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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중국 태평천국운동 역사현장을 가다-①프롤로그] 반봉건·반외세 '아래로부터의 개혁' 동학혁명과 닮아

● 동학혁명과 유사점 - 종교조직 기반 피지배계층 주도 봉기, 토지 균등분배…근대화 운동에 영향

● 동학혁명과 차이점 - 반청 기치 건국…교주가 천왕에 올라, 내부 지도층 간 살육전으로 몰락의 길

 

올해로 120주년을 맞은 동학농민혁명은 갑오년 당시‘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걸었다.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봉건사회의 구조로부터 벗어나려는 반봉건 근대화운동이며,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제국주의 세력을 타파하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이런 동학농민혁명의 궤적은 프랑스혁명과 중국 태평천국운동과 견줄 수 있다. 특히 종교조직을 기반으로 하고, 반제국주의를 표방한 점에 있어서는 태평천국운동(1851~1864년)과 깊은 유사점을 갖는다.

 

이 두 사건 모두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청나라와 조선의 근대화운동에 일정부분 영향을 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전북일보는 지난 12일부터 16일까지 중국 근대 최대 민중혁명이었던 태평천국운동의 본거지였던 중국 난징(南京)과 동학농민혁명의 국제적 배경이 된 갑오 청일전쟁의 무대였던 웨이하이(威海)를 방문했다. 중국 현지 태평천국운동·청일전쟁 기념시설 답사를 통해 동학농민혁명과 태평천국운동의 연계점, 두 사건이 이후 국제정세에 미친 영향 등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중국 현지 취재를 바탕으로 태평천국운동의 배경과 이념, 중국 현지 태평천국운동·청일전쟁 기념시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중국의 관점 등에 대해 4회에 걸쳐 짚어본다.

 

△태평천국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

▲ 난징시 옛 총통부 건물에 전시돼 있는 1850년대 태평천국 궁성의 축소판 모형. ·중국= 권혁일기자

청나라 말기 관료와 군대의 부패와 지주제 등 경제적 모순이 심화하면서 사회적 무질서현상이 빚어졌다.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경작 면적은 제자리이고, 아편 유입에 따른 은의 해외유출로 인해 농민 가계는 더욱 악화됐다.

 

태평천국운동의 진원지인 광시성(廣西省) 역시 이런 일반적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아편전쟁 이후 상하이(上海)가 개항되자 전통적으로 대외무역의 독점을 누리던 광저우와 연결된 교역로가 갑자기 불황이 빠지면서, 실업자가 된 운송업자와 전쟁 후 해산된 지방군으로 인해 사회불안 요소도 커졌다.

 

이 가운데 독특한 관습과 방언을 이어오면서 광동성 내 화북 출신 이주민들과 현지 한족 사이 분쟁도 격화됐다.

 

이주민들은 힘을 모으기 위해 하나의 단체로 규합됐다. 태평천국운동은 바로 이런 이주민들의 종교결사로부터 시작됐다. 종교결사인 배상제회의 창시자이자 태평천국운동의 지도자인 홍수전(1814 ~1864년)은 광둥성 출신으로, 먼 선대가 화북에서 이주해왔다.

 

몇 차례 과거시험을 치르는 등 관리를 꿈꿨던 홍수전은 과거시험을 치르는 길에서 우연히 읽게 된 그리스도교 선교책을 본 뒤 독자적인 그리스도교리를 바탕으로 1844년 배상제회를 창시했다. 배상제회는 홍수전의 지인인 풍운산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신도가 급격히 늘어났다.배상제회는 우상 파괴와 향촌민의 개종을 적극 추진하면서 향촌사회 기존 세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배상제회는 신도들을 무장조직화했다.

 

또한 이들은 당시 청나라 지배계층인 만주족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청나라와의 결전도 피할 수 없었다. 2만여명에 달하는 강력한 무장집단을 이루게 된 배상제회는 1850년 7월 봉기해 청나라 군대와 곳곳에서 충돌하며, 북진했다. 이 과정에서 1851년 1월 11일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수립을 선언하고 3월 천왕(天王)에 즉위했다.

