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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는 우리민족의 정서와 멋과 풍류가 어우러진 민중 음악이다. 판소리는 위로는 임금에서부터 아래로는 민중들까지 즐겨 들으며 함께 울고 웃었다. 판소리의 양대 산맥은 동편제와 서편제다. 남원은 동편제 판소리의 탯자리다.수많은 명창과 명인들이 지리산 자락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득음을 이루며 한국 판소리사에 굵은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판소리 명창 반열에 오르기 위해선 지리산 계곡에서 독공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그만큼 이 지역은 판소리를 위한 자연환경과 인문 환경이 하나가 된 곳이다. 최근 들어 지리산 둘레길이 펼쳐져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쉽게 판소리 명창과 조우하게 된다. 우리음악이 대우받을 수 있는 주변 환경이 형성된 것이다. 특히 남원시 운봉읍 비전마을은 동편제 판소리의 창시자인 가왕 송흥록이 태어난 곳일 뿐 아니라 여류명창 박초월의 판소리를 익힌 소리의 고향이란 점에서도 범상치 않은 지역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운봉은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하나인 옥보고가 거문고를 크게 발전시킨 곳(운상원)으로 알려져 있어 이곳은 우리나라 전통음악의 산실이다. 이처럼 운봉이 이 땅의 소리의 중심지로 거듭나는데 대해 향토사학자 김용근씨는 운봉을 지칭해 동편제 판소리의 창시자 송흥록을 비롯하여 수많은 소리꾼들의 수련 장소였던 구룡계곡 뿐만 아니라 소리를 즐겨하는 귀 명창들과 그들을 후원하는 재력가인 만석꾼이 있어 소리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자연환경을 갖춘 지역"이라고 소개한다. 조선 순조 때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서 태어난 송흥록 선생은 민속음악 가운데 가장 느린 진양조를 판소리에 응용, 판소리의 표현영역을 확대시키는 등 다양한 음악 기교를 사용함으로써 극적이면서도 예술적인 판소리를 완성시킨 인물이다. 특히 〈춘향가〉의 옥중가중 귀곡성(귀신 울음소리)은 그가 창작한 독창적인 판소리 창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송흥록 선생으로부터 출발된 동편제는 형의 고수로 지내다가 뒤에 형에 버금가는 명창이라는 소리를 들은 아우 송광록과 손자 송만갑이 대를 이어온 이후 계층과 지역을 초월한 광범위한 애호를 받는 예술로 부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특히 송흥록은 철종으로부터 정삼품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받기도 했으나 세도가 김병기 일가의 몰락과 대원군의 부상에 따라 명예와 돈도 모두 팽개치고 함경도 지방을 떠돌다가 생을 마감했다.평생을 소리에 미쳐 소리를 지키다 간 송흥록은 지금도 판소리사에서 큰 업적을 남긴 대명창이다. 소리가 천시 받던 시절, 소리를 생명줄처럼 지키고 살았던 그는 지금도 후학들에 판소리 중시조뿐 아니라 치열한 정진과 새로운 것을 향한 진양조 창시자, 그리고 후대에 명맥을 이어놓은 교육자로 첫 손에 꼽힌다. 2000년부터 비전마을에 국악성지가 조성되며 송흥록 선생 생가와 박초월 명창 고택이 복원되어 있고 동상 등이 건립되어 조명을 다시 받고 있다. 우리 소리를 지켜온 명창에게 후학들은 제대로 대접을 해주고 있는 형상이다. 지금도 판소리 전공자뿐 아니라 우리 음악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판소리 유적지로 주목받고 있다./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판소리사 최초의 비가비 광대인 권삼득(1771-1841). 비가비 광대란 이른바 무가계열의 소리꾼이 아닌 양반계통의 판소리 명창을 칭한다.지금까지 권삼득이 태어난 곳은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와 익산군 남산리, 그리고 남원 출생설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여러 학자에 의해 권삼득은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에서 태어나 익산 남산리에 거주하였으며, 그의 외가가 남원으로 정리됐다. 따라서 완주군 용진면은 우리나라 판소리사 최초의 비가비인 권삼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해 소리의 고장으로도 불린다. 양반 출신의 소리꾼이라는 비가비로서 활동하면서도 조선 8명창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던 권삼득은 살아생전 세상을 주유하며 소리를 하다가 고향인 용진면 구억리로 돌아와 세상을 떴다. 신재효는 그의 호탕하고 씩씩한 가조를 두고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에 비유하기도 했다. 현재 용진면 구억리에는 그의 묘역과 생가터, 소리굴 등이 있다그러나 권삼득이 우리 판소리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이유는 앞에서 말한 양반 광대, 덜렁제 창시라는 수식어 이외에도 조선창극사에 나오는 글의 내력 때문이다. 