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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세계기록유산 미등재 기록물] 김낙철 역사(金洛喆歷史)·김낙봉 이력(金洛鳳履歷)

김낙철역사 1894년 4월 1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김낙철 역사 1895년 1월 3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김낙철 역사(金洛喆歷史)

전라도 부안의 접주 김낙철(1858∼1917)이 1890년 6월 7일(이하 음력) 동생 김낙봉과 함께 동학에 입도한 이래 1917년 12월 14일까지 일기 형식으로 남긴 자전적 기록이다. 국한문 혼용체로 쓰여있으며, 일기 형식이기는 하지만, 매일의 일을 기록한 것은 아니다. 동학이나 천도교와 관련하여 중요한 상황이 있을 경우에만 기록하고 있다. 분량은 모두 38면이다. 

김낙철·김낙봉 형제의 본관은 부안이다. <김낙봉 이력>의 1890년 기록에 따르면 김낙철의 집안은 1,000년이 넘게 부안에서 대대로 살아온 명문고족[盛門高族]이었다. 이전 시기의 집안 내력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5대 동안 독자로 내려오다가 그의 부친 대에서 형제가 출생하였으며, 이 형제가 맨손으로 집안을 이루어 몸소 수만 환(圜)의 재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김낙철역사>에도 역시 자신이 부자였음을 밝히고 있다.

<김낙철 역사>에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다른 자료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중 눈에 띄는 몇 가지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낙철은 1890년 6월 7일 동생 낙봉과 함께 동학에 입도하였다. 열흘 뒤인 6월 17일에는 동생 낙주(洛柱)가 종제(從弟)인 낙정(洛貞)·낙용(洛庸)과 함께 입도하였다. 김낙철 등은 1890년 7월부터 포덕(布德)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891년 3월에는 포교한 신도가 몇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숫자의 신빙성 여부를 떠나 김낙철 형제 휘하 동학교도들의 규모가 적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정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김낙철 형제가 부안 일대에서 전봉준과 손화중이 이끌던 동학농민군 주력부대와 부안 군수 사이에서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낙철과 낙봉 형제는 입도 초기부터 제2세 교조 최시형을 자주 찾아보고 직접 모시기도 하는 등 교단 내에서도 만만찮은 위상을 확보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1893년 2월 광화문 복합상소 때는 동생 낙봉만 참여하였으며, 이때 김낙철은 전라도 도도집(都都執=도집강)을 맡고 있었다. 이 무렵부터 각 지역에서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본격적으로 일어났지만, 김낙철은 큰 문제 없이 포교를 이어갔다고 한다.

<김낙철 역사>에는 1894년 3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교단 측의 대응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김낙철은 동학농민혁명의 발발 당시 전봉준에 대해 “고부 전봉준이 민요(民擾)의 장두(將頭)로서 고부 경내의 인민을 선동한다는 말이 들리므로, 은밀히 그 속을 탐문해 보았더니 외면은 민요의 장두이나 내면은 스스로 동학의 두목이라 부르며 다른 사상을 품고 있었다.”고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생 낙봉을 최시형에게 보내는데, 최시형은 “저 봉준은 교인으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니, 절대 상관하지 말고, 몰래 각 접(接)에 기별해서 모두 지휘에 따라 봄을 기다리라.”고 비밀리에 분부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김낙철은 이러한 분부 내용을 은밀히 각 접에 알리고 수도(修道)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봉준이 고부성을 무너뜨린 뒤 각 처의 “무뢰배”가 전봉준과 김개남의 포(包)에 몰려들었고, 부안까지도 위태롭게 되었다. 이때 부안 군수 이철화(李哲和)가 김낙철에게 “부안성을 지켜 외적(外敵)을 막아 달라”고 요청하자 4월 1일에 교인 수백 명과 함께 서도(西道) 송정리(松亭里) 신씨(辛氏)네 재각(齋閣)에 도소(都所)를 설치하였다. 동생 낙봉도 신소능(申少能)과 함께 부안 줄포(茁蒲)에 도소를 설치하여 타 지역 농민군을 방어하였으며, 이에 대해 온 고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2월 12일 김낙철과 낙봉 형제 모두 나주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의 지시를 받은 부안군수에 의해 체포되었다. 12월 23일 경군(京軍)과 일본군 30여명에 의해 압송되어 1895년 1월 3일에 나주 초토영(招討營)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김낙철 형제는 함께 구금된 농민군 32명과 함께 엄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1월 6일 다른 농민군 대신 잡혀 온 3명은 석방되었고, 나머지 29명 가운데 김낙철 형제를 제외한 27명은 모두 포살되었다. 이 무렵 나주 초토영에는 보성군수 유원규(柳遠奎)과 장흥의 이방언(李方彦)이 갇혀 있었으며, 전봉준과 손화중은 그 전날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사실 등을 기록해두고 있다. 

