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건 전 국정원장 영전에
전북이 낳은 巨人 신건 원장님의 갑작스럽 별세 소식을 듣고 전북 도민은 깜짝 놀랐습니다. 인생은 칠십부터라고 하는데 백수를 누리는 시대에, 너무 비통합니다. 70년대 초 서울 남부지청 검사로 재직시 저는 국회의원 비서관 신분으로 지역민의 민원으로 만나게 되었지요. 강자에게는 엄하고 강했으며, 약자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대한민국 검사였지요.
부안이 고향이지만 전주 경원동에서 자라셨고, 임실인 저는 풍남동에서 유년기를 보낸 선친 간의 인연도 호형 호제하며 지낸 동기가 됐지요.
서울 강남에 첫 다리가 놓이기 전, 이승환 선배의 개업식에 많은 법조인과 같이 참석해 술잔을 기울이던 일. 엄혹한 TK정권 시절, 대검 중수부장을 전북인이 맡아 어깨가 무겁다며 처신을 신중히 하면서도, 덕수궁 옆 대검 사무실에서 출입기록지를 남기지 않고 고향(호남) 사람을 만나 어려움에 처한 많은 공직자 기업인을 구한 일들. 법무부 교정국장 시절, 2교대로 교도관이 너무 힘들고, 따라서 재소자도 불이익을 받는다며 당시 평민당(총재 김대중) 의원과 당직자들을 설득하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여권을 이해시켜 3교대로 되는 예산과 인력을 확보, 교정 역사에 새 장을 여신 일.
그 무렵 아버님이신 백양촌 선생(전주고 교사 역임)님이 중증 치매가 와서 어려움에 있을 때, 제자와 지인들이 백양촌 문학상을 만들어 전주 관광호텔에서 시상식을 할 때 “천하의 불효자는 접니다. 공직에 있다 보니 모시지 못해 건강이 나빠지셨습니다”며 효심 어린 진실의 눈물로 목이 메어 말할 때 김남곤 예총회장·이치백 주필·장명수 총장·임병찬 총재 등 많은 참석자와 저도 울었지요. 법무 차관 시절, 전북인 중에 법무장관이 나와야 법조인맥이 바로 설 수 있다며 뜨거운 고향 사랑의 열정을 독백하신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국정원 차장 재직시 당시 경찰과 검찰의 사이가 벌어져 있는 사실을 알고, 중재를 해서 고향 후배인 경찰청장을 보호해 준 일. 국정원장 취임 후 잠을 4~5시간도 못 잔다며 밤늦게나 새벽에 대통령께서 직접 확인하시니. 각종 보고서를 읽고, 숙지해야 하느라 늘상 잠이 부족하다며 최선을 다하던 그 모습. (그때 건강을 상하신 것은 아닌지?)
전북 기자단(서울 주재)이 면담을 요청하니 간담회를 가져 달라고 요청하면 선뜻 시간을 내어 기탄없이 고향소식 듣고 나누던 시간.
고초도 겪으셨지요. 도청에 정보기관이 연루되었다 하여 어려움을 당하신 일. 그 뒤 소충·사선 문화상(특별상)을 수상케 되었을 때, 그 어느 상보다도 기쁘다며 온 가족이 사선대에서 모여 기념 촬영을 했지요.
전북의 자긍심과 고향 발전을 위해 국회에 나가야 되겠다며 전주에 출마해 당선되신 일. 공천에 밀려 포기했으나 전주의 많은 동지들이 강권하기에 출마한다면서 심정을 토로하신 그 인간미. 올해 4월 보궐선거에 서울 관악에 정동영 후보가 나가니 도와야겠다며 저와의 통화에서 “양 위원장, 전북인으로서 도와야지 않겠나!” 하며 설득하셨으나, 끝내 저는 당인으로 묶여 있으니 이해해 달라는 말씀도 못 드리고, 입안에서 맴돌았지요. 신 의원님! 백양촌 선생 묘소를 천주교 묘역(양수리)으로 이장할 때 하신 말씀. “자식은 부모님 사후에도 효심을 가져야 하지! 모신 자리가 좋아 보여!”
건이 형님!! 전북이 낳은 수재요! 인물이신 형님을 천주님께서 천당으로 이끄실 테니 모든 걱정 다 잊으시고 평안히 영면하십시오! 전북인들은, 아니 대한민국의 역사가 형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기록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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