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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 서사시집 '만인보' 16∼20권 발간

 

'어둑어둑한 섬진강 기슭/아버지의 뼛가루를/바쁜 물살에 뿌려 날린 뒤/소년은/노고단 쪽을 바라보았다//노고단은 구름 속//이제 열네살 준호는/어디에서도/아버지 없이 사흘 굶어 살아갈 것이다/바람은 앞에서 불어올 것이다//소년의 얼굴은 아버지의 얼굴을 빼다 박았다//빨갱이 새끼/빨갱이 새끼/그 이름이 평생 따라붙을 것이다'(만인보 16권 중 '소년 준호' 전문)

 

1950년 한민족을 갈라놓은 이념의 전쟁이후, '빨갱이 새끼'라는 원치 않는 이름을 얻은 것이 어디 준호 그 한사람이겠는가.

 

고은 시인(71)이 '만인보'(萬人普·창비 펴냄) 16권부터 20권까지 5권을 한꺼번에 내놓았다. 1986년 첫 권을 낸 '만인보'는 1997년까지 15권을 펴낸 연작시집. 7년만의 노작(勞作)이다.

 

"저는 전후 세대로서 살아 남았고, 죽은 자들을 가슴에 품어야 하는 의무를 갖게 됐습니다. 그래서 1950년대 전후를 산 행리(行履)에서 인간상을 얻어왔습니다”

 

'사람과 사람들'이라는 부제로 묶인 이번 다섯 권의 '만인보'는 식민지시대에서 해방공간을 거쳐 한국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7백19편의 시에 담긴 절망 이후의 연대기. 삶과 맞닥뜨린 죽음의 상황, 전래사회가 무너진 곳에서 일어나는 상황, 실존과 폐허, 이데올로기의 습래(襲來), 민족이동과 인간의 비인간화를 몰고 온 전쟁, 그 전쟁 속의 인간적 가능성이 비극의 풍광으로 그려진다.

 

김일성·성혜랑·이휘소·이종찬·채병덕·신성모·이상룡·이승만·조소앙·김달삼 등 좌·우익 정치·혁명가와 선우휘·오영수·김소희·김규동·'폐허'동인·임화·이쾌대·최승희·노천명 등 예술가들, 그리고 벽지산촌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더해졌다. 이 시기가 갈등과 전쟁, 살육, 폐허로 얼룩졌던 만큼 인물들의 내력도 처절하기 짝이 없다.

 

'군용트럭에 탄 인부들/산산조각으로 솟아올랐다/솟아올라 흩어져 다 떨어졌다//자욱이 먼지 내려앉았다//한 아낙이 처박힌 머리 들고 일어섰다/왼쪽 팔이 남아 있다/어서 피 멎어라'('그 아낙' 부분)

 

선배문인이 전한 슬픔과 분노에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고통스러운 역사를 되새김질하고 그에 짓밟힌 만상의 인간들을 사랑하며 껴안고 뺨 비비며 삶의 진의와 세계의 진수를 손가락으로 끄집어내고 있다”는 말을 헌사했다.

 

1980년 여름, 시인이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내란음모 및 계엄법 위반혐의로 남한산성 밑 육군교도소 특별감방에 갇혀 있을 때 구상했던 '만인보'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시인이 직·간접적으로 만났던 인물들을 각자 한 편의 시로 형상화함으로써 '시를 통한 한국 인물현대사의 복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30년대 인물에서 시작해 70년대 민주화운동의 주역들로 내려왔다. 올 하반기에 낼 다섯 권에서는 60년대와 70년대의 못 다한 이야기를 전한 뒤, 내년에 펴낼 마지막 다섯 권은 80년대로 완결될 예정이다. 시인의 말이 실현되면 30년대부터 80년대까지 60년간의 한국사가 고스란히 시에 담기는 셈이다.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세계 각 국의 대표시인 초청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지난 31일 미국행 항공기에 몸을 실은 시인은 이어 하버드대에서 강연하고 10일 스페인으로 건너간다. 그곳 살라망카 대학의 초청행사에 참석한 뒤 2월말 귀국할 예정이다.

 

최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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