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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은학교에서 보내는 3월 꽃 편지

김종필(동화작가)

 

시은이, 세은이, 지은이. 공교롭게도 이름 끝 글자가 똑 같은 세 여자 아이가 학교에 첫발을 내딛으면서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 6학년 언니들은 입학 축하 선물을 건넸고 교장 선생님은 손녀 안아주듯 '삼은이'를 안아주는 따뜻한 입학식이었다.

 

폐교 위기에 놓인 학교를 그냥 두라는 서설이었을까? 며칠 후에는 큰 눈이 내려 살구나무 가지마다 두툼한 겨울이불을 덮어주더니, 며칠 새 여린 마디마디마다 작디작은 붉은 촉을 달았다. 꽃망울이다.

 

그 살구꽃눈이 지켜보는 운동장에서 모처럼 체육을 했다. 유난히 궂은 날이 많았던 3월 내내 몸이 근질근질했던 아이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몸살을 앓았다. 내 몸도 봄기운을 느꼈는지 꿈틀꿈틀 함께 앓았다.

 

누가 먼저 축구공을 들고 나왔는지는 몰라도 점심을 먹자마자 전교생이 운동장으로 모였다. 혹시 여자 아이들도 함께 했냐고 묻는다면 시골 학교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삼은이'는 그냥 관중이었다. 덩치 큰 언니들과 단단한 축구공을 상대하려면 탐색기간이 좀 더 필요할 것이다.

 

교장선생님과 나는 서로 적으로 맞섰다. (다들 축구는 전쟁의 또 다른 표현방식이라고 하니 분명히 '적'이라는 표현이 맞다) 우리는 골문을 지켰다. 스무 명 남짓이 뛰어다니는 운동장에서 나는 천국을 보았다. 살구나무 심판도 슬며시 뜬 눈으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축구전쟁터에서 천국을 보는 이 즐거움!

 

아이들은 꽥꽥 소리를 지르고, 수비 보는 낮은 학년은 무섭다고 골대 뒤로 도망을 간다. 헛발질을 하고는 발라당 뒤집어 까지고, 끝내는 나를 밀치고 골을 넣는다. 교장선생님과 손뼉을 마주치고 만세를 부른다. 축구는 점심시간으로 모자라 5교시까지 이어졌다. 모처럼 몸 풀린 봄날인데 교실로 들여보내 수학책을 펴게 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교사들에게 3월은 독감 같은 달이다. 학급과 학교 운영의 1년 계획을 세워야 하고, 끊임없이 쏟아져 오는 공문이 휴전선의 한겨울 눈처럼 쌓인다. 시간을 재촉해 오는 지시 공문과 잦은 출장명령에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기도 한다. 교사들은 이맘 때 흰머리가 부쩍 늘어난다.

 

작은 학교에서는 훨씬 심하다. 그러나 이곳에도 귀한 아이들이 있다. 컴퓨터로 하는 일은 조금 천천히 하더라도 아이들과 마주하는 일은 바로바로 해야 한다. 내 입에 밥을 넣어주는 것은 명령을 끊임없이 내려 보내는 고위공무원이 아니라 까르르 웃고 있는 이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화단에 키 작은 수선화가 노란 꽃을 피웠다. 까치들이 나뭇가지 끝에 앉아 짖어댄다. 우리 교실 옆에서 살고 있는 장닭 두 마리는 아무 때고 목청을 높인다. 봄날이다. 조금 더 기다리면 벚꽃이 흐드러질 것이고, 학교 지킴이 살구나무도 아직은 청춘이라며 진분홍 꽃을 팝콘처럼 터트릴 것이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나의 봄은 '삼은이'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입학한 그 날부터 시작되었다. 겨우내 잠자던 세상이 스멀스멀 꿈틀거리는 작은 학교의 3월이다.

 

/ 김종필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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