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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있는 주말] 유강희 시인·김윤숙 화가의 추석

보름달을 함께 마주하고 싶은 그리운 당신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추석을 며칠 앞둔 가을 어느 이른 아침, 아직 방에 누워 있던 내 귀엔 엷은 창호지를 뚫고 들려오는 아버지의 숫돌에 조선낫 가는 소리. 슥슥삭삭. 삭삭슥슥. 아버지는 제 가슴을 온전히 내맡긴 단단한 숫돌에 물을 먹여 가며 정성스레 낫을 갈고 있다. 물 묻힌 손바닥으로 한번 스윽 날을 매만져 보기도 하고, 낫을 쳐들어 허공에 슬쩍 비춰 보기도 하면서 어떤 그윽한 눈빛을 찬찬히 떠올려 보는 것이리라.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퍽이나 조심스러우며 어떤 신령스러움마저 깃들어 있는 듯하다. 오랜 세월 한 가지 일만 해온 장인의 손길처럼 움직임 하나하나에 지극한 세심함이 배어 있다.

 

나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싫은 눈치를 애써 숨겨가며 혼자 그 소리를 엿듣고 있다. 매년 연례행사처럼 하는 일이라 나는 그 낫 가는 소리만 들어도 손에 잡힐 듯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나는 왠지 추석 무렵의 아버지의 그 낫 가는 소리가 좋았다. 잘 갈린 시퍼런 날에선 금방 모시옷 서걱거리는 소리가 날 듯하고 한 겨울 대밭을 내달려온 바람소리가 들릴 듯하다. 구름무늬 같기도 하고 바닷가 부서지는 파도무늬 같기도 한 시퍼런 칼날을 오래 오래 들여다보시던 아버지.

 

아버지는 그 잘 드는 조선낫에 돌돌 새끼줄을 감아 아침을 뜨기 무섭게 조상이 묻혀 있는 산소를 향해 앞장을 섰다. 낫도 옷을 입고 벌초를 하기 위해 따라 나선 것이다. 아버지 뒤를 좀 더 큰 형들이 따랐고 난 맨 뒤에서 송아지처럼 까불까불 따라갔다. 아버지의 발부리에 그날 아침 이슬은 눈부시게 깨졌다.

 

어제 나는 벌초를 다녀왔다. 어머니와 전주에 사는 형제들이 모여 아침 일찍 차를 타고 구이 가까운 곳에 있는 산소에 갔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이번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전주에서 출발한 차는 새로 뚫린 길을 타고 삼십 분 남짓 걸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렇게 빨리 산소에 닿고 보니 웬일인지 서운한 감이 들었다. 예전대로라면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작은 마을과 마을, 개울과 개울을 건너 당도했어야 옳다.

 

어릴 적 내가 좋아했던 여자아이가 살던 마을, 꼽추 누이가 살던 이웃 가게, 추석날 영화를 보기 위해 몰래 전주행 버스를 타던 동네 형들, 봄이면 어김없이 노래를 부르며 개울을 건너던 미친 여자 등, 정겹고 슬픈 이야기들이 도란도란 말을 걸어오는 풍경들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지나쳐 온 상실감은 의외로 날 침울하게 만들었다.

 

높은 교각 위로 쭉쭉 뻗은 직선의 길들, 이상한 파충류처럼 게슴츠레 반쯤 눈을 뜨고 있는 검은 터널, 이제 이런 풍경들은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나 흔한 풍경이 되었다.

 

뻥뻥 뚫린 보기 흉한 산허리들, 아무데서나 불쑥 튀어나와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콘크리트 구조물들. 그 아래 멀리 초라하게 웅크리고 있는 고향 마을로부터 나는 오랫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하지만 앞만 보고 달리는 길은 그런 나를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 길은 많지만 정작 길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디에 닿으려고 그렇게 속도에만 열중하는 것일까.

 

벌초는 반나절도 안 되어서 끝났다. 성능이 좋은 예취기는 쇠매미처럼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날카로운 칼날이 윙윙 돌 때마다 가루처럼 날리는 풀들, 몸이 반 토막 나 달아나는 벌레들, 불꽃을 튀기며 날아가는 돌멩이들, 예취기는 거침이 없다.

 

유강희 시인 (desk@jjan.kr)

어린 시절 아버지는 조선낫으로 한 움큼씩 풀을 베면서도 그런 것들을 아끼는 마음 또한 놓지 않았다. 그런 아련한 풍경은 이제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풍경이 되었다. 뱀이 스윽 지나가도 괘념치 않고 메뚜기가 날아도, 돌멩이에 낫이 걸려도 그것들을 상하지 않게 했다.

