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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

임영희 벌써 반세기가 된다. 서울에서 근무할 때 큰 병원에서는 심리치료로 음악요법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TV가 별로 없어 FM 라디오에서 듣는 음악이 전부였다. 해거름 퇴근할 때쯤이면 전파상에서 흘러나오는 향수 짙은 고향노래가 나를 달래주었다. 문호 셰익스피어도 음악을 듣는 순간은 모두 아름다워진다고 했다. 그런데 요즈음 모두가 코로나로 불안과 고통 속에 살고 있는데 트로트가 큰 위로를 준다. 태어날 때 4.2Kg의 우량아로 울산에서 태어난 어느 가수는 10살 때 부모와 헤어져 할머니의 슬하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가난하다고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맞기도 일쑤였다. 그래서 폭력에 시달리다 폭력 단체에 가담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간절한 만류로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김천예고 서수용 선생님을 만나 전학을 해서 성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서 선생은 그의 노래를 들어보더니 너는 노래로 평생 먹고 살 수 있겠다고 말해 가슴에서 에밀레종을 치는 소리가 났단다. 그러다 고교 3학년 때 당시 공중파에서 놀라운 시청률을 자랑하던 스타킹에 나오고, 23세 때 다시 그 방송에 나왔는데 패널 가운데 전문교수가 인생의 희로애락을 다 표현된 노래라며 극찬을 했다. 예전보다 안전감 있고 호소력이 훨씬 성숙했다며 청중들의 기립 박수도 받았다. 이후 그 일을 계기로 유명대학 성악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동영상을 본 독일 RUTC 대학에서 제의가 들어와 유학하게 된다. 유학 중에 한국 음식이 너무나 먹고 싶어 찾아다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곰탕을 먹고 있는데 찔레꽃 노래가 흘러나와 곰탕 국물보다도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이후 집에 와서도 그의 전축에서는 찔레꽃 노래만 종일 나왔다. <찔레꽃>은 할머니가 생전에 자주 듣던 유일한 노래란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라는 가사다. 그리고 가끔 한국 노래 CD를 사러 갔는데 루치아노 파바로티 노래를 듣고 웅장함에 매료되어 성악공부를 더 열심히 하여 전설의 카루소처럼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귀국해서는 예식장 등 닥치는 대로 노래를 불렀으나 전 재산을 소속사에 사기를 당했다. 이후 물탱크 청소 등 궂은일을 하며 라면 하나로 이틀을 버티며 살았다. 그러다 지난 3월 종편에 방송된 트롯 서바이벌 미스터 트롯에 출연해 4위에 올라 유명세를 치렀다. 그는 출연 당시 성악가 출신인 점 등이 화제가 돼 트롯과 성악가 파바로티를 합친 트바로티라 불리며 출연자 중 최고의 주가를 올렸다. 성악을 하다 트롯을 부르려니 부단한 노력을 했으리라. 지금은 스승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성공하여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불우한 과거를 씻어가는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입대도 미루며 영화도 두 번 찍었으니 반가운 일이다. 얼마전 종편 콜센터 신청곡에서 60살 가까이 된 아줌마가 오빠라며 환호할 때는 웃음이 나오면서도 흐뭇하기까지 했다. 또 한 청년은 취업의 고민 중 그의 노래를 신청해 듣고 위로를 받았다. 베트남에서 온 여자 암 환자는 그의 노래를 들으면 기적이 일어날 것 같다고 좋아했다. 이제는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안 계시지만 전국노인복지관에 1억 원 상당 손 소독제를 기부하였다. 음원 수익금으로 돌아가신 할머니의 사랑을 잊지 않고 선한 마음으로 기부한 것이다. 항상 인사 잘하고 남에게 박수 받는 사람 돼라. 남에게 욕먹지 않는 사람 돼라는 할머니의 유언을 되새기며 살아가는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 임영희 수필가는 전북백일장에 시가 당선되어 문학에 입문해 대한문학 수필로 등단했다. 현재 전북문화해설사로 근무하고 있으며 이야기할머니로 유치원 봉사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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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13 16:29

아, 이런 정신머리- 임석재

임석재 이게 어디 갔지? 분명히 수첩과 함께 샤프연필과 볼펜을 넣었는데 연필이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우선 볼펜으로 조경업자와의 상담내용과 조감도를 그려 놓았다. 내가 찾는 샤프연필은 본체가 노란 플라스틱으로 두껍고 견고하다. 그래서 들고 쓸 때는 묵직한 느낌이 나서 즐겨 쓰는 필기도구이다. 또한 쓰고 지우기도 쉽고 부드럽고 진하지 않은 색깔이 거부감을 주지 않아 십여 년 넘게 써온 것이었다. 다시 기억을 더듬어본다. 가방 속에 숨었나? 가방 속의 물건을 다 꺼내고 찾아보아도 없다. 그렇다면 처음에 챙겨 넣으면서 바닥에 흘린 것인가, 아니면 산소 입구에서 수첩을 꺼내면서 빠졌을까? 딱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요즘 들어서 실수가 더 잦아졌다. 지난 봄에는 그동안 오래 써온 안경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맘먹고 좋은 것으로 장만한 것이라 금전적인 손실도 크지만 어디서 잃어버렸는지가 생각나지 않는 것이 더 문제였다. 운동을 하면서 벗었다가 다시 쓰고 물리치료실에 와서 양복의 안주머니에 넣어 둔 것 같은데 확실하지 않았다. 다시 되짚어 차 속을 찾아보고 그날의 족적을 되새기며 추적을 해 보아도 허사였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더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늘 끼고 다니던 반지가 없는 것이다. 거실에 앉아 있다가 문득 손가락이 허전하여 바라보니 왼손 약지에 반지가 없어졌다. 혹시 지갑 속에 두었나 하고 안방 탁자 위 지갑을 급히 찾아보았다. 그 지갑은 아내가 헝겊으로 만들어준 손지갑이다. 검은색 테두리에 갈색과 노란색을 한 줄씩 넣어서 바느질로 꿰맨 퀼트 작품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가죽으로 된 지갑을 가지고 다니지만 나는 아내의 사랑어린 이 지갑을 애지중지 한다. 돈을 지불하러 지갑을 꺼내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지갑 속 종이봉투 속에서 돈을 꺼내면 실소를 짓는 사람도 있다. 쌈지 같다는 사람도 있고 너무 깔끔을 떤다고 하는 친구도 있다. 손지갑의 안쪽에는 옷핀을 꽂아놓았다. 이 옷핀은 쓸모가 많다. 반지도 끼지 않을 때는 이 옷핀에 꿰어 놓았었다. 손이 붓거나 일을 할 때는 반지를 빼서 두어야 하는데 잃어버릴까 염려되어 궁리한 것이다. 지갑 속의 카드며 명함 모두를 꺼내 보아도 없다. 아내까지 동원해서 탁자의 서랍 속이며, 내가 신문이나 TV를 볼 때에 자주 앉는 소파의 방석까지 들치며 찾아봐도 보이지를 않는다. 내 나름 언제나 잃어버리지 않으려 세심한 주의를 하였건만 이런 일이생기고 말았다. 아깝고 서운하고 아, 이렇게 정신이 없나 하는 자괴감(自愧感)에 더 가슴이 쓰렸다. 아내는 어딘가에 잘 두었지만 지금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위로하였다. 하지만 손에서 반지를 언제 뺀 것조차 기억이 나지 않다니 정녕 이것이 일종의 치매기가 아닌가 걱정도 된다. 그러다가 화장대 옆의 반지 상자를 보았다. <나의 반지 함, 잊어버리지 말자> 볼펜으로 또렷하게 쓴 글자들도 내가 한심한 듯 바라본다. 아, 나는 왜 이리 정신이 없을까? 내가 미웁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기억이 소멸되고 희석되어 가는 것은 지극히 정상인데도 내 탓이오.하고 가슴 칠 수밖에 없는 내가 싫다. /임석재 수필가 임석재 수필가는 김제금산초등학교에서 정년하고 대한 문학으로 등단을 했다. 전북문인협회, 행촌 수필 회원이며 현재 아람수필문학회 회장으로 있다. 수필집 <나, 또 하나의>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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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06 15:24