조선창극사에서는 권삼득의 소리를 '장단에 어긋남이 없이 사설을 짜나가는 솜씨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와 함께 신분사회에서 예상되는 수모와 멸시를 감내하고 광대의 길을 택했던 소리꾼 권삼득의 자취는 그의 생가와 묘소, 그리고 소리굴에 나온다. 특히 생가에 소개된 그의 기록은 '사람, 새, 짐승의 세 소리를 터득했다 하여 삼득(三得)'이라고 했으며, 묘소 입구에는 '천지인 즉,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 소리 세 가지를 터득하여 명창이 되었다'고 전한다.그와 관련된 유적으로 현재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에 생가, 무덤, 소리굴, 소리 구멍 등이 있다. 현재 이들 유적이 복원되어 잘 정비된 상태로 자리잡고 있다. 판소리사에 불멸의 족적을 남긴 양반 광대 권삼득은 전설에 의해 묘사된 명창이 아닌 분명한 문헌과 음악적 소양을 토대로 이 땅의 소리꾼의 지침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고장 출신으로 수많은 명창들의 길을 열었던 양반 광대에 대한 보다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세계가 인정한 판소리의 참뜻을 더욱 건강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이다.전공자뿐 아니라 도민들도 한번쯤 소리구멍에서 자신을 불태우며 득음을 향해 목숨을 던진 명창, 그리고 신분을 초월해 판소리에 매료돼 가문에서 쫓겨나면서까지 소리에 매진했던 권삼득 명창의 진정한 소리사랑을 느껴보는 것도 예향 전북인의 멋일 것이다.생가, 묘역, 소리굴, 소리구멍에는 240여년이 지났지만 권삼득의 탄탄한 내공에서 뽑아내는 덜렁제 한 대목이 들리는 듯하다. 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전주소리문화관 소장품으로 현재 전주역사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소리북은 제작자와 명고의 기록은 없지만 조선후기 북으로 추정되는 유물이다. 100여년이 훨씬 넘은 이 소리북은 소리의 고장, 국악의 본향으로 위치하고 있는 전북의 뿌리깊은 소리 역사를 대변하는 처연한 느낌까지 준다.이 소리북 크기는 37㎝×37㎝×21㎝. 비록 색이 바래고 가죽이 벗겨 나가 북으로서의 생명력은 없지만 유물이 갖는 역사성은 시대를 초월해 당당한 북에 자신을 던졌던 이름 없는 고수의 생명력이자 유명 고수의 목숨과 같은 유물이다. 판소리의 장단을 치는 소리북은 이른바 소리 명창이 춘향가나 심청가 같은 긴 이야기를 노래하는 동안 북을 잡은 고수는 소리꾼과 함께 소리의 생사를 살려내어 그 소리가 비로소 예술이 되게 한다.일찍이 시인 김영랑이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 장단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 연창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 북은 오히려 컨닥타요"라고 간파한 것처럼, 그리고 '일고수이명창'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처럼 소리북은 판소리를 이루는 중요한 축이다. 뿐만 아니라 소리북을 잡은 이에게 고수라는 전문 음악인의 칭호를 부여하고, 소리북의 음악세계를 따로 '고법'이라 하여 명창의 득음의 경지와 동일하게 인정했다.이런 것들이 소리북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안하면, 북이 소리의 보조적인 반주악기가 아니라 "오히려 지휘자인 컨닥타요"라고 외친 시인의 역설이 지나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전주소리문화관 소장의 소리북은 전북인들의 마음을 소리로 표현한 문화 매체이자 상징과 같은 유물이다. 언제부터라고 단정할 수 없는 아주 오래 전부터 한민족의 생활 속에서 함께 해온 소리북은 전북음악사의 축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어디에서 누가 이 소리북을 연주했는지는 모르지만 일제강점기에 권번과 기생조합, 혹은 민간에서 명창을 받쳐주는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는 점에서도 시대를 넘어선 깊은 사연이 있을 듯하다. 특히 이 소리북은 당대 장인의 오랜 경험에 바탕을 둔 안목과 솜씨에 의해 이루어져 더욱 미덥다.소리의 고장으로 각인된 전북의 악기들이 턱없이 부족하다. 여기에 전통문화를 소중히 돌아보지 않은 근래 100여년 사이에 오래된 국악기 유물들이 소리없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리북이 주는 역사적 의미나 연륜적 무게는 더욱 커 보인다.수명이 100여년이 지난 이 소리북이 주는 의미는 근대의 악기들이 사라지고 훼손되고 있는 가운데 발견된 것이고, 또한 척박했던 시절 명창과 명고가 만나게 해준 가교란 점에서도 근대의 전북 국악사의 한 켠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영국에 세익스피어(1564-1616)가 있다면 한국에는 신재효(1812-1884)가 있다. 비록 250여 년간이란 시간의 차이가 있지만 공교롭게도 태어난 날(4월 26일)과 작고한 날(4월 23일)이 모두 같은 세익스피어와 신재효는 각기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지만 모국어로 빚어낸 언어의 연금술은 문화국가를 지향하는 하나의 꼭지점이 되었다.1812년 고창에서 태어나 1884년 작고한 조선 후기 판소리의 이론가이자 후원자가 바로 신재효다. 