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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의 마술 상자 속에서 짠~하고 나온 작은 비둘기. 그 비둘기 같은 아이가 우리 집에 처음 인사 왔던 날은 여름으로 접어드는 가랑비가 가만가만 내리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아들 애 뒤에 선 작디작은 아이가 눈에 들어와 크지 않은 우리아들이 훤칠해 보일 정도였다. 그 작은 아이가 내년이면 우리 며느리가 된다. 그 며늘아기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와 절차로 조금은 번거롭고 바쁘지만 행복한 요즘, 몇 사람들이 며칠 전 이야기를 농담처럼, 혹은 진지하게 건넨다. 작은 문학상수상소감 마지막에 이름 끝 글자가 나와 같아 재미있게 자연스런 며느리 소개가 될 것 같아 이름을 부르며 예비시어머니 모습 어떠냐고 물을 때 당황하던 애의 모습을 유심히 보았던 때문일까? 어떤 이는 확실한 기선제압을 했다느니 며느리 잡는 것도 가지가지라느니 하면서 놀리기까지 한다. 그렇지는 않다. 나도 알 수 없는 내 맘 깊은 곳에 시어머니의 어떤 본능이 깔려있을지는 모르지만 이성으로서의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난 우리 예비며느리가 참 예쁘다. 작은 얼굴, 작은 키는 날 주눅 들지 않게 해서 좋고, 요즘 세상 흔 한 것이 박사라지만 그만큼 노력하고 인내해서 얻었을 그 자격이 자랑스럽다. 보내준 김장김치가 맛있다며 미안해서 내년엔 제가 담가보겠다는, 믿기지도 믿을 수도 없는 그 말이 어찌나 대견하고 기분이 좋은지 아무 때나 쿡쿡 웃음이 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예쁘고 고마운 이유는 따로 있다. 우리아들의 행복해 하는 모습 때문이다.탓 들을 일도, 칭찬 들을 일도 없이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우리 아들, 부모 속 썩이는 일없이 제 앞 가름하는 충실한 직장인이지만 맘을 알 수 없는 어려서부터의 무표정은 내 맘의 짐 아닌 짐이었다. 여자 친구가 생기면 좀 달라지겠지 하는 맘에 사귀기를 은근히 종용해도 그저 묵묵부답이던 아들이 서른두 살이 되어서야 처음 데려온 여자 친구 옆에서 달라진 모습이라니. 지금껏 볼 수 없던 밝은 표정과 당당함으로 나를 보는 눈의 따뜻함에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 했다. 내 노력과 정성을 어쩜 그리도 몰라주느냐고 푸념 아닌 푸념과 원망 아닌 원망을 중얼대던 세월이 얼마인가. 이젠 됐다. 작고 귀여운 비둘기 같은 예비며느리가 내 무겁던 맘의 짐을 이렇게 홀가분히 쉽게 벗겨주다니.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함이 아쉬울 뿐 며느리 맞이하기 위한 이런 저런 절차나 준비가 그래서 재미있고 행복한 요즘이다. 함속에 넣어 보낼 귀한 목화씨와 향나무 조각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던 것도 큰 행운으로 여겨져 감사할 만큼.*수필가 이용미씨는 2002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그 사람>이 있다. 전북문화관광해설사 회장.
