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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작가-이소애 <몽돌이라 했다>

사계절이 시인들에게는 춘궁기다. 영상매체로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대형서점에 가도 시집 코너는 구석에 있어 찾기 어렵다. 시장만 탓하기엔 개운치 않은 것이 시인과 독자 간극이 크다. 치열한 자기 세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시는 어려워지고 독자는 갈피를 못 잡고 소외된다. 게다가 비평가의 취향과 기호에 따른 해설은 독자 자신의 문해력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접근성을 떨어뜨린다. 누군가는 안이한 독서 태도를 비판하며 독자에게 수준 높은 이해와 몰입을 요구한다. 다행히 시에 대한 낭만적 관념과 치기라는 접점이 있어 멸절되지 않고 세계의 작동방식으로써 기인한다. 이소애 선생의 시 에세이 『몽돌이라 했다』는 시 84편에 감상과 해설을 덧붙인, 시의 근원적 가치가 무엇인지, 시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심한 흔적이다. 지면상 몇 작품만 소개해 본다. 복효근 시인의 “몽돌해변은 돌의 수도원 통성기도가 적막으로 수렴되는 곳”(「꿈꾸는 돌」)에서 “몽돌은 처절한 고독과 아픔을 곱디고운 참회로 마음을 다듬었”다고 본다. “꽃밭에 꽃 꽃 꽃 가득 피었다 / 꽃밭에 한번 엎어져 보자던 그, 사람 오지 않고 / 꽃밭에 꽃 꽃꽃 시든다” 김용옥 시인의 「그리운 사람」. 이 짧고 담담한 시 한 편은 어째서 이리 쓸쓸하고 가슴을 아리게 하는가! 인간 보편정서 사랑과 ‘욕망’을 꽃이라는 관능적인 사물로 내면화하는 걸 두고 선생은 “그리움은 몸이 기억한다. 몸에 스며든 감정은 매일매일 꽃처럼 피어난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걸맞은 표현이다. 강연호 시인의 「감옥」도 반갑다. 물리적으로 갇혀있는 아내는 노상 즐겁고 열린 공간에서 자유로운 그는 오히려 출구를 찾지 못하고 세상에 갇혀 운다. 세상과의 전복과 대치 속에서 생활인 그는 한없이 외롭다. 인간이면 누구나 앓고 있는 ‘존재론적 고독’에 대해 선생의 “내부에 파도치는 격랑이 아닐까. 안식처를 잊고 바람처럼 방황하고 싶을 때가 있다. 갇혀있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가 있다. 마음이 묶인 감옥에서 울어 본 사람은 안다.”라는 감상은 누구라도 공감할밖에. 문신 시인의 “이발소 의자에 앉아 빗소리 들었다 일흔의 이발사도 같이 듣는지 가위질 소리가 못내 예전만 못하였다 몸 낮춘 빗방울들이 일흔 살의 느린 선율 같아 때때로 사무쳤다(중략) 이발소 거울 속에서 한 생이 우기처럼 종일 흘러가고 있었다 아, 한 마리 초식동물이어라 조만간 이 우기를 혁명처럼 건너가겠구나”(「단골」) 다 읽은 뒤 필자는 한참을 ‘몸 낮춘 빗방울’이 된다. 게다가 이소애 선생의 풀이말은 또 얼마나 곡진하고 사무치는지! 독자들이여 직접 확인해보시길 바란다. 이 외에도 안성덕, 배귀선, 유은희, 도혜숙 시인 등의 작품들과 시 해설도 좋다. 이들 공통점은 자의식과잉에 빠진 작품이 아니어서 난공불락의 해석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별도로 “시는 슬픔을 더 슬픔답게, 파괴를 파괴답게 하는 장르다. 시는 견디는 작업이다.”라는 김해순 시인의 말이 유아독존, 자기 고립을 천명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 내면에서 충돌하는 소리, 그 치열함에 대한 고뇌의 다른 표현인 것. 선생의 발자국을 따라 연결된 84개의 세계로 다녀왔다. 고립을 풀고 연민과 돌봄의 자세, 치유의 표상이자 연대가 가능함을 본 것이다. 선생은 우리가 취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삶의 균열을 미화하지 않는다. 다만 그곳에서 독자가 몽돌처럼 “처절한 고독과 아픔을 곱디고운 참회로 다듬”기를 바라는 것이다. 기명숙 작가는 전남 목포 출신이며,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몸 밖의 안부를 묻다>가 있다. 현재 강의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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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21 17:57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은영 동화작가-최연숙 '경성 기억 극장'

요즘 친구들을 만나면 기억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도 그래. 어제 일도 기억이 안 난다니까.” 라고 말하곤 한다. 의기소침한 친구에게 용기를 주려고 한 말이지만 사실이다. 어제 내가 한 일을 떠올려보면 순간 백지가 된 것처럼 아무 기억이 안 난다. 결국 핸드폰을 꺼내 카드 결제 명세를 보며 ‘맞아’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수십 년 전의 어떤 일은 마치 방금 일어난 일처럼 또렷하게 떠오른다. 그 속에는 잊고 싶지 않은 애틋하고 소중한 기억도 있지만, 절대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픈 추억도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붙박이처럼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기억을 우리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최연숙 작가의 동화 『경성 기억 극장』에는 기억을 없애주는 장치가 나온다. 주인공 덕구는 자신을 돌봐주는 수현이 아저씨를 밀고했다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떨쳐버리려고 기억을 지운다. 덕구는 자신이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조선 학생에게 전쟁을 도우라고 연설한 여선생님과 필리핀에서 민간인을 폭격한 공군 비행사가 기억을 지우고 편안하게 돌아가는 걸 본다. 덕구는 고문당해 악몽을 꾸는 수현이 아저씨에게 기억을 지우라고 권하지만, 아저씨는 기억이 길잡이라며 거절한다. 나중에 자신이 했던 일을 알게 된 덕구는 다시 기억을 지우라는 말에 ‘기억을 지운다고 내가 한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며 고민한다. 기억을 지우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것을 깨달은 덕구는 수현이 아저씨에게 사과하고 아저씨의 독립운동을 돕는다. 기억이 길잡이라는 말은 기억을 통해 나아갈 방향을 찾는다는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 그 기준이 되는 것은, 그동안 내가 보고 듣고 경험했던 것들, 또는 그것에 대한 기억이라는 말이다. 만약 그런 기억이 사라진다면 잣대를 잃은 우리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기억은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게 하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소중한 존재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일상의 소중한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 떠가는 뭉게구름처럼, 소소한 발견과 작은 기쁨으로 채워가는 순간순간을 기억하는 방법은 없을까? 힘들거나 외로울 때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팍팍한 삶을 여유로 바꿀 수 있도록 말이다. 어쩌면 기억을 기록으로 바꾸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먼지 쌓인 일기장을 꺼내 몇 년 전 날짜가 적힌 종이를 넘긴 뒤 오늘 발견한 사소한 즐거움을 적어보자. 먼 훗날 오늘의 기억이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하도록. 장은영 동화작가는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통일 동화 공모전과 이다 생명문화 출판 콘텐츠 공모전에서 상을 받고(공동수상), 전북아동문학상과 불꽃문학상을 수상했다. 2022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발표지원)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책 깎는 소년>, <으랏차차 조선 실록 수호대>, <열 살 사기열전을 만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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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7 18:17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작가-심정은 '환경수업도 업사이클링이 필요해'

핸드폰 요금을 정액제로 바꾸고 나니 늘 데이터가 부족하다. 월말이면 간당간당한 데이터 때문에 마음 졸인다. 그러다가도 아내가 자신의 여유분을 보내줄 때면 횡재한 느낌이 들었다. 월말까지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데이터이기 때문에 다 사용하지 못하는 달이면 손해 보는 기분까지 들기도 한다. 예전에 무제한 요금제를 쓸 때는 데이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부담이 없다 보니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의 데이터를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웠으나 어느 순간부터 무디어져서 쓰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어차피 무제한인데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런 달이면 피곤함이 일찍 찾아왔고 한편으로는 무력감까지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핸드폰 없이는 살 수 없는 삶이 되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도 비슷했다. 회의 중간에도 휴식 시간에도 사람들의 손에는 핸드폰이 어김없이 들려 있었다. 편리했지만 내심 이렇게 살아도 될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위기라고 이야기하는 환경 문제도 이러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우리는 환경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봄이면 황사와 미세먼지 때문에 불편하고 힘들어도 당연하게 여겼다. 날씨가 역대급으로 덥다는 올해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사람들도 폭염이나 열대야, 그리고 동남아에서나 경험하는 스콜과 같은 빗줄기가 쏟아져도 그러려니 한다. 오히려 지금까지 환경이라는 무제한 데이터를 마음껏 쓰다가 갑자기 절약해야 한다고 하니 불편해한다. 기후 위기나 지구 온난화의 원인이 자원의 무분별한 사용과 오남용에서 비롯된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어떻게 될까? 과학자들은 지구 온도가 1도 높아졌다고 세상의 위기를 이야기하지만 현실적으로 체감하기는 어렵다. 과연 해결책은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런 의문이 들던 중에 책 한 권을 만났다. 현직교사이자 환경학자이기도 한 심정은 작가의 『환경수업도 업사이클링이 필요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아이들과 함께 학교 현장과 사는 마을을 개선하고자 했던 교사의 현실적인 노력을 촘촘히 다루고 있다. 사례가 풍부한 만큼 글이 주는 신뢰감도 상당하다.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단순하다.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 출발은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는 일이다. 내가 즐겁고 행복해야 세상의 변화도 가능하다. 우리가 친환경이라고 착각했던 에코백 이야기를 읽다 보면 뜨끔하다. 친환경이라는 단어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무수히 많은 기념품은 ‘환경’이라는 그럴싸함으로 포장한 쓰레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저자의 바람처럼 10년 후 어느 날, 수업시간에 자신들이 환경을 고민하며 만든 에코백을 들고 만나는 아이들을 상상해 본다. 기후 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기다리는 행복은 그냥 오지 않는다. 변화에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의 말처럼 우리의 전환은 “그냥 지나치던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하는 순간”부터 시작한다. 그런 선생님과 함께 자란 아이들이 있는 한 우리의 미래는 어둡지 않다. 교육 현장에 계신 선생님만이 아니라 학부모,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주제가 책에 가득하다. 무더운 여름, 휴가지에서 이 책을 벗 삼아 떠나는 건 어떨까? 돌아오는 길에는 세상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장창영 작가는 전주 출신으로 20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불교신문·서울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돼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시집으로 <동백, 몸이 열릴 때> 와 문학이론서 <디지털문화와 문학교육>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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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31 16:57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경옥 아동문학가-이현지'한성이 서울에게'