[금요수필] 인연

박귀덕 남편 따라서 병원을 갈 때 심심하면 암송하려고 가져갔던 신석정의 작은 시집이 화두가 되어 병실사람과 대화를 했다. 그녀의 고향은 전주라서 고향 사람, 그리고 동갑이라는 매개로 더욱 따뜻한 가슴을 열어주었다. 이후 짬이 날 때마다 자판기 커피를 나누었다. 그녀는 집이 얼마 멀지 않은 곳이어서 매일 외출을 했다. 그 때마다 필요한 물품을 부탁하기도 하면 도움을 주었다. 웃음이 멎은 병실에 생기를 주었다. 그녀의 남편은 어미가 물어다주는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새 처럼 둥지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고 거의 누워서 생활을 했다. 간혹 클래식 음악 소리가 침상 밑으로 흘러나올 뿐이었으며 외진이 있을 때만 일어나 모습을 보였다. 신석정 집안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뒤 선입견 때문인지 표지 모습과 닮아 보였다. 그 옆 침대에는 젊은 청년이 입원을 했다. 병색도 없는데 왜 입원했을까? 잠시 생각하다 잊었다. 다음 날 젊은이가 수술을 마치고 왔다. 젊은 엄마는 아들을 안고 자지마, 자지마.를 외치며 뺨을 때린다. 참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남의 일에 참견하기가 싫어 생각을 접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뺨을 때리는 엄마의 손은 멈춤 없이 계속되었다. 슬며시 옆으로 가서 청년의 침대를 들여다보니 창백한 얼굴로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수술을 했다지만, 얼굴이 유난히 창백하고 쇼크 상태였다. 나는 황급히 간호사실로 뛰어가 쇼크요. 하고 외쳤다. 간호사들이 곧바로 뛰어왔다. 교수가 오고 청년은 바로 수술실로 이송되었다. 재수술을 했다고 한다. 청년의 엄마가 그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청년은 아버지에게 자기 간을 이식해 주는 수술을 했다고 한다. 수술이 끝나고 아버지는 중환자실로 갔으나 아들은 건강해서 바로 입원실로 올라왔단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재우지 말라고 했는데 자꾸 자려고 해서 뺨을 때렸다 고 하며 혈관이 터져 출혈이 되는 줄도 모르고..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며 내 손을 꼭 잡고 고마워했다. 나는 괜히 쑥스러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아드님을 하느님이 보살펴 주신 것다.고 했다. 오래전 병원에서 쇼크 환자를 접한 경험이 있었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오늘 이 청년의 상태를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평소에 남의 침대를 잘 기웃거리지 않는 성격인데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 내 눈에 띄어 쇼크임을 직감하고 그 청년을 구한 것 참 신기하다. 간호사실 바로 앞방에 있게 해 준 것도 모두 청년과 무슨 연결 고리로 이어진 듯 조화로웠다.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은 하늘이 맺어준다고 했다. 그렇게 천륜으로 만난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간을 선뜻 내어준 청년이 기특했다. 그리고 그의 효성이 아름답다. 청년과 함께 입원해 있던 남편도 연이 맞는 의사를 만나 새 생명을 얻기도 했었다. 간이 나빠서 정기 진료를 받던 중 위내시경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간 진료를 하던 분이 왜 위를 검사해보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권유에 따라 위내시경 검사를 했더니 위암 초기였다. 바로 수술을 받고 완치를 했던 생명의 은인이었다. 비록 남편은 떠났지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여러 해 동안 알뜰하게 건강을 보살펴 준 의사 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다. 귀한 생명을 연장시켜 준 그분의 고마움을 품고 산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 이웃들과 어울려 사는 삶은 기적보다 소중하다. ◇ 박귀덕 수필가는 <수필과비평>으로 등단했으며 전북문인협회 부회장, 행촌수필 회장, 전북수필 회장, 수필과비평 전북지부장을 역임했다. 수필집 <삶의 빛, 사랑의 숨결>,외 2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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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30 17:35

[금요수필] 이토록 사람의 향기가 그리운 것은

안홍엽 꽃의 계절이 끝났다. 매화, 산수유, 개나리, 겨울 달빛보다 더 시린 목련꽃, 인동의 시간들을 견뎠던 만큼 봄꽃들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어느 땐 바로 가까이 피어있는 꽃들도 그냥 지나칠 때가 많지만 봄의 꽃들은 그럴 수가 없다 이제 봄꽃의 향연은 끝나고 세상은 여름 꽃으로 단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코로나의 습격은 축제의 마당을 통곡으로 바꾸어 버렸다. 아름다운 봄꽃 향기가 온 누리에 기득해야 할 계절에 온 세상을 악취로 뒤덮여버렸다. 거기에 축제마당을 종횡으로 헤집고 다닌 사람들의 못된 짓거리들은 꽃의 향기를 뒤덮을 만큼 악취를 풍겨놓았다. 꽃의 향기가 제각각인 것처럼 사람들의 향기도 마찬가지여서 세상을 즐기리라 오해를 했다. 요란한 소리 없이 고요한 향기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가는 봄꽃처럼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절규했다. 그런데 봄의 축제도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코로나는 인류의 생명뿐만 아니라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끊임없는 위협을 하고 있다. 주연과 배역이 바뀐 정치권은 백성의 아픈 곳, 가려운 곳이 어디인지를 애써 모른 체 하려는 듯 가증스럽다. 승자의 저주는 하늘을 찌르고 패자의 갈등은 날이 새도 마찬가지다. 방법이 없어 민주주의는 선거라는 제도를 아쉽게 채택했다지만 차라리 이럴 바에야 선량한 독재자를 찾는 것이 오히려 이상적이지 않을까 하는 가설까지 생각하게 한다. 명색이 민주주의를 품고 살아 온 사람들이 오죽하면 이런 한탄스러운 푸념을 했을까. 언필칭 우리는 경이롭고도 놀라운 나날들 속에 살아왔다. 진실한 꿈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라는 광고 카피나 사랑스러운 세계를 원하거든 네 적을 포함해 모든 것을 사랑하도록 하라고 권고한 간디의 말을 되새겨본다. 어차피 함께 만들어가에서 진실해 보이고도 싶고 모두를 사랑하고도 싶지만 반복되는 배반의 세월을 어떻게 추스려야 할까? 최인호는 우물 안 개구리는 대해(大海)가 있음을 모른다는 속담도 있지만 용서를 애원하는 자도, 해야 할 자도 진실함도 사랑함도 모두가 사람이 해야 될 일인데 사람들끼리 잘 못 만나 봄꽃 향기도 날려버리고 봄의 축제도 흥이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모두 우물 안 개구리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향기로운 사람들을 만나 그 향기에 포근히 안기고 싶어 한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오순도순 만들어가는 세상이 이상향이다. 이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공동 작업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좋은 세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러한 좋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 했다. 어쩌다 우리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가 참 꿈같고 기적 같다. 석유 값이 물 값 보다 싼 이상한 세상을 살아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꽃 보다 더 진한 향기를 풍긴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 향내는 가시지를 않는다. 꽃은 향내가 없어도 자태가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꽃으로 행세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애써 향내를 버리려 해서 안타깝다. 죽어서 이름을 남기려는 그 이름은 다름 아닌 꽃의 향기와 같은 것이다. 꽃의 향기보다 더 진한 사람의 향기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다. 지난 총선에서 우리는 300명의 대리자를 뽑아 황금빛 뺏지를 달아주었다. 그 뺏지의 뒷면에는 5000만 국민을 사람의 향내에 취하게 하라는 명령이 새겨져 있다. 그 향기를 기대해 본다. △안홍엽 수필가는 전주 mbc 편성국장을 역임했고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며 전북문화상 수상작가로 산문집 <사랑이 꽃비 되어>, <별과 사랑과 그리움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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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23 16:36

[금요수필] 잠자리

김세명 삼라만상이 약동하는 계절이다. 어디선가 향긋한 냄새가 알 듯 말 듯 스며든다. 산 계곡 숲속에서 은은하게 느끼던 나긋나긋한 푸른 향기다. 숲속은 포근하다. 저 나무들도 사람의 삶과 같지 않은가? 수종 간에 소리 없는 경쟁을 하며 아등바등 살아가지만 여유롭게 보인다. 자연도 오랜 세월이 지나다 보면 안정되어가는 숲으로 이루어지겠지.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묵은 이파리들이 팔랑댄다. 춤을 추듯 너울거린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반복되다가 한 잎이 허공으로 날아간다. 팔랑대며 팽그르르 돌다 덜어진다. 아름다운 환상이다. 언덕에는 찔레꽃이 피고 강변에는 물새들이 촐싹대던 어린 시절을 어이 잊을 건가. 그 시절 그리움이, 빛바랜 일기장 글씨처럼 흐릿해져 간다. 강가에서 물고기 잡기나 삼대에 거미줄을 감아 잠자리를 잡고, 자연과 벗하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내 고향 북고사로 가는 방죽가에서 왕 잠자리 암컷을 잡아 실로 다리를 묶어 바이~바이~하며 원을 그리면 그 말을 알아듣는지 숯 잠자리가 날아와 헐레(짝짓기)를 한다. 미물이지만 종족의 번식을 위해 계속 시도하는 왕잠자리들을 포획했다. 암컷을 향해 끝없이 도전한다. 잠자리 잡기에 해가는 줄 몰랐다. 잠자리는 7년간 유충으로 물벌레에서 잠자리가 된다고 한다. 사람은 왜 날 수 없을까? 하며 잠자리를 부러워도 했다. 나도 청년기를 지나며 사람도 미물과 크게 다를 바 없음을 깨달았다. 시련을 당하면 종족을 더 번식하는 것은 본능이다. 육이오 사변 후 베이비붐이 증명한다. 아이를 낳으면 저절로 자라는 줄 알았다. 제 복(福)은 타고 난다며 굶주리며 넘어져도 단련하며 활달하게 자랐다. 배워야 산다 며 인생의 완성을 위해 학문을 익히고, 우월감에 젖어 고아한척 이기심에 빠지지만 한치 앞만 바라볼 뿐이다. 생존경쟁을 위해 아등바등하며 사는 게 너무 처절할 때가 많았다.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다른 생물보다 사람이 우월하다고 단정 할 수도 없다. 요즘처럼 코로나19 미물에게 인류가 고통 받는 걸 보면 더욱 그렇다. 코로나 이후 모든 게 변했다. 빈부의차도 비 대면으로 종교의 패러다임도 위선으로 외면 받고 있다. 신천지도 극락과 지옥도 누가 가보았냐 돈을 벌기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런 말도 먹히지 않는다. 사람도 미물처럼 한 시절 맴돌다 종족을 번식하고 살다 때가 되면 간다. 천수를 누리기도 하고 불행을 당해 요절하기도 한다. 평탄하기도 하지만 직선과 곡선 원형을 그리며 물레방아처럼 돌고 돌며 생을 이어 간다. 철따라 꽃이 피고지고 신록이 우거지면 쉼 없이 생태계는 번식을 하고 모든 생물은 먹이사슬에 따라 나고 죽고를 반복한다. 누구나 그 대열에서 부귀공명을 누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잠자리 포획처럼 소용없다며 good bye~ 하는 게 삶이 아닐까 ? △김세명 수필가는 2001년 『수필과비평』지로 등단했으며, 전북문협과 전북수필 모악에세이 회원, 신아문예 작가회 감사, 수요반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저서로는 業(업), 청무성(聽無聲) 수필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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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16 17:18