신분 상승을 꾀하면서도 한시가 아닌 판소리에서 정신세계를 찾은 그는 판소리를 즐기는 동시에 자신의 넉넉한 재력을 이용하여 판소리 광대를 모아 생활을 돌보아 주면서 판소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특히 신재효는 판소리사에서 동편제와 서편제의 장점을 조화시키면서 판소리의 청각과 시각을 모두 만족시키는 점을 강조한 당대의 뛰어난 예술가였다. 진채선 등의 여자 광대를 길러 내어 여자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춘향가를 남창과 동창으로 구분하여 어린 광대가 수련할 수 있는 대본을 마련하기도 하여, 판소리의 다양화를 시도했다. 더욱이 이 땅에 광대가를 지어서 판소리의 이론을 수립하였는데, 인물·사설·득음·너름새라는 4대 법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무엇보다 신재효가 한국 판소리사는 물론 문화예술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는 것은 바로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오위장본집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구성은 동창춘향가를 시작으로 여창춘향가·남창춘향가·심청가·적벽가·횡부가·토별가·박타령·치산가·오섬가·허두가·성조가·호남가·갈처사십보가·추풍감별곡·도리화가)·어부가·광대가·방아타령·권유가·명당축원 등의 노래를 수록했다는 점에서 서민문학의 귀중한 보물과 같다.특히 교육자로서 당대의 명창을 배출했고, 기록으로써 판소리의 지평을 열었던 신재효의 역작이기도 한 이 고서는 6책, 필사본으로 구성돼 있으며 서울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또한 1969년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서 영인·간행한 바 있다. 신오위장이란 신재효가 제수 받았던 관직명이다소외당한 민중의 편에서 울고 웃었던 당대를 빠짐없이 기록해 놓은 고서적은 판소리뿐만 아니라 낡은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 세상을 열고자 했던 시대의 선각자 신재효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명저이기도 하다.신재효 전집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이 책은 판소리의 형성과 발전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전북의 땅에서 전북인이 혼으로 빚어낸 노작은 시대를 초월해 오늘날까지 판소리의 바이블로 존경받고 있다./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우리 고소설의 대표작품을 추천하라면 아마도 우리 국민들은 춘향전을 제일로 꼽을 것이다.그런데 춘향전은 전해지는 이본들이 수없이 많아서, 각 이본마다 내용을 약간씩 달리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본을 가린다면 명실 공히 전주에서 제작된 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를 내세우게 된다. 현재 고소설이 전해지고 있는 형태를 보면, 먼저 붓으로 쓴 필사본 형태가 있고, 다음은 붓으로 쓴 낱장을 나무판에 뒤집어 붙여 그대로 새긴, 판화의 판 같이 만들어 찍어낸 판본 형태가 있으며, 그리고 활자로 인쇄해낸 활자본 형태가 있다. 춘향전도 이 세 가지 형태로 전해지고 있는데,『열녀춘향수절가』는 조선시대 후기 전주에서 판각해 찍어낸 판본이다. 완판본이라고 하며, 각지에서 개인이 판매를 목적으로 출간한 것이기에 방각본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춘향전의 판본은 완판본 이외에도, 경기도 안성에서 판각하여 출간한 안성판본이 있고, 또 서울에서 판각 출간한 경판본이 있다. 이들 세 지역에서 출간된 춘향전 판본들은 내용의 기본 줄거리는 동일하지만, 이야기를 표현함에 있어서 매우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중에서 가창이나 낭송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열녀춘향수절가』는 그 내용이 풍부하고 가장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4.4조의 음률에 잘 맞추어 놓아, 춘향전의 대표로 꼽힌다. 현재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완서계서포 본으로, 이 판본은 전해지는 책이 비교적 많아 쉽게 접할 수가 있다. 이 판본과 다가서관 판본을 비교해 보면, 같은 저본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내용의 글자나 단어를 약간씩 다르게 수정해 놓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판이 낡아 다시 만들면서, 만드는 사람의 주관이나 언어습관에 따라 글자와 단어를 바꾼 것으로 여겨진다. 이 속에는 동양 문화권에 있는 우리들이 필수적으로 알고 있어야할 중국의 역사 사실과 교훈을 주는 고사 성어, 그리고 우리 민족 삶의 바탕인 토속문화와 구수한 방언들이며, 의식주 전반에 걸친 생활습속과 명칭들, 관직생활과 조정이며 관청의 의식 절차 등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나타나 있다. 진정 우리 민족 모두가 정독해야 할 내용이라는 점을 강조해두는 바이다전주에서 펴낸 『열녀춘향수절가』는 상권 45장, 하권 39장, 모두 84장으로 되어 있다. 고종 이전의 광대들에 의해 다듬어진 판소리의 정화를 모두 도입하고, 전라도 방언을 잘 담아 판각하여 상품화한 것이다. 