역사는 다양한 예술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소설뿐 아니라 드라마나 영화, 게임에서도 다각적으로 활용된다. 예전에는 직접 역사적 공간으로 들어가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면 지금은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한다. 역사적 인물을 현대로 데려오는 판타지와 현대와 과거를 넘나드는 이야기가 혼재하기도 한다. 아무튼 역사적 사건과 공간은 독자들에게 호기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주요한 소재로써 작용한다. <한성이 서울에게>라는 판타지 역사 동화는 현대를 사는 인물에게 백제 때 천연두로 죽었던 귀신이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현대에 사는 ‘서울’이라는 여자아이는 백제 때 쌓아 올린 풍납토성 부근에 살고 있다. 나이 차이가 나는 대학생 오빠가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고 익사하는 사고를 당한 뒤 집안은 무기력증에 빠져있는 상태다. ‘서울’이는 오빠처럼 남을 위한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한성’이라는 백제 귀신은 자신의 독무덤이 있는 ‘서울’이네 집 마당이 자기 집이라며 떠나지 않고 살고 있다. ‘서울’이네 집 주변은 아파트 재개발에 한창 열을 올리고, 주변 사람들은 다 떠났지만 ‘서울’이네 집과 이웃 할머니 집만 남아 있다. 서울이네는 삼 대째 살아오던 집이기 때문에 이사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물론 경제적 여력도 되지 않는다. 백제 귀신은 서울이네 집 앞마당에 자신의 시신이 묻혀 있는 독무덤이 세상에 나와 박물관으로 가야만이 길잡이를 만나서 이승을 떠날 수 있다고 말한다. 풍납토성 인근은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면 공사가 멈추기 때문에 설령 공사 중에 유물이 발견되더라도 몰래 없애거나 신고조차 하지 않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밤이면 도굴꾼들은 풍납토성 인근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다. 그러다 도굴꾼 3인방은 서울이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고 어머니가 간호하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에 배관공으로 위장하고 들어온다. 서울이네 집 앞마당에 유물이 있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결국 도굴꾼들이 찾아낸 유물은 한성이의 독무덤이었다. 백제 양식의 ‘굴 돌방무덤’이었지만 도굴꾼들은 오직 돈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결코 남을 돕지 않겠다던 서울이와 한성이가 독무덤을 지켜내며 유적이나 유물은 돈이 아니라 지켜야 할 가치라고 말한다. “이천 년이 지났다고 사랑했던 마음까지 다 흙먼지가 된 줄 아세요? 저건 돈이 아니에요. 남겨진 사람이 떠난 사람을 사랑했던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도 훔쳐 갈 수 없다고요.” 도굴꾼에게는 유물이 단순히 돈의 가치로만 여겨졌지만 서울이는 세상을 떠난 오빠의 유품을 치우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백제 귀신인 한성이도 자신을 묻을 때 엄마의 귀걸이 한쪽을 껴묻거리로 넣어준 것을 생각하며 유물은 남은 자들의 사랑이었다고 여긴다. 우리 사회가 많은 것을 물질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세상에 살다 보니 자칫 소중한 가치를 잊을 때가 있다. 그래서 유물을 단순히 돈으로 환산하는 사회적 현상이 만연한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두 아이는 잊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가치가 있다며 세상을 향해 외친다. 물질적인 것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유물은 단순한 흙덩이나 돈이 아니라는 사실과 사랑의 흔적이라고 작가는 강조한다. 그것은 유물이 단순한 부장품이 아니라 누군가 사용했던 물건일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남겨진 유물은 누군가의 사랑하는 마음을 기억할 때 가치가 살아나기 때문일 것이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는 기억이다. 시간을 견디는 기억이 역사인 것이다. 이경옥 아동문학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두번 째 짝>으로 등단했다. 이후 2019년 우수출판제작지원사업과 지난해 한국예술위원회 ‘문학나눔’에 선정됐었다. 그의 저서로는 <달려라, 달구!>, <집고양이 꼭지의 우연한 외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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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4 16:2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기우 극작가-표성흠 '교룡'

담락당 하립(1769∼1830)과 김삼의당(1769∼1823)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문학인 부부다. 두 사람은 남원시 향교동 유천마을에서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났다. 18세(1786년)에 혼례를 치렀으며, 33세(1801년)에 선영을 지키기 위해 진안군 마령면 방화마을로 옮겨 살았다. 두 사람의 고향인 유천마을에 첫날밤 부부가 나눈 시를 새긴 시비와 벽화가, 교룡산국민관광지에 삼의당의 시 「화만지」를 새긴 시비가 있다. 진안군 마이산 들머리에는 부부의 영정을 모신 명려각과 시비가, 백운면 원덕마을에 부부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부부는 쇠락한 양반 가문의 후손이라는 내력과 글재주도 비슷했다. 담락당은 평생 책을 벗 삼았지만, 벼슬에 나서지는 못했다. 문집 『담락당집』을 남겼고, 2000년 진안문화원에서 시 209수를 엮어 『담락당 시집』을 냈다. 이름 없이 남편이 지어준 당호로만 알려진 김삼의당은 조선의 여성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다. 입신양명을 위해 먼 곳에서 공부하는 남편을 향한 애정과 기대, 육아와 시집살이, 가난한 살림을 꾸리는 여인의 일상 속 크고 작은 일과 자연의 멋을 소재로 쓴 시 111편 253수와 산문 26편이다. 『김삼의당 시문집』(제일사·1982)이 있으며, 『삼의당 김부인 유고』(신아출판사·2004)로 번역·출간됐다. 두 사람의 지난한 시절은 표성흠의 장편소설 『교룡』(산지니·2022)에서 더욱 애절하게 그려진다. 작가는 ‘삼의당·담락당의 운명적 만남’을 부제로, 두 사람을 남녀평등을 실천하고 순수학문을 탐구하며 이상적인 삶을 추구한 인물로 묘사한다. “발은 땅에 딛고서도 머리는 하늘 높이 두고 사는 ‘꿈꾸는 사람들’, 그것도 혼자가 아닌 부부가 똑같이 꿈을 먹고 살던” 천상배필이다. 작가의 상상은 시대와 지역에 대한 진중한 고민이 스며 있다. 소설 속 담락당은 조선 후기 과거제도의 폐단에 회의를 느끼고, 김시습·박지원을 본보기 삼아 실학을 강조하고 문체의 혁신에 동참한다. ‘삼례’라는 이름을 얻은 삼의당은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노동의 숭고함과 남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시에 옮기며 삶을 감내하고, 낭만을 놓지 않는다. 이야기에 맞춰 소개하는 담락당과 삼의당의 작품들도 작가의 치열한 탐색의 결과다. 담락당과 삼의당의 삶과 작품에 관한 존중은 지금의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서로 색깔이 다른 두 객체가 만나 하나가 되자면 각자가 가진 포부를 굽힐 줄 알아야 한다. 길을 하나로 바로잡아야 옳게 갈 수 있다. 강물이 산언덕을 의지 삼아 그 안으로만 흐르듯 서로의 굽어짐 속으로 흘러가야 한다.”라는 부부의 길이다. 굽어든다고 체면 깎이는 일이 아니다. 전북의 유서 깊은 장소와 여러 설화를 풍성하게 소개한 것도 작가가 선사한 미덕 중 하나다. 남원시의 광한루·교룡산성·덕밀암·만복사저포기·요천·유천마을·인월, 무주군의 최북, 임실군의 ‘오수의 개’, 장수군의 타루비, 진안군의 마이산·마이탑·만취정 등 『교룡』 속 전북 곳곳을 둘러보면 담락당과 삼의당이 일깨운 부부의 도가 자연스레 떠오를 것이다. 최기우 극작가는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했다. 희곡집 <상봉>,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은행나무꽃>, <달릉개>, <이름을 부르는 시간>, 어린이희곡 <뽕뽕뽕 방귀쟁이 뽕 함마니>, <노잣돈 갚기 프로젝트>, <쿵푸 아니고 똥푸>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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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7 17:2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황지호 소설가-한그루'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 시집'

