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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박물관에서 발굴조사에 들어가 햇빛을 보게 된 부안 유천리의 각종 유물은 시대를 넘어서 고려청자의 빛깔을 지금까지 전해주고 있다. 곱고 세련된 유약과 부안땅에서 채취된 백토, 여기에 자연이 빚어낸 불 등으로 탄생된 고급 청자는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지만 청각적으로 우리 예술의 찬연한 미감을 전해준다. 도공의 치열한 예혼은 그 위에 투명하게 빚어졌다.현재에도 이화여대 박물관 수장고에 소장돼 있어 일반인이 관람할 수 없는 청자 관악기는 그동안 미술사학계에서 도판으로 소개되었을 뿐 학계는 물론 한국음악사학계에서도 소개 조차 되지 않은 유물이다. 그러나 이 유물은 고려시대 청자에 생산된 현재까지 유일무이한 관악기란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 부안군에서 발간한 『부안유천리 고려도자』에는 "속이 빈 8각관으로 지름 0.8센티미터의 구멍이 있어 관악기로 추정하였다"라고 한 줄로만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비록 유약이 녹지 않아 상태가 불량하지만 이 악기는 고려시대 전북국악사는 물론 한국음악사의 외형과 내실을 넓혀줄 유물로 평가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고려시대 각종 주악도상에서 소개되지 않았으며, 본격적인 연구 또한 미진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악기는 출토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관악기 유물이란 점에서 학계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비록 파손되어 원형을 제대로 알 수 없지만 취구가 있고 세로로 불 수 있는 관악기인 점, 그리고 피리에 비해 규모에서 큰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퉁소로 볼 수 있다.고려시대 이후 퉁소라는 명칭으로 전승되어 있는데, 시대에 따라 악기의 구조는 약간씩 달랐다. 특히 고려 이후부터 조선 중기까지 당악과 향당교주의 궁중음악 연주에 사용되었으며, 조선 후기 풍류문화에서도 한몫을 한 악기다. 퉁소는 세로로 부는 관악기의 일종으로 현재는 그리 활발히 연주되지 않지만, 풍류객들 사이에서도 높은 인가가 있었으며, 민간에서도 퉁소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애용되었던 악기다. 퉁소가 얼마나 널리 알려졌던지 바깥에서는 제대로 행세하지 못하면서 집안에서나 큰소리치는 사람을 일컬어 '방안퉁수'라고 하는 말까지 생긴 걸 보면 퉁소가 사람들에게 어지간히 친근한 악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특히 20세기 초반에 퉁소의 명인은 거의 모두 전북 출신이었다. 단소의 명인 추산 전용선과 맹인으로 이름을 떨친 편재준, 그리고 유동초 명인은 모두 퉁소로 이름을 날렸다. 우리 전북에서 출토된 퉁소와 조선시대 퉁소 명인 대부분이 전북출신임을 감안한다며 퉁소란 악기는 전북과 불가분한 관계임은 자명해진다. 그리고 고려시대부터 전북에서는 퉁소를 사랑할만큼 수많은 악공이 전통음악 지킴이로 활동한 것을 상상만 해도 국악의 본향으로 전북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만큼 전북의 국악뿌리는 깊다고 할 수 있다. 이제라도 유천리에서 출토된 퉁소를 통해 고려시대의 화려했던 음악을 부활하는 작업이 절실하다.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장구는 모래시계 모양의 나무통 양면에 가죽을 대서 만든 타악기다. 장구는 사람들을 춤추게 하고 노래하게 하는 데 그 어떤 악기보다 강력한 힘과 인상을 심어준다.특히 현재와 같이 나무통에 가죽을 댄 장구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언제나 장구 대용품을 만들어 장구 소리를 냈다. 고려청자가 유행하던 시절에는 우아한 청자로 장구통을 만들어 멋을 더했고, 조선시대의 풍류방에서는 대나무통으로 만든 죽장고를 두고 노래와 줄풍류를 반주했다.홍명희 소설 '임꺽정'에 "강아지가 아니고 박아지라도 좋다. 박아지는 개울물에 엎어 놓고 박장구 치지 걱정이냐"라는 대목을 읽다 보면, 서민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박장구를 두드리며 즐기는 일도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것도 저것도 없으면 '입장구'라도 쳤던 것이니 이만하면 장구가 거의 생활필수품처럼 존재했던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우리나라 기록에서 장구가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부터다. 