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군이 조선시대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중심 인물이었던 정여립 선생의 유적을 발굴 보존하기위해 그가 최후에 항거했던 천반산성에 대한 학술용역을 실시한바 있다.
1589년 선조 22년에 있었던 기축옥사는 그 내용에 대한 정확한 규명이 없는 역사 미스터리이다. 기축옥사 일어난지 40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들이 몇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그하나는 기축옥사를 날조된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정여립의 억울한 죽음을 변호하는 입장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혁명을 모의하다가 실패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기축옥사의 내용은 한국사 대사전에 이렇게 쓰여져 있다.
"정여립은 조선 선조 때 모반자(謀叛者)로 자는 인백(仁白)이고 전주 출신이다. 1570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좌랑을 거쳐 수찬(修撰)으로 사직 했다. 본래 서인(西人)이었으나 집권중인 동인(東人)에 아부하여 임금으로부터 미움을 받았기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후 많은 선비들과 접촉하면서 정권을 잡을 야심으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신분의 제한없이 선비 불평객들을 모아 무술훈련을 시켰다. 정감록(鄭鑑錄)등 비기(秘記)를 퍼트리면서 이씨(李氏)가 망하고 정씨(鄭氏)가 흥한다고 민심을 선동하였다. 그러나 소문이 차차 퍼지자 거사를 앞당겨 1589년 선조22년에 겨울철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하여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궐기하여 서울에 침입하여 병조판서를 살해한 후 병권을 잡을 것을 모의했다. 이때 안악(安岳)군수 이축(李軸)이 이 사실을 듣고 보고하여 관련자들이 잡히자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 피신하다가 관군(官軍)이 포위하자 자살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재조명을 주장한 사람은 단재, 신채호(申采浩) 선생이었다. 그는 "사색당쟁 이후의 역사는 피차의 기록이 서로 모순되어 그 시비를 분별할 수 없어 역사의 가장 어려움이 된다."라고 했다 한다.
기축옥사는 지금도 전라도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여립의 마지막 항거지인 천반산성 유적지에 대한 관광지 개발은 물론 역사적 진실 규명에 대한 좀더 활발한 학술 연구가 있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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