약 270년 전, 무주군 부남면 대소마을에 돌림병이 발병했다. 나룻배를 건져 올려 수로를 막고, 대문바위를 닫아걸어 육로를 폐쇄한 뒤 치료에 전념했으나 소용없었다. 다들, 이제, 사람의 힘으로는 역병을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웃 마을에서 디딜방아를 몰래 가져와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디딜방아는 형상과 기능, 의미와 상징이 주술적으로 해석되어 액을 방어하는 주력(呪力)의 신물로 여겨져 왔다. 정월 보름밤 디딜방아를 제물 삼아 일명 ‘방앗거리제’를 지냈다. 제주는 남자가 아닌 여자, 당골네였다. 제사를 지내고 나면 ‘고사요’를 부른다. 산 자와 죽은 자, 살리려 했던 자와 살아나지 못한 자의 슬픔을 위로하는 노래. 그 한(恨)을 달래주는 노래를 시(詩)로 여길 수는 없을까. 제주 4·3을 다룬 흑백영화 「지슬」. 지슬은 지실(地實)에서 온 말로 감자를 뜻하는 제주도 사투리다. ‘實’은 ‘열매’라는 뜻도 있지만 ‘사실’이라는 뜻도 있다. 1948년 11월 말부터 이듬해 1월까지 감자 줄기 같은 동굴에 숨어 지슬로 연명하다 끝내 희생당한 안덕면 무등이왓 주민들의 ‘사실’을 담고 있다. 영화는 ‘신위·신묘·음복·소지’ 네 꼭지로 전개된다. 희생당한 영혼을 위로하는 제의이자 굿판임을 알게 하는 표지다. 카메라가 굿판을 열기 전 내담자의 아픈 사연을 느끼는 무당처럼 사람과 사건, 4·3의 제주를 관찰한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는 동안 고사요 같은 노래 ‘이어도사나’를 죽은 자들이 부른다. “아방에 아방에 아방덜, 어멍에 어멍에 어멍덜, 이어도 가젠 살고나 지고, 제주 사름덜 살앙 죽엉, 가고저 허는게 이어도우다” 이 노래와 영화를 4·3을 위로하는 시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백석 시인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씨봉방」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위 옆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갈매나무’가 하얀 무명옷을 입은 무녀처럼 느껴진다. 신령한 산, 정령과 다름없는 바위 옆에서, 추위와 외로움을 인내하며 ‘쌀랑쌀랑’ 방울을 흔드는, 그리하여 고통과 슬픔에 사무친 산 아래 사람들을 위로하는 가녀린 무녀. 이 시를 그 무녀가 백석의 목소리를 빌려 부른, 무가(巫歌)로 받아들이면 안 될까. 문정희 시인의 시 「곡비」의 마지막 두 연은 다음과 같다 “그네의 울음은 언제나 그칠 것인가/ 엉겅퀴 같은 옥례야, 우리 시인의 딸아/ 너도 어서 전문적으로 우는 법 깨쳐야 하리//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 알아야 하리” 「4·3 시집」에 담긴 77편의 시를 디딜방아로, 지슬로, 영험한 방울 소리로, 까무러치는 울음으로, 사십구재 씻김 소리로 생각하면 안 될까. 시인들을 늙은 당골네로, 엉겅퀴로 같은 곡비로, 하이얀 무녀로, 무등이왓 바라보는 서러운 박수무당으로 여길 수는 없을까. 황지호 소설가는 202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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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0 17:1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정경 시인-임주아'죽은 사람과 사랑하는 겨울'

물결을 닮은 사람이 있다. 한자리에 멈춰 있지 않으며 다른 존재들을 기꺼이 받아들여 투영해 낸다. 끊임없이 존재의 기슭을 어루만지는 사람. 임주아 시인이 그런 사람이다. 그가 운영하는 서점 ‘물결서사’의 이름처럼. 그이는 수년 동안 전주 선미촌에서 ‘물결서사’를 지키며 책을 팔고,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을 그 오지 아닌 오지(?)로 초청해 소박하고 사랑스러운 문학 행사들을 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심 ‘쓰는 자’의 정체성을 고심했으리라. 마침내 그이가 보낸 물결이 한 권의 시집으로 우리에게 도착했다. 임주아 시인의 첫 시집 『죽은 사람과 사랑하는 겨울』(걷는 사람)은 로맨틱하다. 사랑의 상승과 하강, 타인과 시적 주체와의 간극, 그로 인해 생겨나는 불안과 갈등, 헤어짐과 남겨짐의 정서가 “살아난 사람”과 “죽은 사람” 같은 힘이 센 시어들로 직조된다. 시인이 물결 위에 적어 보낸 시를 읽으면 여흔이 “물결무늬”처럼 남는다. 산문시 「백행」에서 시인은 “물속은 꿈결 꿈속은 물결 사랑하는 것과 망가진 것 무너진 것과 돌아선 것 튤립처럼 팔 모으고 똑똑 물방울을 받”아내듯 “등 푸른 잎사귀에 대고 속삭이면서 비밀 많은 부족처럼 씨앗을 귀하게 여기기 잠깐 바람결에 사랑을 두기”를 스스로에게 주문한다. “매일 한 폭씩 넓혀가는 마음으로”(같은 시), “산책할까”(「무성인」) 하고 우리에게 묻는다. 사랑의 대상을 굳이 연인으로 한정 짓지 않는 것이 시의 풍미를 더 살리는 길이 되겠다. 다른 존재와의 조우, 그들을 혹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의 숱한 감정적 일렁임이 임주아 시의 서사를 만들고 서정을 일깨운다. 그렇기에 그이는 “세상이 너무 커다란 구멍 속으로 사라져”도(「홀」), “나는 살아남아 사랑을 돌보았다”(「폐업」)라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이 느낀 단 한 번의 즐거움을 쪼개고 쪼개 나빠지려하는 마음에 이어 붙이면 조금 아물 수도 있을까. 오늘이 좋대도 내일은 모르겠고,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알 수 없지만. 다짐도 싫고 각오도 싫고 계획도 싫지만. 다만 덜 절망적이고 덜 미워하며 살고 싶다. (중략) 나는 매일 달라서 오랜만에 크게 웃고 떠들며 갑갑한 껍질을 벗고 한 달에 한 번 신중하게 울며 살아난 사람이 될 수도 있다.”(산문시 「울며 살아난」)라고 했으므로 나는 그에게 “이상한 믿음”이 생긴다. 임주아 시인에게서 시작된 시의 물결이 덜 절망적이고 덜 미워하며 사는 세상으로 인도해 줄 것이라고. 무릇 시인이란 존재는 자신만의 언어로 슬픈 세상을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글 쓰고 책 파는 임주아 시인이 총괄기획자로 활동하는 ‘전주책쾌’가 7월 6일부터 이틀간 전주 남부시장 ‘문화공판장 작당’에서 열린다. 독립출판물을 소개하는 이 북페어를 위해 지금쯤 그는 머리를 질끈 묶고 눈을 빛내며 종횡무진하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외롭게, 용감하게 자기 영토를 만들어온 독립출판인들과 작가들이 미지의 독자들과 만나는 자리. 부디 글을 쓰는 사람도, 책을 만드는 사람도, 책을 파는 사람도, 그 책을 읽는 사람도 글 너머의 다른 존재들의 사랑을 느끼게 되기를. 그 행위가 물결처럼 멈추지 않기를. 그리고 그 힘으로 임주아 시인이 다음 시를 써내게 되기를. 무한한 응원을 보낸다. 김정경 시인은 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검은 줄’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시집 <골목의 날씨>가 있다. 자칭 ‘산책중독자’. 오래된 골목을 유람하며 채집한 이야기로 시도 쓰고, 산문도 쓰며 살고 있다. 현재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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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03 17:2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근혜 작가-군산구암초등학교 '나는 경암동 철길 마을에 살아요'

똑 단발에 얼굴이 갸름한 소은이가 물었다. “선생님, 시가 뭐예요?” 소재 하나 달랑 주고 동시를 써보자 했을 때 날아온 질문이었다. 시의 정의를 묻는 건지, 선생님이 생각하는 시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건지 알 수 없었던 나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소은에게 이렇다 할 답을 주지 못했다. 손에 든 지도서를 들고 입술만 깨물다 수업을 끝낸 기억에 나는 지금도 시가 어렵다. 군산구암초등학교 아이들은 시가 뭔지 알까? <나는 경암동 철길마을에 살아요>를 설레는 마음으로 펼쳐본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으면 시를 읽는 바른 태도가 아닐 것 같아 양 엄지손가락을 맞대고 책장을 펼쳤다. 그렇게 나온 시가 <내 귀>다. ‘내 귀는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엄마가 빨래 널자 하면/안 듣고/밥 먹으라 하면/바로 일어나 먹는다./내 귀는 참 신기하다/’<내 귀 전문> 아이는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선택적 귀를 가졌다. 시를 쓰지 않았다면 몰랐을 자신이다. 이 아이뿐만 아니라 많은 아이가 시 쓰기를 통해 진짜 자기를 찾은 듯하다. ‘저는 고백합니다./사실 겉으론 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속으론 학교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겉으론 학원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속으론 학원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고백 일부> 녹록치 않은 현실로 아이들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내적 갈등을 겪는다. 불행히도 시작부터 지는 싸움이라는 걸, 어른이 정한 대로 돌아가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안 아이의 고백은 독백이 되어 버린다. ‘나는 나예요/누가 못생겼다/나쁘다/못 한다 해도/나는 나예요’<나 전문> 아이는 못난 ‘나’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그것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과 같다. 다섯 줄의 시가 현자의 말보다 값지다. ‘맨날 아빠가/ 땀에 젖어서 온다//모기가 땀 냄새를 맡고/같이 온다/아빠가 모기를/배달하는 것처럼’ <아빠는 모기 배달 기사 전문> 만날 땀에 젖어 들어오는 아빠를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아이. 그런 아이에게 모기는 무찔러야 할 악당이다. 노동의 가치가 폄하되는 시대, 땀의 농도가 진한 직업일수록 기피 대상 1호인 시대이지만 아이에게는 그런 아빠가 우상이고 자랑이다. 다만 이 아이가 커서 살아갈 세상은 흘린 땀만큼의 대가를 인정해 주길 바라본다. 세상은 정글이다. 어린이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렵고 놀람의 연속이다. 그러나 미리 겁먹지 않는다. 구암시인학교 아이들이 쓴 시가 그걸 말해준다. 청정지역에서 막 길러낸 유기농 동시를 읽으니, 시가 뭔지 조금 알 것 같다. 덧씌워지지 않은 명징한 세계를 경험하게 해 준 어린 시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더불어 많은 사람이 파릇파릇 생기 돋는 시어들로 잘 차려진 밥상을 받길 바란다. 단짠단짠, 시큼털털, 매콤달콤, 쌉싸래한 시의 맛을 느끼며. 김근혜 작가는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동화 『다짜고짜 맹탐정』과 『봉주르 요리 교실 실종 사건』, 『유령이 된 소년』, 『나는 나야!』, 『제롬랜드의 비밀』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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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26 16:3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영주 작가-나혜경 '우리는 서로의 나이테를 그려주고 있다'

