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민족음악 교류 '전주'가 중심되도록 힘 보태겠다"
TV 방송광고의 우리 전통음악 등장은 이제 낯설지 않다. 우리문화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된 시점으로부터 출발했을 전통음악의 활용은 사실 상업성을 앞세운, 조금은 불온한(?) 목적이 읽혀지긴 하지만 어찌됐든 우리음악 대중화를 위한 통로로는 반가운 일이다. 최근에는 한 이동통신 광고에 출연한 촉망받는 10대 국악인의 빼어난 실력 덕분에 우리 민요의 쓰임이 더 새로워졌다. 좁은 통로이긴 하지만 전통음악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사실 반세기가 넘는 대한민국의 현대교육 역사에서 우리의 음악교육은 서양음악이 중심이었다. 변방으로 밀려난 전통음악의 존재는 그래서 늘 낯설거나 미미했다. 지금도 그 상황이 역전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음악의 가치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전통음악의 고유한 특성과 그 가치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민족음악학자 이병원교수(72, 하와이대 교수)를 만난 것은 그래서였다. 1967년에 미국 유학을 떠나 1세대 국악이론가로서 민족음악학의 기반을 다지고 연구 작업을 확산시켜온 이 교수는 우리나라에 민족음악학을 소개하고 서양에는 한국음악을 전파한 주역이다. 우리지역과는 특별한 인연이 없지만 한국전통문화, 특히 전통음악의 중심지로서 전주와 전북을 주목해 온 이 교수는 여러 차례의 특강을 통해 이 지역의 연구자들과 젊은 세대를 만나왔다.
안식년을 맞아 한 달 일정으로 한국에 온 이 교수가 지난 11월 초, 전북대 국악과 특강을 위해 다시 전주를 찾았다. 한국전통음악의 묵은 과제를 명쾌하게 짚어내는 이교수와의 인터뷰동안 이 시대의 화두가 되어버린 세계화의 허상이 어른거렸다.
-민족음악을 이념적인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학문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대중적으로 아직 낯선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족음악학 발전은 어느 수준인지 궁금합니다.
“역사가 짧은 만큼 아직은 전공자도 적고 학문적 성과도 미진합니다. 전공자가 늘고는 있지만 한국음악의 이론적 영역에서도 연구의 진전은 여전히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짧다고는 해도 민족음악학에 관심을 덜 갖게 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대학 교육의 한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민족음악학과 관련이 있는 분야는 국악과인데 국악과 교수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경향이 있었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의 인식이 고착되어 있으니 전공 선택의 폭도 좁을 수밖에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는데, 국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유학을 권하면, 오히려 교수들이 한국음악을 공부하는데 왜 미국까지 가서 공부하려고 하느냐고 말리기도 했어요.(웃음)”
-심각한 상황이었군요. 지금은 좀 나아졌습니까.
“크게 나아지진 않았지만 가능성은 보입니다. 1980년대 초에 국제전통음악학회의 26차 회의를 한국에 유치했어요. 그 행사를 치르려고 아예 하와이대를 휴직하고 풀브라이트장학금을 받아 서울대로 왔었죠. 한국음악을 연구하는 교수들이 틀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거든요. 젊은 세대라도 다른 나라 음악과 학자들의 연구 환경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스럽게 그즈음부터 국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유학을 가기 시작했고. 민족음악학을 공부하려는 한국인 제자들이 생겼습니다.”
-민족음악학에서도 교수님이 주목하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음악과 음악가는 무엇인가를 주목합니다. 한 시대와 사회에서 음악과 음악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지요.”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문화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높아졌는데, 한국음악은 어떻습니까.
“제가 처음 유학 갔을 때 한국음악은 그 존재가 거의 없었어요. 미국이나 유럽의 음악교과서에 소개조차 되지 않았으니까요. 중국과 일본음악에 대한 내용은 있는데, ‘한국음악은 중국 일본음악과 비슷하니 그냥 넘어가겠다’는 식이었죠. 그러다 처음으로 영국의 음악백과사전에 실리게 되었는데, 그 내용을 제가 정리했습니다. 1980년에 한국음악 원고 청탁을 받았는데 박사과정을 마치는 즈음이어서 개인공부만으로도 버거웠던 때였어요. 그래도 그것을 놓치면 안되겠더라고요. 분량까지 많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 만큼 보람은 있었지요. 그 후 수정보완작업을 거치면서 전문가들이 각자의 영역을 정리해서 이제는 한국음악에 대한 소개가 아주 잘되어 있습니다.”
-연주나 실제 무대 공연을 통해 한국음악을 이해하게 되는 통로도 예전보다 많이 달라졌죠.
“물론입니다. 그런데 사실 외국인들에게 한국음악은 매우 어려운 음악입니다. 아프리카나 다른 나라의 전통음악들과는 많이 다르죠. 그것이 한국음악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한데, 첫째는 한국음악은 연주할 때 음을 변형하는 특성이 있다는 겁니다. 이른바 ‘변음’인데, 대금의 경우도 한 구멍에서 한 가지 이상의 음을 만들어내거든요. 가야금도 마찬가지고요. 변음을 할 수 없는 악기는 중심 악기가 될 수 없습니다. 한번 조율하면 그만인 양금이나 음을 변형시키기 어려운 단소 같은 악기는 그 때문에 부속악기의 기능을 하게 되죠.”
