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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약육강식

새 소리가 조금 달리 들렸다. 자세히 보니 두 마리가 교대로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내 승용차 부근이라서 시동을 걸고 뒷 트렁크를 여닫고 해도 내 행동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 자리를 뜨지 못하며 오락가락 울어 댄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 계단으로 올라가 그 부근을 살펴보았더니 내 인기척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그 순간 두 마리의 새가 동시에 고양이를 공격했다. 나뭇가지 속에 있을 땐 어쩌지 못하고 있다가 고양이가 지상 공간으로 나오자 위에서 내리꽂으며 공격을 시작했다. 새의 둥지를 노리던 고양이도 그 공격에 쏜살같이 도망갔다. 어쨌든 상황이 종료된 것 같아 뒤돌아 나오는 순간 다른 승용차 밑에 숨어있던 검은 고양이가 나를 쏘아보는데 그 눈빛이 써늘해서 오싹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일부러 방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궁금해서 보았을 뿐이라고', '너희들 세계의 생존경쟁에 끼어들 생각은 전혀 없었노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어느 다큐에서 보았는데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해 생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강자가 약자를 취하는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약자를 도와준다고 강자의 섭취를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의 법칙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만 짐승들은 아무리 넘쳐나도 욕심부려 넘보지 않고 배가 고플 때만 사냥을 한다고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저 생명 보존을 위한 한도 내에서의 욕망으로 끝나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고 선을 넘는 것이 문제다. 숲을 불태우고 강을 막고 바다를 메운다. 그렇게 해서 얻은 이익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한 가지를 얻으면 반드시 잃는 것도 있다는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얻는 것만 생각하며 잃는 것엔 관심이 없다. 누가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했던가? 요즘 들어서는 제아무리 날고 기는 인간이건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소소한 바이러스에 굴복당하고 있는 현실을 보며 인간이 자연에 먹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치료할 백신을 만들어 내기도 전에 그 바이러스들은 끝없이 새로운 변종으로 우리 인간의 몸에 침투할 것이라는 예견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인간이 '약(弱)'이 되고 자연이 '강(强)'이 되는 찰나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미미한, 그러면서도 전 세계의 인류를 휩쓸며 휘젓고 있는 저 바이러스들, 무서운 핵이나 전쟁 무기는 아니어도 얼마든지 온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음을 알깨워 주고 있다. 이는 어쩌면, 자연의 섭리를 무시하고 겁 없이 날뛰는 우리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고 경종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기가 힘들 것 같다. 어쩌면 이대로 도태되어 버리고 새로운 세상으로 뒤 바꿈 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까지 든다. 그렇게 되면 먼 훗날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서 잠깐 존재했다가 사리지고 마는 생물의 한 종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거대한 공룡들처럼…. 지금부터라도 인간이 이 지구를 살리면서 강자(强者)남아 영원히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을 지속할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아니, 인류의 일원인 나 자신부터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를 깊이 새겨볼 일이다. 김재희 수필가는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작가로서 행촌수필문학상, 수필과비평문학상, 전북수필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수필집 '그 장승이 갖고 싶다' '꽃가지를 아우르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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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24 17:25

<금요수필> 금계국의 파노라마

요즘 산하(山河)는 금계국의 잔치다. 산에도 들에도 고속도로변에도 전국 어느 곳엘 가도 금계국의 화려함을 쉽게 볼 수 있다. 설한(雪寒)에 정(情)을 품은 매화가 지나가면서 벚꽃이 산천을 뒤덮더니 행여 덤벼들 꽃들에 앞서 금계국은 5월의 녹음과 연인 삼아 노랗게 하얗게 파노라마의 진수를 보인다. 금계국은 식용이 가능한 국화과에 속하며 크기는 30~60cm 정도다. 개체에 따라서는 90cm까지도 자란다. ‘금계국(金鷄菊)’이라는 이름은 꽃이 황금색 계란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졌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꽃은 화사한 노란색이며, 잎은 길쭉한 편이나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흔히 '들국화'라고 부른다. 금계국꽃은 신록이 우거진 초여름에 노랗고 하얀 향연의 연출은 마치 자연을 대변하는 5월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나는 요즘 바깥에 나가 금계국을 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어쩐지 잃어버린 연인을 마주하는 느낌마저 든다. 옆을 멀리하고 떠나버린 얄미운 정의 흔적을 보는 마음은 몇십 년 전으로 돌아가 자칫 우울할 까 봐 내심 마음을 가다듬기도 한다. 내 고향 새만금의 섬 야미도 고향 죽마고우요 뜻을 함께해온 오직 하나였던 진정한 친구 고 김정웅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내 마음을 찌빽거리는 금계국의 정확한 이름을 잘 몰라 확인하기 위해 국어사전을 떠들어 보기도 했다. 근년에 접어들면서 군산 월명공원 설립산의 남쪽엔 금계국이 활짝 피어 붐비는 인파의 눈길을 사로 잡는다. 그런가 하면 군데군데 노랗고 하얀색의 꽃' 하면 금계국이라고 할 만큼 인기 절정이다. 보고 또 보고 싶은 금계국꽃이다. 또한 금계국 꽃에 대해 노란 꽃잎 속에 짙은 밤색 무늬의 꽃이 들어있어 화사한 치장이라 하여 기생초라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화사함을 지닌 꽃이라는 데서 더욱 보는 이들의 마음을 술렁대게 한다. 마음에 새겨둔 연인을 보는 마음이라면 어떠할까? 금강물 따라 서해바다로 가면서 정만 뿌릴라나 상념을 스친다. 원산지는 북아메리카가 이지만 우리나라에도 전국의 산하는 물론, 시골길 가로에도 모습을 드러낼 만큼 널리 퍼져있어 국민들의 마음을 아름답게 공헌(?)을 하는 새로운 각광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난 주말 모처럼 만에 승용차편으로 친구와 함께 남해지역으로 여행을 떠났다. 남해와 서해안의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 심지어 마을 길을 다니면서 금계국 꽃이 자태를 보이는 모습을 볼 때마다 다정한 도로의 친구로만 여겨졌다. 나만의 감정인지는 몰라도 금년 들어 처음 느껴보는 마음으로 마치 다정한 친구 하나가 생겨난 마음 같아 더욱 금계국에 대한 친밀감이 돋았다. 그러나 일행들도 대체적으로 다감한 느낌들을 주며 "언젠가는 우리나라 꽃이 되겠다"고 까지 한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금계국은 1년에 한 번씩 보게 될 친구가 될 것 같다. 시각의 아름다움은 마음의 아름다움이니까. 금계국 피우기 위해 쉬지 않고 걸어도 짧은 가을, 바람의 날개를 달고 노란 향주머니 열기에 바빠 하루해 짧다지만 스산한 가슴으로 지고(至高)의 푸름 아래 홀로 삶이 힘들까 봐 마지막 들꽃 되어 찬 바람 불기 전 가을의 노랑향기 온몸으로 담아내는 금계국(金鷄菊)의 하루가 예스럽기만하다. 김철규 수필가는 전북일보 편집부국장과 논설위원을 거쳐 전북도의회 의장과 군산신문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전북수필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수필집 '인연 외 10권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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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17 17:13

<금요수필> 가을을 보내며

아침, 저녁으로 온도 차가 많이 나는 것을 보니 겨울이 가깝게 와 있다는 신호다. 언제나 이맘 때 쯤 되면 지난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가슴을 파고 든다. 학교에서 집까지 십리 길인 4km를 걸어서 집에 도착하면 앞마당에는 엄마가 자신의 무게보다 훨씬 무거운 콩 다발을 머리에 이고 와서 여기저기 쌓여있었다. 그리고 땅거미가 짙은 방문 앞은 아직도 불이 켜져 있지 않은 채 나를 맞이했다. 아마도 엄마는 지금 뒷산 너머에 있는 다랑이 밭에서 고추를 따거나 고구마를 캐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얼른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놓고 단숨에 뒷동산에 올라 엄마를 소리쳐 불러본다. 그러면 어디선가 내 소리를 듣고 구부린 허리를 펴며 손짓한다. 오전에는 고구마를 캐고 오후에는 고춧대를 뽑는 중이란다. 배고프고 춥다고 투정 부리려다가도 엄마의 곱은 손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기억들이 새록인다. 일 년을 땀 흘려 지은 농작물인데 서리 내리기 전 수확을 해야 한다고 엄마의 굽은 허리의 뒷모습에 투정은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걸려 있는 호박이 나의 시선을 끈다. 이제는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어머니가 생각난다. 호박은 어머니에게 아주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 때는 알지 못했지만 호박이 얼마나 영양가가 높은지를 이제는 알았다. 그러나 그 때는 참으로 지겨웠었다. 날이면 날마다 올라오는 호박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내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때는 모두가 가난했었다. 부식이 따로 있지 않았으며 주식인 곡식을 확보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컸던 시기다. 그러니 반찬은 어머니 손수 마련하여야 하였다. 자투리땅에는 빠짐없이 심어진 호박은 어머니의 땀이 밴 반찬이 된 것이다. 어머니의 손은 마법의 손이었다. 어머니의 손이 닿는 것은 다 보물로 바뀌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만능인이었다. 세상의 어머니는 모두 다 그런 줄로만 알았었다. 그러나 그 것이 모두 다 어머니의 땀과 노력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호박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어머니에게 있어선 호박마저도 그렇게 넉넉하지 못하였다. 가난한 살림에 무엇 하나 여유가 있을 턱이 없었다. 먹을 식구는 많고 먹을거리는 부족하니 난감 했다. 이런때 가족을 위한 어머니의 지혜는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어린 마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이제 내가 부모가 되니, 어머니의 절박하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6남매를 혼자서 키우신 어머니. 호박도 그러하지 않은가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식물. 지금은 늙은 호박을 거두어들일 때다. 여린 호박은 부치고 나물하고, 중간호박은 된장찌개용, 어디 그뿐인가 호박잎으로 쌈 싸서 먹고 가을철에는 쌀뜬물 받아 으깨 국 끓이면 찬 바람 불어오는 늦가을엔 그 맛이 일품이었지. 인생의 황혼기처럼 늙은 호박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다 주고 있다. 호박즙, 떡, 엿, 식혜, 무궁무진한 게 호박인 것 같다. 주고 또 주어도 아깝지 않은… 우리 어머니도 이 호박과 같은 삶이 아니었을런지? 나도 이제는 두 자녀의 어머니가 되고 보니 어머니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지금도 하늘에서 응원해 주실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오늘은 호박으로 된장찌개를 끓여야겠다. 허경옥 수필가는 교직에서 정년을 하고 지금은 전북 노인일자리에서 근무하고 있다. 전북문학관 아카데미에서 문예창작을 수강하고 있으며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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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10 17:31