고려 문종 30년인 1076년에 제정한 대악관현방 소속 악사들의 월급 항목에 보면 장구 연주자 두 명이 제2등급의 악사로 소속되었고, 『고려사』 「악지」에는 아악을 제외한 당악과 향악 및 궁중정재 반주를 위한 악기 편성에 모두 장구가 사용되었다.1939년 사적 제69호로 지정하고 관리되어 온 부안 유천리 도요지는 700년 전 고려인의 혼을 담아 당대 최고의 기술로 만든 고려상감청자의 보고다. 이 고려청자 산실에서 출토된 청자음각 추규무늬 장구는 당대 도공과 예인의 합일치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현재 이화여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장구는 화려하면서도 섬세하고, 대담하면서도 웅장한 고려시대 장구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특히 『악학궤범』에는 '장구를 만드는 재료에 대해 장구의 허리는 나무에다 칠포를 붙인 것이 제일 좋고, 사기가 그 다음이며, 질그릇은 좋지 않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도자기 장구 또한 실제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700여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본 이 청자장구는 길이가 48.2cm로 현재의 장구와 유사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 장구는 유물의 허리격에 해당되는 조롱목을 연결하여 쓰는 조립식이 아닌 일체형의 장구란 점에서도 당대 도공들의 치열한 예혼을 만날 수 있다. 순수하게 흙은 한 점의 장구를 탄생시킨 것이다. 또 장구에는 추규당총, 연판, 당초, 뇌문, 종선문이 조각되어 있어 화려함마저 안겨준다. 또한 받침 흔적까지 있어 장구를 고정시켜 연주한 것으로 추측된다. 거대한 크기를 생산했던 도공을 생각하면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이 유물은 일제강점기에 정읍에 살던 일본인 후까다가 유천리 가마터에서 도굴하여 갖고 있던 유물로 1958년 이화여대 박물관이 구입한 것이다. 현재에는 나무로 된 장구가 사용되고 있지만 도자기 장구가 주는 우아함과 섬세한 소리로 빚어내는 국악무대도 열리기를 바란다.
가을 하늘빛인 비취색으로 빚어낸 고려청자는 한국인의 미의식이 가장 많이 담겨진 역사의 그릇과 같다. 특히 고려시대 전남 강진, 경기 광주와 함께 청자생산지의 트로이카를 형성했던 부안의 청자는 왕실에 진상될 만큼 역사적 무게와 한국의 미를 대표한다.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청자상감인물문매병은 사적 69호로 고려 청자 최대 생산지였던 부안군 유천리 가마터에서 생산된 명품이다. 13세기에서 14세기에 사이에 제작된 이 매병은 비록 파편으로 출토되어 복원되었지만 고려인의 미감을 반영한 작품으로서 높이가 38.5cm의 위용을 자랑한다.특히 중국 원나라와 도자 교류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작품으로 학계에 보고된 이 매병은 괴석과 연꽃, 대나무와 국화꽃이 있는 정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사락도(四樂圖)가 그려져 있어 도교사상을 보여준다. 현실에 발을 딛고 이상향을 그린 작품인 것이다. 더욱이 정원에서 사락도를 배경으로 시 짓기, 그림그리기, 춤추기, 악기를 연주하는 4장면 또한 고려공예의 진수라는 점에서 4장면을 한 곳에 담은 세계 유일의 작품으로 주목된다.한국화 된 고려매병을 보여주는 일례이기도 한 이 청자는 넓은 형태에 입구부분에 부드러운 S자형의 측면 선을 이루고 있다. 이 매병에는 고려시대 음악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두 가지 악기가 등장한다. 당대 악기였던 종적과 향비파가 등장하는데, 악공을 연상케 할 만큼 남자들의 힘찬 기상이 고스란히 흙과 유약을 통해 스며있다.먼저 종적은 대금과 소금이 가로로 비껴들고 부는 관악기인 횡적인데 비하여 세로로 내려들고 부는 관악기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적은 퉁소였다. 그러나 본래 퉁소는 중국에서 전해진 당악기의 하나였다. 이 악기는 궁중음악에만 사용되던 것인데 현재 사용되지 않는다. 민간에서도 퉁소라는 이름의 악기가 널리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그 전통이 끊어지고, 유일하게 함경북도 북청 지방에서 사용하던 것이 남아 전한다.또한 『삼국사기』에 "향비파는 당나라 제도와 대동소이하며 신라에서 비롯하였으나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기록돼 있다. 그 음에는 세 조가 있으며 궁조, 칠현조, 봉황조에 212곡이 있다" 라고 하였다. 향비파는 4현에 곡경인 당비파와는 달리 5현에 직경이며 복판에 대모를 대고 거문고처럼 술대로 타는 것이 특징이다. 