시내 변두리 시골의 5일 장날이다. 특별히 사야할 물건도 없으면서 장이 서는 날이면 주섬주섬 챙기고 자주 5일장에 나간다. 시끌벅적한 시골 장날은 볼거리가 많다. 사람 사는 맛이 물씬 풍기는 곳이기도 하다. 텃밭에 심었을 것 같은 몇 가지 채소를 놓고 양지쪽에 앉아 파시는 어느 할머니의 얼굴은 초겨울 찬바람을 쐬어 빨갛다. 주인에게 끌려나와 얼마 후에는 새로운 주인에게 팔려 어미 곁을 떠나야 하는 강아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꼬리를 흔들어 댄다. 시골 5일 장날은 이런 모습들을 볼 수 있어서 나는 좋아한다. 슬쩍 시장 구경이나 하고 올 요량으로 나섰는데.어느새 내 손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묵직하게 들려 있다. 늦서리를 맞고 몸살을 앓기 전에 주인의 손에 들려 나온 연한 고추도 샀다. 호박죽을 쑤어 먹으려고 누렇게 늙은 호박도 샀다. 땅속 깊이 굵고 통통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가 뽑혀, 이제 세상 구경을 나온 고들빼기도 한 움큼 샀다.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싱싱한 조기가 왔어요.'하는 장사꾼의 속임수를 알면서도 속아 한 무더기 샀다. 기웃기웃 구경을 하다 보니 내 손에는 갖가지 싱싱한 생선이나 채소들이 들어 있는 검은색, 노란색, 파란색, 하얀색 비닐봉지가 꽤 많이 들려 있다. 시골 장날이면 빠지지 않고 어김없이 나오는 사람이 있다. 몸에는 고무로 만든 옷을 칭칭 감고 엎드린 채, 배로 기어 다니며 장날의 주인공처럼 가냘픈 음악소리로 시선을 끌며 도움을 청하는 장애인이다. 그런 사람을 보면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동전이던 지갑 속의 작은 돈이던 서슴없이 내준다. 오늘은 양손에 물건이 무겁게 들려 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외면하였다. 내 두 손에 물건들이 들려있어서 줄까 말까 마음은 갈등을 했지만 가던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집으로 와 버렸다. 그냥 집으로 돌아 온 탓에 마음은 편치 않다. 시골 5일장에서 금방 사온 싱싱한 채소와 생선으로 가족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시장 바닥을 누비고 다니며 지나는 행인의 동정을 구하던 그 사람의 눈동자가 자꾸 생각났다. 내 어릴 적, 이른 아침 식사 때면 찾아오는 손님이 있었다.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며 밥을 얻어먹고 다니는 거지들이었다. 어머니는 언제 보셨는지 기다렸다는 듯 작은 상에 두어 가지 반찬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 팔팔 끓는 국을 챙겨 내다 주셨다. 어머니는 아침에 찾아 올 거지의 몫까지 넉넉하게 밥을 하셨던 걸까? 한 번도 그냥 돌려보낸 것을 본 적이 없다. 들마루에 걸터앉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후다닥 먹어치우고 말없이 코가 땅에 닿게 절을 하고 가는 거지를 자주 보았다. 어머니는 늘 그러하셨다. 어머니가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와 준 덕일까? 지금 우리 남매들이 잘 살고 있다. 어머니의 행동을 보고 자랐기에 나도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오늘 시골 장에서 본 그런 사람들을 보면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내 지갑의 무게를 덜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외면하고 돌아 와서 내 자신을 책망하고 있다.
우리는 왜 항상 열차가 떠나는 쪽에 서 있는 걸까? 궁금증의 시작은 여섯살 적부터였다. 아버지가 서울로 떠났다. 돈 벌러 간 것이다. 나는 엄마와 함께 플랫폼에 서서 아버지를 향해 또 열차를 향해 한없이 손을 흔들었다. 아버지는 얼마 되지 않아 돌아왔지만, 그때 떠난 열차는 지금도 내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계속 떠나가고 있다.많은 세월이 흐른 뒤 내가 떠나게 되었다. 입영열차를 탄 것이다. 열차는 겁먹은 나를 연무대역에 내려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어찌나 야속하던지 휑한 역사를 바라보며 숨죽여 울었다. 다시는 열차를 타지 못할 것 같아 더 그랬다.