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의 영화와 풍류 간직한 서품…만고의 진리를 전하다…앙세 위;주로 한 거침없는 필력 돋보여
왕순(王珣·349~400)의 자는 원림(元琳)이며, 왕흡(王洽)의 장남이다. 벼슬은 상서령을 지냈으며 왕헌지와 동시대 인물이다. 「백원첩」은 종형제인 왕목(王穆)에게 보낸 서간으로 백원(伯遠)은 그의 자이다. 지금 우리가 숭앙하고 있는 서품들이 대부분 서간이나 제문 또는 비문들이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전에 다룬 왕희지 일가의 서품들이 주로 탑모본이나 판각본인데 비하여, 오늘 소개하는 왕순의 「백원첩」은 왕씨 일가의 필적 중 유일하게 진적본이다. 이처럼 희귀한 진적본임에도 불구하고 왕순의 이름이 송대 이전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동진시대의 명필 중에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듯하다. 송나라 휘종조의 「선화서보(宣和書譜)」 권14에 이 「백원첩」을 논하며 왕순의 서에 대해서도 비로소 언급한 것이 보인다. 그 기록을 간단히 살펴보자.
왕순은 아버지 흡(洽)과 할아버지 도(導)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예서를 잘 썼고, 행초서에도 능했다. 삼대에 걸쳐 서명이 높았다고 전한다. 이처럼 당시에 명필들이 명가에서 출현한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속된 비유를 빌리자면 왕대 밭에서 왕대 나는 격이다. 왕순은 당시 최고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귀족의 풍류를 배우며 상서령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대령(大令) 왕헌지에 비해 소령(小令)으로 일컬어지는 왕민(王珉)이 일찍이 비단 네 필에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붓을 들고 휘호하였는데 수미가 일관되어 한결같았을 뿐만 아니라 오자도 없었다. 그것을 본 왕헌지가 희롱하며 동생의 글씨는 마치 노새를 타고 준마를 앞지르려 하는 것 같다고 비아냥거렸다. 왕헌지의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잘 나타난다. 왕순은 이러한 명가의 틈바구니에서 자랐다.
이 첩은 후에 청나라 건륭제의 손에 들어갔다. 건륭제는 왕희지의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왕헌지의 중추첩(中秋帖)과 함께 이 첩을 자신의 집에 보관하고서 삼희당(三希堂)이라 이름하였다. 삼희당이란 세 가지 희귀한 보배를 보장(寶藏)한 집이라는 의미이다. 이로써 왕순의 「백원첩」은 이왕의 필적과 더불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천하의 주목을 받았다. 명작은 언젠가 명가의 손에 들어가기 마련이다. 이 작품은 현재 북경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총 5행 69자로 쓰여진 글씨는 유려한 진대의 행서풍을 보이고 있다. 필세는 앙세(仰勢)를 위주로 하고 있으며, 거침없는 필력이 돋보인다. 당시 유행한 왕희지류의 서풍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왕희지와는 다른 독자적인 풍격을 이루고 있다. 명나라 동기창은 "왕순의 글씨는 소쇄고담(蕭灑古淡)하며 동진의 풍류가 눈앞에 펼쳐진 듯하다"고 평하였는데 바로 이 첩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이왕(二王)의 필적만을 천하의 보배로 여겨 탑모본과 판각본이 시대를 풍미하였으나, 귀한 진적이 시대를 거치며 떠돌다가 비로소 청나라 건륭제의 소장품이 됨으로써 세상에 보기 드문 명적으로 거듭 태어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유일하게 동진의 영화와 풍류를 한 몸에 간직하고 있는 이 작품은, 명작은 사라지지 않고 언젠가 빛을 본다는 만고의 진리를 확인시켜 주는 뛰어난 서품이다.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