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시골에서 올라온 내 또래 친구 몇 사람과 후배인 국문과생들이 저녁이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 하숙집 문을 두드렸다. 그러면 우리는 번화가 S극장 앞길에 H집이라는 막걸리 집을 찾았다. 대개가 개근상을 주어도 될 정도로 술꾼 친구들이었다. 당시 문학도라는 어설픈 미명 아래 드나든 H술집을 회상해 본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세 명이 앉으면 비좁은 의자 두 개였는데 그 자리도 늦으면 서서 마시는 일명 다찌노미 신세가 되었다. 여름엔 사카린을 가미한 냉 막걸리를 빈 맥주병에 담아 파는 게 유행이었다. 술병들이 얼마나 길게 많이 세워졌느냐가 다른 주당들과의 경쟁이었다. 안주래야 밥반찬 몇 가지와 젓갈류나 풋고추와 된장이면 족했다.
밤 12시면 야간통행금지라서 그 안에 더 많이 더 빨리 마셔야 했다. 날마다 만나도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았는지 친구가 말실수하면 바로 가로채 안줏거리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투박한 막걸리 잔으로 한 잔씩 주고받으며 고상한 얘기가 오가다 말소리가 해롱거릴 때쯤 되면 자리에 없는 친구를 안주 삼았다. 심지어는 자리에 없는 여학생들을 술상에 올려놓고 씹었다.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을 안주 삼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누구와 거시기 한다느니, 누구와 뭣 했다더라는 등 해서는 안 될 얘기까지 안주는 풍성했다.
술집 주인의 아들은 서울 S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구정물통에 손 담그며 번 돈으로 아들을 뒷바라지한다는 동정의 손님들이 아주 많이 찾았다. 지금은 그 술집도 없어져 달짝지근한 냉 막걸리도 맛볼 수가 없고 같이 술집을 드나들었던 친구도 몇 년 전 두 명이나 먼저 저승으로 가버렸다.
술은 마음을 따라 주고 진실을 마셔야 우정이라는 진가가 나오는 것이다. 흰 눈이 소록소록 내리던 날밤 목로주점에서 어깨너머로 풍겨오던 담배 연기와 함께 릴케나 헤밍웨이를 노닥거리며 마셨던 막걸리 집의 추억이 그립다. 술집을 인생강의실이라고 하며 고전이나, 사르트르를 말하던 막걸리 집의 운치를 잊을 수 없다. 나는 가끔 옛 친구와 애주의 소야곡을 듣고 싶다. 어느새 고희를 넘겼지만, 옛 친구를 만나면 한 잔 술부터 이놈 저놈 하며 마시고 싶다. 주유별장(酒有別腸)이라 했던가. 나도 지금은 건강상 술을 못하지만 옛날에는 마시면 솔직해지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즐거울 때 마시면 박장대소나 세레나데가 흘러나오고, 슬플 때 마시면 수심을 누그러뜨릴 수가 있었다. 누군가는 술은 비와 같다고 했다. 진흙에 내리면 진흙탕이 되고, 옥토에 내리면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술은 자유를 얻고, 건강과 기쁨을 얻지만, 방종과 오만, 망언 등 성후회(醒後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따라 애주의 소야곡을 들으면서 술 한 잔 생각이 난다.
△나인구 수필가는 ‘대한문학’에서 시, 수필로 등단한 뒤 전북문인협회 이사, 전북수필문학회 이사로 활동했다. 현재 대한문학작가회 회장으로 전북수필문학상을 받았다.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