취직한 딸아이를 떠나보낸 곳도 바로 그 플랫폼이었다."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등을 다독여 주고 돌아서려는데 가슴이 저려왔다. 딸아이의 체온이 채 가시지 않은 벤치에 멍하니 앉아 여운을 챙기자니 더 서러웠다. 우연하게도 우리집 삼대는 이렇게 각각 열차를 타고 떠났다.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를 먼 데로 장사 보내고, 아들 군대 보낸 마음이 이랬을까? 떠난 사람은 말이 없기에, 이별의 아쉬움은 고스란히 보내는 자의 몫이 된다는 사실을 딸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알았다.나는 영화에서도 열차의 출발과 심심치 않게 조우했다. 등장인물에 동일시돼서 흠뻑 취해있다 보면 난데없이 기적이 울렸다. 화들짝 놀라 허리를 세우면 연인의 서러운 이별이 수은등처럼 서 있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이 열차를 타고 떠나는 장면에서는 배경음악이 커지고 영사막이 요동쳤다.아이러니하게도 세계 최초의 영화인 <시오라 역에 도착하는 기차>는 그 움직이는 방향이 다르다. 열차가 사람들 앞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관객은 열차의 움직임을 순환하는 삶의 모습에 견주었고, 죽음이라는 불멸의 적을 물리친 양 개선장군을 맞이하듯 열광하며 계속해서 보았다고 한다. 그때의 관심은 온통 살아 움직이는 활동사진이었을 테니까. 꿈틀거리는 물체가 자신들 속으로 돌진하는 것을 보면서 혼비백산 했으리라.나는 사십여 년 전에 봤던 <콰이강의 다리>에 등장하는 그 육중한 열차의 역동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산다. <닥터 지바고>에서는 주인공 유리가 우랄산맥을 넘을 때 철길에 쌓였던 눈【雪】에서 눈【眼】을 떼지 못했다. 그 감동은 꺼내기 쉬운 기억으로 남아 언제고 내 여린 감성을 자극해왔다. 일본영화 <철도원>은 주인공의 시린 삶의 역정이 하얀 눈밭을 달리는 열차의 모습에 투영되기에 그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눈시울이 젖는다. 우리 영화 <박하사탕>에서 다리 위로 늘어진 철로는 삶의 질곡을 뚫는다. 주인공 영호의 절규는 기적소리마저 관통하고 잘 나가던 시절과 만나기에, 관객은 자신이 열차에 오르는 것 같은 환영에 사로잡혀 플래시백에 빠지는 것이다."나 다시 돌아갈래!"영화 속 열차와 철로는 우리의 감성에 깊이 파고들어 온갖 은유로 삶의 여러 장면을 요모조모 간섭하고 지나간다.오늘도 열차는 수많은 사람들을 싣고 떠난다. 애달픈 기억의 편린으로 가득찬 역사(驛舍)는 아는 듯 모르는 듯 구내방송만 쏟아내고 있다. '안녕히 가시고 다음에 또 가십시오.'라며.열차는 레일을 돌고, 사람은 자신이 설정한 행동반경을 돈다. 그 속에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고, 어느 날은 내 딸아이가 있었다. 여기서 슬픔은 열차의 순환과 특별한 인과관계가 없다. 사람의 순간 감정의 발로일 뿐. 영화 또한 여러 사람의 삶을 열차에 실어 보내면 그뿐이다.내일도, 모레도 나는 계속해서 플랫폼에 설 것이다. 순환이라는 굴레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동반자이기에 언제고 나는 열차와 함께 울고 웃을 것이다.수필가 이승수씨는 2009년 <수필과 비평> 으로 등단. 현재 진안우체국장에 재직하고 있다.
정화를 보러갔다.창문 가득 스며든 한 낮 햇살이 정화가 있는 곳까지 내려앉아 따스하다. 정화가 있는 곳은 꽃밭이다. 지지 않는 꽃 속에서 웃고만 있는 모습, 정화는 평소에 웃는 모습을 잘 보이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보는 대로 웃고만 있다. 정화는 시고모의 고명딸이다. 내가 시집을 와서 처음 정화를 보았을 때 정화는 초등학생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철둑 옆 어느 집에선가 고모의 늦은 딸이 되어 가난하지만 행복한 모습으로 한창 예쁘게 자라고 있었다. 그때는 이야기 상대가 될 수 없다고만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새 자라서 처음으로 부모님의 말에 거역을 하면서까지 결혼을 하는 나이가 되었다. 