향비파는 『경모궁악기조성청의례』에 의하면 1777년에도 사용되었으나 이후 단절되었다.이처럼 이 매병에는 종적인 퉁소와 지금은 단절된 향비파가 새겨져 있어 중세음악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역사를 거치면서 부침이 심했던 우리 악기가 700여년을 넘어 새롭게 부활되는 모습이 참으로 경이롭다.전북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0호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탑으로 손꼽이는 실상사백장암삼층석탑. 화강석으로 5m의 높이로 세워진 이 탑은 실상사의 또 다른 상징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 서편에 위치한 절로 통일신라시대인 828년(흥덕왕 3) 홍척이 창건하였다. 실상사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백장암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이 탑은 그 아래 경작지에 세워진 탑이다. 기단 구조와 각 부의 장식조각이 특이하여 전형적인 신라 석탑과는 다른 형태의 석탑이다. 즉, 보통의 탑은 위쪽으로 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 데 비해 이 탑은 아래와 위의 너비가 거의 일정할 뿐 아니라, 높이도 1층만이 높을 뿐 2층과 3층은 비슷하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색다르다. 기단부는 낮으며 4면에는 난간을 섬세하게 양각하고 있다. 탑신석은 매 층이 돌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1층은 그 남면에 문비를 중심으로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다른 3면에 보살상, 천왕상, 동자상 등이 각각 조각되어 있다.특히 2층 탑신 사면에 한국고대음악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할 수 있는 주악상이 조각되어 있다. 사면에 각각 2구씩 총 8구의 주악상은 화려함의 극치다. 필자가 1998년 탁본을 떠 학계에 소개한 바 있다. 당시 이 탑의 주악상은 곳곳이 마모되어 있었으며 박판, 요고, 생황, 동발, 향비파, 횡적이 확인되었다.이 가운데 박판은 기존의 전남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에 나온 박판보다 시기적으로 반세기 정도 빨라 가장 오래된 석조물의 주악상으로 평가된다. 또한 향비파는 삼국사기에 신라 삼현의 악기로 소개되어 있는데, 문헌을 뒷받침하는 최초의 고대유물로 발견돼 눈길을 끌었다. 더욱이 서역계의 악기인 향비파와 횡적이 조각되어 있어 우리나라 음악변천사도 펼쳐놓았다. 다시 말해 우리음악이 서역을 시작으로 중국을 거쳐 들어왔음이 부분적이나마 이 유물에서 밝혀진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악기는 일방적인 전수가 아니고 우리민족의 뚜렷한 민족성과 미의식으로 수용되었으며, '우리 식'으로 펼쳐짐에 따라 우리나라 음악발전의 한 축도 감상할 수 있다.총 6명의 천인이 연주하는 악기들의 모습은 때로는 동적이고 때로는 정적으로 당대 음악상을 고스란히 부활시켜 연주하는 오늘날의 국악실내악단처럼 보인다.일반적인 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지 않고 각 부재마다 자유로운 구조로 되어 있으며, 탑신 전체에 갖가지 조각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신라 후기를 대표하는 공예탑으로 최고의 걸작이란 극찬을 받고 있다.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실상사 출토 범종은 1969년 3월 29일 남원군 산내면 실상사 경내에 있는 약사당 동남쪽 지점에서 출토되어 현재 동국대박물관 1층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높이 28∼99㎝, 입지름 96∼99.5㎝으로 발굴당시부터 빼어난 장식미로 주목을 받은 유물이다.애석하게도 출토 당시 이미 종신의 절반 이상이 파손된 상태로 발굴되어 완형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남아 있는 주악상을 포함한 비천상과 하대 및 당좌의 모습을 통해 통일신라 범종의 모습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완형 혹은 파종으로 현존하는 통일신라 범종의 수가 희소한 점을 감안한다면 실상사종의 존재는 한국 범종의 전형을 완성한 통일신라시대 범종의 양식을 규명하는데 있어 전범과 같은 존재다. 이미 학계에서는 실상사 출토종은 규모 면에서 상원사종에 버금가는 중대형의 범종이었으며, 전형적인 항아리형 종신을 가진 종이였음이 밝혀졌다.