잠자리- 김세명

김세명 수필가 삼라만상이 약동하는 계절이다. 어디선가 향긋한 냄새가 알 듯 말 듯 스며든다. 산 계곡 숲속에서 은은하게 느끼던 나긋나긋한 푸른 향기다. 숲속은 포근하다. 저 나무들도 사람의 삶과 같지 않은가? 수종 간에 소리 없는 경쟁을 하며 아등바등 살아가지만 여유롭게 보인다. 자연도 오랜 세월이 지나다 보면 안정되어가는 숲으로 이루어지겠지.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묵은 이파리들이 팔랑댄다. 춤을 추듯 너울거린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반복되다가 한 잎이 허공으로 날아간다. 팔랑대며 팽그르르 돌다 덜어진다. 아름다운 환상이다. 언덕에는 찔레꽃이 피고 강변에는 물새들이 촐싹대던 어린 시절을 어이 잊을 건가. 그 시절 그리움이, 빛바랜 일기장 글씨처럼 흐릿해져 간다. 강가에서 물고기 잡기나 삼대에 거미줄을 감아 잠자리를 잡고, 자연과 벗하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내 고향 북고사로 가는 방죽가에서 왕 잠자리 암컷을 잡아 실로 다리를 묶어 바이~바이~하며 원을 그리면 그 말을 알아듣는지 숯 잠자리가 날아와 헐레(짝짓기)를 한다. 미물이지만 종족의 번식을 위해 계속 시도하는 왕잠자리들을 포획했다. 암컷을 향해 끝없이 도전한다. 잠자리 잡기에 해가는 줄 몰랐다. 잠자리는 7년간 유충으로 물벌레에서 잠자리가 된다고 한다. 사람은 왜 날 수 없을까? 하며 잠자리를 부러워도 했다. 나도 청년기를 지나며 사람도 미물과 크게 다를 바 없음을 깨달았다. 시련을 당하면 종족을 더 번식하는 것은 본능이다. 육이오 사변 후 베이비붐이 증명한다. 아이를 낳으면 저절로 자라는 줄 알았다. 제 복(福)은 타고 난다며 굶주리며 넘어져도 단련하며 활달하게 자랐다. 배워야 산다 며 인생의 완성을 위해 학문을 익히고, 우월감에 젖어 고아한척 이기심에 빠지지만 한치 앞만 바라볼 뿐이다. 생존경쟁을 위해 아등바등하며 사는 게 너무 처절할 때가 많았다.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다른 생물보다 사람이 우월하다고 단정 할 수도 없다. 요즘처럼 코로나19 미물에게 인류가 고통 받는 걸 보면 더욱 그렇다. 코로나 이후 모든 게 변했다. 빈부의차도 비 대면으로 종교의 패러다임도 위선으로 외면 받고 있다. 신천지도 극락과 지옥도 누가 가보았냐 돈을 벌기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런 말도 먹히지 않는다. 사람도 미물처럼 한 시절 맴돌다 종족을 번식하고 살다 때가 되면 간다. 천수를 누리기도 하고 불행을 당해 요절하기도 한다. 평탄하기도 하지만 직선과 곡선 원형을 그리며 물레방아처럼 돌고 돌며 생을 이어 간다. 철따라 꽃이 피고지고 신록이 우거지면 쉼 없이 생태계는 번식을 하고 모든 생물은 먹이사슬에 따라 나고 죽고를 반복한다. 누구나 그 대열에서 부귀공명을 누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잠자리 포획처럼 소용없다며 good bye~ 하는 게 삶이 아닐까 ? 김세명 수필가는 2001년 『수필과비평』지로 등단했으며, 전북문협과 전북수필 모악에세이 회원, 신아문예 작가회 감사, 수요반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저서로는 業(업), 청무성(聽無聲) 수필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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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09 15:15

[금요수필] 내 손 안의 3종 세트

문경근 퇴직을 한 뒤 집안에서의 생활 비중이 크다보니 매일 나와의 거리가 가까워진 물건들이 있다. 요것들은 모양이나 크기, 색깔도 고만고만하여 지근거리에 두고 돌려가며 부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멀리하기엔 너무 가까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나와 같은 동병상련(同病相憐)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아마 수긍을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 손 안의 3종 세트라 부르는 휴대전화, 컴퓨터 마우스, TV 리모컨이다. 특히 요즈음 같이 코로나 19의 포로가 되어 방안에 갇혀있다 보니 손 안의 3종 세트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틈새를 노려 나 사이와 거리가 더욱 가까워져 한 몸이 된 듯하다. 이 들의 공통점은 일단 손아귀에 들어오면 그 기능을 손쉽게 발휘하여 내가 원하는 곳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 간편함과 신속함에 깜짝깜짝 놀랄 뿐이다.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은 이들은 내 손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생명체로 진화한 듯 나와 소통을 시작한다. 그러나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닌데도 습관적으로 그들에게 접근하는 경우가 잦아졌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과 거리가 가까울수록 짧아지는 나의 동선(動線)은 게으름으로 이어지며, 요즘은 오히려 주객이 전도되어 이들이 나를 부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내가 말로만 듣던 3차원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실감한다. 공간을 수학적으로 나눈 것을 차원이다. 1차원은 선(線)으로 앞과 뒤의 방향뿐이고 2차원은 면(面)이라 하여 1차원에 좌우 양면이 더 추가 된 것이라 하다. 그런데 3차원은 공간(空間)으로 2차원에 위, 아래의 높이라는 방향까지 더 해 진 것이니 이들의 지배가 시작 된 것이다. 내 손 안의 리모컨은 TV 프로그램을 자유자재로 옮겨 다닌다. 손가락 끝의 미세한 자극만으로도 별의별 정보가 쏟아진다. 거리는 두되 마음은 가까이하라는 자막이 흐른다. 옆에 항상 대기하며 언제든 부르면 냉큼 다가올 수 있도록 충실한 비서 휴대전화에 문자 도착 신호가 뜬다. 대면은 어려워도 마음의 끈을 놓지 말자는 지인의 연락이다. 휴대전화는 옆에 없으면 불안하고, 외출할 때도 마지막에 반드시 챙기는 필수품이 된 지 오래다. 그러다 무료한 시간이 흐를 즈음, 쓰다만 수필을 다듬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컴퓨터를 켜고 마우스를 움켜쥔다. 이 물건 역시 손아귀에 쏙 들어와서 톡톡 건드려만 주면 세상을 향한 문이 스르르 열린다. 나는 원고를 불러오기 전에 몸을 풀듯 잠시 인터넷 항해를 하는 습성이 있다. 인터넷이야 휴대전화로도 접속할 수 있다지만, 탁 트인 화면의 유혹을 떨칠 수가 없다. 그래도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쓸 때만은 온전히 내 심중의 사유가 작동하는 시간이다. 내 손 안의 3종 세트와 한참을 놀다 보면 눈은 침침해지고 어깨도 뻐근해 심심함을 달랠 겸 이들을 탁자 위에 나란히 놓고 아내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본다. 화면에 나타난 그들의 정지된 모습은 무심하고 냉정하다. 손만 내밀면 간편함을 즐기며 게으름에 빠지다 보니 이들 3종 세트가 애물(愛物)에서 애물(碍物)로 바뀌어 가고 있는 건 아닌지 가끔 걱정된다. 정보화 기기의 편의성이 타성이 되기 전에 3종 세트를 경계할 시점에 이른 건 아닐까. 하지만 이들과 애증(愛憎)이 깊어져 즉각 헤어지기는 어렵고 적당한 거리의 유지가 상책이 아닌가 싶다. 오늘도 그 적당함을 찾기 위해 밀고 당기는 밀당을 하며 내 의지를 시험 중이다. ◇ 문경근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공무원연금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정읍수필, 전북수필, 행촌수필, 전북문협 회원으로 있으며 수필집 학교 잘 다녀왔습니다외 1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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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02 17:22

[금요수필] 학산(鶴山)이 주는 행복

이우철 매일 아침 아내와 함께 학산을 오른다. 도시에 이처럼 갈 수 있는 산이 있으니 즐거운 일이다. 송정서미트를 지나 망태저수지에는 아침을 즐기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누가 돌보거나 가꾸지 않아도 철따라 옷을 갈아입는 산은 스스로 변화하면서 수천년을 이어온 전주의 심장이나 다를 바 없다. 중턱을 넘어가면 전주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보광재가 나온다. 교통사정이 열악했던 시절 완주 평촌사람들은 이 길로 전주까지 시장을 다녔던 곳이다. 촌부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지게로 짐을 날랐고 채소를 팔아 어려운 생계를 이어 갔으리라. 수레도 다니며 선조들의 땀방울이 어린 산길, 짐승이 우글거리고 강도들의 은거지이기도 했을 것이다. 학산은 학의 날개를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남고산을 줄기로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산의 지형은 아늑하고 평화스럽기 그지없다. 눈, 비가 와도 태풍이 몰아닥쳐도 방패막이가 되었고 예기치 않는 재해를 막을 수 있었다. 가까운 곳에 모악산이 있고 나들이하기 좋은 강천산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노년에 은퇴자들이 몰려드는 지역이다. 등산은 진땀을 빼는 한고비쯤 있어야 맛이 있다. 보광재에서 능선을 따라 오르면 깔끄막길이 나온다. 숨이 가쁘고 등짝에 진땀이 젖는다. 내려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뱃살을 줄이고 건강을 위하는 일이니 참고 견뎌야 한다. 때론 중단할까 돌아갈까 갈등이 앞서지만 어디 등산뿐인가.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그렇듯 그 고비를 참고 넘기면 내리막길처럼 순탄하게 풀려지기도 한다. 정상에 오르니 상쾌한 바람으로 몸은 날아갈듯 가벼워진다. 구구 욱구구 산 비둘기 울음소리는 정겹고, 보랏빛 철쭉꽃이 만발해 있다. 코로나 역병 때문에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오르내리지만 눈으로만 가볍게 인사를 한다. 어디 낙원이 별것이던가? 몸속의 묵은 찌꺼기를 땀으로 흘려보냈으니 보약을 매일 한 첩씩 먹은 셈이다. 아내도 제법 선수가 되었다. 처음엔 중간에서 내려가기를 반복했지만 이젠 쉬지 않고 정상까지 오를 수 있으니 장족의 발전이다. 혼자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가면 멀리갈 수 있다고 한다. 그간 묵은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니 좋다. 부부중 누구라도 건강하지 못하면 가정의 분위기는 불안해지기 마련이니 나이 들수록 함께 건강해야 한다. 능선을 따라 정수장방향으로 내려오면 소나무가 숲을 이룬다. 공기는 맑고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여유롭다. 도시에 살면서 어찌 욕심을 다 채울 수 있을까만 가까운 곳에 산이 있고 계곡에 물이 마르지 않으니 노후에 이만한 곳도 없으려니 싶다. 마음이 답답할 때, 글을 쓰다가 생각이 막힐 때 숲이 있고 훌쩍 떠날 수 있는 학산이 있어 행복하다. △이우철 수필가는 순창 출신으로 공무원으로 퇴직한 뒤 「대한문학」에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와 전북수필(부회장), 행촌수필, 순창문협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수필집 <나이 드는 즐거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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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25 16:25

[금요수필] 물 꺼!

