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 먹인 종이에 밑그림 그리고…고운 비단에 색 입히고…
최근 전주 환안이 결정된 태조 이성계 어진은 1408년 태조가 죽은 뒤 1409년 전주부 선비들의 요청으로 경주 집경전본을 모사(模寫)해 1410년 전주에 봉안한 것이다. 1872년에는 한양 남별전의 태조 어진이 낡자 경기전본으로 새로 그리면서 전주에 모실 어진도 다시 그려 내려보냈다. 이때 모사 과정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는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模都監儀軌)'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왕의 초상을 비롯 과거 초상화는 어떻게 그려졌을까?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먼저 초본(草本)을 그려야 한다. 초본은 초상의 틀을 처음으로 잡으며 그린 밑그림. 초상화 성격에 따라 초본을 제작하는 과정도 다르다. 생존하고 있는 인물을 그리는 도사(圖寫), 제작된 초상을 다시 베껴 그리는 모사(模寫), 이미 죽은 인물의 초상을 상상해서 그리는 추사(追寫)가 있다. 추사의 경우 고인 생존시 옆에서 가까이 모시던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그렸다.
초본은 기름종이, 즉 유지(油紙)에 그렸다. 여러차례 기름을 먹여서 반투명해진 종이에 유탄(柳炭)이나 먹으로 밑그림을 그렸다. 밑그림을 바탕으로 옅은 먹선이나 붉은색으로 비단에 옮겨 그린 다음 색칠을 하고 짙은 먹으로 윤곽선을 강조했다.
국립전주박물관 '조선시대 초상화 초본'전(24일까지 전주박물관) 특별강연을 위해 전주를 찾은 이수미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연구관은 "초본은 비단에 그 윤곽을 정식으로 옮기기 전에 미리 그 결과를 볼 수 있게 만든 샘플작이라고 할 수 있다"며 "초상화 주문자들은 초본을 기준으로 수정, 보완을 거쳐 정본의 제작 방향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안집 초상' 초본을 보면 오른쪽 위에 '정본차(正本次, 정본에 쓸 것)'라고 쓰여져 있어 초본을 여러장 그려 이 중 정본으로 완성할 초본을 택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초상화는 화면 뒷면에 채색이 숨어있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뒷면에 색을 칠하면 앞에서 칠할 때보다 채색이 떨어질 염려가 적을 뿐만 아니라 비단 사이로 뒷면에 칠한 색이 비치면서 은은한 색상 효과를 살릴 수 있다.
화가들에게 왕의 초상을 그리는 일은 크나큰 영광이었다. 도사의 경우 특별히 자리에 앉아서 왕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모사할 경우에는 범본을 밑에 받치고 그리게 되는데, 먼저 이를 담당할 기구나 인물을 선정하며 체계적인 일의 진행을 위해 도감(圖監)을 설치하기도 한다. 일정한 시험이나 추천으로 어진을 담당할 화원을 뽑은 후에는 밑그림을 제작하게 된다.
이 때 화가들은 소례복(小禮服) 차림을 한다. 그림을 그릴 때 불편하지 않도록 좁은 소매의 관복을 입었으며 딱딱한 관대도 하지 않았다. 밑그림 위에 비단을 두고 좌우에 내왕판(來往板)이라 불리는 나무틀을 깔고 화원이 그 위에 올라가 비단 위에 밑그림을 올린 후 채색을 했다. 이 학예연구관은 "채색 과정이 끝나면 왕과 신하들의 점검을 거쳐서 미심한 부분은 보완하게 된다"며 "매 단계마다 왕과 대신들의 심사 과정을 거치고 길일길시(吉日吉時)를 택해 진행하는 등 국가의 지대한 배려 가운데 어진이 제작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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