-악기의 특성이 존재와 위상을 규정하는 셈이군요.
“또 하나는 한국적인 독특한 음색입니다. 목소리라면 거친 탁성 같은 것이고, 악기에서는 거문고의 경우, 줄을 뜯고 밀었다 끌었다 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서걱거리는, 잡음 같은 소리를 말합니다. 이 특성은 우리 음악에 중요한 요소예요.”
-한국 사람들도 한국전통음악의 이런 특성을 잘 모르는데, 외국인들에게는 두말할 나위 없겠습니다.
“어떤 미국인 교수가 쓴 글을 보았는데, 한국음악을 이해하고 즐기려면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더군요. 그것이 뭐냐면 한국음악의 경우 음을 변화시키는데 그 또한 일정치 않다는 것이죠. 오늘연주 다르고 내일 연주 다르니 음악가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음악적 특성을 익숙하게 익히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변음의 구사가 가능하려면 연주자 또한 그만한 역량을 갖추어야 되겠군요.
“물론입니다. 정악에서는 개인 연주자들의 변음 정도가 덜하지만 어찌됐든 영산회상 같은 경우도 완벽한 기준은 없으니까요. 다시 말하자면 융통성이 있는 음악이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산조나 시나위까지 나가면 완전한 즉흥연주랄 수 있으니 연주역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좋은 연주를 할 수 없죠.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우리 음악의 전통이 달라졌어요.”
-전통 양식과 고유한 특성이 발휘되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1960년대에 대학에 국악과가 생기면서 대학교육을 위해 국악곡도 서양악곡의 형식으로 채보하기 시작했습니다. 채보가 교재가 된 것이죠. 심지어 산조까지도 그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그렇다보니 융통성이 있는 연주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악보에 의한 한 가지 연주밖에 못하게 되었습니다.”
-창조적인 연주가 불가능하게 된 셈인가요. 그래도 어느 단계까지는 악보에 의한 정확한 이해와 연습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여러 명을 단체로 가르칠 때는 악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게 되면 악보를 떼고 즉흥적으로 자기 연주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꼭 필요하죠.”
-도제식 교육이 장점도 있지만 현대의 교육 방식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이러한 한국음악의 전통적인 교육 방식이 더 어렵다는 인식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인도의 전통음악인 ‘라가’는 지금도 악보를 쓰지 않습니다. 구음으로 가르치죠. 하나의 음에서 다른 음으로 넘어갈 때 수백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만 계속 연습합니다. 그런 다음에 연주를 하면 자연적으로 즉흥적인 음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인도음악은 지금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음악입니다. 역사도 길고, 음악성도 풍부하죠. 우리 음악의 전통과 특색도 그에 못지않은데 그런 고유한 것들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시대적 환경보다 본질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혹시 문화재 지정 제도의 영향은 아닐까요.
“가장 큰 이유는 거기 있다고 봅니다. 한국음악의 특성으로 보면 무형문화재 지정은 잘못 적용된 예입니다. 문화재 제도가 뭔가요. 일본에서 들여와 그대로 적용시킨 것 아닙니까. 일본음악은 그것이 가능합니다. 서양음악도 그렇지만, 일본음악은 완제예술이예요. 한번 만들어 놓으면 변하지 않죠. 그래서 일본음악은 그대로 재현하는 모방 기능이 아주 중요합니다. 원형으로부터 조금만 벗어나도 인정을 못 받게 됩니다. 일본의 대대로 기능을 세습해가는 이에모토(家元)제도가 대표적인 예죠.”
-그렇고 보니 우리 전통음악에서도 ‘누구누구 류’라 해서 스승의 기능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것도 그 제도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그 ‘누구누구류’가 문제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판소리만 해도 스승의 소리를 그대로 따라하면 2급 예술가로 평가받았습니다. 좋은 음악가는 내 음악을 만들어야했지요. ‘류’가 등장한 것이 사실 얼마 되지 않습니다. 60년대 즈음 일 텐데, 일본 유학파들이 유식하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 일본식의 ‘류‘라는 명칭을 사용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 음악은 일본음악과 완전히 다르거든요.”
-우리 전통음악도 일본처럼 도제식 교육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특성은 전혀 다르다는 말씀이군요.
“옛날 국악인들은 한명의 스승 밑에서만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판소리 공부하는 사람도 스승이 여럿이었지 않습니까. 소리하는 사람이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배우기도 하고, 여러 영역의 음악을 섭렵했지요. 결국 그런 과정에서 익힌 음악적 자양분으로 자기 음악을 만들어냈습니다. 변음이 가능했던 것도 그만큼 음악의 양분으로 음악세계를 갖추어놓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요. 이런 특성이 문화재 제도 때문에 망가졌습니다. 물론 그 제도를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연주방법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은 문제예요.”
-고유한 방식과 그것으로부터 생성되는 특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겠습니다.