무심코 리모컨을 돌리다 멈췄다. 유명 연예인이 자신의 엄마와 차를 타고 여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엄마의 굽은 등을 딸의 가슴으로 지그시 누르는데 딸의 표정은 웃음과 울음의 경계다. 엄마는 뒤에서 푸근히 밀어주는 딸에 행복하기만 하다. 하지만 딸과 엄마는 다르고 같다. “바닷가에 가자.” “바닷가에 다 왔어.” “저기 쑥 봐라.” “엄마, 내 친구네가 제주도 여행가서 바다는 안 보고 쑥만 뜯었데.” “저기 낚시한다.” 모녀의 대화는 자꾸 어긋났다. 딸은 웃었다가 빗나가는 엄마를 이해 못해 난감해 하다 이해돼 웃기를 반복했다. 엄마는 딸의 나이를, 딸은 엄마의 나이를 체험하는 여행이었다. 같이 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서로의 나이테를 읽으며 이해해갔다. 공감되는 장면을 보다 『우리는 서로의 나이테를 그려주고 있다』가 떠올라 펼쳤다. 색연필로 그린 꽃과 사물, 독학으로 그린 그녀의 마당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다. 잘 익은 노오란 모과의 윗부분에 눈이 쌓이면 마치 모과나무가 등불을 들고 환하게 빛나고, 모과가 눈에 쌓여 떨어지는 풍경, 콜드블루 커피 내리는 느릿느릿한 여유를 배운다. 비 오는 날 장화를 신고 우산을 받치고 깨끗해지는 마당을 거니는 마음이 싱그럽다. ‘12월과 1월, 쉼의 시간을 지나면 2월부터는 벌써 땅을 뚫고 새싹이 올라오는 게 보이기 시작한다. 나무의 꽃눈도 발갛게 부풀어 올라 금방이라도 꽃을 보여줄 태세다. 마당은 이렇게 같은 자리에서 돌고 돈다. 그래도 지루하지 않다.’(본문 중에) 내 마당에 핀 꽃을 한 삽 퍼서 이웃과 꽃 한 삽을 교환해 두 가지로 늘어나 피었다. 꽃씨 나눔으로 마당을 채우니 2개월의 쉼을 지나면 새싹이 얼굴을 내민다. 해마다 새로 내미는 얼굴이 반가울 따름이다. 전원생활을 꿈꾸다 제 코 다친 사람이 있다. 바로 나다. ‘나무가 이리로 넘어오니 잘라라. 분리수거 잘 해라. 쓰레기봉투 여기다 버리지 마라라.’ 사사건건 관여에 못 이겨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색소폰 소리가 소음으로 들린 동네가 있다니 동병상련을 느껴서일까 전원생활을 즐기는 것보다 위안을 받는다. 아니, 전원생활에 적응하는 시인이 부럽기 그지없다. 사람이 뜸한 시골마을에 인기척이 반가울 만한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동네를 돌아다니던 노인들은 하나 둘 사라지는 고즈넉한 마을에 사람을 배척하는 심보를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크기가 작아도 하늘이 보이고 자연의 질감을 느낄 수 있는 땅이면 다 마당이다. 마당은 집 안에 있는 사람을 바깥으로 불러내는 곳이며, 우울할 때 기대거나 붙잡고 일어서기에도 좋은 곳이다. 세상 밖으로 나가기 전 심호흡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완충지대이다.’ (본문 중에서) 나혜경 시인의 마당 예찬론을 읽은 후 마당을 보니 수레국화, 금국, 마가렛이 바람에 흔들리는 마당의 여유로움을 새삼 느껴본다. 낮에 우거졌던 마당의 풀을 베어냈다. 풀냄새가 가득하다. 하늘에는 별이 하나 둘 고개를 내밀고 고요 속에 와글와글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까지 어우러진다. 김영주 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됐으며, 같은 해 동양일보 동화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저서로는 장편동화 <레오와 레오 신부>, 청소년 소설 <가족이 되다>, 2023년 수필 오디오북 <구멍 난 영주 씨의 알바 보고서>, <너의 여름이 되어줄게>, 5人앤솔러지 청소년소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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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19 17:3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영종 시인 –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사소해서 두렷하고 실제적이며 아름다운 이야기는 이리 막을 엽니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뜻하는 게 넌지시 드러나 있어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떠올리기 쉽지 않아요. 그러나 다 읽고 난 후, 채 가시지 않은 감동을 데리고 처음으로 와보세요. 안에 있는 것을 흘러넘치지 않게 하여 휴머니즘을 안겨주는 오월의 이파리들이 느껴질 것입니다. 가야 할 길을 가는 간결한 강물을 보게 되겠지요.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여성들을 빨래처럼 비틀어 가혹하게 짜냈던 수녀원 소속 '막달레나 세탁소'는 막강한 세상을 상징해요. 미시즈 윌슨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일하던 중 임신을 한 펄롱의 열여섯 엄마는 너무 약하죠. 아버지는 윌슨의 부유한 친척으로 추정될 뿐이죠. 그래도 자식이 없는 윌슨이 그를 돌보며 소박하게 살아갑니다. 농장 일꾼인 네드도 같이 살았는데 집안에 다툼이 거의 없었어요. 펄롱도 윌슨의 배려 덕에 자리를 잡고 살아요. 소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아내와 딸들에게 기쁨을 느끼면서 말이죠. 실업수당 받으려는 사람들 줄이 길어지고 있어요. 모든 걸 잃는 일이 쉽게 일어난다는 걸 안 펄롱은 버티고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그렁저렁 어울려 살기를 바라죠. 그리고 딸들이 유일하게 괜찮은 수녀원 여학교를 탈 없이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혀요.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갔다가 석탄광에 갇힌 아이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도움을 청하는 아이를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 펄롱을 괴롭혀요. 그는 모든 걸 잃을 수 있는 선택 앞에서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같은 선물을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을까”, 고뇌합니다. 수녀원이 갖는 힘은 사람들이 주는 만큼이라 말하다가, 그와 수녀원 여학교 사이에는 얇은 담장 하나뿐이라는 충고를 들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힘들어했던, 늘 어머니와 함께 미사에 가고 같이 식사하고 밤늦은 시간까지 불가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그를 더 나은 혈통으로 만들었던, 그의 구두를 닦아주고 구두끈을 매주고 첫 면도기를 사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네드. 그리고 친절과 격려,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작은 것들로 그의 삶을 이루어준 윌슨. 그 둘 덕분에 그는 감히 하지 못했던 일을 합니다. 가늠쇠인 왼쪽 손목 아래에서 사소한 차이로 떠난 화살이 멀리 가면 크게 달라지듯 말이죠. 펄롱은 아이를 데리고 나와요.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만, 단 한 번도 이와 견줄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느끼면서 말입니다. 그의 삶은 하찮고, 간소하고, 모호했지요. 그러나 안에 웅크리고 있던 것은 품격 있는 불씨였던 것이죠. 이영종 시인은 2012년에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아르코 문학창작기금에 선정돼 2023년에 첫 시집 <오늘의 눈사람이 반짝였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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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12 15:55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아현 소설가-장창영'나무의 문을 열다'

