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일반기사

서민서 巨富까지..김지영의 60년 연기인생

그는 환경미화원이었고 빈민층 노인이었고 치매 할머니였다. 주로 그랬다. 아니, 지난 60년간 줄곧 그랬다.

 

그런데 갑자기 수백억 원대의 재산을 가진 거부(巨富)가 됐다. SBS '마이더스'와 MBC '반짝반짝 빛나는'에서 그는 동시에 엄청난 재산을 가진 사채업자 역을 맡고 있다. 나이 일흔하나에 대변신이다. 어울릴 줄 몰랐다. 그런데 웬걸, 반전의 맛이 끝내준다. 두 작품 속 사채업자의 모습도 180도 다르다. '마이더스'에서는 유머러스하고 인자한 캐릭터이고, '반짝반짝 빛나는'에서는 독한 캐릭터다. '천의 얼굴'이라는 말은 그를 위한 것이리라.

 

그렇다고 '전공'이 바뀐 것은 아니다. '치매 노인'은 전매특허 수준이다. 지난 20일 개봉한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서 그는 또다시, 그러나 또다른 치매 노인을 연기한다.

 

'백전노장' 배우 김지영. 연예계에도 동명이인이 많아 그의 이름은 오랜 세월 젊은 동명 후배들에게 가렸다. 하지만, 칠십이 넘은 지금 그는 드라마와 영화계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배우 중 한명이 됐다. 감독들은 앞다퉈 그를 캐스팅하기 위해 러브콜을 보낸다. '대기만성'이라는 말로도 다 담지 못할 파란만장, 드라마틱한 연기 인생이다.

 

 

 

"항상 서민 역할만 하다 돈 많은 사채업자를 맡으니 변신이 힘드네요. 실제로도 돈을 많이 가져본 적도 없고 돈 때문에 교만하고 오만한 삶을 안 살아봐서 어렵네요.(웃음)"

 

그를 만나기 위해 최근 '마이더스'의 경기 일산 촬영현장을 찾았다. '마이더스'가 '생방송'으로 촬영이 진행되는 탓에 그와의 인터뷰는 킨텍스에서부터 호수공원까지 4시간의 동행 속에서 이뤄졌다. 전날 밤샘 촬영을 하고 나온 상태였지만 그는 체력적으로 끄떡없었다. 현재 드라마 두 편에 영화 '도가니'까지 세 편을 동시에 찍고 있지만 매니저도 없이 혼자서 척척 활동 중이다.

 

"은퇴했으면 몰라도 감독들이 날 믿고 맡기는데 출연을 안할 수 없죠. 이젠 의무감으로 연기하는 거예요. 시청자가 좋아해 주시니 그에 보답하는 생각으로 하는 거죠. 솔직히 돈 벌자고 하면 이 짓 안 해요. 툭하면 밤새우고 힘들잖아요. 연기는 내 삶 그 자체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삶 자체가 아니고 꿈이나 다른 무엇이었다면 이렇게 오래 못했을 거예요. 그저 연기에 젖어서 하다보니 여기까지 온거죠."

 

◇1952년 연극으로 데뷔.."연기는 내 삶 그 자체" = 김지영은 한국전쟁 직후 악극단에 들어간다.

 

"조부가 법관이셔서 법관을 꿈꿨는데 전쟁통에 흐지부지됐어요. 집에서 시집보내려는 눈치가 보여서 시집 안 가려고 극단에 들어갔어요. 당시 배우 김승호 씨가 제 부친과 친해서 우리 집에 술 마시러 자주 오셨는데 '아저씨 나 좀 극단에 넣어주세요'라고 부탁했죠. 그렇게 해서 악극단 마지막 세대가 돼 8년을 활동했죠."

 

악극단에서는 주인공을 도맡아 하던 그가 조연 인생을 시작한 것은 1960년 '상속자'로 영화계에 데뷔하면서다.

 

"당시에는 배우가 다 옷을 구해야 했는데 주인공을 맡겨줘도 형편이 어려워서 그에 맞는 옷을 구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단역을 달라고 했어요. 허름한 옷을 입고 나가도 되니까요. 주인공만 하던 제가 스스로 단역 인생을 살게 됐으니 현장에서 느끼는 비애감이 무척 컸죠."

