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의 자주적 민족사관...中 역사왜곡에 통곡하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의 「조선사연구초」(연학사, 1946)를 입수한 것은 1954년 4월 2일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고사상이두문명사해석’(古史上吏讀文名詞解釋)에 마음이 이끌렸던 것이다. ‘향가(鄕歌) ’해석에도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앞섰던 까닭이다.
1926년(內寅小春)에 쓴 벽초 홍명희(洪命憙)의 서문으로 보아 조국광복 전의 간행본도 있었던 것같다. 이는 살피지 못하였다.
내가 지닌 46판 127면의 이책에는 6편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고사상이두문명사해석’에서는 익산의 ‘무강왕릉(武康王陵)'을 ‘기준릉(箕準陵)'이라 한 「고려사」‘지리지’의 잘못을 들어 밝히기도 하였다.
이 밖의 5편 논문 중, 특히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와 ‘조선역사상일천년래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千年來一大事件)'에는 우리민족 고대사에 대한 단재의 뚜렷한 사관이 담겨 있다. 광활한 강토를 놓고의 사관이요, 자주적인 민족사관임을 볼 수 있다.
단재 사관의 핵심을 이만렬(李萬烈)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 바 있다. ‘단재에 의하면 우리 민족사의 상고시대에는 중국민족에 필적하는 강건한 힘과 영토·문화·종교사상을 가졌는데 후대로 오면서 약화되어 갔다. 특히 조선 근세에 이르러 종교·학술·정치·풍속이 모두 사대주의의 노예가 되었고 외세를 따라 변천하는 사회로 전락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사연구초」를 다시금 들추어 본다. 최근 들어 중국에서는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해 우리의 상고사 왜곡을 여러모로 노골화하고 있지 않은가. 뤼순(張順) 감옥에서 순국한 단재의 영혼이 이 상황을 본다면 어떠하실까. 나는 이 책을 안고 통곡하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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