<금요수필>구두병원 아저씨

몇 년 전 아내가 편안하게 신으라며 캐주얼 화 한 켤레를 사 왔다. 평생 처음 신어 본 신발이었다. 퇴직 후 자유롭게 신을 수 있어서 계절도 날씨도 상관없이 줄곧 신고 다니다 보니 구두 밑창이 닳아 버렸다. 발바닥의 균형이 어긋나 팔자걸음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백화점 신발가게에 가서 밑창을 보수하려니 5만 원을 내라 했다. 수선비가 비싸서 포기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니 동네 은행 앞에 구두병원을 소개해 주었다. 창문에 <구두병원, 광택, 수선, 굽갈이> 등을 써 붙여 놓았는데 한 평도 안 되는 컨테이너 부스였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60대 후반의 아저씨가 오래된 구두 재봉틀 앞에 앉아 있었다. 구두 굽을 갈아주는 데 얼마냐고 물으니 만 오천 원이라고 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니까 사오십 분은 기다리라고 했다. 마땅히 갈 곳도 없어 구두를 맡기니 헌 구두로 만든 슬리퍼를 주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많아서 구두병원 안 쪼끄마한 간이 의자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나이가 몇이며, 어느 곳에 사는지 물으며 시간을 메우고 있었다. 간간이 아가씨들과 중년 부인들이 샌들이나 구두 굽갈이를 맡기고 한두 시간 뒤 찾아가곤 하였다. 나도 다른 신발을 가지고 와서 맡기고 일을 본 뒤 찾아갈 걸 그랬나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뒤 굽을 칼로 잘라내고 있는 걸 어쩌랴. 그래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기료장수는 건강이며 세상 살아가는 방법들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위장에는 부추(전라도에서는 솔, 타지방에서는 정구지)를 삶아 먹어야 하고, 호박이나 가지를 많이 먹어야 좋다는 등 단방약에 관한 처방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구두 손질은 멈추지 않았다. 얼핏 들었던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돈을 벌어서 불우이웃을 돕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을 땐, 뭐 그런 것을 다 묻느냐며 얼버무렸다. 이 신기료장수는 독신으로 살면서 가난한 이를 돕고, 손수 도시락을 싸서 가지고 온다고 들었다. 이야기 중에도 신발을 칼로 자르고 페이퍼로 닦고 문지르며 손끝으로 곱게 다듬다가 밖에 나가 숫돌에 문지르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한 뒤 강력 접착제로 붙이며, 송곳으로 꿰매는 것이었다. 한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그런데도 새로 오는 손님의 일감을 주문받으랴, 수선한 신발을 내주랴 바삐 움직였다. 나는 대충 되었으면 달라고 했다. 그런데 아직도 멀었단다. 신발을 신다가 잘못되어 창이 떨어지면 안 된다며 깔창을 뜯어내더니 다시 송곳으로 밑창을 꿰매는 게 아닌가. 나는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무릎 위에 널따랗고 두꺼운 보자기를 올려놓고 한 번도 하늘을 향해 본 적이 없는 구두 밑바닥을 뒤집어놓고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단단히 끈을 조이고 정성을 다하는 게 아닌가. 고무신이나 운동화는 빨아서 말릴 때 뒤집어 밑창이 하늘을 볼 수 있게 하건만, 가죽구두는 어디 그렇던가. 구두를 닦고 약칠을 하면서 얼굴이 비칠 정도로 광택도 내며, 입김을 불어 살살 문지르고, 깔창은 씻어 말리지만, 밑창은 항상 땅에 엎드려 그 음침한 곳에 붙어있다. 그리고 늘 젖은 곳이나 더러운 곳만 밟는다. 깨끗하고 번들번들한 구두 밑창을 이 구두병원장(?)은 가장 가까이에서 소중하고 튼튼하게 그리고 애정을 가지고 만지면서 일을 한다. 그 구두병원 아저씨를 보니 윤오영 님의 수필 <방망이 깎는 노인>이 문득 생각났다. 맡겨진 일에 사명감으로 최선을 다하는 그 자세가 믿음직했다. 우리 모두가 이 아저씨처럼 살아간다면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는 더 맑고 밝아지지 않을까 싶다. 나인구 수필가는 대한문학에서 시, 수필로 등단해쓰며 전북문협, 전북수필, 영호남수필. 대한문학회원이며 은빛수필 회장을 역임했다, 시집《간주곡의 서정》 수필집《그런 돌이 되고 싶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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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03 16:23

<금요수필> 뒷짐을 지다

언제부터인지 나도 모르게 뒷짐을 지게 된다. 뒷짐자세를 의식을 하는 순간 얼른 손을 풀고 걷기자세로 바로잡는다. 뒷짐 지고 걷는 자세가 어느새 편한 자세라는 걸 몸이 먼저 알았다면 늙었다는 증거다. 나의뒷짐 때문에 거리의 사람들을 주의 깊게 보노라니 남자나 여자나 성별불문하고 뒷짐을 지고 간다. 구부정한 자세로 뒷짐 지고 가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띤다. 노인이 많다는 얘기다. 사실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어서 남의 모습을 보고 나를 살피고 얼른 뒷짐을 푼다. 뒷짐이라! 무얼 뜻 하는가 뒷짐을 지는 것은 어떤 일을 방관한다는 의미이고 일선에서 물러나 앉는 일이다. 일을 할 때는 손을 앞쪽에서 열심히 무언가 만지고 부지런을 떨게 되어있다. 현역의 자리에 있을 땐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손이 할 일이 많았다. 언제 손이 뒤로 갈 틈이 없다. 아직 건강하고 할 일이 많아 동분서주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손이 어느새 뒤로 가서 마주잡고 뒷짐을 지고 가고 있다. 일손을 놓으라는 암시인가. 뒤짐 지고 손을 맺고 가는 저 사람들은 다르게 말하면 일손을 놓았다는 걸 말해주리라. 뒷짐을 진다는 것은 어쩌면 은퇴의 다른 표현이다. 중년이 뒷짐 지는 자세는 좀 다르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배를 내밀고 자못 거만스럽다. 중년이 팔짱을 끼고 몸을 뒤로 젖히고 있는 모습도 비슷한 인상을 준다. 일을 하지 않은 동작으로 주시 관망하는 모습이다. 감독자의 태도로 시선엔 힘이 들어가 있어 하수인들을 주눅 들게 하는 뒷짐이다. 뒷짐을 지거나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라면 일단 비호감이고 비생산적이다. 수년 전에 동네 고샅을 나가다가 목격한 일이다. 윗 골목에 사시는 박스를 줍는 할아버지가 구부정한 자세로 뒷짐을 지고 가고 있었다. 그 뒤를 네 댓살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구부정한 자세로 뒷짐을 지고 따라가는 모습이라니! 할아버지 걸음의 복사판이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이라는 말을 증명해준다. 할아버지의 뒷짐 습관을 손자는 그냥 할아버지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으니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해야 할 일이다. 어휘 말투 행동 하나하나를 아이들 보는 앞에서 조심해야할 이유다 요즘엔 뒷짐자세를 운동 동작에 도입하고 있는 추세다. 실제로 해보니까 운동으로서의 뒷짐 자세는 스트레칭 효과가 크다. 반듯한 자세로 허리를 펴고 뒷짐을 질 때 깍지 낀 손바닥을 땅으로 향하고 등 뒤에서 아래위로 올렸다 내렸다 신축과 이완운동을 반복적으로 한다. 거북목이나 오십 견 척추협착 등에 효과가 크다고 하니 수시로 실행해서 허리를 펴야겠다. 아침으로 천변을 산책하는 데도 뒷짐 지고 가는 사람이 많다. 건강하게 살자고 조깅하러 나와서도 구부정한 자세에 전형적인 노인성 걸음들을 보자니 가슴이 답답하고 씁쓸하다. 초등학교로 통하는 우리골목에 등교시간인데도 한 두 명이 띄엄띄엄 조용히 지나간다. 적막하고 쓸쓸한 등하교 시간이다. 출산율 최하위인 대한민국의 시골학교나 도서지방 폐교는 20년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최근엔 중 소 도시 주택가 학교도 폐교 위기에 놓였다는 말이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학령인구 감소가 심각하다. 아침이면 골목 가득 아이들의 발걸음이 왁자지껄하던 옛날이 그립다. 주택가라서 그런지 뒷짐 지고 가는 노인들의 모습만 보인다. 백세 시대가 노인 공화국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노인들이 뒷짐을 지고 간다. 동네 앞 네거리에 어깨를 펴고 활보하는 젊은이들의 보무당당한 모습이 보고 싶다. 박순희 수필가는 <한국문인> 으로 등단했다. 현 행촌수필문학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수필집 <꽃으로 말한다> <대체로 맑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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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27 17:56