특히 주악비천상의 경우도 천의의 자연스러운 굴곡, 천의를 장식한 다양한 장엄구, 섬세한 안면표현과 신체의 양감을 통해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상원사종(725년)의 주악상과 더불어 통일신라 범종의 주악비천상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이 파종의 주악상은 통일신라시대 음악상을 살피는데 귀중한 사료로 주목되었다. 범종의 종신에 조각된 2구의 주악상은 서로 마주보며 생황과 횡적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나란히 구름을 타고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자세로 날고 있다.먼저 생황을 연주하는 왼쪽 주악상은 전체적으로 직삼각형을 이루는데 몸을 약간 돌리고 두 손으로 생황을 받들고 있다. 그러나 이 생황은 8세기 전반 상원사 소장 범종의 생황과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어 독창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또 횡적을 부는 오른쪽 주악상은 연화좌에 반듯하게 앉아 몸은 생황을 부는 주악상을 바라보고 있다. 몸을 튼 자세로 적을 불어 마치 종적을 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입가에 피리의 끝이 표현되어 있어 횡적을 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황과 종적을 불고 있는 비천의 풍만한 모습은 신라불상의 양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 종은 남아 있는 부분의 입지름으로 보아 상원사동종보다 약간 큰 규모였으리라 추정되는데, 실상사의 창건 때인 828년(헌덕왕 3) 함께 주조되었다고 생각된다.실상사 출토종의 구성요소는 8세기 범종의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으며 새로운 모티브의 표현 등으로 통일신라 후기 9세기 범종과의 영향관계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의 9세기 초의 범종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 통일신라시대 음악상을 알려주는 악기까지 문양 되어 있으니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유물인지 다시 한번 보여준다. 신라 천년의 향기가 지역과 시대를 뛰어넘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유물인 셈이다. 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정읍시 내장산 망해봉에서 내장산리조트 조성 현장으로 빠지는 산자락.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한 여인이 누워 있다. 머리와 눈, 코, 입, 가슴 선까지 선명하다. 전체적인 실루엣이 누워 있는 여인의 섬세한 형상과 너무도 흡사해 탄성을 자아낸다. 느낌은 처연하다. 이 능선을 오래도록 봐 온 주민들은 1300년 전 정읍지역을 무대로 구전돼 온 정읍사 속 여인이 현신한 것이라며 신기함을 감추지 않는다. 조선시대 악전인 악학궤범은 9권 3책으로 이뤄져 있지만 백제 가요로는 유일하게 정읍만 수록돼 있다. 고대 백제인들은 유난히 노래와 춤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읍사는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다. 행상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네의 애뜻한 마음을 그려낸 정읍사처럼 가요는 세월과 공간을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를 교감케 한다. 더 많은 백제 가요가 전해지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정읍은 음악적으로 삼국 속악의 하나로 전승되어 고려와 조선 시대를 통하여 무고의 무의 때 가창되었고, 특히 조선 시대에 와서는 섣달 그믐날 밤에 궁중에서 마귀와 사신을 쫓기 위하여 베풀던 의식인 나례 후에 거행된 '학연화대처용무합설'에서 처용가 등과 함께 연주되었다. 패망의 역사 때문일까. 정읍뿐만 아니라 백제의 가요는 서러움이 배어있다. 여러 문헌 등을 통해 추측컨대, 백제 가요와 음악은 매우 다채롭고 깊이가 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실체에는 접근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조선조에도 정읍은 여전히 무고 정재의 창사로 사용된 사실이 악학궤범에 전한다. 악학궤범은 정읍의 노랫말이 기록된 유일한 문헌이다. 정읍은 전승과정에서 변화가 있었으나, 조선조 내내 궁중악으로 사용되어 오늘날까지 연주되고 있으니, 그 역사는 적어도 천년이 넘는다. 