양영아 희뿌연 모래바람 속에 한 여인이 그림자처럼 휘청거린다. 비쩍 마른 여자의 머리 위에 물동이가 버겁다. 맨발이다. 약 시오리는 훨씬 넘게 걸었다는 그 여인의 얼굴은 갈라져버린 대지를 닮았다. 식구들의 생명수를 이고 간다. 그곳도 예전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였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못된 지도자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가족도, 아름답던 주변 환경도 모두 잃어버린 시리아 난민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우물마다 시체가 버려지고 파괴된 건물더미가 물줄기를 덮어버렸다. 더 보려니 우울한 TV 화면만큼 내 마음도 우울해져 TV를 끄고 일어겄다. 그리고 머리도 식힐 겸 목욕탕으로 갔다. 그런데 수도가 고장인지 사람도 없는 자리에서 물이 철철 흐르고 있었다. 또한 그 옆 아주머니의 물도 계속 넘치고 있었다. 요즘은 절수기 설치로 잠깐 흐르다가 자동으로 닫히는데 그 아줌마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아예 고무줄로 고정해놓고 쓰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이 넘치니까 잠그면서 쓰자고 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심히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목욕탕 주인이냐고 시비조로 나왔다. 주인만이 물을 아껴야 하는지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목욕탕 풍경도 자세히 보니 가관이다. 너도, 나도 물이 넘치는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물새가 깃털 다듬듯 제 몸 가꾸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상큼한 오이는 천연재료로 공해가 없지만, 온몸에 도배하듯 바르는 저 유제품과 오일은 어떻게 될까? 끈적임을 씻어내려니 물도 엄청나게 쓴다. 그 더러움을 답싹 안고도 불평 없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는 저 물의 겸손을 우리는 과연 알고나 있는가.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물이 도랑물 같다. 물에 녹아 없어지는 물질이라면 괜찮지만 오염의 주범이 대부분일 텐데 문제다. 불편한 마음을 안고 탕 밖으로 나가려는데 젊은 여자 둘이 침을 튀기며 싸우고 있다. 샤워기 물을 시종 틀어놓고 목욕하는 여자를 보다 못한 간섭녀가 나무라는 중이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고도 소시민답게 돌아섰는데 그녀의 용기가 대단했다. 그래서 나는 밖으로 나가려는 발걸음을 돌려서 간섭녀의 역성을 들어 주기로 했다. 물 꺼! 당신 집에서도 이렇게 계속 틀어 놓고 써요? 샤워 시간 2분만 줄여도 24리터의 물이 절약된대요. 당신 손주들 십 리 밖에서 물 길어오지 않게 하려면 어서 잠그세요. 나는 갑자기 생긴 용기에 TV에서 보았던 풍경을 현실로 착각하며 한 수 거들었다. 막무가내의 나의 말에 대책 없는 듯 샤워녀는 옹알거리며 샤워기를 껐다. 그 의로 풀풀 날리는 흙먼지 길 위에서 비틀거리며 물 길어 오는 샤워녀의 후손이 클로즈업 되어 보인다. 아냐. 그래선 절대 안 돼. 이제 더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물동이를 이고 십 리씩 걷는 일은 없어야 해. 나는 목욕탕 문을 다시 열고 나서면서 샤워녀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물 꼭 잠그면서 써요! 바짝 얼어버린 샤워녀를 남겨두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맑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눈을 지그시 감는다. 마르지 않은 머리 위에 삼월의 햇볕이 참 따스하다. 물 꺼! 이 한마디에 겨울잠 자던 새싹 들이 해 맑게 웃거 손짓 하며 고개를 내민다. △양영아 수필가는 교직에서 은퇴하여 「대한문학」 수필 「표현문학」 시로 등단했다. 행촌수필문학회장, 꽃밭정이수필문학회장을 역임했으며 수필집<슴베>,<불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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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18 17:49

[금요수필] 석류꽃

박성숙 첫 수필집 <풀꽃이고 싶다>가 출간되어 책이 도착한 날이었다, 나는 이 책을 안고 맨 먼저 관음선원으로 달려갔다. 첫 번째 서명한 수필집을 부처님께 올리고 기쁨으로 일렁이는 마음을 다독이며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절에 당도한 때는 소나기가 한 둘금 지나간 뒤여서 무성한 나뭇잎에서는 그때까지 톰방톰방 물방울이 듣고 있었다. 사나운 빗줄기에 후벼 파인 마당 한편에서 꾸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스님은 무엇인지 열심히 줍고 계셨다. 가까이 가 보니 스님께서는 비에 떨어진 흙 묻은 석류꽃을 줍고 계셨다. 스님의 하는 양을 바라보고 섰던 나도 어느새 슬그머니 따라 앉아 산 모래알이 튀어 배긴 빨간 석류꽃을 주워 모았다. 스님하고 나는 깨알처럼 튀어 박힌 흰 모래알을 말끔히 털어내고 새악시처럼 고운 얼굴을 드러낸 석류꽃을 미륵님 앞의 돌상 위에 놓아 드리고 예배했다. 펄펄 살아 있는 생명을 끊어 헌화한 때보다 지면에 나뒹구는 흙 묻은 꽃을 주워 헌화한 일을 더욱 여법(如法)하게 여기시는 듯, 미륵님은 투박한 얼굴에 자애 넘치는 미소를 날리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그 정겨운 미소는 길고 긴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대문 안에 들어선, 돌아온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웃음 같은 편하고 푸근한 안도의 미소였다. 스님께서는 큰 비가 내린 뒤의 축축한 누기는 건강에 해롭다시며 차를 권하시었다. 분청사기의 작은 찻잔에 따끈한 작설차를 따라 주시며 귀하고 예쁜 막내 따님을 보시어 기쁨이 크겠습니다. 하시며 자그맣고 예쁘게 장정된 수필집의 출간을 축하해 주셨다. 그렇지, 3형제 내 아들이 배가 아파 출산한 육신의 아들이라면, 내 수필집 「풀꽃이고 싶다」는 영혼이 진통하여 가슴으로 출산한 정한의 딸이겠지, 스님께서는 작가들도 생각하기 힘든 표현을 너무나도 쉽게 말씀하셨다. 법당을 내려서서 돌아올 무렵에는 축축하던 누기도 어지간히 가시고 뜨락이 뽀얗게 말라 가고 있었다. 그리고 반질대는 이파리 사이에 종처럼 매달린 빨간 석류꽃에는 서편으로 기우는 저녁 햇살이 찰찰 넘치도록 고여 있었다. 뜨락은 고요하고 백화는 만발한데 석류 앞에 멈춰선 내 발길은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려야만 했다.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후미진 곳에 피어 있는 꽃. 나마저 보아 주지 않는다면 석류꽃은 조르르 눈물을 흘리며 더운 한숨을 토해낼 듯, 그렇게 애잔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장미처럼 화려하지도, 봉숭아처럼 애처롭지도 않으면서 그저 여염의 여인처럼 수더분한 꽃. 초롱한 깎지 속에 숨어서 빨갛게 빨갛게 달아오른 꽃. 장미가 부조하는 현대인의 사랑을 대변하는 꽃이라면, 석류는 여인의 조여 맨 가슴속 깊이 숙성된 생명의 엑기스와 같은 꽃이 아닐는지. 뜨거운 열정을 알알이 뭉치고 수줍은 숨결로 곱게 물들인 후. 견딜 수 없이 꽉 찬 순간 툭 하고 터져서 가슴을 열어 보이는 꽃. 석류꽃은 어쩌면 늦깎이로 등단하여 알알이 뭉치었던 평생의 정한을 이제서야 한 권의 수필집으로 툭 터져 내보인 내 가슴속 같은 그런 꽃이 아닐는지. △ 박성숙은 한국문인협회 전북지부에서 시 부문으로 문예사조에서 수필부문으로 등단했다. 시집 규화목 사랑, 붉은 꽃 지고 수필집 풀꽃이고 싶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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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11 16:53

