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훌쩍 떠난 지 일 년이 넘었다. 빨갛고 노란 단풍이 온 산에서 넉장거리 하던 재작년 가을 어느 날 그는 갔다. 그 해 봄에만 해도 생때같았던 그가 몇 달 사이에 그만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봄의 끝물쯤이었을까, 그가 위암이라는 소식이 풍문에 들려왔지만 직접 물어보기 멋쩍어 언저리만 맴돌며 살피기만 했다. 워낙 밝은 표정인 데다 평소처럼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식성으로 보아 병이 그리 위중하리라고는 짐작조차도 못 했다. 수술하고 잘 조리하면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개복하고 보니 복막까지 전이되어 더는 손을 대지 못하고 닫았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살다보니 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 하루하루가 바쁘다. 타고난 조급증 탓에 몸이 바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바쁜 것인지도 모른다. L의 병세가 빠른 속도로 악화하여 집에서 자리를 보전하고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도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가 보지 못했다.
그를 병원으로 옮겼다는 연락이 왔다. 의식이 왔다 갔다 하여 임종예배까지 미리 드렸다기에 마지막 인사라도 하고 싶어서 다급히 병원으로 찾아갔다. 몸이 밭아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늠름했던 풍채는 어디로 가고 몰골이 너무 왜소하게 보였다. 그래도 듣던 것보단 약간 나았다.
가족들은 “의식조차 없었는데 하루 사이에 사람을 모두 알아보고 대화를 나눌 정도로 좋아졌다”며 기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세상과의 마지막 작별을 위한 배려였을 줄이야. 수발하던 부인이 내가 왔음을 알리자 감았던 눈을 뜨며 희미하게 웃었다. 가만히 손을 잡았다. 그도 손을 맞잡았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에게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저 맞잡은 손에 힘을 더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날 밤 편안하게 그는 저 세상으로 갔다. 그가 떠난 지 벌써 2년째, 지금도 지인들끼리 모이면 그의 얘기하며 추억을 더듬는다. 시간이 갈수록 추억은 희미해지기 마련인데 그와의 아름다운 기억들은 더욱 또렷해지고 어제 일처럼 느껴짐은 어인 까닭일까.
나는 요즘 들어 가끔 죽음에 대한 생각에 잠기곤 한다. 사후세계에 대해 궁금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어느 것 하나도 답이 없다. 그러잖아도 짧은 인생을 죽어보기 전에는 티끌만큼도 알 수 없는 사후세계에 대한 사유로 허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보다는 죽음을 전제로 하는 삶의 가치에 대한 생각이 깊어질 때가 많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지인들의 부음을 전해 듣고 문상을 다녀온 날이면 이런 생각들이 더욱 깊어진다. ‘내가 죽어버리면 세상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면 애착을 가지던 일들이 시들해지고 가슴이 스산해지며 모두가 덧없이 느껴진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 있는 것은, 죽음이란 것을 맞이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실제로 사는 모습을 보면 평생 죽지 않을 것처럼 소유에 집착하며 욕심껏 움켜쥐고 아등바등 사는 사람이 많다. 하나같이 생명에 대한 지나친 욕심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두려워 떤다. 나도 그들의 하나이지만.
삶에 대한 애착이 결코 나쁜 건 아니다. 그러나 살면서 잊었던 것을 챙기듯 가끔은 죽음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내가 집착하고 있는 일, 애착을 가지고 아끼는 것들을 천칭 저울의 한쪽 접시에 담고 반대쪽에 죽음을 올려 기울기를 달아볼 때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지금껏 살아온 날보다 훨씬 짧을 남은 시간의 빈 그릇에 어떤 삶의 내용을 채워야 할까? 죽음을 전제로 삶의 가치를 천칭에 저울질하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리며 살아야겠다.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은 소망을 담아서….
△윤철 수필가는 김제 출신으로 전북대 행정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진안군 부군수를 역임했으며 수필전문지 〈에세이스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현재 전북수필문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