씩씩하게 잘 사는 날은 얼마나 되었을까, 이혼이라는 것을 하고 딸 둘을 데리고 나와 온갖 고생을 할 때 우리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유일하게 나의 모든 고통을 잘도 들어주었던 정화, 나보다 열 살 쯤 어리지만 세상을 힘들게 헤쳐 나가는 모습이 어느 때는 나보다 더 어른스러워 보이고 내가 어떤 말을 하든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내 편이 되어 왜 그럴까, 하며 가벼운 탄식을 하곤 했었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한 정화는 그 생활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갈라져 나와 살면서 번번한 차림새를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거의 운동복 차림으로 직장을 나가고 낡은 신발위로 불거져 나온 발등을 보이기가 일쑤였을 만큼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 딸 아이 둘을 성구면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한탄을 쏟아내기도 하고 이따금씩 술 한 잔으로 자신을 위로하면서 하루하루를 그래도 잘 버텨나갔다. 그의 일터에서 가끔 만나 서로에게 툭툭 안부를 전하면 가슴에 내려앉아 있던 내 너울들이 쑥 벗겨져 어디론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일터에서 만나면 항상 밝은 모습으로 언니, 언니하면서 이런 저런 말을 던지곤 했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외로움을 나는 알고 있다. 친척 누구와도 가까워 질 수가 없었고 자신의 엄마에게 조차도 말할 수 없었던 어떤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깊은 속내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그의 외로움만큼 내 외로움도 커지면 그날 저녁 정화를 찾아가면 되었다. 이불을 깔고 누워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는 거의 막막한 것들이었다. 누구도 만날 수 없는 늦은 밤에 마음 터놓고 오고가는 말은 간절하기도 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별이 마당에 내려와 앉아 있는 듯 아련한 불빛이 창가에 비치고 먼 곳에서 컹컹거리며 우는 한 마리의 개는 우리를 더 쓸쓸하게 만들었다. 그때 마냥 힘들어 했던 시간들, 삶이 바빠서 푸념보다는 눈물 몇 방울이 전부였던 그 시절, 나보다 더 힘든 생활이었을 텐데 정화는 내 얘기를 들어주기만 하고 자신의 얘기는 미쳐 꺼내 놓지 못했었다.그런 정화가 갑자기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시간을 이어주던 고리가 순식간에 풀리어 빠져나가버리고 머물렀던 자리가 순간 빈 공간이 되어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그 빈자리를 헤어진 남자가 다시 나타나 두 아이와 남겨진 모든 것을 가지고 어딘가로 가버렸다. 정화가 생전에 알았던 유일한 그 남자는 자신의 정당성을 드러내며 정화가 남기고 간 모든 것을 챙겨가지고 사라졌다. 이 모든 일은 순간에 일어났지만 나의 기억은 멈추지 않고 있다.낮고 음울한 내 말을 더 들어줄 사람이 멀리 가버리고 그런 밤의 시간을 같이 보내며 창문에 와 닿는 덜컹거리는 바람소리와 멀리서 자박자박 거리며 걸어가는 낯선 사람의 발소리에 숨죽였던 모습도 이제는 기억에만 있게 되었다. 고모는 어제도 오늘도 그냥 온종일 정화의 모습만 보인다고 하며 만사가 귀찮다고 하신다. 그 마음을 다 아는 나는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십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모습인데 그것을 미리 말해 줄 수가 없다. 바람도 없고 햇볕이 따뜻한 날, 정화를 보러 나선다. 산모퉁이를 돌아 그가 있는 언덕의 집에 들어선다. 미리 열린 유리문 뒤로 활짝 핀 꽃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정화가 머문 곳 끝 유리 창문 앞에 등을 보인 낯선 남자가 멈칫하다가 조용히 빠져 나간다. 웃고 있는 정화의 모습 뒤로 과거가 되살아난다. 마치 지금 내가 무슨 말인가를 하면 왜 그랬대, 하면서 다시 내게 어떤 위안을 줄 것만 같다. 그것이 너무도 선명하게 현실과 부딪히면서 다가와 무슨 말로도 대신할 수가 없다. 남아있는 자를 향한 사진 속의 정화는 밝기만 하다. 이제는 다 용서했을 정화, 그 넓은 마음 안으로 저녁 햇살이 조용히 스며들고 있다.*수필가 편성희씨는 2001년 <우리 문학>으로 등단했다. 수필집 「꽃지는 오후」가 있다.
