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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표(藏書票)

 

책을 사면 첫 페이지 안쪽에 사인을 먼저 하는 습관이 있다. 아마도 아주 어린 시절, 스스로 책을 갖게 된 때로부터 시작된 습관일 것이다. 돌아보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엔 누구나가 교과서에 각자의 사인을 해놓았었다. 책 주인이 누구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 누군가 가져가더라도 금세 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그렇다보니 책의 표지 뿐 아니라 옆쪽에까지 잘 지워지지 않게 주인의 이름을 새겨놓은 경우가 많았다. 책이 귀하던 시절, 사람들은 아예 표식을 따로 만들어 책에 붙이기도 했다. '장서표(藏書票)'다. 장서표는 자신이 소장한 책에 대한 소유와 애정의 표시로 책의 안겉장에 붙이는 작은 크기의 판화다. 이 판화에는 책의 주인이 좋아하거나 어울리는 이미지와 '누구누구의 장서'란 의미의 라틴어 'EX-LIBRIS'를 주인의 이름과 함께 새겨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책에 붙이는 용도가 정해져 있다 보니 그 크기 또한 아무리 커도 우편엽서의 크기를 넘지 않는다.

 

장서표는 15세기 독일에서 처음 사용했지만, 인쇄술이 발달한 19세기 후반에는 폭넓게 확산되어 발전했다. 장서표는 소유를 표시하는 기능이 우선이지만, 판화로 제작되는 덕분에 아름다움을 표시하는 장식적 기능도 커서 현대에 와서는 독립된 판화예술의 한 분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 본래의 용도에 따라 책의 주인이 직접 제작하기도 했지만 작가에게 맡겨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장서표를 판화작품으로 남긴 이름난 작가도 적지 않다. 장서표의 의미와 판화작품으로서의 예술성이 주목받으면서 그것을 교환하거나 수집하는 애호가들도 세계적으로 많이 늘어났다. 1953년에는 국제적인 장서표 애호가 모임이 처음으로 열렸고, 1966년에는 국제 장서표 협회 연합(International Federation of Bookplate Societies: FISAE)이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결성됐다. 우리나라에서도 장서표를 제작하는 판화작가가 여럿 있는데, 그중에서도 남궁산의 장서표 작업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1990년대부터 장서표 작업을 시작한 그는 지금까지 문화계 인사 들을 중심으로 400여명의 장서표를 제작했다. 동양에서도 장서표와 같은 기능을 하는 장서인(藏書印)이 있었다.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책을 귀하게 여겼던 시대가 물려준 귀한 산물들이다. 책이 넘쳐나는 시대. 우리는 과연 후대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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