[금요수필] 나의 단골 이발소

박광안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꼭 찾는 이발소가 있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이발소가 있었는데 요즈음은 미용실이 대행을 하고 이발소가 쇠퇴하는 새 풍속도 속에서도 아직까지 꿋꿋이 찾는 이발소다. 어서 오세요. 코로나로 다들 살기가 어렵다고 표정이 어두운데 그래도 사장님은 신수가 훤하십니다.이렇게 찾을 때 마다 반갑게 맞아준다. 의자에 앉으니 창문 너머에는 면도거품 같은 구름 지나가고 이발사는 하얗게 아침을 부풀린다. 어긋난 문틈에서 비어져 나온 삼색 싸인볼은 늘 시간을 제자리로 회전시킨다. 이십 년 단골의자에 몸을 기대면 초침처럼 가위를 째깍거리며 요즈음 어떻게 지내세요?라며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넨다. 예 코로나19라는 불청객이 찾아와 방콕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라며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지만 언젠가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방콕이라는 여행지라 불렀다. 그래요. 모두가 마찬 가지일 거예요?하면서 손은 여전히 비발을 한다. 20년이 넘도록 단골손님이 되어버린 이발와 나는 나이도 동년배로 농담도 허물없이 주고받으며 지내는 사이다. 그리고 더욱 정감이 가는 것은 서로가 장남이라는 가정에서의 역할에 공통점이 많아 통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단골이 되다보니 어디를 어떻게 잘라달라는 말 한마디 없이 의자에 앉아 머리를 내맡긴다. 그래도 이발사의 날선 가위가 몇 번 춤을 추고나면 헝클어진 머리가 잘 정돈이 된다. 오늘은 아침 일찍 서두른 탓에 바로 이발을 할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두어 시간을 기다릴 때도 있다. 기다리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생활의 정보도 얻을 수 있는 사랑방 역할도 한다. 이발사는 열일곱 살부터 이발을 시작하여 오십 여년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가위질을 얼마나 많이 하였던지 몇 년 전부터 팔이 아파 일주일에 한번만 쉬어야 하는데 두 번을 쉬면서 물리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외길 육십년이 가까우니 이발 회갑년 까지만 하고 끝내야겠군요.라고 하니 놀면 뭐합니까? 할 수 있는데 까지 해야지라며 손사래를 치더니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 숨을 쉰다. 그래도 젊었을 때 전성기에는 직원을 세 사람이나 두었어도 날마다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어서 천국에 가겠습니다.라며 찬사를 보내자 너털웃음을 지으며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이발을 하고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짧은 시간에 나를 새로운 얼굴로 변신을 시켜주어서 십년은 젊어진 것 같았다. 술 담배도 하지 않고 오직 성실하게 살아오면서 부모님을 평생 한집에서 모시다가 작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니 지금세상 보기 드문 효자, 열녀다. 그리고 그 고된 삶 속에서도 시간을 쪼개서 여러 사회단체에 봉사도 많이 하는 것을 보면서 그에게 머리를 숙인다.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이 이발을 하려면 미용실을 찾는데 나는 아직도 미용실이 왠지 불편하다. 미용실에 가면 남성들만의 특권인 면도도 할 수 없는데 이발소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라져가는 것들이 어디 이 뿐일까 만은 허름한 이발소가 품고 있는 진한 추억의 향기도 사라져 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시대변천에 따라 전통으로 내려오는 것이 사라지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일까? ◇ 박광안 수필가는 교직에서 정년퇴임했으며 <인간과문학>에서 신인상을 받아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다. 덕진문학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수필집 <연못가 새 노래>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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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04 17:33

[금요수필] 그래도 아직 잘 모르겠다

김덕남 생긴 대로 논다라는 말이 있다. 대체로 무언가에 순응적인 그런 뜻만 있는 것은 아니며 부정적인 상황에서 쓰이는 말투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아는 만큼 행한다는 뜻과도 상통하지 않겠냐는 해석을 해본다. 예술분야의 창작 활동은 타고난 소질과 재능의 바탕위에 숙련의 고통과 열정이 더해야 빛을 발할 수 있다. 문학도 예외일 수는 없다. 글을 쓰는 목적은 감동과 설득을 통해서 독자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이러한 힘은 바로 잘 갖춘 생김인데 그것을 위한 자양분이 될 수 있는 조건들이 있다. 그런데 나는 좋은 글을 쓰기에 적합하게 갖춰진 생김도 힘도 조건도 일천하다. 남들처럼 고전을 많이 읽기를 했나, 음악에 심취해 보기를 했나, 그림에 미쳐보기를 했나, 멋지고 우아한 춤에 빠져보기를 했나. 이런저런 핑계로 어느 것 한 가지에도 마음을 쏟지 못하고 욕심만 앞세운 시늉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황혼에 들어서 요즈음 쓰고 있는 글들도 다정다감한 끌림이나, 감미롭고 부드러운 미사여구의 문장은 꾸미지 못하고 무미건조하기만 하다. 이것이 본디 내 감성의 생김이라는 방증으로 생긴 대로 놀고 있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어려서 부터 애완동물을 길러 보고 싶은 애착이나 예쁜 꽃을 피우는 식물을 가꿔 보고 싶은 의욕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엄밀하게 말하면 예쁜 강아지나 꽃들을 외면할 만큼 냉혈한은 아니었지만 그런 전원적인 환경에서 자라지 못한 탓도 크다. 어찌했건 이렇게 척박한 가슴과 머리로 글 농사를 지어보겠다고 무모하게 덤볐다. 그러고는 기름진 남의 밭 수확만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가끔은 비록 취미삼아 쓰는 글이지만 꼭 이래야 하나?며 가슴이 아파 그만 내려놓고도 싶었다. 언젠가 귀한 분으로부터 목성균 선생님의 책 누비치네를 선물 받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글의 힘과 생김, 그 분만의 색깔을 참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글은 나의 수필 쓰기의 지침서였다. 나도 그의 글처럼 가슴을 울리는 좋은 글을 닮게 써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읽고 또 읽었다. 그런데 내 글이 에세이스트 최근호 <문제 작가 특집>에 실렸다. 문제 작가! 무엇이 문제라는 말인가? 설마 군대에서 말하는 관심 병사는 아닐 테고, 적어도 문학계에서의 문제라면 문학의 감각, 반향, 선풍 등을 뜻하는 센세이션을 일으킬만한 관심거리라는 좋은 쪽의 의미일 것이다. 내가 이런 문제 작가의 단 위에 섰다니 실로 나에게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특집의 특은 일반적인 것을 뛰어넘어 유별나게 돋보인다는 개념이다. 문제적 작가로 관심 대상이 되고 있으니 남다르게 특별히 새롭고 좋은 글을 써보라는 주문일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변명으로 늘어놓은 배경처럼, 내 힘이나 내 생김이 하루아침에 달라질지가 큰 고민이다. 여태 엉터리일 수도 있는 글을 써 놓고도 내 그릇이고 내 색깔이라며 뻔뻔했다. 5년 전, 에세이스트 신인상 무대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이제 특집작가의 반열에 세워졌으니 석사 학위 자격의 모자를 쓴 셈이어서 어깨도 무겁고 걱정도 크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참 기쁘고 특히 나의 멘토인 남편 앞에서 더 자랑스럽다. 그리고 이제 내친김에 박사 학위까지도 넘보라며 부추길 것이 분명하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쓰는 노력만이 그 해결의 답일 것이다. 앞으로 그야말로 문제작을 양산하는 문제작가가 되고 싶다. △김덕남 수필가는 초등 교장으로 정년하고 에세이스트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향촌문학 대상을 수상했다. 수필집 <아직은 참 좋을 때> <추억의 사립문>이 있으며 삽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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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28 17:17

[금요수필] 가고픈 농촌, 추억의 임실

최기춘 임실(任實)이란 명칭은알차고 충실한 열매를 맺는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어떤 국문학자는 임실을 순수한 우리말로 임들의 고장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내 고향 임실은 예로부터 맛과 멋 그리고 풍류가 어우러진 고장이다. 한편 전북지역에서 애국지사가 가장 많은 충효의 고장으로도 널리 알려지고, 박사들이 많이 배출 되었다하여 박사골로 불린다. 이러한 임실에 1964년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위해 부임한 벨기에 지정환 신부가 가난한 임실의 농부들을 돕기 위해 산양 두 마리를 보급한 것이 국내 치즈 역사의 첫 발자국이 되어 우리나라 최초로 치즈 제조가 시작된 곳이다. 하지만 요즈음 농촌은 산업화의 물결 따라 도회지로 몰려가 예전 같지가 않다. 아기들의 울음소리, 젊은 아낙들의 웃음소리가 멈춘 지 오래며 먹고 살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싱그럽고 풋풋했던 자연환경도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다. 동네 고샅도 시멘트로 덮여있고 도랑마다 쓰다 버린 농약병이나 폐비닐로 많이 오염되었다. 마을 앞을 흐르는 개천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가재나 미꾸라지, 송사리 같은 작은 물고기들을 구경하기란 옛날이야기다. 이러한 시점에서 임실군 심민 군수는 앞으로 행정과 주민 협의체를 중심으로 깨끗하고 살기 좋은 농촌 환경 가꾸기를 통해 농업인의 삶의 질 향상 및 <오고 싶고 찾고 싶은 농촌 마을>을 만들겠다고 밝히고 유관기관과 이장협의회, 부녀회를 비롯한 모든 주민들이 협의체를 구성하고 연차적 활동계획을 세워 지속적으로 야심차게 추진한다고 한다. 우선 폐비닐, 폐농약병 수거와 하천과 마을 안길 정비 등 손쉬운 일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부터는 꽃 심기, 태양광 조명 설치 등 경관 조성사업을 추진한 결과 운암 상운 마을과 임실 정월 마을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마을의 환경이 깨끗하고 길가 언덕과 가로수 밑에 심은 꽃 잔디가 화사하게 피어 장관을 이루는 등 가고픈 농촌 만들기 사업이 해를 거듭할수록 튼실한 꽃을 피우고 있다. 요즈음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다 보니 사람들이 많이 답답해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국민들은 이 사태가 지나고 나면 제일 하고 싶은 일이 우리 국토사랑 여행을 하고 싶다는 설문조사가 있다. 코로나를 계기로 여행 패턴도 많이 변하고 있다. 떠들썩한 유명 관광지를 찾는 것보다 한적한 농촌, 잘 가꾸어진 둘레 길을 걷고 농촌의 맛 집을 찾아 고유의 음식을 먹으며 여유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아 졌다. 임실군은 때맞추어 <가고픈 농촌 만들기 사업>을 조성하여 고샅마다 들길 마다 낯익은 꽃들이 반겨주고 냇가에는 피라미 송사리 다슬기들이 어서 꾀 벗고 들어와 추억 속을 첨벙대보라고 손짓을 하니 얼마나 선경지명이 있는 사업인가? 나는 지난 일요일 아내와 함께 운암 상운 마을에 갔다. 동네 주변 길가와 가로수 밑 언덕에 심은 꽃 잔디가 활짝 피어 온 동네가 꽃으로 가득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성미 급한 도시민들이 많이 찾아와 조용하던 농촌이 활기를 되찾은 느낌이었다. 낯익은 둘레 길은 안전하고 걷기 편하게 잘 만들어져 노소가 마음 놓고 다닐 수 있었다. 발길닿는 곳마다 눈길이 머문 곳마다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자연의 싱그러움과 꽃향기에 취하여 아름다운 추억을 한 아름 담으며 아, 내 고향 임실이 오늘 따라 더욱 좋다. △최기춘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수필집 〈머슴들에게 영혼을〉이 있다. 대한문학작가회, 영호남수필 회원이다. 전북수필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임실문학회 회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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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21 18:48