<금요수필>시간은 지우개

벼가 치자 빛으로 물들어 간다. 들녘의 메밀꽃은 하얗게 솜사탕을 풀어내고 소슬한 바람이 차창 가로 스친다. 긴 세월 얽매인 직장의 매듭이 풀리자마자 남편은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그 말에 “이왕이면 홀로 계신 시이모님 두 분도 같이 모시고 가요.” 하는 내 말에 그 사람은 “어머니가 더 좋아하겠네.” 하며 소년처럼 들떠서 완도 여행길에 올랐다. 나이 들어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시어머니는 이모들과 전화만 할 뿐 만나지 못해 답답하다고 넌지시 푸념을 했다. 폐를 갉아먹는 병마에 지쳐 바람 불면 날아갈 듯한 가랑잎 같은 시어머니. 잠시나마 파리한 그 얼굴에 웃음 띠게 할 수 있다면 맘의 부담쯤이야…. 앞에 앉은 세 여인은 소풍이라도 나온 듯 끝없이 말 꾸러미를 풀어낸다. 시간이 세 자매의 고운 모습은 가져갔으나 기억 속에선 지나간 일을 그림처럼 그려낸다. 어린 시절 친정집 옛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비 내리는 날 익산 미륵사지 근처 저수지에 가면, 물고기들이 새 물 내를 맡고 상류인 도내 골 냇가로 거슬러 온단다. 몰려오는 고기들을 대나무로 엮은 용수를 물속에 넣고 건져 올리면 바가지로 퍼 담을 정도로 많이 잡혔다. 보리새우, 쏘가리, 붕어 등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들고 그네들은 신바람이 나서 집으로 갔다. 어느 보름날 밤에는 친구들과 귀신 잡기 놀이를 하다가 동네 어귀 느티나무 아래 당집 근처에 갔는데, 하얀 수염에 흰옷을 입은 장대처럼 큰 남자가 지팡이를 들고 나타났다. 호들갑스러운 여자애들은 귀신이 정말 나타났다고 혼비백산하여 친구 집으로 몰려가는 소동을 벌였다. 아마도 당집 무속인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를 떠올리면 그네들은 지금도 모골이 송연해진단다. 세 자매는 번갈아 가며 세월의 그물에서 추억을 건져 올렸다. 완도 수목원에 도착하여 호숫가를 걸었다. 큰이모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걷고 작은이모는 관절염으로 오리걸음으로 쩔뚝이며 다녔다. 시어머니는 제일 허약하지만 그나마 걸음은 비틀거리지 않았다. 기우뚱한 그들의 뒤에 걸린 그림자도 시름에 겨운 생의 무게인 듯 절룩이며 따라갔다. 육신은 서걱거려도 마음만은 소녀라 얼굴에 동심이 흘렀다. 해 질 녘에 전망대에 오르니 다도해가 한 눈에 들어왔다. 크고 작은 섬들이 어우러져 수려했다. 서산 너머로 해가 숨어들고 있다. 세 자매의 백발 위로 노을이 내려앉아 붉게 물들어 간다. 남남으로 만나 시어머니와 인연을 맺은 지 어언 삼십여 년. 색색의 사연이 층층으로 쌓여 무지개가 뜨기도 하고 먹구름이 몰려올 때도 있었다. 이제 세월의 더께만큼 마음자리도 헐렁해져 야위어 가는 어머니를 감싸 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여행을 좋아하는 시어머니와 완도에 오는 길에 이모님도 겸사 모시고 왔는데……. 머지않아 누구나 기우뚱거리며 걸어가야 할 그 길 위에서 손잡아 줄 사람 있다면 외로움에 휘청거리지 않으련만. 해수탕의 열기로 얼굴에 복사꽃을 피운 세 여인과 땅끝 마을을 찾았다. 땅끝 표지석 앞에서 그녀들은 사진을 찍었다. 흰머리 날리며 배시시 천진하게 웃는 세 자매. 언제 다시 손잡고 여행할까. 그네들의 얼굴에 서글픈 빛이 언 듯 스쳐 간다. 흘러가는 세월은 그네들의 젊음을 데리고 갔다. 지금 이 순간도 시간이라는 지우개는 우리의 기억을 지워가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네들에게 특별한 순간은 잊을 수 없는 카이로스*가 되어 문득문득 생각날 것이다. 웃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이번 여행이 우울할 때, 세 자매에게 한 모금 청량제가 되었으면. 박일천은 수필 전문지 ‘에세이스트’로 등단하여 <토지문학 수필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한국문협 회원, 샘문학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수필집 <바다에 물든 태양> , <달궁에 빠지다>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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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06 17:12

<금요수필>눈으로도 들어보시오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시는 어느 신부님의 강론에서 흥미 있는 얘기를 들었다. “강론을 할 때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이 나서 더 열성적이고 풍성한 내용을 전하려고 노력하지만 벽에다 대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조금 얘기하고 그만 둔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녀원의 수도자들은 귀로만 듣지 않고 눈으로 듣는 반면 신부님들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는 얘기였다. 수녀님들의 경우 얘기는 귀로 듣지만 눈을 맞추며 어서 다음 얘기를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 같아 즐겁다는 것이다. 눈을 마주치지 않은 신부님들은 몸은 안에 있지만 마음은 밖에 있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그렇지만 설마 동풍취마이東風吹馬耳(말의 귀에 동풍이 분다는 뜻으로 아무런 감각이나 반응이 없음)나 마이동풍 馬耳東風 우이독경 牛耳讀經 같은 뜻은 아니리라 믿었다. ‘귀 소문 말고 눈 소문내라’ ‘귀 장사 하지 말고 눈 장사 하라’ 는 우리 속담의 뜻은 귀로 듣는 사실과 눈으로 보는 사실을 반드시 확인 하라는 타이름이 아닐까. 실제로 우리 생활 가운데 이러한 타이름을 지키지 않아 일어나는 각종 불상사는 헤아리기조차 부끄럽다. 요즘 귀로만 듣는 ‘카더라’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격의 손상을 입고 피해를 당하고 있는가. ‘좋은 노래도 세 번 들으면 귀가 싫어한다.’ 호가창창불락 (好歌唱唱不樂)인 것처럼 국정을 논의해야 될 선량들마저 허구한 날 ‘카더라’에 매달려 세월을 좀먹고 있다. ‘아니면 말고’가 독버섯처럼 존재하고 있는 사회가 결코 정의로울 수 없다. 코로나 19로 집안에 갇혀 사는 사람들의 유일한 위안거리인 TV조차 그런 짓을 하고 있으니 힘없는 국민은 무엇을 낙으로 삼고 살아야 할까 답답하다.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天地不仁)는 말을 새겨 볼 때가 아닐까 싶다. 천지는 천지의 이치를 거스르는 자가 천지의 이치를 깨닫고 순종할 때 까지는 인자하지 않다는 뜻이며 거기까지 가기 위하여 귀로도 듣고 눈으로도 들으라고 신부님은 권고는 절절히 공감을 주었다. 오감을 다 동원해도 모자랄 텐데 어찌 보면 가장 줏대가 없는 청각에만 의지하여 사물을 판단하려는 우리들의 의지를 지적해 준 듯하다. 밖에 있는 국외자가 아니라 항상 안에 있는 주관자의 의식을 버리지 않을 때 하늘은 비로소 우리에게 인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도 그런 뜻에서 멀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믿음의 사회, 정의로운 사회, 공정한 사회 그리하여 드디어는 일등국가로 가는 길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헬렌 켈러는 다른 애들처럼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의사 표현을 못 하니 난폭한 활동을 하기 일쑤였다. 설리번 선생님을 만나고,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하나하나 경험하고 반복 또 반복하며 알아갔다. 모든 것을 만져보고, 손가락으로 알파벳을 익혀 단어를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헬렌 켈러가 처음 ‘water(물)’이라는 단어를 배우기까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안홍엽 수필가는 전주 MBC 편성국장을 역임했고 <월간문학>으로 등단했으며 한국문협, 전북문협회원으로 전북문화상, 방송작품상을 5회 수상했고 산문집 <사랑이 꽃비 되어>, <별과 사랑과 그리움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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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22 16:43

