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면 자작고개서 농민군 800명 넘게 희생 / 2012년 기념공원 조성, 참혹한 역사 되새겨 / 강릉 관아·선교장엔 '동학혁명 안내판' 없어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서석 5일장이 들어선 날이었던 데다, 마침 또 장터 입구에 휴대폰 가게가 새로 문을 열면서 개업 행사를 벌여 일대가 떠들썩했다. 우스꽝스런 분장을 한 사람이 연신 북을 치며 노래를 하고 있었고, 막 하교하는 참이던 학생들이 멈춰 서서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서석면이 통째로 “나 아직 안 죽었어!” 하며 존재감을 발산하는 듯했다.
서석은 예로부터 원주, 강릉, 인제, 횡성 등과 연결되는 교통이 편리해 장돌뱅이들의 주요 거점이기도 했고, 오늘날에는 홍천군 동부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서석은 그리고 강원도 지역 동학농민군이 보루로 삼던 거점이기도 했다.
△피가 고여 ‘자작자작’ 했다던 자작고개
장터를 뒤로 하고 야트막한 구릉을 시나브로 오르다보면 서석면사무소와 보건지소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 보건지소를 오른쪽에 끼고 계속 올라가면 자작고개라는 고갯길이 나오고, 그 왼편으로 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가 있다.
1977년에 세워진 위령탑과 2012년에 조성된 기념공원이 전적지를 구성하고 있는데, 기념공원은 다른 어느 기념공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조성돼 있었다.
“어릴 적에 이 길을 지나서 학교를 다녔는데, 장마철만 되면 사람 뼈가 튀어나오곤 했어요. 그 땐 한국전쟁 생각만 했었지, 유골들이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죠.”
서석면장을 지냈고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에 헌신했던 심형기 씨가 고갯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 희생된 농민군이 학자 조사에 따르면 800명이라고 하는데, 갑오실기 같은 기록을 보면 ‘수천 부지기’라고 돼 있거든요. 그만큼 많이 희생이 있었다는 거죠.”
1894년 9월에 농민군 2차 봉기가 시작되고, 북접 교단도 기포령을 내렸다. 홍천대접주 차기석은 홍천 동부 지역과 봉평 등지를 근거로 활동하면서 농민군과 투쟁 물자를 모았다.
10월 13일에 홍천 내면 동창을 친 것도 그런 활동의 일환이었다. 이 때 농민군이 집결한 내촌면 물걸리 일대에 지금은 기미만세공원이 조성돼 있다.
차기석 부대는 세곡을 모아두는 곳이었던 동창을 침으로써 물자를 충당하면서, 서쪽 경기도 일대에서 홍천을 넘어오던 민보군과 관군을 상대할 준비를 했다. 이 때 창고를 관리하던 김덕원이라는 사람이 물자를 풀어 농민군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들은 그러나 장야평 싸움에서 3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동쪽으로 밀려 서석 방향으로 후퇴했는데, 이 때 농민군이 진을 쳤던 자리가 바로 전적지 자리다. 산과 고개로 둘러싸인 분지 가운데서 홀로 섬처럼 머리를 내밀고 있는 듯한 지형으로, 사방 곳곳이 잘 보여 방어진을 치기에는 아주 좋은 자리였다.
10월 22일, 민보군과 관군이 서석에 들이닥침으로써 풍암리 전투가 벌어졌다. 지형 상으로는 농민군이 유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기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었다. 농민군은 ‘적들의 총에서는 빨간 물이 나올 뿐’이라는 주술적 믿음에 의지해 싸웠지만, 낫과 쇠스랑 정도로 신식 소총을 든 군대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전투에서 결국 농민군 8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 광경이 어찌나 참혹했던지, 이 때 흘러내린 농민군의 피가 고개를 적셔 길바닥이 ‘자작자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고개 이름이 ‘자작고개’란다.
△“전라·충청도만 생각하는 인식 아쉽다”
홍천 지역에서는 서석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가 활동하고 있다. 번듯한 사무실도 없는 형편이지만, 서석면·홍천군과 함께 매년 전적지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제삿날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70년대까지도 음력 10월 23일 즈음에 동시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27가구나 됐었기에, 자연스레 이 날이 제삿날이 된 것이다.
1977년에 위령탑이 세워지고 나서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천도교 예법으로 ‘청수봉전’이라는, 맑은 물을 떠놓고 예를 갖추는 방식으로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지금은 추위 등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양력 날짜로 기념을 하고, 이 때 서석면민집회를 함께 진행한다고 한다.
“원래는 동학 관련한 이야기는 서로 쉬쉬하고 그랬는데, 70년대 이후에 위령탑도 세워지고 ‘혁명’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이제는 ‘역적’으로 보는 정서는 많이 없어졌죠.”
고장의 역사를 들춰내고 기념하려는 노력이 거둔 결실이 바로 이런 걸까.
“사람들이 우금치, 전라도, 이런 곳만 생각하지 서석은 모르거든요. 이렇게 희생자가 많았던 곳인데….”
△강릉 관아의 농민군 4일 천하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길은 험하기가 그지없었다. 크게 돌아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달렸으면 좀 수월했으련만, 무슨 고집이었는지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운두령을 넘기로 했다.
서석을 뒤로 하고, 동학농민혁명군이 관아를 점령하고 자치를 실현했던 강릉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1894년, 홍천 지역의 차기석 세력과는 다른 세력이 그보다 먼저 평창,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동학 교단과 연관이 있었고 경기·충청도의 북접 주력과 합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차기석 세력과는 달리, 반봉건·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자생적으로 나선 세력이었다.
평창의 오덕보라는 이를 중심으로 모인 농민군은 1894년 9월 초 강릉 방면으로 진격했다.
대관령을 넘은 농민군은 9월 4일 강릉 관아를 점령하고 자치를 실시했다. 이들은 억울하게 붙잡힌 이들을 풀어주고 이서배(하급 관료)를 잡아 가뒀다. 또 지주들의 땅 문서를 거뒀으며, 농민들에 대한 징세를 감면했다.
2011년에 복원된 강릉 관아에는 이와 관련된 설명은 붙어 있지 않았지만, 농민들이 호령하고 이서배들이 벌벌 떨며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농민군 자치는 그러나 ‘4일 천하’에 그쳤다. 경포 인근 선교장의 대부호 이회원이 지휘한 반농민군의 습격으로 농민군은 평창 쪽으로 물러나야 했다. 농민군이 선교장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선수를 친 것이다.
패퇴한 농민군은 전열을 정비해 강릉을 다시 치려 했지만, 민보군과 관군,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평창 등지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11월 하순 무렵에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11월 12일에는 홍천 내면 지역에서 항전을 벌이던 차기석 또한 접전 끝에 체포됐다. 그는 강릉부로 압송돼, 11월 22일에, 강릉 관아의 교장에서 처형됐다.
이런 역사를 기억이나 하는지, 강릉 선교장은 그저 말없이 으리으리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관광객이 초가을 햇볕 속에서 ‘양반 가옥’을 찾았고, 그들의 눈길이 닿는 곳 어디에도 이곳이 동학농민혁명 시기 반농민군 활동과 관련이 있었다는 설명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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