다만 정읍의 노랫말이 조선 후기 무렵에 이르러 불리지 않으면서 기악곡으로 변한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특히 정읍은 수제천, 혹은 무고라는 이름으로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궁중연악으로 연주되었고 1970년에는 파리에서 제 1회 유네스코 아시아 음악제 전통음악분야에서 봉황음 이라는 곡으로 연주되어 최우수 악곡으로 선정, 세계적 거작으로 공인되었다. 전북의 자랑스러운 음악이다. 온유한 민족성으로 알려진 백제의 가요, 정읍에는 마치 풍만하고 아름다운 곡선미의 예술이 스며져 있는 듯하다. 백제가요 중 유일하게 오늘날까지 전승해온 정읍사의 생명력은 악학궤범이란 전통음악의 모범답안 속에서 고스란히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 한별고 교사
백제는 미마지가 일본에 기악무를 전해두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매우 우수하고 풍부한 예술성을 지닌 국가였다. 그러나 당대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승리자였던 신라 쪽으로 편향된 서술로 인해 상대적으로 백제의 문화예술은 과소평가되고 평가절하 되었다.또한 지금까지 학계에 보고된 고고학 자료 역시 충청도를 중심으로 발굴되었기 때문에 전북의 실상을 유물로 찾기는 매우 미약하다. 그러나 부여 등 옛 백제 땅에서 출토된 '금동향로'등은 당대 백제문화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준다. 고려사 악지에는 백제가요로 '정읍사'를 비롯해 '방등산가', '선운산가', '무등산가', '지리산가' 총 다섯 곡이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사 악지에 나오는 백제가요는 악보나 설명이 없이 유래와 곡명만이 전해오고 있어 동시대 음악문화를 살피는데 한계가 있다. 더욱이 이 가운데 '선운산가'는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료의 빈곤에서 비롯되어 그것을 단서로 하여 백제가요의 양상을 살피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특히 다섯 곡의 백제가요 중 전북지역에 해당되는 곳은 '정읍사'를 비롯해 '선운산가'와 '지리산가' 등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하게 많은 곡을 보여준다. 그만큼 백제시대에도 전북의 전통문화가 화려하게 꽃피고 융성했던 점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선운산가'는 정역에 나간 남편이 기한이 지나서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선운산에 올라가 남편을 그리워하며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 가요는 백제 여인들 사이에 널리 불리어졌던 종교적 망부가로서, 삶의 고통스러움과 시대 상황에 대한 풍자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이 노래가 불리어진 지리적 공간, 특히 선운산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운사는 24처의 굴이 있어서 원시 고유 신앙과 연결된 축술적 기원의 비나리적 성격이 이 노래를 지배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국문학자 조재훈 박사는 백제가요에 대해 "평민성, 저항성, 윤리성, 정한성을 담고 있다"고 서술한 바 있다. 이러한 백제가요는 한국가요의 원류가 되어 그 섬세한 정서와 한의 정감이 고려와 조선시대에 흘러 현대시가에도 닿아 있으며, 판소리계 소설과 음악의 원천으로 작용하기도 했다.국악의 본향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전북의 수많은 국악단체들은 이제 백제가요를 새롭게 해석하고 전승되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제 백제가요를 고전만이 아닌 오늘에 살아 숨 쉬는 현대적 전통음악으로 재창조하기 위해 작곡과 공연, 그리고 노래로 승화시키는 방안이 절실하다는 것이다.수 천년의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 지역에서 우리만이 간직한 소재로 전통음악이 새롭게 복원하는 것도 현재 국악인들의 사명일 것이다.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선사시대에 우리의 조상들은 수렵이나 어로행위를 할 때 서로 간에 연락을 꾀하거나 작업의 흥을 돋을 목적으로 고함을 지르고 노래를 부르거나 혹은 도구를 이용해 상호 교신을 하였을 것이다.