[금요수필] 도심 산책

낮은 산자락의 오솔길도 아니고 동심을 부르는 언덕도 없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도 없고, 언니와 같이 빨래하러가며 부르며 건너던 징검다리도 없다. 종달새 우짖던 보리밭과 메뚜기 뛰놀던 언덕은 오래전 번듯한 도로가 되었다. 하지만 도심 길에도 아름다운 자연은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시선을 붙잡았다. 어제 오후부터 안개비를 동반한 바람이 불더니, 밤새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른 채 맑고 청명한 아침이 밝았다. 오후 한 시에 꽃밭정이노인복지관 부관인 상산복지관으로 어르신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오전에 한 시간 반 정도 거리를 걸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출근할 남편의 밥상을 차려놓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오늘은 어젯밤 스쳐간 바람과 비의 합작품이 지면에 가득해서 자꾸 시선이 바닥으로 갔다. 막 속잎의 티를 벗고 햇살 좋은 이른 여름을 즐기려던 잎들을 수다스러운 바람이 억지로 따다가 온 지면에 녹색 추상화를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깨끗하게 씻긴 회색 블록에 수많은 그림은 갖가지 모양으로 뇌에 상상력을 깨웠다. 조금 구부러진 담장 밑에는 녹색 잎들을 모아 방석인 듯 깔아놓고, 두 다리 쭉 펴고 앉아 무릎 토닥이며 쉬어가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팝나무 밑엔 은하수별처럼 예쁜 꽃잎들이 시집갈 아가씨가 밤새워 수를 놓은 듯 내 걷는 몸짓 따라 살랑거렸다. 조금 더 가다 보니 침엽수 잎이 많이 내렸다. 가지 떠난 침엽수는 노란색에 가까웠다. 여기저기 고르지 못한 틈에도 끼고 갈라진 곳에도 쌓여 낮은 산자락도 되고, 금잔디가 바람에 날리는 언덕도 되었다. 빗물이 흐르는 대로 따르다 멈춘 곳에 속잎들은 잔잔한 파도가 넘실대듯 밀려와 있었다. 그러고도 아직 여백을 채우려는지 바람은 나뭇가지를 자꾸 흔들었다. 신호등을 건너니 벽돌담은 다 지나고, 여러 가지 색으로 옷을 입은 예쁜 모양들로 구부려진 철제 아파트 울타리가 시작되었다. 내일 아침엔 좀 일찍 나와 천변으로 내려가 걸어야겠다. 양 옆으로 이름 모를 잡초들과 갈대가 어우러져 녹색 비단처럼 펄럭이고, 가끔 쑥부쟁이 노란 꽃이 나를 반길 것이다. 바닥엔 클로버 하얀 꽃이 내 발등을 더듬어보려 애쓰며 꽃반지에게 추억을 잊었느냐고 물어도, 번듯한 길 따라 내 발길은 멀어지고 말 것이다. 이토록 계절 따라 변화를 거듭하며 즐거움을 주는 도심 길에 또 한 가지 보너스가 있다. 천변뿐 아니라 도로변 곳곳에 운동기구가 설치되어있어서 간단한 준비운동을 할 수 있다. 나는 두 팔로 중심을 잡고, 허리 돌리기, 파도타기, 공중 걷기를 각각 300번씩 한다. 하고 나면 적절한 온도와 습도로 온몸의 세포가 잠을 깨는 듯 상쾌하다. 이런 즐거움 때문에 나의 도심산책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산책(散策)'의 사전적 의미는 '느긋한 기분으로 한가로이 거닐다'는 뜻이다. 도심의 산책은 그런 의미에서 참 좋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면 근심 걱정도 바람과 함께 날아가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요즈음은 산책을 즐기시는 분들이 꽤 있다. 산책은 여러가지로 바쁜 현대인들에겐 더없이 소중하며 몸과 마음 건강에 모두 좋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앞으로도 천천히 산책을 즐기며 도시의 일상도 둘러보며 마음의 여유도 찾고 싶다. 박유선 수필가는 양지노인복지관 노인·성 상담사, 중·고등학교 성폭력교육 강사, 문화회관·사회복지회관·노인대학의 민요·가요 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 ‘가시꽃’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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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모
  • 2022.09.15 18:28

<금요수필>시끄러운 세상 살아가기

사람은 저마다 말을 하고 살기 때문에 때로는 시끄럽다. 아무렇지 않게 입들끼리 넘나드는 말들은 잡음이 되지만 때로는 화음이 되어 변덕이다. 사실 화자의 즐거움과 청자의 괴로움이 서로 다르다. 며칠 전, 우리 동네 식당이 문을 닫았다. 전주에서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콩나물국밥집이었는데 식재료가 깔끔하고 간이 입에 맞아 시나브로 정이 들어가던 중이었는데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입간판을 세우고 있는 주인인 듯한 아저씨에게 여기 식당 어디 갔냐고 묻자 뚱한 눈길만 보탤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그간 우리 마을에서 가뭇없이 사라진 가게만 해도 벌써 열 곳이 넘는다. 그에 반해 대기업의 프랜차이즈는 우후죽순처럼 번창하고 있다. 향긋한 국화차의 전통찻집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피자집이 들어와 동네 상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재래시장에 대형 할인점이 들어와 순대와 옥수수까지 팔고 있다. 신문이나 미디어에서는 매일 같이 대기업의 횡포가 도를 넘었다고 성토하지만, 친구의 세탁소도 언제 문을 닫을지 걱정이 앞선다. 걱정스런 것은 TV도 마찬가지다. 하루가 멀다고 신조를 쏟아내야 예능 프로 시청률 1순위를 차지할 수 있다. 나무는 고목일 때 불 때기가 좋고, 책은 옛날 것이 좋은 것이니 많이 읽어야 하며 친구도 죽마고우가 정답고 좋으며 술도 묵혀둔 술이 맛이 있다 했는데 이러한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덕목으로 살다가 빠르게 변하는 세류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까? 현재의 삶은 얼마나 새로움을 체험하려 노력하느냐에 달려있다. 따라서 이제 공자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은 단순히 머리로만 익히는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따뜻한 지식(知識)과 체험(體驗) 그리고 인간애(人間愛)로 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말은 소통과 화합의 수단이다. 말은 진흙 속에 연꽃처럼 신중함을 품고 느림을 미덕으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살아가며‘입만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나고는 한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화려한 말은 우리를 짜증 나게 한다. 사람은 누구나 말실수한다. 신이 아닌 이상 내 마음과 다르게 말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말 실수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한 나라에 위정자나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정치가는 정제된 언어 구사와 신의가 있어야 한다. 그네들이 말만 앞세우고 책임을 회피한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 앞으로 나가기는커녕 계속 뒷걸음질만 칠 것이다. 장마가 지나간 황방산은 더없이 푸르고 청신하다. 산이 아름다운 것은 숲을 이루고 있는 꽃과 나무들이 제 각자의 자리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큰 나무와 작은 나무는 다툼이 없고 장미꽃은 족두리 꽃을 깔보지 않는다. 함께 하지 않으면 그저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에 지나지 않지만 더불어 살아가니 큰 숲을 이루고 푸른 산이 된다. 나는 오늘 무슨 말을 했나.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나. 택시기사님의 말뜻은? 친구의 하소연은…. 또 나는 그네들의 말을 귀담아들어 주었는가. 제일 가까운 남편과 아이들의 말을 제대로 듣긴 한 걸까. 언제 어디서든 누구는 말을 하고, 누군가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우리가 말만 늘어놓고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말은 점점 말이 아닌 다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거리를 구르는 낙엽이거나 휴지통 속에 담긴 쓰레기거나…. 박경숙 수필가는 <계간수필>에서 수필 천료로 등단하였으며 전북 수필문학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전북수필문학상, 산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수필집 <미용실에 가는 여자>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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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01 15:34

지금이 행복한 때

모처럼 어머니를 모시고 가느라 차를 가지고 미장원에 갔다. 코로나와 상관 없이 여전히 손님이 많았다. 잠시 기다리니 차례가 돌아와 어머니 머리를 잘랐다. 그런데 내 머릿결은 어머니와 달리 모발이 가늘고 숱이 적어서 아무리 공을 들여도 머리가 살아나질 않는다. 그래서 어머니를 집에 모셔다드리고 미장원에 다시 갔다. 내 앞에서 파마를 마친 손님은 나이가 꽤 들어 보였지만 뒤통수가 참 예뻤다. 나는 머리가 참 예쁘게 나왔다며 칭찬을 했더니 한 수 더 떠서 피부가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도 머리가 예쁘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단다. 허참! 칭찬해주고 본전도 못 찾은 것 같아 조금 섭섭했지만, 피부까지 좋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그만 부럽다는 소리가 연거푸 나왔다. 그러자 그 손님은 내가 차를 가지고 온 것을 알고는 나이 들어 운전하는 걸 보니 참 멋지게 사는 것 같다며 치켜세웠다. 그러자 원장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제야 나는 처진 어깨가 펴지면서 힘이 좀 생겼다. 나는 왜 가진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남의 것만 보면 다 좋아 보이는지 모르겠다. '비우며 살자'고 수없이 다짐했건만, 아직도 채우고 싶은 갈증에 허덕이고 있으니 얼마나 더 채워야 할지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언제던가, 서울 강남의 아주 큰 평수 큰 타워플래스 아파트에 사는 분이 투신자살을 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이유는 딱 한가지 '답답해서'라고 했다.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고 소중한 목숨을 답답해서 버리다니 참 어이가 없다. 그런가 하면 어느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는 부모들이 일하러 나가기 때문에 늘 집에 혼자 남아 점심 굶기가 일쑤라는 이유로 자살을 했다. 그의 유서를 보니 어느 날 집 아래에 사는 복지관 관장이 공부방 아이들과 함께 돈가스 가게에 데려갔더란다. 그 어린이는 일기장에 처음 먹어본 돈가스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라고 썼다고 했다. 이 글을 읽는 내 마음도 이리 짠한데 그 부모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지 모르겠다. 나는 요즘 전주 남부시장 새벽시장을 자주 간다. 운동기구에 몸을 풀며 이것저것 물건 사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잘 하면 싸고 좋은 물건을 사고 싶은 만큼 사 올 수도 있다. 어제도 머위와 맵지 않은 꽈리고추, 표고버섯, 비트 등을 사 가지고오면서 소고기도 조금 사 왔다. 집에 와서 인터넷을 보며 만드는 법을 익힌 뒤 만드느라 오후 2시에야 식사를 했다. 치아가 없는 어머니와 함께 먹기 위해 잘게 부수고 갈면서도 함께할 수 있다는 기쁨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요 며칠 일어나질 못해서 엉덩이를 밀어 달라고 하시던 어머니도 소고기를 갈아서 끓여드렸더니 혼자서도 잘 일어나시니 세상에 이런 특효약이 어디 또 있을까? 하늘나라로 가실 때까지 이 상태만 유지되어도 좋을 텐데…. 행복이란 결코 멀리 있거나 숨어있는 게 아니라 항상 곁에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싱싱하고 좋은 야채를 사다 만드느라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가족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지금이 최고로 행복한 때가 아닌가 싶다. 더욱이 무서운 전파력을 가진 코로나 때문에 미국을 비롯해 프랑스와 이태리, 페루, 이라크, 레바논 등 지구촌 곳곳에서 아우성이 빗발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열흘째 10명 선으로 안정세가 유지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곧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행복한 꿈과 희망을 안고 오늘도 열심히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다. 한일신 수필가는 공무원으로 정년 퇴임한 후 수필에 입문해 <대한문학> 으로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 영호남수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 <내 삶의 여정에서> 가 있다. /한일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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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30 14:37