“저는 그것을 과정예술인 한국음악이 완제예술화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바람직하지 않은 변화에 공헌(?) 한 것이 서양악보로 채보하는 것과, 문화재 제도랄 수 있어요. 그나마 과정예술의 전통을 고수하는 음악가들이 아직은 적지 않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그 대부분은 훌륭한 음악성을 갖추고 있는 음악가들이죠.”
-과정예술과 완제예술의 예술적 완결성을 명쾌하게 가를 수는 없겠지만 형식적 특성은 분명히 있겠군요.
“과정예술은 공부해가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변해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비닐봉지는 그 안을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모양이 바뀌지만 플라스틱 통은 바뀌지 않습니다. 과정예술과 완제예술은 그런 차이입니다.”
-사실 오늘의 풍토에서는 전통예술의 길을 가는 사람들 대부분의 궁극적인 목표가 문화재로 지정받는 것인데, 오히려 제도가 예술적 창조성을 제한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처음 젓대를 배울 때만 해도 선생님이 한 달 배우고 나니까 거문고를 배우라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경기민요 하는 분을 소개하면서 민요도 배우라고 권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자기의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자양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길을 가르쳐준 것이었죠.”
-좋은 연주자가 되는, 한국음악의 고유한 특성을 잘 갖춘 연주를 하려면 어떤 방식의 과정이 필요하겠습니까.
“저는 대학에 있는 제자나 후배들에게 이렇게 권합니다. 적어도 국악기를 전공하는 학생들이라면 졸업을 앞두고 1년은 예를 들어 무용하는 사람 반주와 굿판의 반주만 하게 하는 방식으로 가르쳐보라고. 그렇게 하면 연주 역량이 놀라울 정도로 커집니다. 새로운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실력을 갖출 수 있게 되죠.”
-그렇고 보면 요즈음 시대의 화두가 된 통섭이나 융합이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군요. 한국음악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이루어져 온 형식이라는 사실에 우리음악의 예술적 완결성을 새롭게 들여다보게 됩니다. 전주 전북의 문화적 토양은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전북, 특히 전주는 한국적 전통문화 도시로서 네임밸류가 있죠. 다양한 예술장르의 전통이 그렇고 음식도 그렇고. 특히 판소리를 비롯한 한국음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중심지로서의 전통과 역할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려면 이제는 세계의 여러 나라 도시들과 교류하면서 우리전통문화 전통음악의 정체성을 창조적으로 이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소리축제도 그런 소통의 좋은 통로가 될 수 있겠죠. 저도 기회가 된다면 세계 여러 나라의 민족음악 교류를 전주가 이룰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 이병원 교수는 국악이론 1세대…한국음악, 서양에 첫 소개
이병원 교수는 한국 민족음악학의 선구자다. 국악이론 1세대로서 그가 이뤄놓은 학문적 결실은 국악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경기도 양평이 고향인 그는 1967년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직후 유학을 떠났다. 민족음악학을 마음에 품은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다. 미국대사관 도서관에 드나들었던 그는 미국의 대학을 알고 싶어 카탈로그를 들춰보다가 UCLA의 ‘민족음악학’에 관한 내용을 만나게 됐다.
내용을 정확하게 알수는 없었지만 무엇엔가 끌리는 마음이 있어 국악학회 월례발표회가 열리는 행사장에 찾아가 공부할 수 있는 길을 물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는 공부할 길이 없다는 답을 그때 들었다.
산골에서 자란 그는 바다를 좋아해 해양대를 가고 싶었지만, 유독 수학을 어려워해 희망을 접고 우연한 기회에 마음에 다가온 국악의 길을 택해 서울대에 국악과가 개설된 이듬해 2기로 입학했다. 하나뿐인 아들이 국악과에 들어가겠다는 것은 ‘풍각쟁이’가 되겠다는 이야기라고 단정한 아버지가 학비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에는 독립해 혼자 힘으로 성장해왔다.
의지를 갖고 들어갔지만 대학의 현실은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그의 이론 연구에 스승들의 칭찬이 이어지자 의욕이 생겨 더 열심히 논문을 쓰고 발표했다. 유학은 민족음악학을 공부하겠다는 오랜 의지의 실현을 위한 선택이었다. 미국의 여러 대학에 제안을 했는데, 대부분의 대학이 좋은 조건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시애틀의 워싱턴 주립대학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민족음악학 전공자가 되었다. 석박사 논문은 모두 한국의 불교음악이 주제였다. 박사과정을 끝낸 해에 하와이대 음대 민족음악학 교수 모집 공고가 났다. 경쟁이 만만치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큰 어려움 없이 하와이주립대 교수가 됐다.
한국의 불교음악 전문가인 그는 1980년 영국에서 출판한 백과사전 ‘The New 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에 한국음악을 소개한 글을 실었다. 처음으로 서양음악학계에 한국음악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글이었다.
강의와 연구를 위해 세계의 여러 나라를 다니는 분주한 일정에도 안식년을 이용해 한국의 대학, 국악 관련 기관과 교류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수많은 저술을 통해 학문 연구의 성과를 전파하고 확산시켜온 그는 한국전통음악의 고유한 특성을 지키는 과정예술의 전승 양식을 지키는 작업을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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