우아한 문체와 속된 문체가 조화를 이루어, 춘향전 이본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국악의 본고장에서 펴낸 이 책은 춘향전의 대중화는 물론 출판의 고장 전주의 명성을 확인시켜 주고 있어 자긍심까지 안겨준다./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악보 『악서정해』는 근대적 표기방법으로 제작된 인쇄본의 국악서적이다. 1932년 전주도서인쇄주식회사에서 나온 이 책은 근대 전북서예가를 대표하는 효산 이광렬과 문인화가 춘강 정석모가 서문을 썼다. 서문에서 이광렬은 이 책이 전주에 사는 일재 이기태가 저자로 참여했다고 했다.음악사학자 권도희는 이 책의 편제를 세부분으로 나누고 첫째 예서부분, 둘째 조선 음악 및 관련된 음악론을 정리한 부분, 셋째 풍류 실제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됐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덧붙여서 이 책이 20세기 전반기의 전주 풍류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로 가장 유력하다고 서술했다.특히 이 책은 고악보의 가야금 율보로 근대 전북음악사를 살필 수 있어 사료적 가치 또한 높다. 전주의 풍류가 정교한 악보집의 편찬이 가능할 만큼 발전되어 있었음을 확인해 준다는 점에서다. 더욱이 율객이었던 저자가 동시대의 전주 풍류음악을 세부적으로 서술해 풍류문화의 선명도도 높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전주에서 살고 있었던 풍류객이 의식적으로 자신이 향유했던 풍류를 서울의 풍류와 구별하고 있음이 잘 드러난다. 더 나아가 이 책은 전주의 풍류공간이 다른 호남지역의 경우와 달리 풍류와 창우집단의 음악이 공존하는 공간이 아니라 풍류를 중심으로 타 음악에 대한 배타적이었으며 보수적이었던 경향까지도 알려준다. 이러한 보수성을 통해 저자는 산조와 같은 새로운 갈래의 수용이나 과거 하층 계급의 음악가에게 풍류방을 개방함으로써 당대의 음악적 요구를 수용하는데 장애가 되었다고 관측하고 있는 것이다.또한 악서정해의 특징은 20세기 전반기에 서울이 아닌 특정 지역의 음악에 전승된 풍류음악의 흐름과 악보가 상당히 부족한 상황에서 전주 풍류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앞서 열거했지만 악서정해에서 저자는 정악만이 우리음악으로 보고 있다. 이는 산조와 같은 민속악적 음악에 반론이 되지만 정음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치열했던 정신세계는 새겨놓고 있다. 이는 호남풍류를 풍류의 정통으로 삼고 있는 저자의 태도에서도 확연해진다. 특히 저자는 도덕적, 교화론적 입장에서 잡음으로 판정된 음악에 배타적으로 반응한 것도 서술하고 있다. 이는 당대 지식인들이 정악을 중심으로 풍류에 집착하고 민속악 등의 광대음악에는 상당히 거리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따라서 『악서정해』는 20세기 초반 전주의 풍류음악을 고스란히 부활시켜놓을 뿐 아니라 당대 지식인들이 음악적 편향성도 동시에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그래서 풍류라는 선율의 동일성이 갖는 예술성도 연주자에 시각과 연주력에 의해 얼마든지 해석이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도 보여준다./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신중탱은 부처님의 정법을 수호하고 도량을 청정하게 하는 신들을 도상화한 그림을 말한다. 신중탱은 대부분 주불전의 신중단에 봉안되어 있으며, 조선후기에 제작된 불화 가운데 전해지는 수가 많은 편이다. 신중에 관한 기록은『삼국유사』에서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화장사에서 밤마다 화엄신중을 외웠다는 기록과, 문수갑사에서 복전 7원이 밤낮으로 늘 화엄신중 예참을 행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늦어도 8세기 초에는 화엄신중에 대한 신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란을 겪으면서 일반 서민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짐에 따라 현실적인 불안 심리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내세적인 신앙보다는 병마나 재액의 퇴치와 현세의 복락을 기원하는 현세구복적인 신앙이 확대되었다. 완주 위봉사 보광명전의 신중탱은 제석과 범천, 천룡팔부중을 함께 묘사한 제석·범천·천룡탱화에 속한다. 이 형식은 신중탱의 형식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애용되었던 것으로, 현존하는 작품 중 가장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신중탱은 범천, 제석천, 위태천 같은 주요 존상 외에도 팔부신중과 토속신이 그려진다. 오늘날 사찰에 가보면 신중단이 빠짐없이 설치되어 있다. 이를 보더라도 19세기에 신중신앙이 얼마나 성행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신중은 불법이나 가람의 수호자라는 외적인 성격과 벽사, 소재라는 내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주는 신으로, 안으로는 질병을 없애주고 복을 내려주는 신으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꾸준히 신앙되고 있다.특히 이 신중탱에는 당대 국악문화도 살필 수 있는 악기가 등장한다. 