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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도의 중심 익산] ⑧익산의 스토리텔링

미륵사탑의 說 說 說…백제사 '판도라 상자'그 진실은?

고도리 석불 입상. (desk@jjan.kr)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첫째, 역사는 예측불가능한 인간사의 판례집이기 때문이다. 둘째, 재밌는 이야기여서다. 셋째, 자신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백제사가 음(陰)이라고 한다면, 익산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양(陽)이다. 음과 양이 거울처럼 서로를 비춰야만 과거와 현재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모든 스토리텔링의 젖줄은 결국 역사로 귀결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익산역사유적지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믿거나 말거나,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 사택적덕 딸, 몸져 누운 무왕과 백제 부흥 위해 미륵사 창건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왕권을 강화한 국왕으로 평가되는 무왕은 권력 투쟁 끝에 몸져 누워 익산에 있었다. 그를 물리치려는 세력들의 말들이 무성했다. 좌평(佐平·백제 관등의 하나)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왕후가 명운이 사그라드는 무왕을 염려, 백제사의 갈림길에서 결단을 내린다. 불심(미륵)에 맡겨 백제 부흥을 염원하는 것. 왕후는 기해년(己亥年·639년)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여기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

 

종교는 유한한 인생에 대한 뼈저린 자각에서 시작된다. 익산 미륵사지에서 나온 유물들도 '불멸'과 '영원'을 위해 만들어졌다. 종교적 염원, 불멸 의식을 담은 상징물은 바로 탑이다. 탑의 가장 심층부에 보관했던 것은 사리. 불교에서 사리는 정화된 정신의 결정체이다. 미륵사지 석탑을 동양 최대의 석탑으로 만든 것을 보면, 무왕이 '불멸'에 대한 염원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무왕과 왕후는 자신들이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주체이자, 고구려·백제·신라로 나뉜 삼국 통일의 주체임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 익산 미륵사 창건, 황등제도 이유였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미륵사지 창건 설화는 황등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일제시대에 없어진 이 황등제는 미륵산 일대로부터 내려오는 물길을 막아서 형성된 호수로 주변의 둘레가 80리나 됐다. 백제 무왕이 세웠던 엄청난 규모의 미륵사를 당시 수도(부여)와 한참 떨어진 익산 미륵산에 세웠던 배경에는 황등제가 있다. 노령산맥 이남의 곡창지대를 부여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미륵사와 바로 옆의 왕궁에서 직접 관할하고자 했던 것. 미륵사 앞에 있는 황등제를 통하면 부여에서 배를 타고 금강으로 내려와 웅포나 성당포를 통해 황등제로 들어올 수 있었다. 무왕은 배를 타고 미륵사까지 곧바로 도착할 수 있었다. 결국 황등제는 식량과 물류를 확보해 주는 요충지였던 셈이다.

 

▲ 미륵사지 일대 널려 있는 돌이 다 문화재라고?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 근처에 가보면 성인 남성 여럿이 간신히 들 수 있을 만한 돌덩이가 여기저기 널려 있다. 석탑을 쌓기 위해 가져다 놓았던 돌 등으로 전한다. 하지만 이 보잘것 없는 돌들이 문화재라고 하면 과연 누가 믿을까.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진행하고 있는 미륵사지 석탑 해체·복원에 쓰여질 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이 돌들을 가져다 부뚜막도 만들고, 토방도 짓고, 구들도 마련했다고 한다. 먹고 살기 바쁜 시절, 문화재가 뭐 그리 대수였겠는가. 이 돌들은 이제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석탑 건너편에 원래 모습 그대로 되살려 만든 미륵사지 동탑이 있다. 2009년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에서 "국보 중의 국보","무령왕릉 이후 백제 최고의 발굴"이라는 평가를 받은 사리호와 사리봉안기가 나왔다. 그렇다면 동탑 심주석에서도 또다른 사리봉안기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김복현 익산문화원 원장은 "탑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둔 곳이기 때문에 여기에 절을 하면 불심이 생긴다고 믿었다"며 "동탑 심주석에 '제2의 사리봉안기'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지만, 지극한 불심이 담겼던 탑이라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 '무왕길'에 있는 고도리 석불입상, 미륵사 문지기였나

 

백제 무왕을 길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익산시는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면서 남겼다고 전해지는 왕궁리부터 미륵사지까지를 추적해 '무왕길'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길을 걷다 보면 왕궁리 인근(금마면 동고도리)에서 2개의 석불이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고도리 석불입상(보물 제46호)을 발견하게 된다. 이 석불입상이 미륵사 '문지기'였는지 마을 장승이었는지 아직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남·녀 여부도 파악하기 힘들다. 하지만 동쪽의 석불이 여성, 서쪽의 석불은 남성일 것이라고 추정만 할 따름이다.

 

이 불상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1년 내내 하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2개의 석불은 섣달 그믐날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리면 꽁꽁 언 하천 위에서 아무도 모르게 밤에 몰래 만났다가 동이 터서 얼음이 녹기 전에 다시 헤어졌다고 한다. 그 날이 1년에 한 번 만나는 유일한 날이라나. 현재 이곳에는 시민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게 나무다리가 놓여졌다. 백제 시대의 '견우와 직녀'는 이제서야 해후할 수 있게 됐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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