K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들만을 상대하다가 어른들 앞에서 강의를 한다는 건 상당한 부담이었다. 어느 날 강의를 하려고 가방에서 교재를 꺼내려는데 준비한 자료를 통째로 집에 두고 온 걸 알았다. 당황한 나는 급히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자료를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남편이 집에서 학교까지 오는 동안 학생들 앞에서 시간을 떼우는 일만 남았다. 망설이다가 초등학교 때 있었던 비슷한 경험이 떠올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가 70년대였다. 학교에서는 호국의 달 6월이면 어김없이 반공웅변 대회를 열어 학생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교육열이 높았던 부모님은 무대 위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담력을 쌓도록 하고 싶은 마음에 내게 웅변을 하라고 권하였다. 어머니는 직접 원고를 써 주시고, 계란 노른자에 식초를 타서 목소리엔 극약처방이라며 먹으라고 코앞에 갖다 댔다. 지독한 냄새를 참고 마시며 열심히 연습을 하여 드디어 무대에 서게 되었다. ‘쿵쾅 쿵쾅’ 큰 북소리가 심장을 강타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수백개의 까만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노려보는 것만 같아 아찔한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게다가 당황한 나머지 그제서야 준비한 원고마저 두고 올라온 걸 알았다. “여러분……” 첫 외마디를 시작으로 다음 원고가 생각이 나지 않자 멍 하니 관중을 바라보다 꾸벅 인사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그런데 모든 웅변이 끝나자 사회자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오늘 원고 내용을 까먹어 도중에 내려간 노서운 학생에게 결과가 나오는 동안 기회를 주면 어떨까요?” 관중들의 박수 소리에 용기를 얻어 준비한 원고를 꼭 쥐고 다시 무대로 올라갔다. 단상 위에 원고를 펼쳐 놓으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 날의 시상식에서 내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지만, 사회자의 배려로 다시 한 번 기회를 얻어 웅변을 마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남편의 핸드폰 문자가 도착했다. ‘강의실 앞에 도착’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강의 자료를 받아 들고 강의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면 매순간 우리는 삶의 무대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향해 나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연설을 하고 있는 연사일지도 모른다. 때때로 실패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내 삶의 무대가 공포스럽게 느껴질 때, 누군가 어깨를 다독이며 어린 연사에게 용기를 준 사회자처럼 “다시 한 번만 해봐. 기회를 줄게.”하며 가만히 얘기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어머니가 써 준 원고가 아니라 내가 준비한 원고를 들고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강의를 하기 위해 성큼성큼 강단으로 오른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외치던 어린 연사의 꿈을 이루게 해 준 이 소중한 시간이 주어짐에 깊이 감사하며 자신감을 찾아 무대로 오른다.*수필가 노서운씨는 2008년 <수필과 비평> 으로 등단했다. 현재 군산 이삭 어린이집 원장.
시월을 빼앗긴 밤에 비가 내렸다.가을의 긴 옷자락 끄는 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새벽 길가로 나가보았다. 밤새 나무들은 뭔 일이 있었는지 팔이 부러지고 모든 옷을 벗어던지며 길가에 아무렇게 누워있었다. 아직 벗지 못한 나무들은 속옷차림으로 우리들에게 모든 걸 부끄럼 없이 보여주고 있었지만, 보이는 것은 다 아름다웠다.자동차위에 떨어진 나뭇잎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쓸어내리며 예쁜 낙엽에 푹 빠져있었다. 신의 작품인 가을은 낭만을 아는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계절이다.한동안 낙엽에 끌려 출근 할 시간을 잊고 있다가 정신없이 뛰었다.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는 말했다. 우리 집에 오빠가 곧 도착할거라고 하였다. 이른 시간에 웬일일까? 하얀 겨울을 풍성하게 지내라고 형제들에게 나눔으로 쌀 한 가마씩 선물로 준비하셨단다. 집집마다 선물하려면 아홉 가마의 쌀이 필요하다.퇴직 후 취미삼아 공터에 농사를 짓고 삶의 질을 높이는 오빠의 가슴에 뜨거운 바람이 불었나보다. 벽에 기대어 옆구리 터지게 살찐 쌀자루를 바라만 봐도 푸짐하고 배가 부른 것 같다.우리형제들은 지난여름에도 큰 행복을 누린 적이 있었다. 우리가 태어나 뼈가 굵어진 마당이 넓은 집을 팔고 읍내로 이사를 갔다. 어머니 혼자 사시기에 관리가 어려운 큰집이라서 할 수 없이 매매를 했다.그런데 몇 년이 지난 후 오빠가 다시 구입하여 어느 별장보다도 멋진 집으로 꾸몄다. 바람이 문풍지를 흔들던 밤, 어린 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무들의 가슴둘레가 커져갔는데 다시 유년시절의 마당과 토방 그리고 흙담집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어린시절에 이불을 잡아당기며 잠자던 소녀들이 이젠 언니동생이 모두 흰머리가 되어, 멀리 달아난 세월의 이불을 덥고 그 방에 나란히 누웠다. 엄마를 사이에 두고 엄마냄새를 맡으며 오빠가 키운 살찐 닭을 삶아놓고 밤새 도란거리면 푸른 별들도 자지 않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누굴 위하여 그 집을 지키려하는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가진 사람들이 백 마리의 양을 채우기 위해 한 마리의 양을 욕심내는 일이 많다.한가마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쌀가마를 서울로 각 지방으로 실어 나르는 오빠의 조건 없는 사랑에 눈시울이 뜨겁다.쌀의 개수만큼 고마운 오빠를 생각하는 날이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낙엽을 바라보며 혹시 꿈인가하여 쌀가마를 바라보니 꿈은 아니었다.억센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풀들은 서로 손을 잡아주고 버텨 주기 때문이다. 말보다는 누르는 문화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오빠의 일으킴은 새로운 변신이었다.이쯤, 쌀가마를 메고 사랑을 배달한 오빠의 허리에 무리가 없을까? 가을과 겨울사이에 나에게는 진귀한 선물이었다.