마치 선녀처럼 생긴 여인들이 비파, 횡적, 바라, 생황을 극사실주의적으로 표현했다. 마치 오늘날 연주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국악은 당대 진솔한 마음을 담았던 그릇과 같이 현실적인 모습을 반추시킨다. 고요한 절에서 소망을 담으며 악기로 마음을 풀어낸 선조들의 슬기가 화공의 빼어난 솜씨로 탄생된 것이다.더욱이 옆으로 긴 화면 상단의 중앙에는 보살형태의 제석과 범천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녹색두광에 금색신광을 지고 있고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이들 사이에는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상이 채워져 있어 국악사는 물론 회화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1896년 제작된 이 작품은 가로 223.6센티미터, 세로 141.5센티미터 등 규모면에서도 장중함을 보여준다, 견본채색으로 그림을 그린 원해당 용준, 편수출초 정련 등 6명의 화공은 그림에서 하나가 됐다. 그림으로 빚어낸 악기가 음악과 아름답게 동행하고 있다./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조선왕실에서 중요지역에 조선건국자의 어진을 모시는 것은 왕실의 위엄을 보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왕에게는 자신의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어진을 모사하고 봉안하는 것은 국가의례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중요 행사였으며, 이를 축하하기 위한 여러 가지 부대행사들이 진행되면서 큰 볼거리를 만들게 된다.경기전은 1410년에 세워졌다가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던 것을 1614년 중수했으며 1991년 사적 제 339호로 지정해 보호하는, 전주문화의 1번지라고 할 수 있다.서울에서 전주 경기전으로 어진이 이안될 때 웅장한 행렬이 연출되었다. 이는 조선왕실의 위엄을 나타내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의미하는 한편, 조선시대 모든 예술영역이 한 덩어리가 되어 극적 모습 또한 보여준다. 예컨대 화려한 의장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은 평민들에게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의례였던 것이다.이러한 어진 봉안행렬에는 시각적 효과와 함께 청각적인 상징을 가지고 있는 음악행렬도가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어진봉안 때 등장하는 고취악이다. 얼마 전 프랑스로부터 영구 기증받은 반차도에서도 화려한 복색을 갖춘 고취악대가 등장했다.경기전으로 봉안되는 어진행렬 때 펼쳐지는 고취악대는 웅장한 악기를 중심으로 어진의 위엄을 상징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청각적인 상징을 가지고 있는 고취악기는 통치자의 절대적 위치를 부각시키며, 매우 용감하고 전투적인 음향으로 행렬의 위풍과 사기를 높여준다.경기전 태조어진 이안행차 시 구성원인 전부고취와 후부고취의 규모는 그 의장의 규모를 염두에 둔다면 대단히 웅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영정모사도감의궤』 등의 반차도에는 서울에서 전주로 향하는 고취악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경기전의』을 보면, 신연을 사이에 두고 앞에는 취타를 선두로 신연의 왼쪽 앞으로는 주장고, 비파, 취거가 있다.또 신연 앞쪽에는 고취가 배치되었는데 고취는 가늘고 긴 북, 비파, 쌍피리, 취거 1쌍, 거문고 1쌍, 피리 1쌍으로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신연의 오른쪽으로는 악무고 즉, 음악과 춤, 북이 어우러지고 있었으며, 지금의 해금인 행금연주와 취적이 배치되었고, 그 뒤를 취타가 또다시 따르는 형태다.『경기전의』에 나타난 음악형태는 거문고 등의 현악기도 등장하지만 취타와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취타는 고대로부터 군영음악으로서 사용되어 왔으며, 역대 임금이나, 관직이 높은 사람이 이동할 때 불고 때리는 연주형태를 가진 타악기 중심의 행악이다.이처럼 어진 봉안행렬에는 우리의 뛰어난 문화유산이 담겨져 있지만 지금은 단절된 상태다. 전통문화중심도시를 추구하는 전주시가 어진음악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은 소중한 문화유산의 진정성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1897년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책을 1906년 필사한 것이 지금의 『경기전의』다. /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완주 송광사는 번성기 때에 현재의 일주문이'3km 밖 나들이'라 하였을 만큼 대찰이었다. 이후 역사의 변천 속에 폐찰이 되었다가 1600년대에 지눌스님의 유지를 따른 법손들이 대대적인 불사를 추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낸 인조대왕이 두 왕자의 무사환국과 국란의 아픔을 부처님의 가호로써 치유하고자 대대적으로 중창한 호국원찰이기도 한 송광사는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사찰답게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면 대웅전에 모신 불상이 땀과 눈물을 흘리는 이적을 드러내고 있는 곳이다보물 제1243호로 1857년에 중건된 대웅전에는 주악도가 11점이 등장한다. 