[금요수필] 이팝꽃 가로수 길

박동수 이팝꽃은 작다. 단순하다. 작고 단순하지만 뭉치면 흰 눈송이를 이룬다. 봄에 하얀 눈송이를 이고 있는 이팝나무는 이색적이다. 그런 이팝나무 가로수 아래를 걸으면 마음이 정갈해진다. 눈송이 같은 하얀 이팝꽃 색깔 때문이다. 봄이면 이팝꽃으로 유명한 곳이 많다. 전주 팔복동 공단에는 이팝꽃으로 우거진 터널이 있다. 그 터널 속으로 철길이 놓여 있고, 하루에 한 번씩 빨간색 화물 기차가 다닌다. 공장 간 화물을 실어 나른다. 그 터널에 가면 하얀 이팝꽃들이 바람에 손을 흔든다. 빨간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보라고 한다. 이때쯤 나는 지리산 아래 카페 이팝에 가고 싶다. 7년 전 산청 한방약초축제에 갔다가 들른 곳이다. 전날 밤늦게 도착해 산 아래 펜션에서 아침 늦게까지 자고 카페에 가서 넓은 창으로 청명한 가을 풍광 속에서 그림같이 다가서는 지리산 천왕봉을 올려다보면서 갓 구운 토스트와 커피로 가을 아침 지리산 아래의 한기를 밀어냈다. 이팝나무 줄기와 가지를 단순화시킨 그림 옆에 작은 글씨로 카페 이팝라 적힌 간판이 벽에 붙어 있는 크지 않은 카페는 참 정겨웠다. 게 다리 모양의 천장 등에 포도가 그려진 도자기 천장 등갓, 창가의 크고 작은 화분들, 긴 탁자와 깔끔한 의자, 벽에 걸린 오래된 벽시계, 장식장 속 장식용 술병, 그림이 그려져 있는 접시 몇 개, 그리고 꽃병에 꽂힌 노란빛과 붉은색이 잘 섞인 장미 다발. 나는 넓은 창가에 앉아서 꽃 그림이 그려진 커피잔으로 커피를 마시면서 베란다 넘어 도로 양쪽에 줄지어 서 있는 이팝나무를 바라봤다. 그때는 가을이 무르익는 10월, 물론 이팝꽃은 없었다. 그러나 내년 봄에는 눈꽃처럼 하얗게 핀 이팝꽃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내년 봄에 꼭 와봐야겠다. 그 가을 동의보감촌에서 열리는 한방약초축제에서 허준 길도 걷고, 약초 족욕도 하고, 한방약재관도 관람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한방약초축제보다는 지금도 나는 카페 이팝만 생각이 난다. 지금쯤 카페 옆 도로 이팝나무 가로수들은 하얀 이팝꽃을 실 지게 피워내고 있을 것이다. 벌써 그곳에 간 지가 7년이 지났다. 그런데 지금까지 다시 한 번 가지 못했다. 가을 아침 카페에서 갓 구운 토스트와 커피로 지리산 아래 한기를 같이 밀어냈던 친구와 함께 다시 한 번 그곳에 가고 싶다. 우리는 7년 전에 다음 해 봄에 같이 오자고 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서울 살고 나는 시골 살기 때문에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지리산 아래까지는 멀기도 해서 지금까지 다시 가지 못했다. 지금 지리산 천왕봉 아래 카페 이팝에 가면 넓은 창가에 앉아서 하얗게 눈이 쌓인 가로수 이팝꽃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저녁나절에는 베란다에 앉아서 지리산을 타고 내려오는 저녁노을과 가로등 불빛 속에서 흰 눈꽃처럼 빛나는 이팝꽃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하얀 꽃을 이고 있는 이팝나무 가로수 아래를 천천히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봄 이팝꽃이 지기 전에 그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 한번 해야겠다. 이팝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란다. 올해는 정말 오랜만에 우리 시간을 내서 지리산 아래 이팝꽃 가로수 길을 함께 걸어보자. △박동수 수필가는 한국문협 월간문학으로 등단(82),현재 한국문협 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수필집 수염을 깎지 않아서 좋은날 등 6권, 전라북도문화상(학술)과 전북문학상등 문학관련상 다수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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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14 17:20

[금요수필] 행복을 찾아서

박경숙 친구가 곧 산골로 이사를 한다. 그곳에 학교를 짓고 싶어서란다. 20여 년의 의사 생활을 그만두고 가족 모두 떠난다. 그녀를 만나 왜 그런 선택을 했냐고 물었다. 그녀는 더 행복하고 더 재미있게 살기 위해서라고 했다. 은행 융자는 많이 걱정 되지만 더 늦기 전에 소외 된 이들과 더불어 나누고 공감하며 살기 위해 용기를 냈다고 했다. 학창 시절 괴짜라는 소리를 듣던 친구다. 가진 게 별로 없는 고학생이면서도 오페라를 즐겨 찾았다. 낮에는 아르바이트하고 밤에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한 뒤 야학을 같이했던 선배와 결혼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는 가약佳約이었지만 부부는 여전히 깨가 쏟아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인간은 행복해지려고 산다.는 어느 문화심리학자의 글이 떠올랐다. 그의 말에 의하면 행복은 하루 중에서 기분 좋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나는 많이 웃고 재미나게 사는 삶이 행복이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은 거창한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닌 이른 아침 구수한 된장국이나 오후의 산책처럼 소박해야 한단다. 침대에 하얀 시트 깔고, 호텔식 샹들리에로 조명을 바꿨을 때 느끼는 행복. 그 행복을 얻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 뒤 월급봉투를 포기하고 아내로부터 하얀 침대 시트를 얻어냈다고 한다. 비우면 맑아지는 걸까. 주변을 돌아보면 행복한 사람들은 소소한 일상에서 확실한 행복을 찾는다. 항상 스스로에게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할 수 있을까를 묻는다. 그 물음을 통해 구체적인 답을 얻고 실천한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까. 어떡하면 유명세를 탈까에 집착하지 않는다. 행복을 얻기 위해 기존의 것을 버리고 용기 있게 선택한다. 며칠 전, TV 인간극장 프로그램에 대기업에 다니다가 명퇴한 50대 남자가 나왔다. 그는 지금까지 좀 더 높은 보수와 더 많은 여가가 주어지는 직장으로 끊임없이 옮겨 다녔다고 했다. 그런 어느 날 퇴근길 쇼윈도에 비친 자기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더란다. 영화 관람과 소설책을 좋아했던 그 소년은 어디로 갔을까? 어렵게 취직한 직장에서 청춘을 바쳐 치열하게 살았지만, 어느새 중년이 되고 말았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도대체 행복한 인생은 언제 시작 되느냐며 성공해야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해야 성공한 것이라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 책상에는 어느 해 가을, 우리 가족이 고창 선운사로 소풍간 사진이 놓여 있다. 사진 속의 나는 파란 줄무늬 원피스에 흰 모자를 쓰고 두 아이를 꼭 껴안고 있다. 초등학생 딸아이는 내 손에 턱을 괴고 유치원생 아들은 사진 찍는 아빠를 향해 찡끗 윙크를 날린다. 나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도시락을 싸고 새우튀김을 만드느라 밤을 꼬박 새워도 행복했다. 꽃무릇 양탄자가 깔린 숲에서 김밥을 먹다가 사진기를 잃어버려 일회용 카메라로 찍으면서도 좋았다. 나는 그때 별것도 아닌 일에 참 많이 웃고 즐거워했지만 그것이 행복인 줄 몰랐다. 새봄을 맞아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더 재미있는 삶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수첩에 적어보려 펜을 든다.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펜을 드니 적을 게 없다. 달빛이 창에 비쳐 방 안이 환하다. 머리맡 창문을 활짝 여니 미풍이 건들거린다. △ 박경숙 수필가는 <계간수필>에서 등단하였다. 전북문인협회와 행촌수필, 영호남수필, 계간수필문우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전북수필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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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23 15:45