완판본의 도시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한 완판본문화관. 전주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 눈과 귀에 익도록 보고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어렴풋이 조선시대의 전주가 서울과 비등한 거대 출판도시였노라고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얄팍한 배경지식 탓에 책을 마주치자마자 난관에 부딪혔다. 부제의 ‘각수’라는 단어의 뜻을 짐작만 할 뿐 정확한 정의를 들어본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각수’를 인터넷에 검색하고 말았다. 예상대로 ‘판목에 글자를 새기는 사람’ 뜻을 가진 단어를 들여다보다 무심코 의문이 생겼다. 목공을 생각하면 목수가 떠오른다. 업을 생각하면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떠오르는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완판본의 도시 전주’라는 소리를 귀에 익도록 들어왔음에도 각수를 떠올리지 못했던 일은 당황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이미 없어진 일과 사람이라고 무심하게 생각해 온 탓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가장 큰 목표는 완판본이라는 단어만큼이나 판각이나 각수와 같은 단어와 최대한 친해지는 것이었다. 『나무의 문을 열다』는 저자가 완판본문화관에서 여러 시민 각수들과 함께 ‘천자문’을 판각본으로 제작하고 인출 및 교정, 출간까지의 과정 일체를 담은 책이다. 단순히 과정을 기록하는 것에서 나아가 과거의 판각 방식에 대한 소개와 각수로 참여하는 저자의 마음을 책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약 1년에 천 장 정도의 판각을 해야 한다면 개인이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마무리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오히려 누군가가 전체 윤곽을 잡고, 다음 사람이 각을 하고 그 다음 사람이 바닥을 마무리하고, 마지막에 숙련된 이가 최종 교정을 하는 방식이 훨씬 더 속도가 났을 것이다. 그것 역시 오랜 경험에서 얻은 노하우였으리라. 시간과 싸워야 하는 우리에게는 이런 공동체 협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 밖에도 판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품을 수 있는 궁금증들을 저자는 속 시원히 긁어준다. 완판본문화관에 동의보감이 전시되고 있는 이유, 판각에 사용하는 조각칼에 관한 이야기, 현대의 출판과 판각을 통한 과거 출판의 차이점 등 직접 각수가 되어 나무에 글씨를 새기며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하나같이 흥미롭다. 자주 놓치던 삶의 지혜를 되새기기도 하고, 잊고 지내던 공동체의 협력을 멋들어지게 내어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분주히 손을 움직이고 서로 협력하는 과정을 통해 결과물을 내는 각수들의 대장정이 덩달아 벅차오르기까지 한다. 우여곡절을 겪은 초보 각수들의 출판기를 응원하다 보면 책의 말미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책은 그냥 오지 않는다. 책을 쓴 저자, 책을 만드는 데 참여했던 사람들의 온 인생이 함께 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책을 선물받으면 설레고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 아닐까.” 결국 나도 나무의 힘을 느끼며 판각을 해보고 싶다는 욕심까지 들게 한다. 흥미가 생기더라도 막막해하지 않아도 된다. 저자가 참여한 판각 교실을 진행한 대장경문화학교의 홈페이지를 둘러보면 답을 찾을 수 있다. 비정기적이기는 하나 10여 년의 세월 동안 꾸준히 판각교실을 운영하는 듯하다. 멋진 책이 내 삶에 불쑥 오기를 기다렸다면 이제는 책에 다가서 보는 것은 어떨까. 최아현 소설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아침대화>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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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29 17:3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진숙 수필가-이주 혜'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습니다." ‘2024 전주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이주혜 작가의 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에서 만난 문장이다. ‘내가 기록한 나와. 내가 기록 속에 가두어놓은 나와. 여전히 과거의 기억 속에서 헤매는 나와.’(본문 중) 헤어질 수가 있다는 말은 흡인력이 강했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다면 지면 위로 건져 올려 일광욕을 시켜야할 것이다. 옭아매는 어제로부터 벗어나야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나’는 쉰 살이 넘은 여인이다. 남편이 정당 당원의 한 여성을 스토킹 하면서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다. 운영하던 학원은 문을 닫게 되고 단란했던 가정도 무너지게 된다. 그러나 남편은 사과조차 하지 않고 훌쩍 떠나버린다. 딸마저도 엄마를 원망하며 독립한다. 혼자가 된 주인공은 외부와 단절한 채 내면의 동굴에 빠져 허덕인다. 죽을 것 같은 공황장애를 겪으며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다.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서 동굴에 숨어드는 것과 일기 쓰기의 연관성을 의심하는 주인공에게 글방 선생님은‘일기를 쓴다는 것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객관화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방법’이라며 숙제를 내준다. “헤어지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기록하세요. 어떤 수치심도 글로 옮기면 견딜만해집니다.” 삶에서 가치를 찾고,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가장 구체적인 통찰을 할 수 있는 것이 ‘일기 쓰기’임을 강조한다. ‘나’는 ‘시옷’이라는 인물을 설정해 소설 같은 일기를 쓴다. 1971년생인 시옷의 유년은 유복했지만 아빠의 부도로 불우해진다. 교동의 마당 넓은 집을 떠나서 철둑 너머보다 더 깊숙한 군경묘지 옆으로 이사를 한다. 합창단복 오천 원이 없어서 겪는 수모, 편견으로 가득 찬 지휘자 선생님을 비롯한 무서운 어른들, 계엄령으로 인해 곳곳을 지키는 군인들의 총부리, 몽둥이와 방패를 든 전경들, 그들을 피해 도망을 가다가 데모꾼들 밑에 깔려 의식을 잃은 친구 애니, 신경질적인 선생님으로부터 모욕을 당하는 친구 윤수, 최선을 다해 살던 윤수의 자살 앞에서 고단했던 그의 삶을 애도하는 동생 수호, 여전히 애증의 관계인 엄마. ‘내가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니 알겠다.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은 없다고.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다가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겉보기와 달리 속은 무척 시끄러웠을 거라고. 여러 번 무너지고 또 무너졌을 거라고. 그래도 매 순간 끊임없이 선택하면서 그렇게 한발 한발 앞으로 걸어갔을 거라고. 사는 게 원래 그렇다고. 이제야 겨우 알겠다.’ (본문 중) ‘나’는 일기 쓰기를 통해서 유년의 상처들을 만나고 그 윗목의 시린 감정들을 토닥여준다. 비로소 ‘나’는 엄마의 폭폭함을 이해할 수 있고 딸과도 소통이 시작된다. 봄과 여름이 포개지는 이 계절에 ‘시옷’과 함께 읽고 쓰면서 내 안의 ‘시옷’과 화해하고 새롭게 출발할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빈다. 어떠한 감정도 글로 옮기면 내 안의 ‘시옷’이 견딜만한 힘을 줄 것이다. 이진숙 수필가는 전직 국어교사 출신으로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 당선됐다. 이후 최명희문학관에서 “혼불” 완독 프로그램 진행하며, <우리, 이제 다시 피어날 시간> 오디오북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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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22 17:47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작가-김유석 ‘왕만두’

“어른도 전에는 어린이였다.” 기능 중심의 세계에서 동심을 잃지 않은 김유석 시인의 동시집을 읽으며 내내 드는 생각, 짱 재밌다. 작품 속에서와 비슷한 경험이 생각나 표제작인 <왕만두>를 읽다 한참을 웃었다. 또 ‘작가가 창조주라 하더라도 동식물 혹은 무생물과의 상호작용이 가능할까?’에 대한 의심은 61편에서 완벽하게 해소되었다. 초록이 무성해지는 이때 수많은 식물들이 말을 걸어오기도 하고 거미, 지렁이, 토끼, 개미, 후크선장 개구리 등이 휙휙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에게 관측되는 식물들은 그저 묵수의 시간을 건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유석 시인은 관점의 사각지대, 땅속 ‘은밀한 통로’를 알고 있는 듯하다. 시인은 오래도록 농사를 짓고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살아왔다. 그런 사람만이 가능한 돌올한 세포와 지독한 감응능력으로 그들의 언어를 번역하고 프린트한다. 깊은 의미를 쉽게, 기발하게, 재미있게 전달하는 건 덤이다. 소위 참신한 발상에 의한 동심이 구현된 ‘시적 동시’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김유석 시인에게 나무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한 후 그 흔적을 나이테에 잘 보관해오는 존재다. 알다시피 시간이란 유한성 때문에 추억은 너무나 간절한 것. “파란 잎이 노랗게 물드는 것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녀온 다른 나라의 지도를 제 몸속에 그려놓았기 때문”<나이테> 이처럼 동시집을 관통하는 주제, 자연과 인간의 공생이 가능함을 읽는다. 이와 반대로 인간과 자연의 부조화에 기인한 심각성을 거미를 등장시켜 유머러스하게 터치 한다. “공중에 거꾸로 매달려” “지구의 무게를 재는 중” “저 뾰족한 빌딩들을 헐어내면 지구가 덜 무거울 텐데”<거미> 어린이는 급속도로 성장 판이 열리는 시기다. 몸도 마음도 감나무처럼 커지고 싶은 질주본능. 그런데 감이 맛있으려면 숙성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온몸이 부르튼” 것도 “가려움도 참아야” 단맛이 고인 “홍시 한 알이 장독대에 툭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다<감은 어떻게 익나>. 이 같은 상황변속은 어린이의 성장과정과 병치되어 있다. 감이 익기 위해서는 온몸이 부르트고 가렵기도 하듯 감이라는 원재료에 무형의 시간을 대응시킴으로써 점진적인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성장 통 이후 쑥쑥 자라는 어린이처럼. 무엇보다 시인은 과거 농촌의 삶을 회고하며 그때만이 정답이라고 강조하지 않는다. 자연과 인간의 순환논리를 생활에서 길어 올린 감각에 문학적 상상력을 더할 뿐이다.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아빠의 공책>에서 ‘아빠의 공책’은 들판이다. “벼 포기들이 넘실거리고 맞춤법이 틀린 벌레소리”도 들리는 신기한 공책. 이어 땀이 논물처럼 들고나야 수확이 가능한 ‘들판을 학교’로 ‘땀을 말줄임표’로 치환, 농촌의 서정과 녹록치 않은 농촌의 현실을 암유하는 데서는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또 시인이 이끄는 대로 가다보면 몽상가가 되기도 한다. “석탄도 기름도 때지 않는 기차가 촉촉한 흙 위에 레일을 깔며 소리 없이 갑니다” “저 기차를 타면 시간표가 필요 없는 마을에 닿을 것만 같습니다.<지렁이 기차> 필자 또한 개미들의 동력으로 움직이는 지렁이 기차를 타고 개발 전 라다크와 같은 곳으로 떠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어린이는 조건 없이 송두리째 받아들여져야 한다.”를 구현한 작품도 참 재밌다. <닮은 감자>에서 감자라는 자연물에 나를 투사, 이질적 두 대상 간 정서적 소통을 가능케 한다. 울퉁불퉁 감자와 감자라고 놀림 받는, 아마도? 외모 컴플렉스가 있는 나. 그런 나한테 감자꽃 리본을 머리에 꽂아주는 우리 엄마가 있기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시적대상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 감자꽃이란 막강한 아름다움의 존재로 전이되기 때문에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고 번번이 시적형상화에 성공할 수 있다고 본다. 좋은 동시란? 어린이의 삶을 관념이 아닌 실감나는 언어로 어린이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고 본다. 김유석 선생님이 시인의 말에서 밝혔듯 “생각하지 말고 그냥 느껴 봐 생각을 많이 하면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리거든”라고 한 것처럼 염소와 토끼와 고라니가 슬금슬금 걸어 나오는 숲과 들판을 걸어볼 일이다. 그곳에서 셈 따위는 하지 말고 그들과 같이 호흡 한다면 이렇게나 아름답고 재밌는 동시가 쏟아질지도 모르겠다. 시인에게 자연은 관념의 대상이 아닌 일터이자 놀이터이며 시를 줍는 창작소일 것이다. 즉물적 표현의 대가 김유석 시인의 응축된 시어와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확장력이 김제 너른 들판에서 경작된 것이니 나는 그 낟알이라도 주워 볼 양으로 무작정 놀러가야겠다 생각한다. 기명숙 작가는 전남 목포 출신이며,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몸 밖의 안부를 묻다>가 있다. 현재 강의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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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15 15:5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은영 동화작가-곽재식'한국 괴물 백과'