이 대웅전 천장을 올려다보노라면 문득 하늘이 된다. 불교의 천국에서 허공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고 춤추면서 꽃을 뿌려 부처님을 공양하는 천인들은 양 팔에 '표대' 혹은 '박대'라고 하는 넓고 긴 띠를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따라 허공에 휘감기고 흩날리는 이 표대를 눈으로 따라가면 음악이 정말 들리는 듯 하다. 음악의 시각적 표현이 천장의 주악도에서 절정을 이룬다.대웅전 천장에 목판 5에서 7장을 붙여 그 위에 채색을 한 주악비천이 마치 오늘날 연주자 모습처럼 사실적이다. 주악비천도는 전면에 7점과 좌우 천장에 각 2점씩 총 11점을 그렸는데, 각기 다른 모습의 비천들이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담았다. 이들 비천의 모습이 독특한데, 비파를 타는 모습, 횡적 부는 모습, 장고춤을 추는 모습, 승무를 추는 모습, 북을 치는 모습, 바라춤을 추는 모습, 칼춤을 추는 모습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더욱이 이 회화에 빚어진 작품들은 의상도 지극히 단조로운 형태로 극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표현에 있어서도 매우 가늘고 가벼운 철선을 사용하였는데 운필은 빠르고 날렵하게 처리되어 화공의 실질적인 모습도 안겨준다.그런 만큼 당대 음악사회에서 전개되었던 악기는 물론 동시대에 펼쳐졌던 무용세계도 세밀하게 그려 놓음으로써 극사실적인 예술성을 담았다.특히 바라춤과 승무 그림과 같은 불교적 요소와 무당춤, 무속 장구 등과 같은 무속적 요소, 그리고 소리북, 횡적 연주 그림 같은 민화적 요소 등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천상의 세계와 현실세계, 또한 불교적 요소와 토속 신앙적 요소 및 종교적 요소와 중생적 요소들이 적절히 조화되어 있는 이형집하적인 성격의 회화작품이다.그동안 주악도상을 놓고 학계는 실질적인 연주성을 앞세워 그 시대의 음악세계를 표출했다는 점과 상징적인 의미로만 상론해 상상의 악기로 구분되어 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각종 악기와 무용적인 모습은 동시대에 풍부하게 전개되어왔던 문화상을 또렷하고 실질적으로 보여준다. /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거문고는 무릎 위에 길게 뉘어 놓고 연주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악기로, 궁중음악과 선비들의 풍류방 음악의 대표주자다. 그리고 전문 연주가의 독주악기로 전승되었다. 오른손에는 술대를 쥐고 현을 쳐서 소리를 내고, 왼손은 공명통 위에 고정된 괘를 짚어 음정을 얻는데, 그 소리는 웅숭깊고 진지하기만 하다. 이렇게 묵직한 거문고의 소리는 문인화가 그린 것처럼 지적인 남성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선비들의 생활공간에서 머물렀던 그 인연의 흔적이 소리의 형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거문고 소리가 선비들의 서실에서 퍼지는 은은한 묵향이나, 한 여름날 소나무 숲을 지나 온 서늘한 송풍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거문고에 축적된 문화의 상징에 공감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거문고는 전라북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연륜이 있고 내력이 기록된 명금이다. 호남의 천재 실학자였던 이재 황윤석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온 이 거문고는 뒷 판의 명문을 통해 그 내력을 알 수 있다. 이 거문고는 지리산의 석상에서 폭포와 번개와 불 등 삼절이 만나서 탄생된 것이다.원래 두 조각이었지만 하나는 중국으로 들어가 명금이 되었고, 다른 한 조각은 남원의 월곡 정씨댁에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남원 정씨댁은 이재 황윤석의 처갓집이었다. 이곳에 보관되어온 재료를 이재 가문에서 요구해 거문고 원판으로 사용했고, 후판은 한라산에서 구해 와 완성했다.특히 황오익은 유학자이면서 거문고 연주자로 이 거문고 재료를 전주의 김명칠에게 거문고를 제작케 하였다. 제작자 김명칠은 제금 등 당대 최고의 악기제작자로 유명세를 떨친 인물로 최고의 재료와 최고의 악기장이 만나서 빚어낸 명품이 바로 이 거문고가 되는 셈이다.더욱이 명문에는 "물건은 사람에 의해 그릇이 되고 사람 또한 물건으로 내세에 이름이 오르게 되니 사람과 물건은 서로 얻는 것이라 하겠다. 나 역시 후손에 참여해 있는 사람으로서 선자에 대하여 기술하기를 바라니 이것이 어찌 황당한 일이라 하겠는가! 옛 성현의 가르침에 '예가 지나치면 어긋나고 악이 지나치면 방탕해진다'는 말이 있으니 너희들은 이것을 경계하고 경계하여 혹시라도 넘치거나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고 적혀있다. 또한 말기에는 "계묘년 단양월에 5대손 종윤(1858-1911)이 적고 못난 후손 욱(旭)이 삼가 쓰다"고 기록돼 있다.