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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포] 익산 왕궁터의 비밀

백제시대 완전한 형태 궁성구조 갖춰

부여문화재연구소가 300여일에 걸쳐 발굴조사한 왕궁터와 발굴된 유적들. (desk@jjan.kr)

1971년, 일본에서 육조시대의 옛 문헌기록이 발견되었다.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 관세음이 경험한 신비한 사례들을 모은 이 문헌에는 백제 관련 기록이 담겨 있었다.

 

‘무광왕(백제 무왕)이 ‘지모밀지(枳慕蜜地)’라는 곳에 천도해 새로운 건축물들을 많이 지었는데 제석사에 벼락이 떨어져 석탑이 무너졌다. 초석부분은 남아 사리함를 열어보니 그 안 유리병에 있던 사리가 없어졌다. 무왕은 발정이라는 스님에게 일러 참회법회를 보게 했는데 이후 다시 보니 사리가 다시 놓여있었다. 이에 감격한 무왕은 사찰을 건립해 그곳에 사리함을 모셨다’는 내용이다.

 

이 부분이 역사학계의 주목을 모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난 65년, 왕궁리 오층석탑 해체 수리때 발견된 푸른 유리병를 담고 있는 사리함과 ‘금강반야경 ’ 등에 비추어 그 내용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무왕이 건립했다는 제석사와 왕궁리 오층석탑이 있는 유적은 불과 1.3Km의 거리. 왕궁터의 비밀을 밝혀내는 또하나의 단서를 제공하는 계기였다.

 

익산 왕궁리의 왕궁터는 어떤 역사적 진실을 갖고 있을까. 왕궁이 없어진 자리에 역사적 진실은 숨겨져 있다.

 

지난 16일 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익산시로부터 정밀조사를 의뢰받아 조사한 결과를 공개했다. 2003년 12월 15일부터 올해 말까지 300일에 걸쳐 이루어진 발굴조사 결과는 역사학계의 관심을 모았을 뿐 아니라 익산 지역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보다 새롭게 조명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가장 큰 성과는 고대 궁성 관련시설의 대지조성과 공간구획에 대한 자료의 확보다. 이번 발굴 결과로 궁성의 계획적인 설계에 의한 축조양상이 확인되면서 학계는 지금까지의 백제 시대 왕궁의 어느것 보다도 완전한 형태의 궁성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궁성을 위한 건물지를 축조하기 위해 기반을 다진 석축과 계단 역할을 하는 월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자리한 후원, 뒷간이 있었던 자리가 세세하게 드러났다. 기존에 발굴됐던 터의 구체적 확인 외에도 새롭게 드러난 건물지와 유물도 적지 않다.

 

남쪽 성벽의 중문지를 비롯해 2기의 석축과 건물지 7동, 배수시설 1기, 와요기 3기 등 13기의 유구가 확인 되었고, ‘王宮寺’가 새겨진 명문기와와 중국청자편, 철제솥 등 중요유물이 쏟아졌다.

 

궁성 안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방지에서 출토된 금세공 유물은 아름답고 정교함으로 마음을 뺏는다. 백제인들의 소박하면서도 섬세한 미감을 그대로 전해주는 유물들이다.

 

남쪽 성벽에서 동서석축까지 일정한 공간 비율로 동서 석축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나, 여러개의 건물지 확인으로 왕궁성 내부 공간의 계획적 구획 및 활용방식에 대한 추정이 가능해진 것 또한 주목할만한 성과다. 여기에 남쪽 성벽의 중문지가 사찰의 중심축 선상에 위치했음을 보여주는 흔적은 사찰을 건립하기 이전에 남문지와 동일하게 설계된 궁궐 등 중요 건물의 존재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연구소는 밝히고 있다.

 

강당지의 남쪽에서는 계단시설의 규모 및 형태가 확인됐고, 오층석탑 아래의 목탑지, 동서석축과 건물지 사이의 선후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도 축적됐다.

 

궁성의 존재는 이미 오래전에 확인됐지만, 궁성의 내부 구조와 생활공간 등의 흔적이 대대적으로 확인된 것은 왕궁리 유적의 실체를 드러내는 중요한 성과다.

 

조법종 우석대 박물관장은 “왕궁의 실체가 드러난 이번 조사 결과는 왕궁유적의 복원에도 의미있는 자료가 될 뿐 아니라 왕궁과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한 이 일대 공간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보다 새롭게 조명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왕궁일대의 역사적 공간과 그 의미는 주목할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枳慕蜜地)’에 천도하여’란 대목이 나온다. 연구자들은 ‘지모밀지’의 지명이 왕궁일대의 옛 지명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조관장은 삼국사기에 왕궁일대를 지마마지로 기록하고 있는 점이나 일부 주민들이 지금도 ‘모질뫼’라고 부르는 점을 들어 그러한 근거는 충분하다고 밝혔다.

 

‘지모밀지’의 ‘지’자(字)는 ‘기’자(字)로도 읽히는데, ‘기마마지’는 ‘건마’를 거쳐 ‘금마’로 불리게 되었다는 점도 이러한 근거를 뒷받침하는 예라고 조관장은 분석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금마를 백제의 별도라고 기록하고 있는 부분도 주목을 끈다. 별도는 ‘부수도’의 개념. 일본에 남아 있는 ‘천도’의 기록이나 부수도의 개념을 연계시킨다면 왕궁이 백제의 새로운 도읍으로서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설득력이 있다.

 

익산 왕궁리 일대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는데는 삼국시대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의 터를 또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쌍릉과 현존하는 백제 석불 중 최대의 석불이 있는 석불사가 놓여진 공간의 구조까지 감안한다면 백제 중흥의 꿈을 실현하는 새로운 공간으로의 의미는 더 커진다.

 

왕궁이 있고, 왕의 상징적 사찰인 미륵사가 있는 익산 왕궁리 일대의 공간적 의미는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인가.

 

제석 불국토의 개념으로 백제의 중흥을 시도하려했던 왕조가 불국토의 꿈을 실현하려했던 공간이 왕궁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보다 새롭게 익산 금마면 왕궁리 일대를 다시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다.

 

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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