김낙철 형제도 그로부터 6∼7일 뒤 서울로 압송되어 진고개[泥峴] 일본인 순사청(巡査廳)에 갇혀 조사를 받은 뒤 다음 날 감옥소에 들어갔다. 이때 서울 감옥소에는 성두한(成斗漢)이 수 백명의 농민군과 함께 옥에 갇힌 지 여러 날이 되었다고 했고,  손화중·전봉준·최경선(崔景善) 등이 갇혀 있었으며, 전봉준은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김낙철 형제는 김방서(金芳瑞)·이방언 등과 함께 3월 21일에 풀려나 3월 29일 한밤중에 몰래 부안(扶安) 인근의 갈촌(葛村)에 도착, 4월 4일 한밤중에 동생 낙봉(洛鳳)과 함께 낙봉 집으로 가서 곁방에 숨었다. 전봉준·손화중·최경원·김덕명 등이 체포된 뒤 나주에 구금되고 서울로 압송된 사정과 전봉준이 다리를 다쳤다는 사실, 성두한이 구금되어 있던 사실, 장흥 동학농민군 지도자 이방언이 체포되어 나주 초토영에 구금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된 뒤 이듬해 3월 21일 석방되기까지의 경과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후에도 부안 동도면 신월리의 친족 집에 토굴을 파고 고초를 겪으며 10개월 간 은신하여 생활한 내용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뒤 각지로 피신한 농민군들의 참상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김낙철 역사>의 원본은 익산에 거주하던 김낙철의 외손녀가 보관해 왔으며 천도교 중앙총부 자료실에는 그 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김낙봉 이력 첫장.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김낙봉 이력 1894년 4월 3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김낙봉 이력(金洛鳳履歷)

<김낙봉 이력>은 1890년 부안에서 형 낙철과 함께 동학에 입도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직접 체험한 김낙봉(1860~1937)이 1937년까지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회고 형식으로 남긴 자전적 기록이다. 표지는 없으며, 본문 첫 장에 “金洛鳳履歷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는 이 자료는 한지에 국한문 혼용으로 쓰여 있고, 모두 127면이다. <김낙봉 이력>의 내용은 대부분이 앞에 소개한 <김낙철 역사>와 중복되지만,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우선 김낙봉은 1893년 2월 교조 최제우에 대한 포교의 자유를 요구한 광화문 복합상소 때는 소수인 박광호(朴光浩), 제소(製疏) 손천민(孫天民) 등과 함께 참여하였고,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다가 해산하라는 명령을 듣고 집에 돌아왔음을 기록해두고 있다.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데 대해서는 형 김낙철과 마찬가지로 부정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곧 “전봉준이 자신의 아버지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손에 죽은 일을 보복하기 위하여 민란을 일으켰다가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무장군(茂長郡)에 사는 손화중을 움직여서 큰 난리를 일으키려는 기미를 보고 마음과 정신이 두려웠다.”고 하였다. 또 형 김낙철의 편지를 들고 청산(靑山)의 문암리(文岩里)에 있던 대신사 최시형을 찾아 그로부터 “이것도 시운(時運)이어서 금지할 수가 없다. 그러나 너는 형과 상의하여 접의 내부를 정중히 단속하고 숨어지내는 것을 위주로 하라‘”는 답신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때 최시형으로부터 동학 교단의 간부인 6임의 첩지(牒紙) 4,000여 장을 받았다고도 하였다. 

한편 김낙봉은 돌아가려는 최시형이 “서장옥(徐章玉)이 진산군(珍山郡)의 방축점(坊築店)에 회소(會所)를 마련하고 전봉준과 호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날이 저물기 전에 해산을 안 하면 큰 재앙이 대두할 것이다. 건장한 심부름꾼을 시켜 빨리 전하라”고 한 지시를 받고 진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김낙봉은 진산 농민군의 기세에 눌려 최시형으로부터 받은 지시를 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최시형이 “시운이라 어찌 할 수가 없으니 너도 빨리 내려가서 뒤에서 호응하라 했다"고 거짓말을 전달한 후 도망하듯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음을 기록해 두고 있다. 진산의 농민군이 김낙봉이 떠난 다음날 금산군의 포군(砲軍)에게[이때 방축점의 농민군은 행상 김치홍(金致洪), 임한석(任漢錫) 등이 이끄는 행상과 읍민 1,000명에 의해 114명이 죽고 나머지는 해산하였다-필자]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도 기록해두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초기 동학교단의 대응과 진산 농민군의 활동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또한 4월 3일 전봉준과 손화중 등이 포병 4,000여 명을 인솔하여 부안으로 들이닥쳐 군수 이철화를 잡아 꿇어앉히고 칼을 빼어 목을 쳐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 이때 김낙철이 손화중과 협의하여 이철화가 참혹한 화를 면하게 된 점 등을 기록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사료총서>에는 전체 내용 가운데 김낙봉이 동학에 입도하는 1890년부터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체포되는 1898년까지의 내용이 실려 있다. <김낙봉 이력>의 원본은 전주에 거주하는 증손자 김문철(金文哲)씨가 소장하고 있다.

배항섭(전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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