역사 동화를 즐겨 써온 내가 언젠가 꼭 써보고 싶은 것은 환타지 동화이다. 지금껏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했던 놀라운 이야기를, 흡입력 넘치는 구성으로 엮어, 어린 독자들이 손에서 놓지 못하는 작품을 쓰는 게 내 오랜 꿈이다. 하지만 언제나 내 상상력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고, 구상했던 이야기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곤 했다. 갈 곳을 몰라 방황하던 그때 선물처럼 다가온 책이 바로 <한국 괴물 백과>이다. 이 책에는 곽재식 작가가 16년간 채집한 한국의 괴물 320종이 수록되어 있다. 18세기 이전 기록에서 찾아낸 것으로, 원전을 밝히고 있어 자료를 찾느라 고생했을 작가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책을 읽어가면서 우리나라에 이렇게나 다양한 괴물이 있다는 게 놀라웠고, 신기하고 괴상한 괴물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선조들의 혜안이 감탄스러웠다. 작가는 괴물을 소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괴물이 등장한 배경을 추측해보고 괴물을 소재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었으면 좋겠는지 방향까지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괴물 ‘강철’은 커다란 소, 말이나 용을 닮았는데 늪 속에 산다. 뜨거운 기운이 있어 늪이 달아오르는데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바닷물조차 끓어오른다. 하늘을 나는 능력이 있어 빠르게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사람을 헤치기도 하고, 논과 밭을 헤집고 다녀 가뭄이 들게 한다. 실제로 산 능선에 앉아있는 ‘강철’을 꽹과리와 징을 쳐서 쫓아내는 풍속이 있었고, 1957년에는 강철을 보았다는 내용이 신문에 보도된 적도 있었다. 작가는 농사일을 괴롭히는 사람이나 상황을 상징하는 강철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거나, 전쟁의 무기나 쇠붙이를 상징하는 강철이라는 말에서 괴물의 이미지가 만들어졌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만약 괴물 ‘강철’을 소재로 이야기를 만든다면 번개나 우박을 마음대로 날리는 무시무시한 존재이지만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괴물로 설정하면 어떨까 싶다. 환경오염이 심각한 요즘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자연재해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괴물은 백성의 말을 먹고 자란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괴물이 등장한 시대적 배경을 떠올리며 괴물을 이해하는 것도 흥미로운 방법이다. 『한국 괴물 백과』에 등장하는 괴물 속에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고, 그 시대 사람들이 꿈꾸었던 세상과 삶을 엿볼 수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조상들의 삶의 방식이나 세계관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으므로, 우리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만드는데 이 책이 소중한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책 속의 괴물과 함께, 어울려 놀고, 씨름하다가, 어르고 달래며, 소망하는 멋진 작품을 완성하고 싶다. 장은영 동화작가는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통일 동화 공모전과 이다 생명문화 출판 콘텐츠 공모전에서 상을 받고(공동수상), 전북아동문학상과 불꽃문학상을 수상했다. 2022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발표지원)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책 깎는 소년>, <으랏차차 조선 실록 수호대>, <열 살 사기열전을 만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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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8 17:4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기우 극작가-최동현 '순창의 판소리 명창'

판소리 역사에서 전북은 독보적이다. 명창의 반열에 처음 이름을 올린 권삼득과 모흥갑을 시작으로 상당수 명창의 고향이 전북이며, 소리의 바탕인 사설도 ‘가락과 장단의 언어’인 전라도 말이다. 남원은 <춘향가>·<흥부가>·<변강쇠가>의 배경지며, 전주대사습은 명창들의 기량을 겨루는 최고의 무대다. 고창의 신재효(1812∼1884)는 판소리 여섯 바탕을 집대성하며 판소리의 중흥을 꾀했다. 순창도 판소리사에서 뺄 수 없는 고장이다. 김세종·박유전·장재백·장판개 명창을 세상에 낸 곳이기 때문이다. 김세종(1825~1898)은 신재효 집에서 판소리 선생을 했기에 명창을 배출하고 판소리를 널리 알리는 일에 큰 역할을 맡았다. 장재백·김찬업·이동백·이선유 등이 그의 문하이며, 최초의 여성 명창 진채선의 소리 선생도 그일 가능성이 크다. ‘판소리는 창을 주체로 그 짜임새와 말씨, 창의 억양반복, 고저장단이 분명하고 규율이 맞아야 한다.’라는 원칙을 지킨 <김세종바디 춘향가>는 김찬업을 통해 정응민으로 이어지며 보성소리로 정착돼 소리꾼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동계면 가작리 쑥대미 출신이라고도 하고, 팔덕면에서 나고 인계면에서 살았다고도 한다. 박유전(1834~1904)은 ‘서편제의 아버지’로 불린다. 대원군은 그의 소리에 ‘제일강산’(천하에서 제일)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무과 선달의 명예직 벼슬을 내렸다. 복흥면 서마리 마재마을 출신이다. 장재백(1849~1907)은 순창과 남원 일대의 동편제 법통을 전승했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여성 명창인 이화중선·이중선·박록주는 그에게 적성면에서 소리를 배웠다. 따라서 그는 남원의 판소리사에서도 중요하다. 남원을 떠나 구례로 뻗어간 송흥록 가계의 동편제 소리 대신 남원의 소리 맥을 지키고 번성시킨 소리꾼이 그의 후손과 제자들이다. 적성면 운림리 매미터 출신이다. 장판개(1886~1938)는 송만갑의 제자 중 첫손에 꼽힌다. 김채만의 고수로 들어가 소리를 배웠으며 다시 송만갑의 고수로 들어가 소리를 익혀 명창이 되었다. 1904년 7월 참봉 벼슬을 하사받았다. 금과면 연화리 삿갓데마을 출신이다. 유등면이 고향인 최동현(군산대 명예교수)의 『순창의 판소리 명창』(민속원·2023)은 박복남, 배설향, 성점옥, 이화중선, 장득주, 장득진, 장영찬, 주덕기, 한애순 등 스무 명에 가까운 명창을 소개하며 판소리사에서 순창의 공적을 풀어놓았다. 판소리의 해학과 저항, 시대정신은 오랜 세월 순창의 땅이 일궈온 맵고 야무진 기운과 다르지 않았다. 특히, 혹독한 독공으로 득음에 이르고 독창적인 바디로 일가를 이룬 김세종·박유전·장재백·장판개 명창의 삶은 책 이쪽저쪽에서 생생하다. 판소리는 스승에게 전승받은 소리를 그 시대 사람들과 긴밀하게 소통하고 변화하며 성장해 온 예술이고, 전통은 후대인에 의해 창조적으로 계승될 때 의미가 있다. 수많은 판을 거듭하며 여럿이 어우러져 이뤄내는 판소리의 굴곡처럼 순창에서 판소리 부흥을 위한 시도가 적극적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저자의 깊은 애정이 행간 곳곳에서 판을 벌인다. 더질더질. 최기우 극작가는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했다. 희곡집 『상봉』,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은행나무꽃』, 『달릉개』, 『이름을 부르는 시간』, 어린이희곡 『뽕뽕뽕 방귀쟁이 뽕 함마니』, 『노잣돈 갚기 프로젝트』, 『쿵푸 아니고 똥푸』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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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24 17:2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작가-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요즘 들어 시간이 갈수록 기술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든다. 과연 하루라도 핸드폰을 잊고 살아본 기억이 있는가? 최근 들어 인터넷 검색이나 유튜브를 하지 않고 살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그건 해외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보면 나는 삶의 상당 부분을 이들 전자기기에 의존하며 살고 있다. 만약 이들이 내 삶에서 사라진다면 과연 그 공백을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렵다. 이에 비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 등장하는 잔잔한 이야기들은 자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월든>에서 자신이 손수 오두막을 지었던 그곳에서 만난 자연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그중 압권은 <겨울의 월든 호수>와 <봄이 오다>이다. 눈 덮인 월든 호수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우리를 자연의 경이로움을 엿보게 이끈다. 한겨울을 이기고 생동하는 봄이 오는 역동적인 장면을 읽고 있노라면 사람들이 왜 이 책에 그렇게 빠져들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당연히 이 책에는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문명이나 첨단기술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흙냄새 가득한 식물이나 동물 이야기, 숲과 대지가 수시로 등장한다. 글은 때로는 애잔하고 때로 감각적이며 매력을 풀풀 풍긴다. 소로의 글이 한국에 소개된 이후 수많은 독자들이 그 낭만적이고 소박한 삶에 열광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내 주변에도 이런 삶을 사는 이가 있기는 하다. 올해 11년째 서울생활과 시골생활을 병행하는 그이가 올린 페이스북 내용을 보면 소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밤중 풀벌레가 우는 소리, 우체통에 집을 짓는 딱새 이야기부터 시시각각으로 주변이 눈부시게 변하는 시골의 봄날 이야기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물론 매번 낭만적인 이야기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시골생활이라면 부러울 법한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아내가 한때 내게 도시 인근에 작업실을 만들 생각이 있는가를 물었다. 나는 공간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거절했지만 내심 그런 공간이 탐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거절한 데는 외지에 그런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 좀처럼 부지런하지 않으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아는 이들 중에도 이런 삶을 실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도심에서의 각박한 삶을 살다가 자신만의 텃밭에서 땀을 흘리거나 집필실에 들어서면 저절로 힐링이 된다고 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공간을 그리워하며 사는지 모른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아파트가 아니다. 어차피 저녁 잠자리에 누울 때는 불과 한평 남짓하면 족하지 않던가. 집이 아무리 넓어도 잠자리에 들 때는 불과 한두 평이면 충분하다. 죽을 때는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도 우리 욕심은 끝이 없다. <월든>은 책 분량이 제법 된다. 마지막 장면을 만나기 위해서는 상당 부분 인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책에 빠지면 어느 순간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쉬워질 것이다. 우리 모두 소로처럼 살 수는 없다. 어차피 그런 삶이 허용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로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매캐한 흙냄새 풍기는 거기로 한 번쯤 가보고 싶다. 가서 한 달 만이라도, 아니 며칠만이라도 살다 오고 싶어진다. 장창영 작가는 전주 출신으로 20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불교신문·서울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돼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시집으로 <동백, 몸이 열릴 때> 와 문학이론서 <디지털문화와 문학교육>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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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17 17:3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경옥 아동문학가, 박상기 '백제 최후의 날'