<금요수필>빨간 머리 병아리

해마다 3월이면 마당에는 햇병아리가 그득했다. 내 어린 시절만 해도 시골에서는 가용비 마련이나 식구들 보양식 감으로는 닭만 한 게 없었다. 그러다 보니 누구네집 할 것 없이 병아리를 길렀지만 사료를 사서 기른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주로 방목이었다. 아버지는 덕가리에서 병아리를 한 마리씩 꺼내 머리에 빨간색 물감을 발라 마당에다 훅 던지며 "잘 주워 먹고, 잘 찾아오너라." 하시던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난다. 한 배에서 태어난 병아리가 스무 마리 정도였는데 아버지는 허실 없이 키워야 한다며 암컷을 더 챙기셨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씀이 '요놈들을 여섯 달만 잘 키우면 알을 낳을 것이고, 그러면 딸내미가 사달라는 별표 운동화랑 크레용도 사줄 수가 있지.'하셨다. 검정 고무신만 신었던 나는 운동화를 사준다는 말씀에 병아리를 정성껏 돌보았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꼬리를 치며 반기는 강아지는 뒷전이고 병아리부터 찾았다. 만약 병아리가 보이지 않으면 입술을 쭉 빼고 '구- 구-구'를 외치며 집 안팎을 샅샅이 뒤졌다. 입술이 얼얼해져 헛바람이 나오도록 한참 찾다보면 엉뚱하게도 뒷집 대밭 속에서 어미 닭과 함께 삐약거리며 따라오는 병아리를 보면 반갑기가 그지없었다. 대숲은 족제비나 들고양이들이 득실대는 곳이라 행여 잡아먹힌 병아리는 없는지 세어보고 또 세어보곤 했었다. 이렇게 돌보아도 병아리 수는 차츰 줄어 열서너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알에서 깬 지 3~4개월쯤 자라면 중병아리라 했고 대략 6개월이 지나면 암탉은 알을 낳았으며 어미 닭도 이 무렵이면 젖떼기라도 하듯이 새끼들을 아프지 않을 만큼 쪼아댔다. 3~4개월이 지나면 암수 자웅을 구별할 수 있었는데 수컷은 암탉과 달리 다리가 길고 꺼벙했지만, 벼슬이 돋고 혈기가 넘쳐 눈도 불그스레 번쩍거리며 가끔 하늘로 목을 쳐들고 '나는 왕이다'고 외치듯 '꼬끼오' 소리도 제법 질렀다. 수컷들은 암컷과 부하들을 거느리고 싶은 자리다툼 싸움이 갈수록 치열했다. 피가 나도록 상대방을 마구 쪼아대며 싸우다가 한 쪽이 날개를 서서히 접으며 눈꺼풀을 내리깔면 한바탕 싸움은 끝났다. 그뿐만 아니라 닥치는대로 먹어치우고 파헤쳤다. 사춘기 시절의 반항아들이라더니, 우리집도 남동생 넷이 모이면 수탉처럼 형과 아우가 따로 없이 서로 욕지거리며 힘겨루기를 하며 자랐다. 사실 나도 병아리가 아니던가.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날 때쯤이면 대추 볼때기가 발그스름했다. 아침 일찍부터 대추나무 밑을 서성였던 일이며, 벌집이 달린 줄도 모르고 나뭇가지를 흔들다가 주인집 할아버지의 헛기침 소리에 놀라 신발짝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도망치지 않았던가? 그날 밤, 벗겨진 신발짝 때문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날이 밝았다. 날이 밝자, ‘최 생원 계신가?’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그때는 무서워 떨었건만, 지금은 토방에 놓인 신발짝 하나마저 왜 이리도 그리움으로 밀려오는지! 여섯 달만 잘 키우면 알을 낳을 것이고, 그러면 운동화와 크레용도 사줄 수가 있다고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은 내 어린 시절 병아리와 함께 자라면서 머릿속에 도장 찍힌 희망이었다. 병아리는 자라서 어김없이 알을 낳았는데 딸 결혼식도 보지 못할 아버지의 구두를 닦아 선반에 올려놓고 저고리 동정을 달아 벽에 걸어 놓았건만, 입어보지도 못하신 아버지였다. 지금도 달걀만 보면 아버지가 생각나고 별표 운동화가 머릿속에 떠 오른다. 최정순 수필가는 전북문인협회· 행촌수필문학회· 대한문학회· 영호남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 ’속 빈 여자‘외 4권의 수필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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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09 17:14

<금요수필>그립다는 것

초등학교 2학년 싱그러운 어느 봄날이었다. 엄마는 나를 두고 세상을 떠나시어 엄머에 대한 동경은 끝이 없다. 엄마의 체온을 그리워하며 밤마다 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잠이 들곤 했었다. 엄마가 병석에 누워계실 때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다. 철없는 나는 보랏빛 자운영 꽃이 활짝 핀 논바닥에서 친구 설자와 뒹굴며 놀았다. 그러다가 앓아누워 계신 어머니 곁에서 책을 펴놓고 글자를 물어보곤 했다. 엄마는 아프면서도 글을 가르쳐 주시곤 했었는데 며칠 뒤 엄마가 돌아가셨다. 오남매를 두고 생의 끈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엄마는 익산군 용안면 임씨 가문에서 만석군 집의 딸로 태어나셨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호열자로 온가족이 생명을 잃었다. 그 후 어머니는 양반이라는 이유로 우리집으로 시집을 오게 된 것이다. 엄마니는 부엌일을 잘못하시어 옆집 사는 할머니가 일을 돌봐주셨다. 나는 그 할머니만 보면 좋아했다. 할머니는 어머니에 대한 세세한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할머니한테 가면 그리운 엄마이야기를 실컷 들을 수 있었다.그래서 자주 놀러갔다. 어머니의 유품으로 화려한 함속에 보물들이 들어있었다. 빨강색 공단에 수놓은 수저집도 있고, 여러 가지 물건들도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요즘도 한옥마을에 가면 고풍스런 물건들에 눈길이 가고 마음이 끌린다. 어디서 많이 보던 물건같이 느껴진다. 친구네 집에 갔을 때 친구엄마가 칭찬해 주며, 반겨주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부러웠다. 그러면서 속으로 무던히도 슬펐다. 내 유년시절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나날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하늘을 자주 바라보았다. 낮부터 떠있는 낮달도보고 상현달, 하현달과 쟁반같이 둥근 보름달도 보았다. 시골 밤하늘의 별들은 검은빛 우단에 보석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나는 별과 달을 보며 혼자서 달노래를 가만가만 불러보기도 했다. 산새소리 대나무들이 서로 부딪치는 밤바람소리, 봄이 되면 뻐꾸기 소리, 논에서 들려오는 뜸부기 소리, 5월이면 노란빛 옷을 입은 꾀꼬리가 깨죽나무에서 우리 집을 보며 노래했다. 참 듣기 좋은 소리였다. 나는 수다스럽게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세월이 흘러 소녀가 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잘 나가지 않았다. 내가 자라는 동안 언니들은 한 명씩 시집을 갔다. 나는 마음이 더욱 외롭고 허전했다. 나를 두고 결혼한 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지금에야 짐작해본다. 세월이 흘러 형부가 회갑이 될 무렵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형부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내 마음이 몹시 슬펐다. 의지했던 형부께서 떠나신 뒤,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하고 결혼하여 약국을 하던 언니네 딸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줄초상을 겪었던 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소종숙 수필가는 전북 익산 출생으로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했다. 한국 가곡사랑회 창작가요제 ‘박꽃’ 작사, ‘삶의 자리를 보다’ 들을 공동 출간한 경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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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19 16:46

살아 있기에 - 양희선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집에만 틀어박혀 있자니 마음이 심란하고 착잡하다. 바깥바람을 쏘이려고 문밖으로 나오니 이파리들이 파랗게 너울거리며 나를 반긴다. 양지바른 처마 끝에 옹기종기 심어놓은 꽃과 채소들도 싱그럽게 다가온다. 시도 때도 없이 방긋 웃던 핑크빛 제라늄은 그지없이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화려하게 피었다가 향기만 풍기고 금세 시드는 장미꽃에 비할까? 미색 박명이 무슨 소용이랴. 오래도록 호사한 그 열정을 즐기면 그만인 것을.... 화분에 덩치 큰 수국이 탐스럽다. 아기자기한 꽃들이 한데 어우러져 풍성한 맵시로 가지가지마다 피어났다. 여름 내내 매혹적인 생기를 잃지 않는 꽃, 풍만하고 고결한 그 자태가 요염하다. 들뜬 내 마음도 꽃 따라 예쁘게 가라앉는다. 스티로폼 박스에서 자란 고추와 가지가 주렁주렁 열렸다. 매달린 열매가 갓난아기처럼 여리고 귀엽다. 채소들의 숨결과 내 숨소리가 서로 교감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살아 숨 쉬는 게 온 몸으로 느껴진다. 살아 있기에 정이 가고 애착이 간다. 그래, 살아있다는 사실이 소중한 거지! 코로나는 인종차별, 국경차별, 빈부차별, 남녀노소차별, 권력의 차별도 하지 않는다. 분별없는 코로나의 침투력은 전쟁의 살상무기보다 두려운 존재다. 소리 없는 투쟁, 마스크로 입을 막고, 사람과 거리를 두면서, 밥도 같이 먹지 말란다. 살다보니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집에만 틀어박혀 있자니 마음만 뒤숭숭하다. 코로나가 제아무리 극성을 부려도 우리는 꼭 이겨내야 한다. 인간의 능력은 못할 게 없지 않은가? 생의 존엄성이 하찮은 바이러스에 무너질 순 없다. 적을 공격하려면 먼저 적을 알고, 제압해야만 이길 수가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백신과 치료제를 연구 중이니 코로나는 곧 사라지리라 믿는다. 계절은 기다리지 않아도 때가 되면 돌아오는 법. 지난 겨울부터 법석을 떨었던 코로나19는 지구촌을 샅샅이 누비면서 어느새 한여름이 되었다. 인간의 능력이 하늘만큼 높다 해도 자연법칙을 거역할 순 없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순응한다면 예기치 못한 재앙은 없을 게 아닌가? 평화로운 날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장맛비가 그칠 줄 모르고 장대비로 쏟아진다. 큰 피해 없이 지나가야 할 텐데…. 나른한 오후, 움직이는 것이 싫어질 때가 있다. 지금이 딱 그렇다. 침대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스르르 잠이 든다. 갑작스러운 스마트폰의 진동소리에 잠을 깬다.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을 차리고 창문을 연다. 무심코 쳐다본 창문 밖 저 멀리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창문 밖 세상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움직인다는 것은 것은 살아다는 증거구나" 이런 생각은 하나의 상상으로 이어졌다. 창문이라는 틀 안에 보이는 세상에는 움직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가득하다. 지저귀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도 보인다. 하지만 그 사이에 솟아있는 전봇대는 생명체들과 달리, 항상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멈추어져 있다. 양희선 수필가는 종합문예지 대한문학 수필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길 따라 꿈길>을 출간했으며 자연보호활동 수기 공모에서 가작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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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12 17:05