시대를 초월해 빼어난 재질의 거문고 재료를 명장의 손으로 탄생시킨 이 거문고는 비록 시공을 초월해 박물관 전시장에서 일반인을 만나고 있지만 전북 지역의 선비들이 덕목으로 거문고를 연주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백악지장' 거문고의 음악성을 다시 한번 듣는 듯 하다./전북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조선 중기의 기녀 이매창(1573-1610)은 유희경, 직소폭포와 함께 부안의 3절로 불리며 조선조 기녀문학의 중심부에 서있던 인물이다.현재 매창의 삶에 대한 기록은 그의 시집 『매창집』과 발문, 그리고 비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발문이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중기 여류시인이었던 매창의 본명은 향금, 자는 선향이며, 매창은 그의 호다. 『매창집』은 2권 1책. 목판본으로 1668년 12월에 부안현의 아전들이 전송하던 매창의 한시 수백수 중에 각체 58수를 모아 변산 개암사에서 개간하였다.이 시집 속에 수록된 이계생의 한시를 각체별로 보면 오언절구 20수, 칠언절구 28수, 오언율시 6수, 칠언율시 4수 등 58수 등이며 말미에 발문, 즉 간기가 부록되어 있다. 매창의 한시는 재치 있고 정감이 넘치면서 한국적 여성 특유의 인고의 성정이 풍만한 작품으로 회자된다.가곡원류에도 매창의 대표작인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으로 시작되는 작품이 소개돼 있다. 매창은 가무는 물론 현금에도 능해 다재다능한 예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떠한 연유로 기생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인지 알려주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문학가 허미자는 그를 서녀로 보아 출신성분상 자연스럽게 기생이 되었다고 하는 반면, 문학평론가 김지용은 고을 태수인 서진사가 권력으로 매창의 정조를 빼앗았으며, 그를 따라 서울로 갔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부안으로 내려온 후 기생이 되었다고 말한다.두 가지의 추측을 모두 종합해 볼 때 매창은 어떤 이유로든 양반가와 혼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생의 길로 들어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의 문학작품 곳곳에 기생 신분에 대한 부끄러움과 한탄이 배어있는 것도 바로 이에 기인한 것이다. 특히 그의 작품은 기생임에도 불구하고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이며,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서 우수한 시재를 엿볼 수 있다.매창이 죽은 뒤 45년만인 1655년 그의 무덤 앞에는 비석이 세워졌다. 그 뒤 300년의 세월이 흘러 비석의 글자들이 이지러진 관계로 1917년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에서 비석을 다시 세웠다.더욱이 부풍시사에서 매창의 무덤을 돌보기 전에는 자손이 없는 매창을 위해 남사당이나 가극단, 협률사 등이 들어올 때에도 읍내에서 공연을 하기 전에 반드시 매창의 무덤을 찾아와서 한바탕 굿판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매창은 기녀라는 최하위 신분에도 당대는 물론 후학들에게도 생애나 예술세계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 여류예술가이다.현재 부안서림공원에 시비도 세워져 있어 이매창을 기리고 있다. 매창의 예술적 영혼과 치열한 시대정신은 신분을 초월해 전북 예술의 화두임을 보여준다./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금산사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를 비롯해 금산사사적, 금산사지 등이 있다. 금산사는 백제 말 법왕 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후 진표율사가 중창하였으며, 고려시대에 혜덕왕사의 중창으로 대사찰로서 규모를 갖추었다.선조 31년 1598년 임진왜란 중 방화에 의해 미륵전, 광교원 등의 가람과 40여 곳의 암자가 모두 소실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건물을 중수하였으며, 일제시대에는 1934년 전후하여 금산사 미륵전의 보수, 대장전 이건 등 여러 변화가 있었다.국보 제 62호인 금산사 미륵전은 금산사에 있는 3층의 불전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 중기의 건축이다. 1층과 2층은 각각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기둥 사이에는 모두 공간포를 하나씩 두었고, 공포(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춘 나무쪽)는 안팎 모두 2개의 출목으로 되어 있다. 이 건물에서는 고층건물의 안전도를 높이기 위해 각 추녀는 높은 기둥에 연결되고 뒷몸을 파서 박은 후 비녀장을 질러 빠져나지 못하게 했고, 가운데 도리의 동요를 막기 위해 동자기둥을 세워주는 등 세심한 배려가 엿보인다.특히 미륵전 한켠에 있는 신중탱화는 국보와 보물 등의 유물은 아니지만 당대 문화상을 보여주는 자료다. 1890년 고종 27년에 화사였던 종준, 정선, 평종, 법인, 선진, 정연 등이 참여해 완성한 작품인 이 신중탱화는 가로 225센티미터, 가로 240센티미터의 크기다. 