나, 이제 십대야! 맞벌이 하는 오빠 부부를 대신해 고모가 조카를 돌봐주는데 열 살 되던 해, 아기 취급하지 말라는 경고로 조카가 내뱉은 말이었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녀석이.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니 고모는 부모와는 달리 모모와 같은 친구인 줄 알았을 텐데, 엄마와 다름없이 걱정이라는 이름의 간섭과 사랑이란 이름의 잔소리꾼으로 되어버린 자신을 뒤돌아보는 이야기가 <대한민국 10대를 인터뷰하다>에 소개된다.어른들은 미래를 강조하지만, 십대들은 지금 이 순간의 삶이 전부다. 이들에게 대통령이나 장관을 지낸 사람들처럼 내가 해봐서 다 아는데! 운운하는 조언이나 충고 따위는 큰 의미가 없다. 이보다 더 심각한 십대의 속내를 행동으로 표출된 허구도 있다.불량소년, 스미스는 감화원으로 송치되자 장거리 선수로 발탁된다. 그가 멋지게 우승하여 명예로운 상을 획득할 것을 기대하면서 원장은 열심히 지도한다. 소년은 원장의 눈치를 보면서 연습에 열중한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는 날, 소년은 상대 선수에게 보기 좋게 져줌으로써 원장의 콧대를 꺾어 놓는다. 이 1인칭 소설, <장거리 주자의 고독>은 1928년 실리토우(A. Sillitoe.영)의 작품이다. 유년시절 하층 노동자들의 가난했던 생활을 체험한 이 소년에게는 원장의 고상한 교훈은 공허한 메아리요, 단순한 잔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소년은 원장의 희망을 점잖게 행동으로 거절한 것이다.중학교 현직에 있을 때의 일이다. 2학년 학생이 전학 왔다.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엄마 말을 잘 듣던 애가 2학년이 되자, 엄마! 나에게 말 걸면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다시는 나한테 잔소리 하지 마. 긴장된 엄마의 얼굴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1남 1녀를 기르면서 지금까지 잘 지내왔는데 갑자기 폭탄선언을 들으니 딸의 얼굴 보기마저 두렵다는 것이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여유가 없다. 딸의 덧정이 없는 행동을 엄마가 고치겠다고 다그친다면 이미 중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으로 훌쩍 성장, 엄마와의 앙금만 기억될 것이다. 자녀교육은 가정에서부터 부모가 당연히 책임져야겠지만 옛날과 달리 요즈음은 만만찮다. 존 F 케네디는 최연소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그의 어머님의 가르침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어머니 로즈는 규칙을 정해 놓고 아이들이 그것을 어겼을 때는 어김없이 회초리를 들었다. 우리들의 할아버지, 아버지 시대에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의 회초리 교육은 탈선을 재촉하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체벌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신경숙의 장편 <엄마를 부탁해>는 내 고향, 정읍이 배경인지라 아주 관심 있게 읽어보았다. 엄마를 잃어버린 일주일째다로부터 시작하여 지난날 우리 엄마와 너무도 평범한 이야기를 회상체 형식으로 화자를 바꿔가면서 엮었는데 감명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세상 엄마들이 신경숙의 엄마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십대의 딸들도 언젠가는 신경숙의 엄마처럼 자식들에게 희생할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늘의 십대를 지나가는 구름의 변화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앞장서지 말고 도와주는 역할에만 힘써달라고 엄마들에게 주문한다면, 생각처럼 쉽지 않다고 헤갈스러워 할까. 거시기지만, 나 역시 젊었을 때 교단에서 제자들을 곁에서 도와주지 못하고 왜 그리 앞에서 냅뜨며 이끌기를 좋아했던가, 나이드니 철든다고 이제야 후회한들 이를 어찌 다시 담으리.