아직도 팔팔하다

“어이, 자네 아직도 팔팔해 보이네!” 코로나로 발을 끊자, 가끔 전화에 대고, 얼굴 잊어버리겠다는 성화에 못 이겨, 얼굴이라도 보여줄 요량으로 모처럼 동창회 사무실에 들렀더니 한 친구가 한 말이었다. 딴에는 반갑다는 뜻이었겠지만, 못 마땅해 하는 내 표정을 보고 어디가 불편하냐고 물었다. 그래서 보자마자 죽을 때가 되었다는 말을 듣는 것보바 났다고 했다. 그리고 열심히 방콕을 했을 뿐인데, 어느새 백발이 늘어 망구(望九)가 되었다며 무심한 세월만을 탓했다. 딴에는 늙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마스크로 코까지 덮고, 머리 위엔 왕관 대신에 팔순때 선물로 받은 우산 형 모자까지 눌러쓰고, 열심히 등산도 하며 건강에 힘쓰고 잇다. 그런데 아직도 팔팔하다는 말을 들으니 언뜻 듣기는 기본이 좋을지 몰라도 비아냥 같이 들려 언짢았다. '998234'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안에 죽어야 복이라는 시쳇말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어디까지나 노인들의 희망사항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말한 대로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선고된 생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생로병사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다. 아침 식사 후에 외출 할 차비를 한 채 나서면 아내는 깜짝 놀라면서 나가지 말라고 붙잡는다. 코로나가 기저질환이 있는 노인들에게 치명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꼭 외출해야만 할 경우에도 절대로 식당에는 들어가지 말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당부한다. 살판난 듯 TV를 켠 채 방구석에서 뒹굴어도 보기에 흉하다고 핀잔하지 않는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속담처럼 삼식(三食)이라고 비아냥거림을 감내해야 하던 사람이 집에서 칙사 대접을 받고 있다. 그게 바로 코로나19의 덕이 아닌가. 코로나19 덕을 보는 사람들이 또 있다. 위정자들이다. 대구의 사태가 잘 마무리되자 위정자들은 성공한 K방역이라고 큰소리친다. 하지만 치료제나 개발된 백신도 없는 맹탕 방역이다. 그러다가 제2 제3차 감염이 확산되자 코가 석자나 빠져버린다. 실체도 모르고 팔팔하다는 말을 함부로 남용하다가 큰코다친 셈이다. 우리의 피 속에는 웅녀의 DNA가 흐르고 있다. 쑥과 마늘만으로 굴콕하면서 인간으로 환생한 DNA이다. 그 덕으로 우리는 쉽게 거리두기와 비대면 그리고 방콕을 감내하면서 호락질과 같은 생활로 어려움을 버틸 수 있다. 단군신화를 부정하는 젊은이들도 많다. 그들은 단군신화 대신에 엉뚱한 신을 믿고, 곧 종말이 다가오고 있으니 2·3·4하기 전에 팔팔해져야 한다고 떠들어댄다. 결과적으로 코로나의 집단감염으로 다른 사람들마저 힘들게 하고 있다. 머리를 들고 팔팔하게 나대다가는 234할 수 있으니, 조용히 홀로 비우고 지내라는 것이 코로나의 경고다. 한참 친구들과 코로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아내에게서 식사 때가 되었으니 집으로 오라는 전화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한 채 집을 향하여 걷는 발걸음이 오늘따라 더 팔팔하다. 소크라테스는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자들 앞에서 처음 경험하게 되는 죽음에 대한 흥분으로 독배를 마실 시간이 아직 멀었느냐고 재촉하였다고 한다. 과연 삶에 대칭되는 절대적인 무(無)로서의 죽음이 있는가. 사르트르는 “나는 한때 과거였으며 앞으로 미래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무(無)가 있을 뿐이다”고 했다. 생(生)과 사(死)의 이분법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는 것이 팔팔하게 사는 법이다. △이희근 수필가는 정읍 출신으로 계간 ‘문학사랑’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원종린수필문학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산에 올라가 봐야> , <사랑의 유통기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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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05 14:09

<금요수필> 당신들의 여운

월요일 아침, 상쾌한 바람을 양껏 들이마신다. 코로나로 온라인 예배를 드리게 된 이후로는 주말 외출이 더 뜸해졌다. 바쁜 시간표 속으로 출근하는 월요일 아침은 그래서 내게 ‘환기’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내가 지금의 직장에 몸담은 것은 2002년 3월이었다. 연고 없는 지방에서 안내견과 함께 사회 조직에 첫 발을 들였다. 토요일도 출근했고, 휴일 일직도 있었다. 일요일이면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빈 학교를 지켰다. 보완 장치를 풀고 주요 건물들의 안전 상태를 확인한 다음 대충 자리를 정리하면 법인 시설에 기거하는 학생들이 교무실로 놀러왔다.수업 중에는 나눌 수 없는 개인 상담도, 정다운 다과도 그 시간에는 가능했다. 동생 같던 여고생들이 놀러오면 눈깜짝할 사이 퇴근 시간이 됐다.장애인 활동보조지원제도가 없던 그 때 내 주식은 배달 음식과 각종 인스턴트 식품이었다.요리에 재능도 흥미도 없었지만 별로 불편하지는 않았다. 혼자 몸으로 먹고 싶을 때 요기했고, 먹기 싫으면 건너 뛰었다. 사회 초년생으로 어설프게 적응해 가는 과정에 배운 술은 내 위를 더 혹사시켰다. 위경련이다, 위염이다 번번이 병원 신세를 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한 내게 선배 교사들은 무턱대고 부담스럽거나 두려운 존재였다. 사근사근한 성격도 못되는 데다가 전맹으로 사회 경험 폭이 넓지 않았던 나로서는 동료들과의 유대 관계를 구축하는 게 풀기 어려운 숙제 같았다. 더구나 내 또래 교사가 없는 환경에서 내성적인 내가 살아 남는 방법이 무엇일지 사실 완벽하게 무지했다. 꾸역꾸역 출근했고,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다. 서울 본가에서 윤택하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기간에만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업무에도, 사회 적응에도 나는 미숙했다. 그래서 교무부장님이 더 어려웠다.교무부장님은 워킹맘이었다. 맹학교 교사답게 목소리가 높았고 컸다. 함께 15년 정도 근무했다. 초등학생 아들이 소풍 가는 날이면 교무실 탁자 위에 먹음직스러운 김밥 접시가 펼쳐졌다. 맥주와 커피를 좋아했고, 따끔한 충고를 서슴치 않았다. 열무 김치를 처음 담가봤다며 불쑥 김치통을 내밀기도 했고, 한사코 운전을 마다하다가 친구가 떠넘긴 티코에 나를 태워주기도 했다. 조수석에 아들을, 뒷좌석에 나를 태우고 달달 떨던 그녀가 생각난다. 언제까지고 한 울타리 안에서 일할 수 있을 것 같던 그녀가 갑자기 하늘나라로 떠났다.간암 때문이었다. 진단 받고, 입원하고, 수술하고 상황은 급박했다.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그녀를 보냈다. 장지로 떠나는 마지막 길에 장성한 아들이 엄마의 영정 사진을 들고 학교에 들렀다. 청명한 어느 가을날이었다. 내 삶도 누군가의 가슴에 진한 여운으로 남을 수 있을까? 장영희 교수가 남긴 저서를 읽으며 곁에서 조근조근 대화하듯 그녀의 삶과 생각을 배웠다. 위로를 받고 다시 시작해볼 용기도 얻었다. 교수님 생전에 직접 만나뵐 기회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녀가 남긴 생생하고 소소한 에세이는 언제까지고 살아서 많은 이들에게 교훈이 되어줄 거다. 혼탁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은은한 길잡이가 되어줄 거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김성은 수필가는 서울 출생으로 국립서울맹학교와 대구대 특수교육과를 졸업했다. 신아문예작가상을 수상했고, 표현문학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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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4.28 16:45