[금요수필] 꽃물

최정순 4월 어느 날, 그날 아침엔 까치도 울지 않았는데 아무런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꽃물이었다. 7형제의 무녀리인 나는 초등학교시절에 툭하면 두드러기가 솟고 추악(학질)을 앓아 키니네를 입에 달고 살았다. 핼쑥한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퍼져 까칠했고, 목은 가느다랗고 종아리는 새 다리였다. 거기다 먹성조차 까다로워서 밥상에 앉으면 콩을 가려냈으니 그 꼴이 어떠했을까. 그저 눈만 커서 눈보라 부르게 된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여자는 모름지기 둥근달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서 때로는 초사흘 달처럼 야릿하게 핏기 없는 핼쑥한 얼굴이 더 예쁠 때도 있다. 어느덧 허약했던 내가 여중생이 되었다. 교복은 아예 3년 동안 입을 요량으로 크게 맞춰서 버마재비 폼에 운동화는 늘 논흙이 묻어 있었다. 어설픈 시골뜨기 여학생이었지만 새끼줄에 매달린 오뉴월 오이처럼 하루가 모르게 달라졌다. 젖가슴은 몽실한 망울이 생기고, 볼기와 새다리도 살이 토실 올랐다. 갸름한 얼굴에, 귀 밑에는 명주털이 보송보송 돋고, 속눈썹은 꽃술처럼 피어났으며, 복숭아 빛 볼에 발그레한 입술사이로 드러난 이가 유난히도 반들거렸다. 하얀 깃을 단 까만 교복차림이 물 찬 제비처럼 S라인을 만들어 갔다. 더욱 두드러진 것은, 생각과 행동이 몸을 따라 나선 것이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 아름답고 멋스런 것을 알고, 때로는 내숭도 떨었다. 그리고 이성에도 조금씩 눈을 떴다. 성적이 떨어지면 창피해서 더 열심히 공부했고, 부끄럼을 타서 혀를 날름거리는 버릇도 생겼었다. 요 밑에 깔아 주름을 잡은 바지를 입고 애교머리로 멋을 부렸으며, 손수건, 손거울, 빗은 가방 속에 항상 챙겨가지고 다녔다. 옆집에 멋진 남학생이 하숙을 하고 있었다. 우물가에서 양말이나 손수건을 빨고 있으면, 그 집 대청마루에서 영어책 읽는 소리가 춘향골 이 도령의 사서삼경 읽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래서 내 딴엔 영어단어도 열심히 외웠고, 오락시간엔 영어노래로 인기 좋던 여고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내 나이 열다섯 살 때였다. 어느 날 꽃물이 툭! 터지던 순간, 심장이 뛰고, 땅이 진동하고, 태양이 곤두박질쳐 눈앞이 캄캄했다. 반세기가 흘렀는데도 잊혀 지지 않는다. 느닷없이 불쑥 찾아온 손님 때문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행여 누가 알까 싶어 골방구석으로 도망가 두려움에 떨었다. 내 옆엔 할머니도 계시지 않았다. 내 문제는 나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경험했었다. 그해 4월의 봄은 나에게 가혹하리만치 잔인했다. 내 살갗을 찢고 화산처럼 치솟은 꽃물, 꽃물이 찾아왔을 때 비로소 나는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마땅히 축복받아야 할 일이었을 텐데 왜 그리도 부끄럽고, 창피하고 두려웠던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제 꽃물은 내 곁을 떠났다. 꽃물, 너를 보내고 나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순장(殉葬)이라도 하고 싶었다. 우리는 28일을 주기로 40년이란 세월을 같이 보냈다. 그런 너를 내가 어찌 잊으랴! 견디다 못한 나머지 에스트로겐이란 친구와 사귀어 봤지만 첫정인 너만 했을라고. 너도 나를 못 잊어 초사흘 달이 되어, 보름달이 되어, 싸늘한 새벽달이 되어, 어느 땐 구름에 가려진 낮달이 되어, 너의 넋은 내 곁을 지금도 맴돌고 있지 않느냐. 우린 비록 떨어져 있지만 내 목숨 다하는 그날까지 너는 내 마음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으리라. △최정순 수필가는 종합문예지 《대한문학》 수필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속빈 여자>를 출간했고, 제7회 행촌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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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16 18:20

세계가 한국을 배운다 - 이종희

이종희 수필가 지금 세계는 전쟁보다 더 무서운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 독일은 한국에게 코로나19 대응 및 협력방안을 협의하고 싶다며 방문을 요청을 했다. 그러나 국내 상황이 엄중하니 화상회의로 대체하자고 제안했다. 독일은 한국의 광부와 간호사 등 인력수출을 받아들이며 우리 경제성장을 견인한 선진국이다. 이런 나라가 수혜국인 한국에게 코로나19의 대비에 한 수 배우겠다니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요즘 우리 대통령은 G20 정상회의를 비롯한 세계정상들과 국가 간 코로나19 대응방안에 대한 공동선(共同善)을 모색하는 외교활동으로 매우 바쁘다. 국가 봉쇄를 선언했던 모로코가 우리 교민을 싣고 와서 의료품을 싣고 간일이나, 꽉 막혔던 베트남 총리와 협의를 통해 우리 기업들의 난제를 해결해 주기로 약속받았다. 이 모두가 코로나 19에 대한 선제적 대응으로 확진자를 최대한 줄인 우리의 성공적 사례를 높이 평가하여 국가의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코로나 발생의 초기부터 우리정부는 유증상자들에게 진단키트 검사를 통해 양성 판정을 받으면 중환자는 음압병실에 입원시키고, 음성 판정자들은 정부에서 마련한 집단시설에 격리시켜 2주 이상 상태를 관찰하며 2회 이상 검사결과 이상이 없으면 격리를 풀었다. 이처럼 철저한 격리만이 감염 전파를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더불어 감염환자의 진원지와 감염자가 이동한 경로를 추적하여 추가 감염 확산 방지에 힘을 기울였다. 경로를 추적하던 중 최대 확진 자가 발생한 대구신천지교회를 찾아낸 이후 4월 3일부터 현재까지 감염의 80%를 차지한 대구, 경북을 긴급재난지역으로 선포하였고, 국회에서 추가경정예산이 통과되어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이제야 끝이 보이는 듯하다. 특이적 양방향 신장 유전자 증폭기술(SBDE-PCR)을 이용한 DNA 분자진단키트로 희박한 양의 바이러스로도 코로나19 확진이 가능했다. 이러한 정밀 의료기술은 해외에서 수입 주문이 폭증하고 있을 정도다. 또, 세계가 인정하는 우리 IT기술이 휴대폰에 앱을 깔아주어 발열증세 등 자가진단 프로그램으로 방역당국이 인지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도입되었다. 자동차를 이용한 드라이브스루 역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등 한국인의 우수성이 빛나고 있어 침체된 요즈음 삶에서도 가슴이 뿌듯하다. 정부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초기대응이 잘못되었다며 비아냥거리던 무리들의 주장이 무색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맡겼으면 코로나19 사태가 이미 종료되었을까? 국내 상황이 어려우면 함께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국민의 도리일 텐데 사사건건 트집만 잡는 행태는 언제까지 계속 될까?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나 일본 아베 수상도 초기 한국의 방역대응을 비웃었다. 그런 그들의 지금 상황은 어떤가. 언론에서 과학자들이 한국의 대응을 옳았다고 해도 오만과 자존심에서 갇혀 선뜻 따르지 않던 그들은 지금 국민들에게 뭇매를 맞으며 한국을 배우라고 하고 있다. 개인이 아닌 국가나 사회, 또는 온 인류를 위한 마음이 공동선이다. 정부에서 접촉차단이 최선의 방역이라는 의지로 학교, 종교시설, 사회복지시설에 사회적 거리두기 실천을 마지막으로 호소하고 있다. 내 삶이 답답해도 참고 따라 주다보면 멈출 날이 앞당겨질 것이다. 소극적 대응으로 확산세가 급증하는 나라들을 거울삼아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의 힘을 보여줄 때다. /이종희 수필가 △이종희 수필가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하고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을 했으며 은빛수필문학회장을 역임했다. 수필집 <여행 & 힐링>외 2권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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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09 15:17

쪽진 머리 -김종윤

김종윤 친구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고향의 부모님 집에서 잤다. 요즘은 수도권에서 행사를 치르려면 관광버스를 대절하고 음식을 마련하여 축하객들을 모시는 것이 보통이다. 서울까지 가려면 일찍 출발을 한다. 아래쪽에서 빨간색 버스가 양쪽 방향지시등을 깜박거리며 올라오는 것을 보니 대절차가 틀림없었다. 차에 오르니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차에 올라서 인사를 하고 중간의 창 쪽에 자리 잡았다. 차가 출발하자 아주머니 한 분이 떡과 닭튀김, 귤, 땅콩 등이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하나씩 주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버스가 쉬고 몇 사람이 타는데 뒤에서 저 사람이 누구야? 하고 깜짝 놀라는 것이다. 모자를 쓰고 옅은 색안경에 하얀 수염이 수북하니 못 알아보았다. 한 마을에 살다 소재지로 이사간 사람이었다. 그는 젊어서 기타도 잘치고, 노래도 잘 불러 멋쟁이였는데 그 모습이 달라진 것이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는 수염과 머리가 큰 영향을 준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의 머리모습이 변하면 마음도 변화가 있는지 의심해 보는 게 보통이다. 우리 어머니의 머리는 지금도 쪽진 머리다. 새마을운동을 하던 무렵에 파마머리를 권유해도 시집 올 때부터 그대로 쪽진 머리를 고수하고 있다. 주변에서 뽀글이 파마를 권장해도 오로지 쪽진 머리를 고수하는 것이다. 쪽진 머리는 깔끔하게 빗고 한복을 입어야 하는 제격이다. 바쁜 아침이나 머리를 감지 못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용한 경우도 있다. 가운데로 가르마를 타게 되면 깔끔하고 우아한 여성미를 느낄 수가 있다. 동생들이 어머니께 파마머리를 권해 보지만 한사코 거절하셨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미혼여성은 미혼남자와 마찬가지로 묶은 머리나 땋은 머리를 하고, 기혼일 때는 쪽진 머리나 얹은머리를 주로 하였다. 이 머리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볼 수 있는 머리모양으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를 지나 요즈음까지 우리나라 기혼녀의 기본형이다. 쪽진 머리로 남과 다른 머리 모습을 하신 우리 어머니에겐 일화가 있다. 명절이 돌아올 때 살구나무 밑 확독 옆에서 전을 부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전형적인 한국여인의 모습이라며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진사는 가면서 5천원 권 지폐 한 장을 주고 갔다. 그 뒤 그 사진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또 이끼 낀 돌담 옆 지붕위로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데 가을걷이를 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JTV전주방송에 나온 적도 있었다. 또 아버지 팔순잔치 때의 일이다. 저녁식사나 하자며 남매들과 조카들을 전주로 초대했는데 모인 김에 가족사진이나 찍자고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 뒤에 시진관 쇼윈도에 전시가 되어 4거리에서 신호대기 중일 때 쪽진 머리의 어머니를 볼 수가 있다. 열아홉 살에 부안 김씨 외아들인 아버지께 시집을 와 파마머리 한 번 못하고 쪽진 머리 아줌마 남동댁으로 팔순을 바라보며 살고 계신다. 방아실 거리 논에 무농약으로 쌀농사를 지어 보내 주시고 철마다 무와 배추, 고추, 쑥갓, 고수 등을 봉지, 봉지 싸서 마음을 담아 택배로 보내주신다. 어머니는 새댁 때부터 새벽마다 정갈하게 빗은 쪽진 머리에 은비녀를 꽂고 물을 길어다 부뚜막에 정화수를 떠 놓고 가족들의 무병장수를 비셨다. 젊어서는 군대 간 아들이 무고하도록 빌고 늙어서는 군대 간 손자의 무탈을 비셨다. 오늘 따라 쪽진 머리의 우리 어머니가 무척이나 존경스럽다. 평생 근면과 성실로 사신 어머니 덕에 오늘의 내가 있다. 쪽진 머리에 은비녀를 꽂은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늘도 나는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 김종윤은 장수군 출생, 산림조합에서 정년을 하였다.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하여 수필집 <시나브브로 가는길>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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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02 15:18

