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그 눈짓은/제주에서 두만까지/우리가 더딘/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중략)//이제 올/너그러운 봄은,/삼천리 마을마다/우리들 가슴 속에서/움트리라.//움터서,/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를/눈 녹이듯 흐물흐물/녹여 버리겠지.'(신동엽의 '봄은'중에서)
찬바람이 콧속 깊이 맴돌지만 봄은 어김없이 기지개를 편다. 1백년만의 폭설, 그 무거운 눈 밑에서도 파릇한 싹이 움트고 있다. '봄'은 시인들에게도 좋은 소재. 안도현 시인은 '저 얼음장 위에 던져 놓은 돌이/강 밑바닥에 닿을 때까지는'('봄이 올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고 했지만 꼭 그럴 필요 있을까.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온다'(이성부의 '봄')고, 주위를 둘러보면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윤동주의 '봄')들이 피어나고 있다.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중략)/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하며 봄비에 새 희망을 가득 담은 고정희 시인의 '봄비'나 '배꽃들은/황토산 자락에/연분홍 첫살의 숨결을 토해놓지'하는 곽재구 시인의 '배꽃'에 어린 풍경을 상상하면 3월 눈보라의 황당함도 씻은 듯 사라진다.
한 시인은 '나 찾다가/텃밭에/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예쁜 여자랑 손잡고/섬진강 봄물을 따라/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김용택의 '봄날')하고 두 손 털고 매화꽃 보러 갔지만, 지금 우리의 봄처녀는 어디쯤 오고 있을까. 어렵고 힘든 시기인 만큼 봄처녀를 기다리는 마음이 급하다. 봄에 어울리는 시 한편을 감상하다보면, 봄처녀의 손짓이 더 가까이 다가오겠지.
△ 이문구의 동시집 '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
'옛날 아이들은/장난감이 귀해서/겨울이 가면/풀밭에서 놀았는데/풀물이 들고/꽃물이 들어서/깁고 기운 옷인데도/봄 냄새가 났다나요.'('옛날 아이들')
지난 해 2월 세상을 떠난 소설가 이문구씨가 "손자 손녀들에게 이런 얘기만은 꼭 들려주고 싶어서” 썼다는 유고 동시집 '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창비 펴냄)는 노래로 흥얼거려도 좋을 만큼 경쾌한 리듬을 가지고 있다.
60여편의 동시를 한데 묶은 이 책은 잊혀진 시골마을의 풍경과 나무 새 풀벌레 등 뭇 생명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느껴진다. 배추꼬랑이는 '내년 봄에/노랑 물감 같은/장다리꽃을 피우기 위해서'('씨도리 배추') 눈으로 목을 축이며 밭에서 견디었고,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빨랫줄에 모여 앉은 제비들이 '뜰에서 주워 먹은 콩이 비리고 비리고 비립디다'('제비')라고 이야기를 나눈다. 동시를 통해 옛 농촌의 일상을 구수하게 풀어놓은 데는 자연과의 교감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작가의 바람이 담겨있다.
△ 유안진의 시집 '봄비 한 주머니'
'320밀리리터 짜리/피 한 봉다리 뽑아 줬다/모르는 누구한테 봄비가 되고 싶어서/그의 몸 구석구석 속속들이 헤돌아서/마른 데를 적시어 새 살 돋기 바라면서'('봄비 한 주머니')
언제나 소녀로 남아 있을 것 같은 유안진 시인이 치열함과 원숙함으로 절창을 토해 놓은 시집 '봄비 한 주머니'(창비 펴냄). 35년 간의 시 작업이 농축된 70편의 시가 수록된 이 시집은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도 없이 푹 빠져볼 수 있다.
한 방울의 피를 누군가를 위해서 흘려본 적이 있던가. 시인은 눈물나는 삶을 위해 기꺼이 피 한 줌 뽑아주지만, '멀쩡한 누군가가 오염될까' 걱정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짓은 이 짓거리뿐'이라고 반성한다. 그리고 '봄비'가 온 세상을 돌고 돌아 따뜻함이 넘쳐나는 세상을 꿈꾼다.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값비싼 화초는 사람이 키우고/값없는 들꽃은 하느님이 키우시는 것을//그래서 들꽃 향기는 하늘의 향기인 것을'('들꽃 언덕에서') 연한 버들잎을 입에 물고 온 산천을 뛰어다니는 치기 어린 이미지, 순백의 미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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