당대 유물을 통해 보았을 때, 많은 원시의 소리가 아직 미 발견의 상태로 남아 있으나 지금까지 발견된 일부 유물 속에서는 당시 소리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전북에서 전하는 가장 오래된 소리도구인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원개형동기는 바로 농경시대의 제사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원개형동기는 제정일치사회에서 제사를 관장하는 제사장의 신분을 상징하는 징표로서 사용되었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원개형동기와 같은 신성스러운 소리의 유물에서 흘러나오는 신성한 소리를 통해 부족의 화를 쫓고 복을 부름으로써 부족구성원들을 다스릴 수 있었다.원개형동기는 둥근 원 모양의 청동기인데, 둥글면서 뚜껑처럼 안쪽이 약간 굽은 형태다. 또한 뒷면에 구멍이 있어 끈을 매달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오늘날 꽹과리와 매우 유사한 모습을 띤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익산에서 출토된 원개형동기가 학계에 보고돼 있다. 이 유물은 1973년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던 고 황수영 교수가 전북지역에 조사차 내려왔다가 익산의 골동품점에서 발견하고 구입하여 국가로 귀속시킨 것이다. 황수영 교수에 의하면 이 유물은 전북지역에서 출토된 것이 틀림없다고 한다.기원전 4세기 말에서 기원전 3세기 초 사이의 유물로 평가되는 이 유물은 문양에 있어서도 십자문양을 보이고 있어 '십자무늬청동의기'로 지칭되기도 한다. 약 12㎝ 크기인 원개형동기가 고대음악사에 주목받는 이유는 청동이란 재질과 십자문양에 있어 샤마니즘이란 종교의식과 밀접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유물은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원개형토기 중 유일하게 십자문양이 있는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오늘날에도 만주 몽고족의 무격들은 수십 개의 동령과 동경, 패곡 등을 달아서 요란하게 소리가 나는 신의를 입고 손에 신고를 잡고 두드리며, 춤을 추는 것과 비교하면 이는 원개형동기와 매우 유사하다. 다시 말해 오늘날 꽹과리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하겠다.비록 악보와 음악적 산물이 없지만 원개형동기는 청동기시대에 제정일치 사회에서 신을 부르고 그 신을 통해 부족원들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면 마치 지금의 꽹과리처럼 '둥둥둥' 울렸을 당대 담백하고 솔직한 음악성이 깃들여있다.전북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부안 죽막동 유적은 주변 일대를 널리 조망할 수 있는 절벽 위의 평탄면에 위치해 있다. 이 해양제사장은 동양에서는 최대 규모로 세계 고고학계가 인정한 선사시대 해양제사유적지다. 이 해양제사장은 노천에 제물과 제기를 놓고, 숭배의 대상으로 신목을 두었으며, 주변에 금줄을 둘러 신성한 곳으로 성역화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죽막동 유적을 통해 항해와 어로 활동과 관련된 각종 해신 제사를 살펴볼 수 있어 고고학적, 인류학적으로 주목받는 곳이다.해양제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며 성행하였다. 삼한 사회에서는 제사장인 천군이 소도라는 독립된 지역에서 의례를 주관한 것이다.이 시기에는 대형 항아리와 그릇받침, 신에게 바치기 위해 실물을 축소하여 만든 다양한 석제 모조품 등을 사용하였다. 제사에서는 음식을 공양하고 제물을 바치며, 신의 뜻을 묻는 행위나 신에 대해 기원하는 음악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사를 위해서 신의 뜻을 묻는 유물 등을 특별히 제작하였다.이와 같은 제사유적은 농경문화와 해양문화가 동시에 발달한 전북에서도 나타나는데, 바로 남원 세전리나 군산 여방리와 같은 생활 유적에서도 찾을 수 있다. 특히 죽막동 제사유적에서는 음악으로 사용되었을 길이 5.4㎝의 청동종방울, 즉 동탁이 발견돼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동탁의 용도는 안에 혀가 있는 점으로 볼 때, 오늘날의 요령처럼 흔들어서 소리 내는 악기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한국음악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악기 분류에 있어 동탁 등을 악기로 분류하고 있지 않지만, 앞으로 동탁도 악기로 분류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선사시대 소리를 내는 의물은 악기의 범주로 편입시켜 우리 고대음악사를 확장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이렇듯 제사유물이었던 동탁을 전통 타악기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악기를 소개한 『세종실록』과 『악학궤범』 그리고 『증보문헌비고』등이 숭유억불을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편찬된 책이므로, 주로 유교 의례에 사용된 악기를 중심으로 소개됐기 때문이다.