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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권하고 싶은 책] (17)소설가 박미경 -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삶은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이다

새벽녘,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으스스 한기가 느껴진다. 꿈속에서 나는 맨발로 눈 덮인 벌판을 헤매고 있었다. 한 손엔 꽁꽁 언 양동이를, 다른 손엔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빵 한 조각을 들고 있었다. 멀리 눈밭 한 가운데, 불 꺼진 수용소 건물이 짐승의 사체처럼 납작 엎드려 있었다.

 

오래전부터 되풀이 되어온 악몽인데 스트레스가 많은 날이면 항상 어둡고 음침한 눈밭을 헤매다 잠에서 깨곤 한다. 어젯밤에도 나는 노역을 마친 죄수가 되어 수용소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길은 늪 같았다. 앞으로 나아가려 용을 쓰는데도 눈 속에 빠진 발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이 악몽을 꾸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5년 때부터다.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었다. 1962년도에 발표된 이 소설은 간첩 혐의로 10년 형을 선고 받고 수용소에 복역 중인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라는 정치범의 하루 일과를 나열해 놓은 중편 소설이다.

 

평범한 농민이었던 슈호프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는 죄목으로 수용소에서 수감되어 8년 째 복역을 하고 있다. 그는 수용소의 비인간적인 대우에 저항할 의지도 없고 탈옥 따위는 꿈도 꾸지 않는 단순한 인물로 강제수용소의 지옥 같은 생활도 더 이상 악화되지 않는 게 행복이라고 느낀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나는 등교시간만 되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증세가 심해, 나중엔 학교 갈 생각만 해도 신물이 넘어 올 정도였다.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느껴지던 어느 날, 학교 교사 증축 공사를 시작하면서 내가 속한 학급이 도서관을 임시 교실로 사용하게 되었다. 도서관은 나에게 신세계였다. 나는 지루한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눈을 피해가며 몰래 책을 읽었고, 6학년이 되어 교실을 옮길 때쯤엔 도서관에 있는 책을 모두 독파할 수 있었다.

 

그 때 내가 처음 손에 잡았던 책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였다. 표지가 너덜너덜한 명작선집 중의 한 권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나는 이 책을 무척 좋아했다. 몇 번씩 반복해 읽는 것도 모자라 책장을 매일 한 장씩 찢어와 다시 제본을 해 읽을 정도였다. "삶은 도망치는 게 아니고 견디는 거란다." 나는 슈호프의 일과를 통해 삶에 순응하는 자세를 배웠다. 나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가르쳐 준 책.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눈 덮인 겨울 들판으로 노역을 나온 나를 소설로 이끌어준 스승이다.

 

투닥투닥 빗소리가 들려온다. 창문을 열어 젖히니 비가 내리고 있다. 빗발이 제법 굵다. 내가 곧 갈 테니 조금만 더 견뎌보라고, 봄이 전령을 보내온 것 같았다. 경칩이 지났다. 세상을 모조리 얼려버릴 것 같던 동장군의 위세도 한풀 꺾였다. 곧 나무에 물이 오르고, 세상천지가 꽃으로 뒤덮일 것이다. 봄은 겨울을 견뎌낸 이들을 위한 포상이다.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의 뒤끝에서도 훈기가 느껴진다. 방범창 창살 밖으로 손을 뻗어 본다. 손바닥에 톡톡, 빗물이 떨어진다. 물비린내가 훅 끼친다.

 

△ 소설가 박미경씨는 경기도 기흥 출생으로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2007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이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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