아끼던 볼펜이 갑자기 사라졌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아닐수없다.방송중 큐시트에 곡목을 적어 나가던 중이었다. 분명히 나 혼자 책상에서 일하고 있었고 누가 다녀간 적도없는데 갑자기 볼펜이 사라진 것이다. 의자 옆, 책상 아래 모퉁이, 근처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어디에도 볼펜은 없다. 손에서 힘이 빠진다. 제갈공명의 백우선이나 관우의 청룡언월도에 비유할 바는 아니지만 손오공이 여의봉을 잃은 것처럼 맥이 풀리면서 급기야 의욕상실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필통을 뒤적여본다. 다른 종류의 볼펜이 있다. 하지만 나는, 방금 전까지 내 손가락 사이에서 뇌와 혼연일체가 되어,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볼펜에 대한 미련을 거둘 수 없다. 몇 주 전부터 두어 건의 기획 작업을 그 친구와 함께 하던 터라 내 영혼의 일부가 그 볼펜에 배어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나의 생각을 읽고 있었을 것이다.컴퓨터가 중요한 일을 처리해주고 키보드 자판이 생각을 더 빨리 정리해주긴 하지만, 여전히 글을 쓰고 창작을 하는 사람들에게, 펜은 신체의 일부와 같다. 종이에 부드럽게 말려드는 접촉감, 머리와 손과 종이와 펜이 서로 애무하다 급기야 혼연일체 되어 전개해 나가는 추진력. 그리고 지우고 다시 써가며 결국 마침표를 찍을 때의 쾌감이란! 키보드로 화면을 채워가는 그것과 확연히 다를 것이다. 서랍을 뒤적여본다. 다 쓴 펜이 한 움큼 잡힌다. 그때그때 중요한 일거리들을 훌륭하게 수행한 충실한 벗들이다. 내면의 내장을 토해 혈서를 남기고 장렬히 순직한 펜의 주검 앞에 잠시 생각에 잠긴다. 저마다의 사연이 담겨있다.지난해까지 자주 사용하던 펜은 1.0㎜ 수성펜이었다. 투명 케이스 안으로 검정 심이 팍팍 줄어드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대단한 업무가 진전되는 양 위안을 삼았다. 종이에 앵기는 감촉도 보드라웠다. 생각이 술술 잘 풀려서 좋았다. 방송관련 상을 받은 어느 해, 대학교 근처에서 우연히 마주친 은사님은 수상 기념으로 근사한 선물을 사주시겠다고 기어이 문방구로 이끄셨다. 이 문방구에 있는 것 중 가장 좋고 비싼 것을 내어 놓으라고 주문하시는데 내가 선택한 펜은 역시 1200원짜리 1.0㎜ 수성 펜. 큰맘 먹고 좋은 펜을 사주시려는 은사님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손에 익은 펜이 내 생각을 먼저 알았다. 비싼 것과 1200원짜리 사이에서 승강이를 벌이고 있을 때, 문구점 주인은 자기 이익은 생각지도 않고 슬며시 내 편을 거드는 것이었다. 교수님, 김 피디님은 이 펜을 좋아하세요. 제가 잘 알아요. 문구점 주인까지 가세하여 1200원짜리 펜으로 낙점. 교수님은 매우 아쉬워하시며 대신 펜을 20여개나 사주셨다. 서랍 속에서 다 쓴 1200원짜리 1.0㎜ 수성펜 십여 개를 보니 은사님의 깊은 사랑이 전해진다. 중간 중간 해외여행을 다녀온 지인 들이 유명 메이커의 펜을 선물해주었는데 딱히 필 꽂히는 펜은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조용히 필통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가 펜이 막히거나 잉크가 말라비틀어져 그대로 장식품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요즘은 다시 1.0㎜ 볼펜을 쓰고 있다. 가격은 다소 올라 1500원쯤 하려나? 떼굴떼굴 볼펜심이 잘도 굴러간다. 생각도 떼굴떼굴 잘 굴러가는 것 같다. 이 친구와 찰떡궁합을 이루며 벌써 십여 개째 속도를 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한창 가속이 붙을 무렵, 그만 이 친구가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수십만 원에서 백여만 원에 이르는 명품 펜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1500원짜리 볼펜 하나 잃어버리고 이렇게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는데, 명품 펜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아니다. 친구를 어찌 가격에 비유한단 말인가. 내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친구가 사라져서 일손이 잡히지 않을 따름. 마음이 허전하다. 그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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