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시인은 '멋'을 이렇게 표현했다.잠자리 날개 같은 한산세저(韓山細苧)로 조촐히 차린 여인이 옥같이 희고 고른 치열을 태극선으로 살짝 가리고 이야길 주고 받는 모습도 우아하려니와,구절오십시(九節五十矢)의 합죽선을 가끔 폈다 접는 선비의 풍채도 또한 이에 못지 않은 풍정이리라.여기에 태극선이나 합죽선이 전주산이고 보면 더 이를 데 없다고 했다.
합죽선은 펴지고 접히는 개폐 구조를 갖고 있다.이 때문에 여자의 정조에 비견되기도 한다.정조를 지키고 변절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사랑의 약속과 그 약속의 증표로써 이 부채를 주고 받았다.일심배(一心杯)와 같이 일심선(一心扇)은 부채살 하나 하나에 결의자들이 이름을 쓰거나 시구를 한구절씩 써서 보관함으로써 변심을 경계했다.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 광성 포대에서 결전을 앞둔 병사들이 원형의 부채살에 각기 이름을 적어 공생공사(共生共死)를 다짐하기도 했다.이 일심선은 현재 미국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에 전시돼 있다.
합죽선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 것이 다르다.중국 합죽선은 부채의 가장자리 갓대에 조각을 해 넣어 장식을 가미하는 성향이라면 일본은 깨끗하게 다듬어 옻칠을 한다.반면 우리나라는 대나무 마디를 그대로 두어 울퉁불퉁한 자연스러움을 살리는 맛이 있다.그림이나 글 하나 넣은 합죽선은 여름철 선물로는 딱 그만이다.조선조 말까지 해마다 단오절에는 공조(工曺)에서 부채를 만들어 재상과 하급 관리들 한테까지 나눠 줬다.호 영남 방백과 절도사 등 지방 장관도 그 지방 특산의 부채를 진상했는데 전주의 합죽선은 단연 일품이었다.
부채의 종류도 만드는 재료에 따라 다르다.새의 깃털로 만든 부채는 백우선(白羽扇),부채살이 끝으로 갈수록 가는 부채는 세미선(細尾扇),몸을 가리는 큰 부채는 옹신선(擁身扇),공작의 깃으로 만든 부채는 공작선(孔雀扇),혼인 때 신랑이 가지는 붉은 부채는 낭선(郎扇),벼슬아치들이 외출할때 풍진을 막으려고 얼굴을 가리던 부채는 사선(紗扇),신부의 얼굴을 가리는데 쓰는 진주로 만든 부채가 진주선(眞珠扇)이다.
평생 합죽선을 만들어 왔던 죽우 이기동선생이 별세했다.도 무형문화재인 그는 유언서도 "부채를 버리지 마라"고 했다.올 여름 전주 합죽선 하나를 장만해보면 어떨까.
/백성일 수석논설위원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