최근 동료 작가들과 삼국유사를 다시 돌아보자는 의미로 톺아보고 있다. 고대 국가는 신비롭기도 하지만 알려진 게 많지 않아서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도 있다. 특히 백제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7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백제지만 패망국이라는 오명 때문인지 백제의 강성함과 찬란한 왕조와는 무색한 기록들을 보면 씁쓸하다. 이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였을까? 《백제 최후의 날》이라는 동화가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최근에 발견된 유물을 토대로 새롭게 밝혀지거나 재조명된 역사적 자료를 충실히 반영하여 백제 멸망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주인공 ‘석솔’은 백제의 마지막 순간 660년, 그 한복판에 서 있는 열두 살 소년이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보리쌀 한 알까지 모두 군량미로 바쳐야 하는 상황에 있다. ‘석솔’은 전쟁과 역병으로 부모님을 잃고 아파 누워있는 여동생을 생각하면 임금님과 조정에 대해 불만이 많다. “차라리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 고것들이 성을 뺏고 빼앗기든 우리랑 뭔 상관이래? 이긴다고 우리한테 보리 한 됫박 나눠 줄 것도 아닌데.”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하고, 왕이 웅진성으로 피신한다는 소문에 석솔은 자신의 감정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먹을 것이 없어서 일자리를 얻으려고 하지만 어느 곳도 열두 살, 석솔이 할만한 일감을 선뜻 내주는 곳은 없었다. 결국 아픈 동생을 돌보며 굶지 않기 위해 도둑질을 일삼게 된다. 그러다 웅진성으로 피신 온 왕과 연 왕자의 만남을 계기로 궁궐에 드나들게 된 석솔은 백제 최후의 결정적인 순간을 코앞에서 맞닥뜨리고, 그 현장에 함께 하게 된다. 잃어버린 왕국, 백제의 마지막 여름을 뜨겁게 살아 낸 소년의 눈으로 역사적 현장을 생생히 되살린 이야기 속에서 석솔의 원망 섞인 외침이 귀에 쟁쟁하다. “우리가 쫄쫄 굶어도 곡식을 갖다 바치는 게 나라 잘 보살피라고 그러는 거잖아요. 그런데 힘들다고 하면 어째요? 걱정이 많고 힘들다고 누가 알아준대요? 백성을 굶어 죽지 않게 하고 위협을 막아주는 임금이 최고지.” 왕자 ‘연’이 나당연합군의 협공으로 웅진성마저 위험에 처한 상황에 대해 걱정하자 석솔은 외친다. 어쩌면 석솔의 외침은 당시 백성들의 아우성이었을지 모른다. 백성들은 자기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해내고 있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위정자들은 무얼 하고 있었느냐는,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였으리라. 그 외침이 백제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라 지금도 유효하기에 울림이 더 컸다. 그럼에도 석솔은 전쟁으로 인한 가까운 이들의 죽음과 나라의 멸망을 지켜보며 소중한 것은 자기 손으로 지키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그 뒤 홀로 적진에 잠입하는 임무를 수행하지만 이미 기울어버린 국운을 되돌리지는 못한다. 이 작품은 역사의 왜곡과 망국의 오명이 덧씌워진 의자왕에 관해 다른 각도로 조명한다. 소년의 시선으로 백제 최후의 모습을 풀어낸 전쟁, 적진에 잠입하는 긴장감이 감도는 이야기와 더불어 역사적 오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하지만 역사를 바로잡는 것과는 달리 책을 덮으면서 백제 멸망의 순간에 함께 한 수많은 석솔들이 아우성치는 게 들리는 듯했다. 망국의 순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이경옥 아동문학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두번 째 짝>으로 등단했다. 이후 2019년 우수출판제작지원사업과 지난해 한국예술위원회 ‘문학나눔’에 선정됐었다. 그의 저서로는 <달려라, 달구!>, <집고양이 꼭지의 우연한 외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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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10 15:4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영주 작가, 김헌수 '계절의 틈'

김헌수 시인은 부지런도 하게 <계절의 틈>이란 제목의 포토포엠을 펴냈다. 사계절을 사진과 시에 담았다. 겉표지에는 푸른 담쟁이넝쿨이 선명하게 벽을 덮어주고 있다. 계절의 틈 사이에 담쟁이는 계절을 익히며 자라나고 뻗어간다. ‘겨울을 익힌 담쟁이는 마른 몸으로 느리게 자라요’ (본문 중) 잎이 다 떨어지고 삭막한 벽에 붙은 담쟁이, 겨울을 익힌 후 그 틈에서도 느리게 자라고 있는 담쟁이를 시인은 보았다. ‘틈’이란 좁은 간격에서도 모든 세상이 꿈틀거리는 생동력을 읽어낸다. 남편의 애정이 듬뿍 담긴 사진에 아내인 시인은 시를 썼다. 섬세하게 사진을 읽고, 살피어 포토포엠이 탄생되었다. 남편의 세계를 들여다본 귀한 시간이었을 터이다. 사진에 열심인 남편을 위해 환갑 즈음에 사진전을 열어주겠다는 시인의 마음이 훈훈하다. 김헌수 시인은 참 착하다. 오래 오래 봐도 착할 것이다. 웬만하면 자신이 참고 만다. 입버릇처럼 말하는 시인의 말이 매번 소홀히 지나가지 않는다. “따져서 뭣하겄어? 그러려니 하고 그냥 넘어가는겨.” 누구를 맹비난하다가도 숙연해져 더 이상 흥분할 수 없게 만든다. 남의 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특히 채근한다. 시인의 시를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 가끔 ‘잠금’, ‘봉합’, ‘밀봉’이라는 시어를 종종 발견한다. 시인에게 속으로 삭히는 의미는 무엇일까? 불현듯 시인이 보고 싶어진다. 늘 웃고 반기는 그녀의 마음속에는 애늙은이(?) 하나가 있는 것일까? "엄마를 병원에 모셔 놓고/ 빈 저녁을 돌아 수원지에 왔지/ 출렁이는 잔물결과/ 무성한 잎이 떨어지며 흘러나오면/ 숲에서 들리던/ 아버지의 낮은 가락/ 비포장도로를 돌아/ 처음으로 아버지와 나는/ 아주 떠나갈지도 모르는 엄마를 생각하면/ 굴참나무 아래 마른 입맥을 골똘히 바라보았지/ 등 뒤로 올라앉은/ 서너 번의 한숨을/ 어둠이 깔린 길에 가지런하게 부려 놓고 왔지/ 서성이는 죽음을 곁에 두고/ 천천히 돌아왔지" (시'수원지' 전문) 상실에 빠진 사람에게 위로될 말은 없다. 차라리 침묵이 나을 때가 많다. 시인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어 걸어왔다고 안 하고 ‘천천히 돌아왔지’라는 긴 여운을 전해준다. 무슨 말도, 무슨 위로도 건넬 수 없는 부녀는 굴참나무 마른 입맥을 바라보았다고 말한다. 맺힌 눈물마저도 ‘도르르’ 흘러내리지 못하고 삼켰나 보다. 이번 포토포엠 『계절의 틈』은 어찌 보면 틈새의 공허함이 아닌 꽉 채우는 위로의 글이다. ‘자꾸만 스며드는 웃음 숨지 않고 토해 내는 눈물 슬픔의 부피를 줄이며 평행선으로 나가는 우리’ 결국 시인은 울지 않는다. 눈물 슬픔의 부피를 줄이는 평행선. 언젠가 김헌수 시인에게 할 선물은 눈물일지 모른다. 마음 놓고 토해낼 슬픔⋯ 김영주 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에 당선됐으며, 2018년 동양일보 동화부문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저서로는 2020년 장편동화 <레오와 레오 신부>, 2021년 청소년 소설 <가족이 되다>, 2023년 수필 오디오북 <구멍 난 영주 씨의 알바 보고서>,<너의 여름이 되어줄게>5人앤솔러지 청소년소설,<쉬, 비밀이야>18人 앤솔로지 동시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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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03 17:47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근혜 작가-전은희'야광귀 축구 놀이'