[금요수필] 삼라만상을 두루적시는 남고 모종

김정길 <남고모종>은 천년 고찰 남고사의 범종소리가 조선시대에 전주부성의 저녁노을을 갈라 울리며 삼라만상을 두루 적셨던 전주 10경의 하나였다. 기린봉 위로 휘영청 솟아오른 달, 전주천과 어우러진 한벽당의 정취, 저녁연기 피어오를 무렵 남고사에서 울려 퍼지는 철고소리는 옛 전주부성의 맥박처럼 느껴지는 풍취였다. 조선 선비들은 서녘하늘에 붉게 물든 낙조를 바라보며 남고사의 저녁종소리를 듣는 아름다운 승경을 즐겼다고 한다. 여기에 남고산의 어머니 산으로 일컫는 고덕산에 머물던 구름이 돌아온다ㄹ하여 고달귀운(高達貴雲)으로 묘사를 했다. 남고사는 창건 당시 고구려 연개소문이 도교를 도입한데 반발하여 명덕화상이 전주에 남고사를 세웠다 하여 남고연국사(남(南高燕國寺)로 불렸다. 그 뒤 남고사는 전주부성의 4대 비보사찰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견훤은 완산주(전주)에 후백제 도읍을 세운 뒤 도읍의 수호를 위해 동서남북에 동고진, 서고진, 남고진, 북고진을 두었다. 여기에 각 진마다 사방을 지키는 동고사, 서고사, 남고사, 북고사를 두어 외침을 막고자 노심초사하였다. 남고산성에 들면 탁 트인 전주시가지가 눈앞을 가득 채우고, 천경대, 억경대, 만경대가 버선발로 뛰어나온다. 만경대 남쪽바위 벼랑에는 고려 말 충신 정몽주가 쇠퇴해 가는 고려를 걱정하며 읊었다는 시가 새겨져 있다. 그 시에는 고려 말 이성계가 황산전투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전주 오목대에서 전주 이 씨 종친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베풀면서 장차 고려를 뒤엎고 조선 창건 뜻을 은근슬쩍 내비쳤다. 그 때 종사관으로 따라왔던 정몽주가 우국충정의 시를 읊었다. 천리바위머리 돌길 돌고 돌아/홀로 다다르니 가슴에 메는 시름이여/청산에 깊이깊이 잠겨 맹세된 부여국은/누른 잎 휘휘 날려 백제성에 쌓였 도다/9월 바람은 나그네 시름 짙고/백년의 호탕한 기상 서생은 그릇 쳤네/하늘가 해는 기울고 든 구름 마주치는데/열없이 고개 돌려 옥경만 바라본다. 언제 봐도 남고산성의 서문을 지키고 있는 남고진사적비가 듬직하게 여겨진다. 그 비문은 1846년 조선 현종 때 최영일이 글을 짓고 조선 후기의 명필이었던 창암 이삼만이 일필휘지했다. 남고산성은 <세종지리지>에 고덕산성, 임진왜란 당시 <선조실록>에는 만경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남고산성 축성을 완성한 전라관찰사 박윤수가 쓴 <만익주신건기>에는 남고산성과 동고산성이 서로 맞서서 돌부리가 솟아 만마동 40리 골짜기를 안고 있다는 기록도 보인다. 남고산성의 이름은 그 때 붙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 때 이정란 장군이 남고산성을 보수하여 왜적을 물리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남고사의 전방에 남장대, 후방에 북장대, 남장대 아래 서쪽 골짜기에 진창(진(鎭倉), 군기고, 화약고 등을 설치하여 1,500명의 병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남고사를 품은 남고산성은 후백제의 얼이 살아 숨 쉬는 문화유적의 보고다. 백제의 얼을 계승하려고 고심했던 견훤이 백제의 옛 땅 완산주(전주)에 후백제를 창업하고 전주부성의 수호를 위해 쌓았던 유서 깊은 유적이다. 그런데 전주에 살면서도 남고산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전주에 산재한 역사문화유산을 많이 찾고 사랑하는 것이 전주 사랑의 지름길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 남고산성을 더욱 아끼고 보존하며 사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 김정길 수필가는 전주상공회의소 기획관리실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영호남수필문학협회장으로 있다. 후백제 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고 있으며 <어머니의 가슴앓이> 등 다수의 수필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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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26 16:59

[금요수필] 물 위에 누워보기

이재숙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병원 물리치료실을 나와 400미터 떨어진 집까지도 걸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혀를 차며 수영이 최곤디 라고 말했다. 시작도 힘들었지만, 수영을 계속한다는 게 너무 힘들었다. 수영반은 기초반 초급반 중급반 그리고 고급반으로 나뉘어 강습이 있었다. 보통 3개월이면 월반이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쉬지 않고 수영 강습을 받았지만, 오랫동안 기초반을 벗어나지 못했다. 수영의 기본적인 동작인 물 위에 몸이 뜨질 않는 거였다. 발차기, 힘 있게 발차기, 엎드린 자세로 반듯이 눕기 이 동작이 모아지면 수영을 할 수 있다는데 일단 물 위에 몸이 뜨질 않는 거였다. 젊은 수영강사는 호루라기를 불며 힘을 빼란다. 힘을 빼면 뜬단다. 패드를 잡고 발차기를 할 수는 있다. 힘이 있어 가능한 동작이다. 하지만 패드를 잡지 않으면 배부터 갈아 앉고 물을 먹고 입과 코에서 물을 뿜으며 멈춰 서야한다. 힘을 빼세요 힘을 빼면 떠요 유급을 한 번 할 땐 눈칫밥이 없었다. 두 번째 유급을 결정할 땐 강사와 나는 물론이고 몇 명의 강습생들도 당혹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랬다 계속 패드를 잡고 발차기만을 할 수 없었다. 속도가 안 맞아 뒷사람에게 너무 피해를 주기 때문이었다. 나는 용기의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선생님 힘을 빼란 뜻을 모르겠어요. 힘을 빼면 쓰러지는데요. 살짝 망설이던 한 손이 수평으로 올라가더니 한번 누워보세요 수평으로 들렸던 강사 손이 등에 살짝 닿는다. 아 이렇게 힘이 들어가니 안되죠. 손을 저어보세요. 아 이렇게 손을 저으면 어떡해요. 힘을 빼고 하셔야죠. 전 수영을 못해서 여기 왔어요 그리고 선생님에게만 수영을 배웠는데요 왜 못할까요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했어요 아무래도 선생님이 잘 못 가르쳐 주시는 게 아닌가요? 내 나이가 얼추 수영강사의 큰어머니벌이니 당돌한 항의(?)에 꾹 참는 표정이다. 강사는 처음으로 내 배 위로 자기의 왼손을 가만히 갔다 댔다. 자 힘 빼고 누워 보세요. 아 더 아직도 힘이 들어갔어요. 힘 빼세요. 자 아주머니는 죽었어요. 죽은 사람 배에 이렇게 힘이 들어가나요? 온몸에 힘을 빼시고 힘 더 빼세요. 더 더 더 더 더 이렇게 쉬운 일이었다니 선생님 손 느낌에서 힘 빼기의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순간 몸이 가볍게 둥 떠오르는 느낌이 왔다. 사실 수영장에서 물에 빠져 죽기는 어려운 일이다. 죽자 하면 살고 살려고 힘을 주면 죽는 거였다. 진즉 이렇게 내 배와 선생님의 손이 맞닿았더라면 삼일이면 끝났을 일이 3개월도 넘어 이제야 힘 빼는 일이 완성되다니. 젊은 아가씨들이 수영을 빨리 익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무슨 이유였던 수영강사의 손이 나보다 빨리 그들의 몸에 닿았던 거였다. 힘 빼기는 그 후 나의 좌우명에 추가되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관용과 온화함, 그리고 애정을 잃어서는 안 된다. 관용과 온화함으로 애정을 기울이는 것. 그것은 몸과 마음에서 힘을 빼야 한다. * 이재숙 수필가는 전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으며, 제1회 국제해운문학상 대상을 받았다. 전주예술인상도 수상했고 시집 <젖은 것들은 향기가 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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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12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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