 

그렇게 시작한 드라마, 영화 인생이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그는 다시금 단역에서 주연으로 올라섰다. 비록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는 어느 자리에서든 숨길 수 없는 연기력을 발판으로 70대에 오히려 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100여 편의 영화와 그보다 훨씬 많은 드라마에 출연해온 그의 대표작이 연기 인생 후반부에 몰려있는 것도 그 때문. '바람은 불어도' '장미빛 인생' 등의 드라마와 '해운대' '국가대표' '마파도2' '아라한 장풍대작전' 등의 영화에서 그는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최근에는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커피하우스' '별을 따다줘' 등의 드라마에 잇달아 출연하며 시청자를 즐겁게 했다.

 

그러나 본인이 꼽는 대표작들은 이보다 더 오래된 작품들이었다.

 

"'초대받은 사람들' '길소뜸' '아다다'… 이런 영화들이 기억나죠. 다 연기상 후보에까지 올랐다가 물 먹었지만 정말 열심히 했고 기대가 컸어요. 물론 상을 받으려고 연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상복이 참 없긴 해요.(웃음) '장미빛 인생'으로 조연상을 받긴 했죠. '우리는 중산층'이라는 미니시리즈 드라마가 있었어요. 제가 처음으로 주인공을 맡은 드라마였는데 그 작품을 통해 제가 인정받았던 기억도 나네요."

 

◇팔도사투리의 귀재.."대사 스트레스에 치매 빨리 올듯" = 김지영은 특히 사투리 연기에 있어 독보적이다. 팔도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그는 서울토박이다.

 

"서울토박이에요. 사투리는 지방을 다니면서 틈틈이 익혔죠. 사투리는 구강구조 자체를 다르게 해야 해요. 입안이 몇 번 씹힐 정도로 연습을 해야 하는 거죠. 작가들이 써온 사투리 대사는 내가 거의 다 고쳐요. 감독들은 내 사투리가 그냥 나오는 줄 아는데 천만에요. 철저하게 연구하고 연습해서 하는 거예요. 시청자께 보답하려면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열심히 연마했어요. 시청자나 관객이 '그 할마시 때문에 오랜만에 제대로 된 고향 말 들어보네'라고 한다면 된 거죠."

 

김지영은 늘 두세 작품씩 동시에 촬영했다. 주연이 아닌 까닭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고 오히려 과거보다 비중이 커지면서 대사 암기의 부담도 그만큼 커지고 있다.

 

"대사 외우느라 늘 혼신의 힘을 다하니 치매가 빨리 올 것 같아요. 의사가 그러는데 즐겁게 암기를 하면 치매에 안 걸리지만 나처럼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암기를 하면 머리가 상한대요. 어떤 때는 머리가 뜨끈뜨끈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도 그는 "대사가 외워지는 한 계속해서 연기할 것"이라며 웃었다.

 

"옛날부터 무대에서 죽겠다고 결심했어요. 다행히 하나님이 건강을 주셨으니 건강이 닿는 한 계속 연기하고 싶어요."

 

◇"세상이 연기 학원..후배들 제발 국어 제대로 사용하길" = 이 백전노장에게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요청했다.

 

그는 "세상이 연기의 학원이고 우리의 삶 자체가 연기"라며 "급하게 하려고도 하지 말고 그렇다고 안일하게 해서도 안된다"고 답했다.

 

"연기는 삶이 몸에 배서 나오는 거예요. 학원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제대로 연기를 하려면 오랜 시간 모든 것을 잘 관찰하고 어디 가서 뭘 해도 놓치면 안 돼요. 그리고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제발 국어를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어요. 특히 TV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국어를 잘 알고 구사해야 해요. 그런 점에서 한심한 배우들 참 많아요."

 

그는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할 것이다. 다만 한국이 아니라 외국에서 태어나 조건이 좋은 데서 연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대중예술인들의 지위가 과거에 비해 많이 향상됐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는 환경이 열악해요. 젊어서 벌어놓지 않으면 늙어서 거지 되기 십상이에요. 늙어서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배우들도 있잖아요. 대중예술이 그 나라의 얼굴인데, 여전히 많은 예술인들이 생계가 어려워 참 안타까워요."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100
최신뉴스

정치일반李대통령, 외교 ‘강행군’ 여파 속 일정 불참

스포츠일반[제37회 전북역전마라톤대회] 전주시 6시간 28분 49초로 종합우승

스포츠일반[제37회 전북역전마라톤대회] 통산 3번째 종합우승 전주시…“내년도 좋은 성적으로 보답”

스포츠일반[제37회 전북역전마라톤대회] 종합우승 전주시와 준우승 군산시 역대 최고의 박빙 승부

스포츠일반[제37회 전북역전마라톤대회] 최우수 지도자상 김미숙, “팀워크의 힘으로 일군 2연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