“너, 그 얘기 들었어? 해 질 녘에 초등학생을 잡아가는 할콩할매 귀신 얘기 말이야?” 80년대 후반, 초등학생(당시는 국민학생)들 사이에 사람 몸에 고양이 얼굴을 한 귀신이 어린이를 잡아간다는 괴담이 돌았다. 귀신의 이름은 홍콩할매. 홍콩할매는 어린이에게 접근해 이렇게 묻는다. “손톱 좀 보여 줄래?” 순진한 어린이는 손톱을 보여준다. 달리기가 빠르고 점프에 능한 홍콩할매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어린이를 잽싸게 납치한다. 누구도 만난 적 없지만 누구에게나 나타날 것 같은 홍콩할매가 무서워서 나는 해 질 녘이 되면 가지고 놀던 공기나 고무줄을 내던지고 집으로 달려갔다. 홍콩할매처럼 보이는 할머니를 만나기라도하면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는 홍콩할매를 능가하는 K-요괴가 아주 많다. 구미호, 강철이, 달걀귀신, 어둑시니, 망태 할아버지, 처녀 귀신 등등. 전은희 작가의 그림책 「야광귀 축구 놀이/단비어린이」에 등장하는 야광귀도 K-요괴 중 하나다. 야광귀는 섣달그믐에 나타나는 귀신이다. 키는 작달막하고 몸에서 빛이 난다. 어린이 신발만 훔쳐 가는 어린이 신발 전문 절도범이다. 이 절도범의 단점은 숫자를 4까지 밖에 셀 줄 모르고 구멍만 보면 정신을 홀딱 빼앗겨 해야 할 일을 잊는다는 거다. 「야광귀 축구 놀이」의 주인공 준모는 설날에 할아버지 댁에서 야광귀를 만난다. 야광귀가 축구화를 훔쳐가자 준모는 야광귀를 쫓는다. 그렇게 야광귀 나라에 가서 야광귀들과 신나게 축구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야광귀는 귀신이다. 귀신이면 무서워야 하는데 그림책 속 야광귀는 무섭지 않다. 오히려 친근하다. 붉은 피부에 커다란 점이 온몸에 퍼져있는 노란 야광귀부터 들창코에 팔이 네 개인 야광귀까지 생김새도 다양하다. 그림 작가는 기존의 정보에 자기 상상력을 더해 다정하고 친근한 야광귀를 탄생시켰다. 잊혔던 전통 캐릭터가 생명력을 얻는 순간이다. 야광귀 캐릭터 외에도 이 책에서 깊이 들여다봐야 할 부분이 있다. 준모가 야광귀들과 축구하는 장면이다. 축구는 두 편으로 나누어 승패를 가르는 스포츠다. 하지만 진짜 목표는 승리를 향한 팀원끼리의 화합과 조화이다. 야광귀들의 축구 정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승부보다 한바탕 신나게 놀기 위해 축구를 한다. 여기에 축구 잘하는 준모가 끼면서 즐거움은 배가 된다. 야광귀들은 고마움에 보답이라도 하듯 준모를 집으로 갈 수 있게 돕는다. 세계적으로 K-문화가 대세다. 요즘은 영화와 뮤지컬의 인기가 음악이나 드라마 못지않다. 대체 한국 문화의 어떤 면이 세계인을 열광시킨 것일까? 한국인 특유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어떻게 발현된 것일까? 「야광귀 축구 놀이」를 읽어주면서 아이와 그 해답을 같이 찾아보기를 권한다. 우리의 어린 시절 그때처럼. 김근혜 작가는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동화 <다짜고짜 맹탐정>과 <봉주르 요리 교실 실종 사건>, <유령이 된 소년>, <나는 나야!>, <제롬랜드의 비밀>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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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27 17:3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헌수 작가-윤일호'킹콩샘의 어린이 글쓰기 수업'

고등학교 시절 엄마는 내게, “헌수야, 너처럼 수학공부 안하는 녀석의 ‘수학의 정석’을 두 권 정도 가져 오니라”라고 말씀을 하셨다. 두 권의 책은 이미 확보가 되었으니 나머지 두 권만 가져오면 수평이 맞지 않는 재봉틀을 괴어놓고 쓰기에 좋겠다며, 벽돌책을 꺼내 보지도 않는 내게 말씀 하셨다. “아니야, 나도 공부 할 거야”라고 말해도 엄마는, “몇 권 더 가져와라, 아버지 낮잠 주무실 때 목침 대신 쓰기에도 좋겠다.”라며 나를 놀리곤 하셨다. 그렇다고 내가 두꺼운 책을 무조건 기피하거나 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벽돌책을 끼고 살았던 적도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 등, 세계문학전집을 꺼내 읽던 재미는 또 남달랐다. 오롯이 문과생이었던 나는 벽돌책이 주는 무게의 의미와 책의 물성에 빠져 들기를 좋아했다. 진안 장승초의 킹콩샘인 윤일호 선생님이 벽돌책을 들고 나타났다. ‘킹콩샘의 어린이 글쓰기 수업’이라는 제목에 글쓰기로 삶을 가꾸는 교실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이다. “이리 긴 글을 언제 다 썼어요?” 라는 물음에 호탕한 웃음으로 받아치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 성량이 풍부한 목소리와 웃음 덕분에 막걸리 집에서 한 출간파티는 들썩들썩 했다. 아이들과 현장에서 만나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책에는 글쓰기와 글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들이 촘촘하게 이어져있다. 책은 크게 두 개의 마당으로 나뉜다. 첫째마당은 삶을 가꾸는 글쓰기, 둘째마당은 글쓰기로 가꾸는 한해살이로 나뉜다. 첫째마당은 삶과 글, 맺힌 마음 풀어내기, 나부터 드러내기 등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둘째마당은 시시하지 않은 시로 시작된다. 시와 동시, 서사문, 스토리큐브로 창의 글쓰기, 무심코 지나쳤던 것에 마음 주기 등 배움과 성장에 필요한 것들이 가득하다.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작년 한 해 초등교사 들의 죽음을 우리는 보았다. 교육공동체의 회복과 학교현장에서 교권이 보호되는 마음과 아이들이 학교 가는 것이 즐겁고 교사들도 학생들과의 모든 일이 즐겁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태보기도 했다. 각박한 삶 앞에서 삶을 바라보는 눈을 달리하고 물질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주는 행복과 소중한 가치들을 일깨우는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삶을 가꾸는 글쓰기를 읽다 보면 한 사람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글쓰기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 어려운 시대에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도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길이 교육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길임을 알기에 그 길을 가고 싶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교실의 아이들, 마음이 아픈 아이들을 만나면서 아이들을 보듬고, 교사의 말을 따르지 않는 아이와 소통하고 나누는 일, 글쓰기를 통하여 조심스럽고 관심 있게 열어갔던 일들을 보여주고 있다. 책속에 들어있는 아이들의 말은 매우 논리적이다. 진실하고 솔직한 글쓰기와 자신의 글을 통해서 마음도 풀어지고 스스로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는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때론 가슴 아픈 사연들이 펼쳐져 교실이 울음바다가 되고 서로를 치유하는 자리가 되며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 일도 있다. 글쓰기로 사람과 소통하고 나누는 방법이 들어있는 책을 통해서, 저자는 글쓰기 지도나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 글쓰기의 시선을 새롭게 찾고 싶은 분에게 조금의 도움을 주고자 썼노라고 말한다. 글쓰기를 통하여 한해살이 식물이 아닌 여러해살이 식물로 거듭 피어나는 아이들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장승초등학교 킹콩샘의 다독임이 있는 글쓰기가 봄볕에 오래도록 머물기를 바란다. 이번 주말에는 모래재를 굽이굽이 돌아 봄꽃이 핀 진안을 둘러봐야겠다. 김헌수 시인은 2018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삼례터미널'로 등단했다. 또 그는 '작가의 눈' 작품상을 받은 이력이 있다. 그의 시집으로는 <다른 빛깔로 말하지 않을게>, <조금씩 당신을 생각하는 시간>이 있고, 시화집으로는 <오래 만난 사람처럼>, <마음의 서랍>이 있다. 오디오북으로는 <저녁 바다에서 우리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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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20 18:03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