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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체육 비사] (19)박영규 전 쌍방울레이더스 단장

"야구단 유치, 막연한 구호보다 이성적으로"

프로야구는 연간 관중 수가 600만명에 달할만큼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으나, 전북 도민들은 현재 이를 직접 관람하기 어렵다.

 

군산에서 연중 몇 경기가 열리고 있으나 프로야구에 관한 한 전북은 변방일뿐이다.

 

하지만 한때 전북엔 쌍방울 레이더스가 있었고, 이는 나름대로 도민의 야구 열기가 분출되는 통로였다.

 

그곳에서 초대 단장을 맡아 5년 넘게 구단을 꾸려왔던 이가 박영규(69)씨였다.

 

야구에 관한 질문에 입을 닫았던 그가 마침내 말문을 텄다.

 

전북야구협회 전무이사, 부회장, 심판위원장을 맡아오면서 아마 야구를 이끌어왔던 그가 프로야구단 단장이 됐던 사정과 그 이후의 전개과정, 그리고 쌍방울의 해체와 제10구단 태동에 대한 견해를 들어봤다.

 

1995년 5월초 어느 화요일 오전 10시, 쌍방울 레이더스 박영규 당시 단장은 전주야구장에 있는 사무실에서 오후 2시부터 열릴 해태와의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직원이 뛰어들어오더니 서울 본사에서 보낸 한 장의 팩스를 내밀었다.

 

'후임단장엔 박효수, 감독 한동화 해임'

 

후임 단장이 결정되면서 단장인 자신의 자리가 하루아침에 없어졌다.

 

당연히 언젠가는 쌍방울 레이더스 사장이 되고, 끝까지 쌍방울과 함께 할 것이란 믿음은 저만치 가고, 실업자 신세가 된 것이다.

 

전격 경질 이유는 그 시즌 쌍방울 레이더스가 개막 경기 이후 내리 10연패를 당한데 대한 문책 인사였다.

 

당시 야구인들은 이를 일컬어 '피의 화요일' 이라고 표현했다.

 

이미 경질 결정이 내려진지 오래됐으나, 시합 전날 코치들과 함께 전주시내 한 음식점에 모여앉아 '내일 경기 승리'를 독려했던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이 일이 있은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쌍방울은 부도가 났고, 결국 전북을 연고로 한 프로팀은 영영 사라져버렸다.

 

피의 화요일 이후 아픈 기억을 지우기 위해 그는 가급적 야구장을 찾지 않았다.

 

야구를 잊으려했으나 그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야구 이력이 워낙 멀리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전주고와 건국대를 졸업한 박영규 전 단장은 1969년부터 1974년까지 5년 가량 전북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고교 이후 그는 '박호'란 별명으로 더 유명했다.

 

최공엽, 박노훈, 김종량, 김희원, 정종석, 이광영, 진영웅씨 등의 원로 언론인들이 전북일보 시절 함께 일했던 선후배들이다.

 

유신때 정부의 프레스카드 발급과 관련, 언론계를 떠난 박영규씨는 옛 도청 근처에서 음식점 등을 경영하면서 아마 야구와 인연을 맺었다.

 

도 야구협회 전무이사, 부회장, 심판위원장 등을 오래 거치면서 그는 아마 야구의 한 중심에 섰다.

 

특히 군산상고와 전주고간 치열한 경쟁구도의 한복판엔 언제나 그가 있었다.

 

당시 두 학교간 경기가 벌어지면 경찰관이 대거 동원될만큼 긴장감이 흘렀고, 전주고 출신인 그는 갖은 오해를 받았으나 뚝심있게 밀어부쳤다.

 

한쪽에선 "자신의 모교편을 든다"고 비난했고, 다른쪽에선 "신발을 거꾸로 신었다"며 심판위원장인 그에게 항의하기 일쑤였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군산상고 출신 선수를 주축으로 한 해태 타이거즈는 최강이었고, 80년대 야구장에 운집한 호남인들은 분출구가 없어 당시 야당지도자였던 '김대중'을 연호했다.

 

'호남분열 의도' 등 갖은 억측속에서 1989년 11월 쌍방울이 제8구단으로 창단됐다.

 

쌍방울 이봉녕 회장과 아들인 이의철 부회장, 이용일 KBO사무총장 등이 구단 출범의 주역이었다.

 

하루는 박기순 쌍방울 상무가 박영규씨를 찾아와 단장직을 권유했다.

 

처음엔 부장으로 들어가서 수개월 후 정식 단장을 맡게 된다.

 

창단 직후 김기태, 조규제, 박성기, 박경완, 김원형 등이 팀의 주축이었다.

 

국내 최고의 포수로 각광받고 있는 박경완은 당시 연봉 800만원을 받는 연습생에 불과했으나 조범현 코치와 박영규 단장이 그를 찾아내 전국 최고의 명포수로 길러냈다.

 

쌍방울 레이더스가 흔들릴때 "SK에 넘어가더라도 지역 연고는 지켜야 한다"며 당시 한광옥 대통령 비서실장, 조정남 SK 부회장, 유종근 전북지사, 김완주 전주시장 등을 만났으나 결국 그의 노력은 수포로 끝났다.

 

요즘 도민들 사이에서 프로야구 제10구단 창단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과 관련, 박 전 단장은 "든든한 모기업이 없고, 인프라가 부족할뿐 아니라, 관중 동원면을 감안하면 어려운게 사실"이라고 전제, "하지만 희망을 잃지말고 객관적으로 접근해서 차분히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신이 활동하던 시절 도내 야구팀은 초등학교 16개, 중학교 6개, 고교 2개, 대학 1개였으나 지금은 초등 4개, 중학교 3개 고교 2개 대학 3개로 줄어든게 현실이라며, "막연한 구호보다는 어떻게 유치해낼 것인지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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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병기 bkweegh@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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