 

이후 홍수전은 휘하의 양수청을 동왕, 소조귀를 서왕, 풍안산을 남왕, 위창휘를 북왕, 석달개를 익왕에 각각 봉하는 등 군사·정치적 지도체제를 확립했다.

 

이 즈음 태평천국군의 병력은 50만명으로 늘었고, 1853년 3월 드디어 강남의 중심지 난징을 점령한 뒤 수도로 삼았다.

 

△태평천국의 이념

▲ 태평천국운동 지도자인 홍수전 흉상.

태평천국의 정치권력은 종교적 권위를 매개로 하고 있다. 하나의 국가인 태평천국에서의 생활은 엄격한 종교적 금욕주의의 규제를 받았다. 술·담배·아편은 물론 남녀의 접촉 또한 엄격히 금지됐다.

 

1853년 간행된 천조전무제도(天朝田畝制度)는 태평천국의 지향점이 될 정치·경제·사회의 체제이념과 정책이 정립한 것이다.

 

이를 보면 토지와 생산물을 포함한 만물을 국가가 관리·분배하도록 했다. 토지의 경우 노동력에 따라 균등하게 분배하되 분배를 위해 기존의 토지소유권을 박탈한다는 규정은 없었다.이는 대체로 사유권의 강력한 통제를 통한 균등한 경제체제를 지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태평천국은 난징 점령 직전부터 반청혁명을 기치로 내걸고,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광범위하게 알렸다. 이는 농민·광산노동자·유민 등 사회 피지배층의 절대적인 호응을 받는 계기가 됐다.

 

반면 이 때문에 당시 지배계층인 신사, 지주, 부유한 상인의 외면을 받기도 해 향후 태평천국의 고립을 좌초하기도 했다.

 

△태평천국의 몰락

 

태평천국운동이 몰락한 가장 중요한 계기는 지도층의 반목이었다.

 

난징에 도읍을 둔 후 천왕 홍수전은 명목상의 지도자로 전락하고 실질적인 통치는 동왕 양수청이 장악했다.

 

양수청의 전횡에 대한 주위의 견제가 심해지면서 북왕 위창휘가 양수청을 제거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친족과 부하 등 2만여명이 살해되면서 태평천국군 전력은 큰 손실을 입었다.

 

이후에도 내부 지도층간 살육전과 숙청이 이어지면서 내부 갈등은 심화됐다. 또한 향촌에서의 세력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한인 관료 및 지주층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무장세력과 청나라 군대는 점차 포위망을 좁히면서 태평천국을 압박했다. 그러면서 초반 사태를 주시하던 서구 열강이 청군에 대해 근대무기와 훈련법을 전수하면서 청나라 군대의 위세도 강화됐다.

 

전방위적인 압박에 시달리던 태평천국은 1864년 7월 수도인 난징이 증국번의 군대에 점령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동학농민혁명과의 비교

 

태평천국운동과 동학농민혁명은 모두 농민 등 피지배층의 주도로 일어났다.

 

이들 농민군은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지배층의 억압과 수탈에 맞선 투쟁, 외세의 침략행위에 대한 부정적 인식 등에서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또한 종교조직을 통해 봉기의 명분을 쌓고 세력을 규합한 것과 이후 청나라와 조선이 외국 열강의 침략대상으로 전락했다는 점에서 보면 두 사건을 같은 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태평천국이 시종일관 청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국가전복을 꾀한 것에 비해 동학농민군은 때론 조선 조정과 타협하기도 하는 등 국가를 위기상황으로 몰아가는 일에는 선을 그었다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정부체제를 변혁하기 보다 백성들을 수탈하는 탐관오리·지주에 대한 저항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장티에바오(張鐵寶) 난징 태평천국역사박물관 연구원은 “이상적인 사회구현을 꿈꾸고, 반외세를 기치로 내건 점에서 두 역사적 사건은 공통점이 많다”며 “이런 민중혁명이 이후 양국 근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최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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