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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원서 농민군 이끈 김홍기와 후손들] 동학 정신, 독립운동으로 계승·실천한 '뜨거운 핏줄'

1894년 방아치 전투서 싸우다 체포·처형 / '차남 3·1 운동 앞장, 손자 야학 운영 '항일' / 증손자 김동규 씨, 선조들 치열한 삶 전파

▲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원 대접주였던 김홍기의 증손자 김동규씨가 지난 11일 남원시 이백면 닭뫼마을 자신의 집에서 가족사진을 가리키며 미소를 짓고 있다. 김홍기 일가는 한 때 멸문지화를 당할 뻔 했지만 현재는 후손이 66명까지 늘었다. 김동규씨는 이들에게 선조들의 동학정신을 전파한 일이 가장 보람된 일이라고 했다.

모난 돌이 정 맞았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가 그랬다. 120년 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농민들은 조선 왕실의 눈에 ‘모난 돌’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열강 사이에 끼어 통치력을 상실한 조선 왕실을 대신해 척왜척양(斥倭斥洋)을 기치로 봉기했다. 1894년 무장에서 기병한 농민군은 그해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면서 잠시나마 그들이 바라던 세상을 만들었다. 조선 왕실도 모난 돌의 반란에 잠시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끝내 일본군을 동원해 모난 돌을 진압했다.

 

모난 돌의 수난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을 펼친 사람들이 모난 돌이었다.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침묵과 복종을 강요했다. 참다못한 이들의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퍼졌다. 다시 모난 돌들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것처럼 독립투사들을 잔인하게 걷어냈다. 이런 가운데서도 모난 돌이 되지 않기 위해 일본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이 많았다.

 

해방이 되면서는 정부의 의견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모난 돌이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유신에 반대하면 정을 맞았다. 

 

하지만 모난 돌의 생명력은 강했다. 정을 맞고 다시 숨죽이며 살기를 반복했지만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에는 어김없이 모난 돌들이 등장했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이들의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만큼이나 뜨거운 피를 가지고 억압에 맞서왔다.

 

1894년 남원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김홍기(金洪基) 대접주와 그의 후손(김종환-김학연-김동규)들 이야기는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김홍기 대접주의 증손인 김동규씨(70)가 구전과 사료 등을 통해 기억하는 동학과,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친 자료를 토대로 김홍기 일가의 삶을 재구성해봤다.

 

△전라 좌도 동학혁명 이끈 김홍기

 

김홍기(金洪基) 대접주의 자는 경홍(慶洪), 본관은 순천으로, 1856년 10월 9일 남원군 둔덕면 탑동(현 임실군 오수면 탑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889년 10월 27일 장인인 최봉성으로부터 도를 받아 천도교에 입교, 전라 좌도(임실·진안·장수·무주·용담·순창·남원·구례·곡성·옥과) 일대를 돌아다니며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포교로 입교한 호수는 5000에 이르렀다고 한다(50~100호 1개 접·다수 접을 관리하는 직책이 대접주) 

 

당시 김홍기는 김영원(3·1운동 주동자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 한영태(천도교 임실교구장, 3·1운동 주동자로 수감 중 옥중에서 혀를 깨물고 자결), 최승우(천도교 임실교구장, 남원 방아치 전투에 참여), 최유하, 최동필 등 6명과 의형제를 맺고 남원 지역에서 동학 포교에 전력을 다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자,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임실의 최승우에게 ‘척왜척양(斥倭斥洋)하고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하에 동원령이 전달되었는데, 최승우는 즉시 남원에 거주하고 있던 매부 김홍기에게 연락해 임실과 남원이 합동해 기포했다. 또 그해 3월 백산봉기에 참여하기도 했다. 

 

김홍기는 최승우와 함께 임실에 무혈입성하여 민정을 다스렸고, 남원 토박이 동학교도인 유태홍, 황내문, 이기동 등과 함께 남원에서 기포한 후, 곡성·순창·옥과·구례·장수·진안·용담 등을 석권했다. 김개남 장군의 남원 입성 이후, 그는 집강소를 통해 남원지역을 통치하고, 남원대회 때 여러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김개남이 북상한 후인 1894년 11월, 김홍기는 남원 토박이 동학교도인 황내문, 이규순, 이사명 등과 방아치에서 박봉양이 이끄는 운봉 민보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 민보군 이성흠에게 체포된 김홍기는 1895년 2월 14일 남원 장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끝나지 않은 동학혁명

 

김홍기의 죽음은 가족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당시 16세였던 그의 큰 아들 김종문은 아버지의 옥살이를 지근거리에서 살폈다. 김종문은 엄동설한에도 아버지가 처형되기 전까지 노숙을 하며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역적으로 지목된 이의 아들에게 아무도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먹을 것을 주고 숙박을 제공하고 싶어도 서슬파란 탄압 앞에 그리 할 용기를 낼 사람은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결국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본 김종문은 3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김홍기의 집안은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봄이면 광문을 열어 어려운 사람들과 먹을 것을 나눴다고 한다. 당시 조정은 그의 죽음과 함께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남은 가족들은 동학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보다 당장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희망은 있었다. 김홍기의 작은 아들 김종환(1891~1959)은 당시 3살이었다. 그는 어머니 등 유족들을 통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동학에 ‘동’자만 꺼내도 잡혀가던 시절 그는 숨죽이며 미래를 준비했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 그는 1919년 3·1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임실, 오수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받아 장성, 구례, 순천까지 전달했다. 들불처럼 퍼진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맡았던 셈이다. 그는 28살 되던 해 집을 나서 6년이 훌쩍 지나서야 집이 아닌 남원 ‘닭뫼마을’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동안 전주, 정읍, 김제 등을 전전하며 장돌뱅이로 위장하며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독립유공자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옥살이를 하거나 수감 기록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렇지만 그의 독립운동 활약상은 남원 지역 향토사학자들과 여러 사료들이 증명하고 있다. 

동학의 정신은 김종환의 아들 김학연(1915~1974)이 그대로 이어 받았다. 그는 일본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행정서기 자리를 거부했다. 또 감시를 피해 남원에서 야학을 운영하며 조선인들에게 항일 정신을 심어줬다.  

 

△“동학의 정신 현대사회로 계승돼야”

 

“삶이 말이 아니었다.” 김동규씨는 지나온 인생을 이렇게 회고했다. 동학혁명과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그의 일가는 피폐한 삶을 살았다. 숨죽여 살며 제대로 된 학업을 잇지 못한 채 현대사에서 점점 배제돼갔다.

그에게는 당장 먹고 살 길이 없었다. 선조들의 동학정신을 계승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중학교까지 졸업한 그는 당시 많이 배운 축에 속했다. 하지만 군대를 제대하고 그에게 닥친 현실은 가난이었다. 그의 아버지(김학연)의 몸이 약했기 때문에 동생 7명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게 그의 의무였다. 그렇게 동학혁명의 정신은 삶의 무게 앞에 무릎을 꿇는 듯 했다.

 

하지만 김동규씨에게는 희망이 있다. 멸족 위기에 몰렸던 증조부 김홍기의 후손은 현재 66명까지 늘어났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들에게 집안의 역사를 들려줬다.

 

그는 선조들에 비해 한 게 없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꿋꿋이 살아남아 동학의 정신을 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김동규씨는 “내가 한 것은 후손을 늘린 것뿐이다. 66명 동학의 후예들이 선조의 정신을 이어받아 올곧고 바르게 살면 내 역할은 다한 것이다”고 말했다.

김정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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