돌아온 책가방

수필의 길에 입문하면서 손가방을 들고 다니며 새내기대학생 행세를 했었다. 그러나 허세도 잠시뿐이었다. 수업 자료며 글벗들의 신간을 받고 보니 한 아름이다. 어찌할까 망설이던 중 용도가 다양한 가방이 굴러들었다. 어느 날 출강하는 K의 낡은 가방을 보고서 반 강제로 선물한 것인데, 그와 정년을 함께 하고서 돌아온 것이다. 가방을 들고 처음 집을 나서려니 왜 그런지 쑥스럽고 어색하기만 했으나 이제는 어엿해졌으며 생각부터 행동까지도 학생의 자세로 틀이 잡혔다. 가방과 첫 인연은 초등학교 때 무명천에 물들인 보자기에 출발한다. 당시만 해도 책을 둘둘 말아 허리나 등에 질끈 동여매고 다니던 책보였다. 그리고 가방을 갖고 다니는 사람은 반 아이들 중 손 꼽을 정도였다. 선생이나 수리조합장 아들 정도였는데 내 기억에는 이웃집 순이의 가방이 지금까지 가억에 남는다. 연분홍색 가방은 너무 아름다워 부럽기도 하고 시샘이 나서 몰래 감추어 골탕 먹인 기억은 지금도 깨소금 같은 추억이다. 그렇게도 부러웠던 가방을 3학년 가을 학기에 할머니께서 선물로 사 주셨다.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품고 잠들 때도 있었고, 책을 넣었다 꺼내기를 몇차례 반복하기도 했다. 되돌아보면 할머니의 금쪽같은 용돈으로 마련해 주셨는데, 책 보다는 딱지나 딱총 등 놀이 용품들을 넣고 다녔으니 할머니는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책가방은 우리 곁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이제 핸드폰 속에 모든 정보가 들어 있어 손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핸드폰, PC에 전화번호 각종 기념일 특별히 기록해야 될 여러 사항들을 저장하면 된다. 문명의 이기는 읽고 쓰고 기억해야 할 인간들의 수고를 보관하고 있어 필요시마다 제공해준다. 이러한 편의적 사고에 빠져 들어 가방의 용도를 잊어버린 것이다. 가방은 누구에게나 널리 쓰이는 생활용품이다. '가방 크다고 공부 잘하냐?' 라는 비아냥거림이나 가방끈이 길다, 짧다는 등 배움을 가방끈에 비유햇던 속어도 있다. 가방의 쓰임새는 각기 다르다. 내게는 싫건 좋건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들어 갈 때까지 책가방, 서류가방, 여행용 캐리어로 익숙했지만 군인에게는 따불백, 여성들은 핸드백으로 다양하게 쓰였다. 바람이 있다면 이러한 가방 속에 읽을거리 하나쯤 넣고 다니면서 여가를 선용하면 어떨까 싶다. 시작은 늦었으나 심기일전하며 할머니의 뜻을 가방에 담아가며, 삶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는 수련(修鍊)의 보고(寶庫)로 삼고 싶다. 일찍이 철이 들었더라면 할머니의 넉넉한 웃음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로 온 몸이 후끈 거린다. 늦은감은 있지만 내 곁에 다시 돌아온 가방은 인연인가 싶어, 물려받은 도자기와 미술품을 함께 고완품으로 남겨 둘까 하는 생각이다. 어색한 교복을 맞춰 입은 예비 중학교 시절, 몸은 자라도 아직 마음은 여린 고등학교 시절, 성인인 대학시절도 장차 나갈 사회에서는 미약한 존재들이다. 이런 시절 어린아이가 곧 제 몸만 한 가방을 메고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몸과 마음이 자라 이 사회를 지키는 구성원이 되었다. 가방, 세상 무엇도 이보다 큰 것은 없다. 다른 세상으로 한 발씩 내디딜 작지만 강한 가방을 다시 멘 나를 응원고 싶다. 가방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나의 밥이었다. 이제 다시 돌아온 나의 가방을 열심히 메고 다니며 나의 일생을 정리하고 싶다. 곽창선은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장을 역임했으며 <표현 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와 현재 표현문학회, 신아 작가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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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4.14 16:42

아리울의 봄

쏴-, 바람이 불면 멀리서 파도가 바람을 몰고 온다. 물고기들도 춤을 추고 입질이 시작되면 아버지의 손놀림도 더욱 빨라진다. 낚싯줄에 매달린 망둥이가 허공에서 바둥거린다. 물살에 떠밀려와 구럭에 갇혀버린 망둥이들은 바다로 회귀하고 싶은 욕망으로 뛰어 넘으려 용을 쓰지만 대부분은 우리 가족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밭농사가 없는 초전리 마을의 남자들은 농사일이 없을 때면 바다로 나가 낚시를 했다. 아이들도 따라나서면 개펄은 언제나 그들의 재미있는 놀이터가 돼 주었다. 달랑게가 집 앞에 나와 뽀글뽀글 거품을 짓고 수컷은 암컷의 환심을 사려고 땅을 파서 집을 만들며 구애를 했다. 분주하던 아침 시간이 지나면 갑자기 허전함이 밀려온다. 빈 둥지 증후군도 지났건만 오늘은 왜일까? 차를 한 잔 마셔보지만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이 탓일게다. 설거지를 마치고 욕조에 더운물을 받아 따끈하게 몸을 담그니 사르르 눈이 감긴다. 얼마나 지났을까?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 닦아내고 긴 머리카락을 풀어 욕조에 담갔다. 빈 마음 한쪽이 따뜻하게 채워졌다. 오늘따라 머리카락이 청정한 미역처럼 싱그럽다. 봄볕이 따사로운 봄날 오후, 창 넓은 찻집에서 먼바다를 본다. 개펄에서 그레질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그들의 구럭 속에는 생합과 바지락이 가득 담겨 있다. 새만금 방조제가 건설될 때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나갔던 사람들이 다시 생명의 보물창고 개펄로 돌아왔다. 고개를 돌려 석양을 보니 아름다운 산호색 바다에 돛을 올린 요트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바닷바람을 가르며 군무를 하고 젊은이들의 윈드서핑이 그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부럽다. 나도 어느새 그들의 초호화 유람선을 타고 고군산열도를 휘감아 돌고 있다. 붉은 산호색 아리울 항의 경치는 천혜의 경관을 자랑하는 한 폭의 수채화다. 이 땅은 서해 바다와 만경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둑으로 막아 만든 땅이다. 생명을 품어 길러내던, 개펄과 해풍의 신비가 있으며, 자연의 혜택을 거저 얻은 땅이다. 개펄 땅에 소금기가 가시니 영양분 풍부한 찰진 흙이 되었다. 이곳 쌀로 밥을 지으면 윤기가 자르르 하고 밥맛도 좋아 '아리울 미'라는 인증마크를 달고 수출 길에 올랐다. 그리고 비옥한 땅에서 해풍을 맞으며 자란 화훼와 유기농 채소는 청정지역이라는 프리미엄을 얻어 농부들의 연간 소득이 억대를 넘어 얼굴에는 항상 환한 미소가 머물러 있다. 경제특구로 지정된 아리울에 외국인 투자자들이 몰려들고 인구도 늘어 광역도시가 되더니 시내가 온통 빌딩 숲을 이루었고, 홍콩보다 더 아름답고 화려한 야경 도시라는 입소문이 났다. 아리울국제공항엔 외국 관광객들이 북적이고, 거리마다 관광인파가 몰려들어 품질 좋은 우리 제품들을 쇼핑한다. 아리울 산업공단에는 공해 물질을 배출하지 않는 IT산업과 탄소산업, 신약개발 등의 기업들이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어 경제가 활성화되니, 세계 각국의 입주 은행들이 호황을 누린다. 청년들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수입이 안정되니 중산층 가정들이 여유를 즐기며 화목하다. 주변엔 노인들을 위한 숙련된 의료인, 최신의료장비를 갖춘 종합병원이 들어서 마음 든든하다. 여러 문화 시설과도 접근성이 좋아 문화생활이 가능하니 누구나가 살고 싶은 고장이 되었다. 주말엔 손자들과 아쿠아리움에서 잠수부가 되어보고 식물원의 희귀식물, 아름다운 꽃들 속에서 동물들의 재롱을 보며 산책을 한다. 비록 소망 같은 꿈이지만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라는 아리울의 봄을 기대하며 오늘도 나는 아리울 둑에서 먼바다를 바라보니 봄빛이 일렁이며 나를 향해 팔을 벌려 미소 짖는다. 박귀덕은 <수필과 비평> 출신으로 행촌수필, 전북수필 회장을 맡아 『나의 등단작』,『나는 隨筆家』 문집을 발간했으며 전북문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수필과비평문학상, 작촌문학상, 전북수필문학상, 행촌수필문학상을 수상 했고 『삶의 빛, 사랑의 숨결』 등 수필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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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4.07 16:44

