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건(시인·원광대 교수)
바람이 분다. 새 봄에 부는 바람이 심상치 않다. 지난 주말 일본의 지진이 나기 전 만해도 바람의 진원지는 중국이었다. 언론은 상하이 스캔들로 떠들썩했다. 스캔들의 중심에 있는 덩씨의 실체가 확인되진 않았지만 언론은 여자스파이 사건으로 몰아갔다.
여자스파이 사건은 세상의 온갖 추문을 합한 것보다 힘이 세다. 여기에는 스캔들이 가지는 불륜의 불온함과 테러리스트가 가진 파괴적 속성이 결합되어 있다. 여자스파이 담론은 종종 국가체제를 강화하는 구실로 쓰였다. 1차 세계대전 시기 '마타하리'는 전시 중 정신무장과 통제의 근거가 되었고 일제도 '기관총녀'사건을 총동원령 체제를 강화하는데 이용했다. 만주에서 국내로 잠입하려던 한 여성의 몸에 총기류와 총탄이 은닉되어 있었다는 것. 여자스파이는 전선의 후방을 통제하는 구실이었다.
이후 잠잠하던 여자스파이 담론이 부활한 것은 1980년대 후반이다. 노태우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선거 직전 KAL기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수많은 탑승객이 사망한 것보다 언론이 주목한 것은 공중폭파의 주범이 여자간첩 김현희라는 발표였다. 비슷한 시기 국가안전기획부는 개인적인 치정사건을 북한공작원 스캔들로 둔갑시켜 일명 '수지김 사건'을 기획했다. 김현희 사건이 최근 일본에서 TV 드라마로 제작된다고 한다. 스파이 이야기는 세월이 지나도 힘이 세다.
바람이 분다. 바람의 방향에 요즘처럼 민감한 적이 없다. 지난 주말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은 현재형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피해가 발생할 지 예측할 수 없다. 도호꾸 지방의 방사능 낙진이 날아가는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남의 불행이 자신에게 옮겨올 것에 대한 공포다. 미국의 모기지론 사태 이후 불안한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은 높아만 간다. 여진의 공포는 현재를 지속적으로 위협한다. 생활터전이 송두리째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것. 스파이 담론이 기존질서의 정서적 위협이라면 지진의 피해는 가시적 위협이다. 안과 밖의 불안심리를 먹이로 하여 위기의식은 번식한다. 어디에서 살 것인가?
바람은 이미 서민들의 삶 저변에서 불기 시작했다. 전주시의 버스파업은 꼬여만 간다. 전세비용과 은행 대출이자는 이미 올랐다. 기름값이 더 오를 것이라는 우울한 소식이 풍문을 타고 들린다. 주저앉는 것은 서민들의 가슴뿐이다. 리비아의 내전과 일본의 지진이 우리 살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가늠하기 힘들다. 해외의 불안요소가 없더라도 서민들은 '죽을 동'에서 '살 동'으로 이사짐을 꾸렸다 풀었다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식당보다 복권가게가 붐비는 형국이다. 가뜩이나 고실업 저성장으로 용기와 희망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에게 스파이 이야기는 성추문과 다를 바 없다. 이 판국에 일본의 지진 피해를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의 작태야 말로 천박하다. 불안한 사회에서 개인의 의지는 약화되고 국가주의는 강화된다.
바람이 분다. 북서풍을 타고 황사가 날아온다. 황사 바람을 반기기는 처음이다. 황사가 지나면 꽃들의 색계가 지천으로 벌어질 것이다. 추운 겨울 내내 봄을 기다린 생의 의지다. 소심한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다. 이번 봄엔 제대로 된 스캔들 한 번 내봐야겠다. 스파이 타령이나 늘어놓는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하이킥 좀 날려 보겠다. 어느 늦봄, 꽃들이 하염없이 저버리는 찬란한 슬픔을 안길지라도. 바람이 불어 오는 곳을 똑바로 마주보련다. 슬픔으로 먹먹해진 가깝고 먼 나라의 이들에게 시 한 구절을 보낸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박태건(시인·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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