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났다고 모두가 호적에 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아들만 있던 터에 ‘흔둥이’로 딸을 낳았을 때, 병원에서 붙인 이름은 '채현경의 아가'였다. 태어난 딸의 손목에 쓰여진 이름, 그것은 딸 아이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민’으로 출생신고를 한 뒤, 부리나케 발급받은 등본에 쓰여진 딸의 이름을 본 뒤의 기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처럼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한달 이내에 출생신고를 해야만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어떠했을까 ?
조선시대에는 요즘처럼 별도의 출생신고제도가 없었다. 대신에 호주가 쥐띠ㆍ토끼띠ㆍ말띠ㆍ닭띠의 해에 작성해서 관에 바치는 호구단자에 출생자의 이름을 올리고, 이를 근거로 관에 보관중인 호적대장에 이름이 기입되면 그 존재를 법적으로 인정받았다. 호구단자가 3년마다 작성되므로 출생후 호적대장에 이름을 싣기까지는 경우에 따라서 3년이나 ‘무적’으로 살아야 했다. 요컨대 태어났다고 하여 모두 호적에 그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은 아니었다.
1804년부터 1840년까지 김상려가 작성한 11장의 호구단자를 보면, 상려는 아들 기두(基斗)를 호적에 올리지 않다가 손자 준석이 5세된 1825년에서야 과부가 된 며느리와 함께 호적에 처음 사망한 사실을 올렸다. 이에 의한다면 기두는 죽을 때까지 군역을 지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반면 7세의 딸은 1804년의 호구단자에 한번 올린 뒤 이후의 호구단자에는 보이지 않는다.
호적이 이름을 올리지 않는 것은 특히 어린아이의 경우에 두드러진다. 40여 년간 작성된 14장의 호구단자가 남아 있는 김재진의 경우 증손자 제(悌)를 6세 때에 호구단자에 이름을 올린 것이 가장 이르다. 대체로 10세 이전에는 호적에 싣지 않다가 16세 이전까지는 대부분 호적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게다가 부인과 며느리를 제외한 여자의 이름을 호구단자에서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왜 이같은 현상들이 있는 것일까 ? 남자의 경우 16세 이전에 호적에 오르는 것은 16세 이상 성인남자는 호패를 패용해야 하고 아울러 군역(軍役)의 의무를 져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린아이들과 혼인하지 않은 여자를 가급적 호적에 올리지 않은 것은 높은 영아사망률 때문이기도 하지만 군역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때문에 호적과 현실 사이에는 상당한 격차가 있을 수밖에 없어서, “조선후기의 호구파악 수준은 실제 인구의 40% 정도로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 여성 1명이 평균 1.3명을 낳고 있어 출생ㆍ보육장려금을 지원하겠다는 정책이 발표된 바 있다. 그리고 주민등록말소가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드높다. 예나 지금이나 출생과 관련한 호적정책이 고민스러운 점은 사람이 있어야 나라가 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진리 때문인 것을 왜 모르고들 있는 것일까 ?
/홍성덕(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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