 

그 모든 것들에게도 조상을 대하듯 경건했다. 그때 아버지를 따라 벌초를 가서 들었던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산과 마을에 대한 이야기들은 산소 근처에 떨어져 있는 밤을 줍듯 재미있었다. 벌초는 형이나 아버지에게 맡긴 채 나는 꽃을 꺾거나 메뚜기를 잡거나 감을 따거나 했다.

 

김윤숙 화가 (desk@jjan.kr)

벌초가 다 끝나고 근처에 있는 외가에 오랜만에 들렀다. 추석 대목인데도 마을은 텅 빈 것처럼 적막하다. 깻대가 담벽에 우두커니 기대어 있고 밭에선 고추들이 따가운 햇살에 조랑조랑 수줍게 익어가고 있다. 마을 회관 쪽에 노인 몇이 꾸부정 서 있고 남자아이 하나는 혼자 공놀이를 한다. 여자아이 하나는 버스 정류장 의자에 그냥 심심하게 누워 있다.

 

마을 군데군데 조립식 건물이 뻘줌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고 빈집도 그새 많이 늘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점령군처럼 콩밭을 동강내어 곧장 뚫은 시멘트 포장길이다. 외가집엔 이제 사람처럼 귀히 여기던 소도 없고 서른도 훌쩍 넘었던 내게 밥 많이 먹어야 키가 큰다고 말씀하시던 외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없다.

 

무공해 고추 세척기가 있는 마당 한켠에 자리를 잡고 외사촌은 옻닭을 끓인다, 장작불을 피우느라 부산이다.

 

소가 새끼를 낳았다. 찬물 한 그릇 떠서 누렁콩도 소복이 담아 외양간 앞에 놓았다. 이틀밖에 안 된 송아지가 머리로 툭툭 차면서 퉁퉁 불은 젖을 빨아먹는다. 눈이 선한 어미는 마른 지푸라기를 소리 없이 새김질하며 이따금 꼬리를 흔들어 쇠파리를 쫓는다. 오래된 낡은 대문에는 한지를 잘라 끼운 쌍줄을 쳤다. 지나가던 이웃 사람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고 복만이 있는가, 큰 소리로 삼춘 이름만 부르곤 한다. 거기에는 한쪽 다리를 끌고 일흔이 넘은 외할머니 산다.

 

―나의 졸시 '외가집'

 

이렇게 소를 생각하고 키우면 그 무서운 광우병에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만물이 서로에게 품을 열어 진실로 생명의 뜨거운 고향이 되어주는 것. 그거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게 자연이 자연답게 사는 길이 아닐까.

 

지금 우리는 직선의 상상력이 곡선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좀 더 빠르고 편리하게, 좀 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기 위해 속도중독증에 걸려 있는지 모른다.

 

나는 시 속의 "복만이 있는가"란 말 대신 "지금 내게 고향은 있는가" 라고 묻고 싶다. 추석에 꼭 보름달을 함께 마주보고 싶은 그리운 당신께도….

 

▲유강희 시인

 

"두레박으로 길어올린 한 모금의 물로 그대의 메마른 가슴을 적셔주길 꿈꾸어 본다"는 시인. 시는 여백이고 여운이라고 생각하는 유강희 시인이 긴 글을 썼다.

 

글 속에 인용한 '외가집'은 첫 시집 「불태운 시집」에 실린 작품. 두번째 시집 「오리막」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가 선정하는 '2006년도 1분기 우수문학도서'에 선정됐으며, '제1회 불꽃문학상'과 '제2회 원광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1968년 완주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대학교 1학년이던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어머니의 겨울'이 당선됐다. 한동안 서울에서 생활하다 6년 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 김윤숙 화가

 

한국화가 김윤숙씨의 그림은 보는 이들에게 잔잔한 울림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하지만 그는 "한 때 그림은 보는 사람이 편안하고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했었지만, 최근에는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에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1975년 진안에서 태어나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5년 첫 개인전은 '일상-雨-마음담기'. 수묵담채로 자연물을 그렸다. 주로 파를 그리다가 나비나 물고기 등 주위의 자연물들이 소재로 연결됐다. 2007년 세번째 개인전 '이야기-人' 부터는 작가 주변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시선이 자연에서 사람들로 옮겨간 것. 최근에는 설치 작업도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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