부안 앞바다와 이규보

불그레한 노을의 부안 앞바다 낙조를 보고 황홀경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평선을 향해 서서히 물들어가며, 그 빛을 받아 출렁이는 바닷물은 노래 속의 멜로디를 연상케해 나도 모르게 흥얼거려진다. 저녁노을에서 잠시 깎아지른 바닷가로 눈을 돌리면 밀려오던 바닷물이 부딪쳐 부서지는 모습이 꽉 막혔던 가슴을 뚫어주며 상쾌해진다. 오랜만에 나들이를 한 아내의 눈치를 보니 흐뭇해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거뭇한 배가 멀리 황금빛 노을과 어울려 휴대폰을 꺼내 서너 폭을 담았다. 고려시대 이규보도 63세에 부녕현扶寧縣에서 벌목의 작목사로 잠시 관직에 있을 때 여러 편의 시를 창작했다. 그가 곰소항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파란 물결과 푸른 산들이 들락날락하고 붉은 저녁노을로 바다가 붉으락푸르락, 마치 만첩병풍萬疊屛風을 두른듯이 아름다웠다고 했다. 이때 시를 읊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했는데, 부안의 주사포구를 지나다가 휘영청 밝은 달이 해변의 모래사장을 비추어 밤바다가 황홀할 만큼 아름다워 시를 한 수 읊었다고 한다. 이 시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과 조선시대 선조의 명으로 조선전기 문신들이 시문을 모아 편찬한 『동문선』 권14에 실린 ‘부녕포구扶寧浦口’이며, 부녕은 지금의 부안이다. 流水聲中暮復朝 흐르는 물소리 중에 저녁은 다시 아침이 되고 海村籬落苦蕭條 해촌마을은 참으로 쓸쓸하다. 湖淸巧印當心月 호수는 맑기에 호수 복판에 당하여 달이 교묘히 찍혀 있고, 浦闊貪呑入口潮 포구는 넓기에 어귀로 들어오는 조수를 탐내어 삼킨다. 古石浪舂平作礪 물결이 찧어 옛날의 돌은 평평한 숫돌이 되고 壞船苔沒臥成橋 이끼가 들어차 무너진 배는 누워 다리가 되었다. 江山萬景吟難狀 강산의 모든 경치 시로 읊어 형상하기 어려우니, 須倩丹靑畵筆描 모름지기 화가에게 붓으로 그려 달라 부탁해야지. 고요한 바닷가마을의 쓸쓸한 정경에도 맑은 바다에 달이 찍혔으니 아름다웠고, 넓은 포구가 조수를 탐내어 삼킨다고 표현했다. 돌은 물결로 숫돌을 만들고 무너진 배도 예쁘게 보였으며, 포구의 모든 경치를 시로 읊어 형상하기 어려우니 화가에 그려달라고 싶다고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경기도 여주 출생인 이규보가 우리 고장 부안을 이렇게 아름답게 시로 읊었겠는가. 지금은 갯벌이 밀려와 썰물이 되면 바닥이 드러나 바닷물이 멀리 보이지만, 이 시를 읊을 때만 해도 원시적인 모습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부안을 찾을 때마다 곰소항 부근의 염전에서 소금을 긁어모으는 풍경, 곰소항 어시장에서 펄펄뛰는 활어를 떠 소주 한 모금에 회 한 점을 넣고 씹는 맛이라니, 그 맛이 그리워 이곳을 찾는다. 이규보의 ‘부녕포구’라는 시를 접하면서 나도 모르게 이곳에서 있었던 추억을 더듬게 되었다. 고려시대 이규보가 본 부녕포구의 정경이 내가 그려본 모습과 다르지 않아 감상에 젖은 듯하다. 부녕포구의 아름다움을 노래해준 이규보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머지않은 날 이 시를 들고 우리 고장 전북의 아름다운 부안을 아내와 다시 한 번 찾으리라. △이종희 수필가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하고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했다. 안골은빛수필 회장을 역임했으며 수필집 <임도 보고 뽕도 따고>, <초원을 찾은 나그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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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3.31 16:56

천년고도 전주의 곰솔, 그 고고한 자태

천년고도 전주에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준엄하게 꾸짖는 곰솔이 있다. 곰솔은 예부터 여느 소나무보다 억세고 강인함의 상징이다. 바닷가에서 자란 해송(海松), 껍질이 검은 흑송(黑松), 고고한 학의 자태를 닮은 학송(鶴松)이 있지만 천년고도 전주 완산칠봉 끝자락에서 250성상을 독야청청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며 버티고 서 있는 곰솔은 내륙에 깊은 뿌리를 묻고 전주를 지켜온 소나무다. 곰솔은 그동안 열여섯 가지를 사방팔방으로 펼쳐서 마치 학이 땅을 차고 하늘로 비상하는 웅장한 자태를 연상케 한다. 또 한편으로는 12m 높이와 9.6m의 가슴둘레로 학이 땅에 내려앉을 듯이 날개를 늘어뜨리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곰솔은 본디 인동 장(張)씨의 선산을 지켰던 나무다. 고요한 숲속에 파묻혀 하늘보다는 땅을 좋아했다. 대지를 향해 사방으로 고르게 가지를 뻗을 줄 아는 조선 선비의 겸손함과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조선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겸비한 나무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곰솔로 꼽힐 정도이며 문화적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내륙지역에 자라는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오죽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곰솔로 여겼을까 그런데 2000년 초 전주시의 안행택지지구개발로 곰솔 앞에 8차선 도로가 뚫리는가하면 그 주변에 고층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기 시작해 목숨 보전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다행이도 그런 가운데 1988년 곰솔이 천연기념물 355호로 지정되자 그 부근이 문화재 보호구역이되어 택지개발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근본적 대책은 될 수 없어 택지개발로 도심 한가운데 서 있는 곰솔 주변은 외로운 섬처럼 변해가며 끝없이 이어지는 아픔과 상처로 곰솔은 속울음을 삼켜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토지개발이익을 노린 무지몽매한 누군가가 곰솔이 죽어야 천연기념물과 문화재 보호구역에서 해제될 것이며 개발 이익도 챙길 수 있다는 탐욕으로 곰솔의 몸통에 구멍을 뚫고 독극물을 투여한 사건 벌어졌으니 곰솔의 생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였으며 시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다행이 2005년 큰 수술을 받고 겨우 목숨을 보전했지만 인조나무를 붙인 몸통과 죽은 열두 가지의 볼썽사나운 몰골이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랄까. 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의 곰솔은 생사기로를 헤매다가 16개 가지 중에서 겨우 4가지가 살아서 남쪽으로 뻗어가며 학이 다시 비상의 꿈 꾸며 날이 갈수록 신비롭게도 푸름을 내비치고 있다. 전문가들의 정밀조사에 다라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사망 진단까지 받을 정도로 몰골이 참담했었다. 찢기고 부러진 곰솔의 상처를 실제 육안으로 보아도 애처롭기 짝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자칫 곰솔은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될 뻔했지만 온 몸이 찢기면서도 생명의 끈을 놓지 않는 강인함을 보여주어서 비록 온전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그 후손들이 옆에서 조상의 아픔을 함께하고 있어 대견스럽다. 각종 위해(危害) 등으로 생육 환경이 나빴던 곰솔의 보호를 위해 주변의 사유지를 사들이고 시민휴식공간으로 조성하려는 계획도 세워져서 여간 다행스러울 수 없다. 인간들의 탐욕 '불천노 불이과 (不遷怒, 不貳過)정신 즉 화(禍)를 옮기지 않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정신으로 학처럼 독야청청 고고한 자태를 잃지 않는 곰솔에게서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품위와 도리를 배워야할 일이다. 김정길 수필가는 한국문학신문 수필부문 대상, 새전북신문 문학상 대상을 수상했으며 그동안 5권의 수필집을 냈다. 현재 전북문인협회 이사 겸 수필분과위원장과 영호남 수필문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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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3.24 17:42

상가(喪家)집 유감

상가(喪家)집 유감 윤 철 친구 어머니의 부음(訃音)을 받았다. 상가는 슬픔이 물안개처럼 번지며 숙연한 분위기다. 코주름 따라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려도 괜찮고, 두 다리를 뻗고 구구절절한 사설과 함께 코를 팽팽 거리며 슬픔을 과도하게 풀어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곳이 바로 초상 마당이다. 그리고 상가(喪家) 분위기는 이렇듯 슬퍼야 제맛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정작 슬픔을 보여야 할 상주(喪主)의 표정에 슬픔이 보이지 않는다. '긴 병에 효자 없다더니 너무 힘들어서 감성이 말라버렸을까?' 잠시 머뭇거리는데 '의식도 없는 상태로 고생만 하시느니 92세까지 사셨으니 차라리 잘 가셨다'며 호상이라고 상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인의 병세가 급격히 나빠져 운명 직전까지 산소호흡기에 의지했다는 말을 듣고 죽음이 슬픔만은 아니라는 것을 긍정했다. 쌓여가는 병원비 때문도, 남의 눈 때문도 아니며 떠나보내기 싫은 마음도 간절했지만 혹시 남들의 눈에 불효자로 비칠까 봐 각정했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죽음 앞에서도 이렇게 체면이 우선이었다. 자신의 삶인데 타자(他者)의 삶을 살아간다. 행복하게 살았어도 체면 때문에 눈치를 보며 생을 마쳐야 하니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으랴. 우리 주변에는 지금도 목숨을 산소호흡기에 의지하여 살고 있는 환자가 많다. 금방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환자도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이는 꼭 필요한 처치가 아니라 과잉진료다. 이미 뇌사상태에서 맥박만 유지하고 있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도 그중 한 사람이다. 부모가 나이를 드실수록 자식이 모셔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과 의무의식에 따른 강박 관념과 함께 고인들도 병원이 편하고 좋다며 집에 가지 않으려고 하는 편과, 오직 집 쪽으로만 머리를 돌리고 심지어 무단퇴원을 감행하는 노인들도 있다. 내 어머니는 집과 병원을 왔다 갔다 하신다. 입 퇴원을 수시로 반복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모두가 짧든 길든 죽음을 앞둔 환자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모범 답은 인생을 미리 그려보는 것이다. 노년의 삶을 먼저 살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먼저 살아보면서 꼭 일어났으면 좋을 일을 아주 상세하고 생생하게 미리서 그려 보고 실천도 해 보는 것이다. 내가 그리던 일과 비슷한 일이 생길 때, 마치 내가 기다리던 버스를 타는 것처럼, 그냥 올라 타면 되는 것이다. 난 아직 한참 멀었고 죽음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다며 나는 아직 젊고 행복하고 즐거운 날들이 앞에 너무도 창창하게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생명이 있는 것들은 정말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여러분은 내가 미래에 언제 다시 환생을 할지 할 지 모르는 그 날을 위해 현재를 너무 안위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무런 생각 없이 오늘도 일터로 나가 사람들과 거의 대화 없이 일하고 집에 와서 다시 스러져 잠들고, 내일도 똑같이 반복, 모레도 마찬가지. 누군가를 만나기보다 돈을 더 벌겠다고 당장 만날 수 있는 웃음과 행복을 너무 멀리 계속 미루고 있지는 않은가?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는 아름답고 소중하며 감사한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자. 아마, 내일도 똑같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현안의 문제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언젠가는 만날 미래의 나를 상상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잠시라도 생생하게 꿈꾸며 삶의 진정한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이따금씩 떠올리는 그런, 따뜻하고 생기있는 하루를 보내도록 노력하자. 윤철 수필가는 진안군 부군수를 역임하는 등 36년의 공무원 생활을 했으며 수필전문계간지 《에세이스트》로 등단한 수필가로서 전북수필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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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3.10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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