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촌에서는 아름다운 미풍양속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한 집안이 혼례나 상례와 같은 ‘대사’를 치를 때면, 온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그 집안일을 돕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물건을 빌려 주거나 음식을 맡아서 해 주고, 심부름을 대신하는 등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모든 일을 돌보아 주는 것이다.
향약은 본래 중국의 북송 말기에 섬서성의 염전현에 살던 여씨 일문에서 시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씨의 향약은 후에 주자(朱子)에 의해서 보완되어 중국 사회를 지배하는 사회적 규약이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향약이 조선왕조의 중엽부터 널리 시행되기 시작했다. 명종과 선조의 시대에 이르러 퇴계의 예안향약, 율곡의 서원향약과 해주향약 등 전국적으로 향약을 두지 않은 마을이 없을 정도로 많이 생겨났다. 남원의 대방향약(帶方鄕約)은 옛 원천방(源泉坊)에 행해오던 원천동약(源泉洞約)을 이어서 실시한 것이 전해온다. 원동향약(源洞鄕約)은 전북 지방 유형문화재 146호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마을 단위의 조산(造山)향약이 전해온다. 또 남원에는 양사재(養士齋)에 대방향약소(帶方鄕約所)란 현판이 걸려 있다. 양사재에는 매년 봄가을로 상읍례(相揖禮·절을 하는 법)와 독법례(讀法禮·글을 읽는법), 향음주례(鄕飮酒禮·음식과 술을 마시는 법), 향사례(鄕射禮·활을 쏘는 예법)를 1642년부터 실시해 오다가 일제 때 이르러 미풍양속을 이어가지 못하고, 최근 상읍례와 독법례가 일부 단체에서 행해지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일부 농촌에 전승되고 있는 각종 계(契) 조직도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강한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협동조직이었다. ‘계’는 어떤 외부적인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해 만든 협동 조직이었기 때문에 이 계 조직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계 조직의 목적과 형태는 각양각색이었다. 예컨대 마을에 다리를 놓거나 하천공사에 필요한 기금 적립을 위해 조직하는 이중계(里中契)의 경우에는 마을 주민의 합의에 따라 응분의 추렴을 걷어 ‘마을 공동 답’을 사들여 그 수확을 모아 공사비로 충당할 정도였다. 또 나무를 함부로 자르지 않게 하고 식수를 장려하기 위해 조직했던 이른바 송계(松契) 또는 송금계(松禁契) 같은 계 조직은 당번을 정해 자진해서 도벌 행위를 감시했다.
우리고장에서는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 중에 금수정(錦水亭), 관왕묘, 춘향사당, 성황단, 사직단, 유애묘, 선원사는 읍승정(揖昇亭)의 노계소(老契所) 계원들이 건립했다. 요천의 제방, 산림감시 감독, 농용수에 필요한 ‘보(湺)’ 관리는 나이가 젊은 소계소(小契所) 계원들이 자진해 감시 감독에 나섰다고 한다. 이런 유허비(遺墟碑)가 요천 제방에 세워져 있었던 것을 지금 기로회(耆老會) 경내에 옮겨 지금까지 보전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향약’과 ‘계’의 조직을 잘 운영해 나감으로써 지역발전과 이웃 간에 서로 돕고 협동하는 생활 풍습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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