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일반기사

해도 되나요

▲ 백봉기

‘눈이 내릴 때 삶의 무상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어 가짜 시인 행세를 한 적이 있다. 한 쪽에 모아두었던 시집을 꺼내어 정독을 하고, 감정 떠오르는 대로 시 쓰기를 흉내 냈다. 보이는 것이 모두 시의 소재였고, 수필 쓰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권기만 시인이 던진 말이 가슴을 찔렀다. “함부로 시인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다가 안 되면 결국 가짜 시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이비 시인이 너무 많아서 행복한 나라가 우리나라다.”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한줄기 희망을 가지고 K시인을 찾아갔다. 그런데 선생님의 평가는 더 냉혹했다. “시는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시 50편은 외우고난 다음에 써야한다. 이것은 시가 아니다”며 30여 편 중에서 대여섯 편만 남기고 나머지는 빨간 볼펜으로 엑스선을 그었다. 창피했다. 그 뒤로 짝퉁 시인 행세를 그만 두고 글 가는 대로 사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엊그제 우연히 컴퓨터를 뒤지다가 수년 전에 사장시킨 그들을 만났다. 그 중에서 ‘해도 되나요’라는 시가 울컥 내 마음을 흔들었다. 이 글을 쓰던 때의 혼령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리워해도 되나요 꿈에서라도

 

그대 가슴에 얼굴 묻고 / 따뜻한 체온 느껴도 되나요

 

길을 걷다가도 / 문득 문득 떠오르는 당신

 

사랑한다는 말 / 염치없지만 / 단 한번 단 한번만이라도 해도 되나요

 

내 뜨거운 심장으로 / 그대를 온통 멍들게 해도 되나요

 

내 그리운 이여 / 견디다 못해 지쳐 쓰러질 때

 

당신 사랑했다는 말 진정 해도 되나요

 

누군가를 미치도록 그리워했던 것 같다. 꿈에서도, 길을 걷다가도 문득 문득 떠오를 만큼 만나고 싶었던 이. 사랑한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할 정도로 가슴 벅찬 짝사랑은 아니었는지. 손에 잡힐 듯 말 듯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게 느껴지고, 금방 만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또 다시 멀어지는 슬픈 사랑이야기인 듯싶다. 분명한 것은 누군가를 향해 답답한 심정을 하소연했고, 그 열정은 뜨거웠던 것 같다. ‘그리워해도 되나요’ ‘느껴도 되나요’ ‘사랑해도 되나요’ 이루지 못할 사랑일지라도 진정 사랑했다는 말은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누구나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은 두 사람의 만남이 순수하고 열정적이며 가슴 설레는 일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이 시의 제목은 ‘시애詩愛’이었다. 시에 대한 열망이 너무나 애절하던 때였다. 마치 시인이나 된 것처럼 자기도취에 빠져, 릴케가 되고 소월이 되고, 때로는 설렘과 번민과 가슴앓이로 밤잠을 설칠 때였다.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쓰기 위해 지쳐 쓰러질 정도로 시어詩語 하나를 목마르게 갈망하던 때였다. 결국 포기해야 했다. 시는 수필보다 더 가시밭길이었다. 사랑이 핑크빛만은 아니듯 시창작의 길도 끝없는 고뇌의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해도 되나요〉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뇌하던 내 지난날의 초상인 듯하다. 누구에게 답답한 심정을 고백하고 의지하며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읊조렸던 것이리다.

 

누군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선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망설일 때가 있다. 나 또한 인생의 기로에서 많은 고민을 해야 했고 결국 나 스스로 갈 길을 결정하면서 살아왔다. 중학교에 진학할 때부터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과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갈림길에서 고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무엇을 선택했든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 비록 잘못된 선택이었더라도 그것은 다시 한 번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아픔이 컸던 만큼 더 성장할 수가 있었다. 인생은 60부터라는데 앞으로 펼쳐질 내 운명에 또 어떤 선택의 갈림길이 있을지. “이렇게 해도 되나요?” 그저 신의 뜻대로 믿고 따를 수밖에.

 

△백봉기 수필가는 군산 출생이며 한국산문 수필공모에 당선됐으며 KBS 프로듀서를 역임했다. 현재 전북예총 사무처장으로 있으며 수필집 '팔짱녀'등을 펴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100
최신뉴스

자치·의회임승식 전북도의원 “인프라만 남은 전북 말산업특구 ‘유명무실’”

자치·의회김동구 전북도의원 “전북도, 새만금 국제공항 패소에도 팔짱만… 항소 논리 있나” 질타

국회·정당임형택 조국혁신당 익산위원장, 최고위원 출마 선언…“혁신을 혁신할것”

법원·검찰남편에게 흉기 휘두른 아내, 항소심서 집행유예

사건·사고‘골프 접대’ 청탁금지법 위반 의혹 전북경찰청 간부, 혐의없음 종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