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의 국악개론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동탁 등을 악기로 분류하지 않고 있어서 전통악기 종류의 폭을 넓히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고대 유물 가운데 동탁을 악기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 원인이 되었으며, 종 종류의 악기를 중국에서 수입한 편종과 특종에 국한시킨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금부터라도 청동기 시대가 기원인 동탁을 악기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이며, 우리 음악의 기원도 더 넓혀 잡아야 한다.전북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지난 9월 완주군 이서면에서 간두령이 출토되었다. 간두령은 현재 국내에서 10여 곳 안팎에서 보고되었는데, 모두 신고 된 유물임에도 어떤 유적에서 어떤 상태로 출토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호남문화재연구원은 발표했다. 이런 면에서 완주 신풍유적에서 정식 발굴조사를 통해 최초로 확인된 간두령은 학술적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하였다. 특히 간두령 대부분이 국보를 비롯한 국가지정 문화재라는 점에서 정식 발굴조사를 통해 존재를 드러낸 이번 전주 출토품 역시 국보급 유물로 평가받았다. 간두령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막대기 끝에 끼우는 방울이다. 전체 모양이 총알처럼 생겼는데, 아랫부분에 둥근 테두리가 차양처럼 둘러졌고, 그 밑은 장대에 끼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한 몸체 끝 부분에는 길쭉한 투창이 뚫려 있으며, 그 안에 방울알이 들어 있어서 요령과 같은 용도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창촉 모양에 청동방울이 달린 간두령에는 정교한 무늬가 일정하게 새겨져 있다. 이런 종류의 방울은 청동 의기 중 악기의 하나로 무당이 의복에 부착하거나, 나무 자루에 끼워 사용하던 타악기로 추정되는 것이다. 간두령이 제작된 청동기 시대 농업 생산력 증대는 지배자의 권위와 직결되는 것이므로, 소국 형성단계에는 농경의례의 성행과 청동 의기의 제작이 증폭했다. 청동 의기는 종교적 의식 용구이지만, 종교의례를 주관하는 지배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심벌이기도 했다. 정치적 지배자는 제천의식을 통해서 국가적 통합과 천신의 대리자 또는 천부신과 같은 권위를 획득했을 것이다. 제천의식은 국가적 사회 통합력의 강화와 농업생산력 증대라는 목적에서 국중대회 방식으로 치러지는 국가적 농경의례이다.농경이 발달되고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자연신을 숭배하는 종교적 제의도 연중행사로 자리잡고, 영고·동맹· 무천의 경우로 미루어 종교의식에 노래와 춤이 함께 아우러졌으리라 추측된다. 특히 삼한의 5월제와 10월제는 농경이 정착, 발달된 청동기시대에 이미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제의에 일반인들은 노래와 춤을 추었고,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제사장이 사용한 음향도구는 간두령이었다. 청동방울인 간두령은 음양, 천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천지자연의 소리를 나타낸다. 천지자연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이 모두가 천지자연의 소리이다. 즉 백성은 이 제사장이 흔드는 천지소리인 간두령 울림에 의해 이목이 집중되고 춤추고 노래하고 명령에 따랐을 것이다. 제정일치시대에 간두령은 민중의 생동을 그려내는 음악성에 있어서 오늘날 타악기와 똑같은 모습을 연출했을 것이다. 간두령은 개별적인 서정의 노래보다는 집단적인 노래에 알맞다고 추론할 수 있다. 청동에서 울려 퍼지는 청아한 소리가 귀전에 시공을 초월해 맴돌고 있다.전북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국악의 본고장으로 지칭되는 전북국악은 우리 역사속의 국악문화와 궤를 같이한다. 지금까지 전북국악은 판소리와 산조, 민요와 농악을 통해 민중의 문화를 대변하고 한국 국악사의 중심부에 서있었다. 전북이 국악의 본향 또는 전통문화의 산실로 자리매김 한 배경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전통음악이 악곡 중심이었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전북의 국악이 걸어온 길을 유물과 유적에서 찾아볼 수는 없을까. 한 점의 유물과 한 지역의 역사유적은 수많은 사연이 담겨져 있는 실타래와 같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제각기 펼쳐졌던 유물과 유적은 그 시대의 이야기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전북의 유적, 유물이 비쳐진 사료들은 기록학적인 성격이 강하여 당대의 음악문화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선사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각종 유물, 유적의 자료를 통해 전북국악의 역사를 확보하는 작업은 그만큼 소중하다. 이 분야 전문연구자인 황미연 전북문화재 전문위원이 매주 한 차례 유물유적으로 만나는 전북의 국악사를 시작한다. 이 연재물은 지역의 유물유적을 통해 전북국악의 깊이와 넓이를 보다 깊고 넓혀줄 것이다. 역사학 전공의 황 위원은 전북지역의 전통음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선사시대 돌무덤의 하나인 고인돌은 지석묘라고도 한다. 큰 돌을 받치고 있는 괸돌 또는 고임돌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학계에 보고되어 있다. 고인돌을 축조하려면 거대한 바위를 채석, 운반해야 하는 과정이 수반된다. 수 톤 내지는 수 십 톤에 이르는 거석을 채석하고 운반하는 데는 오랜 기간과 대규모의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즉 고인돌은 벼농사를 위시한 농경사회, 일정한 영역권이 형성된 정착생활, 혈연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집단의 의례 행위로서 축조될 수 있는 것이다.이와 같은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집단 노동요가 필수적으로 불러졌을 것이다. 고인돌 축조는 많은 사람의 노동력 동원을 필요로 하는데, 협동과 단결력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통일된 행위의 협동 과정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영-차와 같은 구호이며, 이것이 지속될 때, 마침내 노동요가 형성된다. 이 때 노동요는 공동체 사회의 힘의 결집과 협동 단결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 4만여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고인돌의 제작과정에서 노동요가 사용되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실제로 1988년 KBS 역사스페셜 한반도 고인돌왕국의 수수께끼란 프로에서 고인돌 축조 실험이 이루어졌는데, 동원된 인원이 73명이며, 이들이 고인돌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노동력의 응집을 위해 자연히 노동요가 불러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인돌은 무덤의 축조과정 중 장송의례의 한 단면도 보여준다. 장송의례는 죽은 이에 대한 애도의 표현, 시신의 처리법과 매장법, 부장품의 매장 풍습, 제의 등이 포함된다. 이처럼 고인돌을 축조한 청동기시대에는 고인돌의 축조과정이나 장송의례에서 상부상조의 공동작업 방식을 통해 동원된 인력들을 하나의 힘으로 모으기 위해 노동요가 필수적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이 시기에 집단 노동요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전북은 고인돌이 한반도에서 장 밀집되어 있는 지역으로 고창 고인돌군은 세계문화유산 997호로 등재되어 보호받고 있다. 약 1,680여 기에 달하는 고창 고인돌과 용담댐 주변의 고인돌을 포함해 전북에 약 3.000기가 있으며, 이 고인돌이 해안과 내륙을 이어주는 주요 교통로에 밀집되어 나타나는 거석문화의 보고이다. 따라서 노동요의 잔영이 남아있는 평등사회의 대표적 유물인 고인돌은 전북의 뿌리깊은 국악 역사를 만나게 해준다.선사시대부터 노동요를 통해 삶의 일부를 희노애락을 즐겼던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유물, 유적이 바로 고인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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