견본채색으로 구성된 이 신중탱화에 제석과 범천이 있는데, 녹색 두광을 쓰고 보살형태로 각기 연꽃을 들고 있고 일관천자와 월관천자가 제석과 범천 옆에 배치되어 있다.이와 함께 하단에는 금강저를 짚고 서 있는 위태천이 날개 깃이 달린 투구를 쓰고 무복을 입은 모습으로 중앙에 버티고 서 있고, 그 좌우로는 무기를 들고 무복을 입은 신장들이 배치되어 있어 화려함 그 자체다. 그 사이로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 천기, 번을 들거나 공양을 드리는 천녀와 동자들로 둘려 싸여 있다.특히 바라, 곡경비파, 횡적, 비파 등 관, 현, 타악기 등이 화려하게 구성돼 있는 신중탱화는 동시대에 사용되었던 음악상을 반영하고 있어 시각적, 청각적인 형태로 구성돼 있어 화려한 색채미까지 극대화시켜 놓았다.이 유물은 사찰이라는 불교적 공간에서 무속적인 요소가 가미된 작품이 공존하고 있어 당대 사찰에서도 극락천도 등을 위해 민속적이고 무속적인 장르와 서로 교감하고 형성 되었던 문화를 유추할 수 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이를 위해 의식을 펼쳤던 모습이 100여년이 넘어서는 오늘날에도 생생한 현실세계로 그려져 있다. 우리 미술과 전통음악의 만남이 세련되면서도 극사실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라 칭할 수 있다./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이재난고는 호남의 실학자였던 고창출신 이재 황윤석(1729-1791)의 방대한 서적 중 한권이다. 이 고문헌은 18세기에 활동한 황윤석이 10세 때부터 63세에 타계하기까지 54년 동안 자신의 학습내용, 시문, 기행문 등 당대의 세상살이에 대하여 보고 들은 것들을 일기 형식으로 자세하게 기록해 놓은 유고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11호로 지정된 이 책은 총 50책으로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 소장돼 있다.그동안 학계에서 이재난고의 가치를 음악학적 측면에서 조명한 바 있다. 임미선씨는 이재난고의 가치를 "왕실의 음악에서 선비들의 풍류, 가객 및 기녀의 공연 내용, 악기, 악보 등 매우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황윤석은 봉조관(칙서를 받들던 관원)으로 수차례 종묘제향에 참배하기도 했으며, 한 때 장악원 주부를 제수 받았을 정도로 궁중음악에 실질적 경험이 있었고, 당대 최고의 음악학자로 분류되는 서명응 이련 김용겸 등과 교유하며 악론을 토론할 정도로 악학에도 조예가 깊었다.따라서 이재난고는 지은이의 음악관과 동시대에 다양한 갈래에서 전개됐던 예술사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은 18세기 궁중 음악의 한 측면과 더불어 조선 후기 공연양상에 대한 새로운 면모, 기녀·가객·고취악대 등의 음악연행자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 생생한 자료이다.특히 중앙에 비해 사료가 빈약한 전북의 국악문화를 상론하고 있어 주목된다. 예컨대 호남지역 선비들의 풍류 생활상과 선비들 사이에서 유통한 양금신보의 가치, 그리고 거문고 음악의 전파 양상 및 외국 사신의 영접 연향(宴享)이 기술됐다. 또 18세기 후반 전라도 기녀들이 검무, 헌선도, 처용무, 선유락, 포구락, 무고 등의 정재(옛 궁중 무용)를 연행한 사실까지 알려주는 등 전북 국악의 실상을 알려주는 보고와 같은 책이다.이 책의 중요성에 대해 임미선씨는 "백제의 노래였던 산유화는 비록 본래의 가사가 전하지 않았으나 이 책을 통해 선율 자체는 전승되었던 사실도 새롭게 부각된 것"이라며 음악사의 전면을 다루고 있다고 보았다.동시대에 필사본으로 각종 국악서적을 필사하며 독학했던 이재의 음악사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 책은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후학들에게 지금까지 길라잡이가 되어준다.평생 독서와 견문을 통해 국어학에서 역사학, 성리학, 지리학, 천문학, 국악 등 폭넓은 학문관을 보여주었던 황윤석은 이재난고를 통해 음악학자로 면모를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만큼 당대 실학자들은 학문의 깊이와 넓이에 구애받지 않고 탄탄한 내공을 통해 학문을 수련의 과정으로 생각했던 모습까지 반추시킨다.이처럼 방대한 연구를 통해 지역음악사의 한켠을 조선후기에 보여주었던 황윤석의 이재난고는 오늘날 국악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학문의 가치도 일깨워준다./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종판소리가 이 땅에 뿌리내리기 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천민에서 시작해 대중적인 지지도를 얻었지만 초창기의 판소리는 천대받고 무시를 당했던 음악이었다. 그러나 판소리는 세계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될 만큼 한국을 넘어 세계가 인정하는 명품 음악이 됐다.판소리를 전승했던 당대 명창들의 기록은 구전에 그치고 일부 확대되거나 재생산되어 오늘날에도 많은 오류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 연수전하기라는 명창들의 행보와 대우 등이 뚜렷하게 기록돼 있다.연수전하기는 1886년 9월 전주 감영에서 전라도 감사 윤영신의 아들이 문과에 합격한 것을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던 모습을 기록한 고문헌이다. 이 연희에서는 외부에서 연행자들을 초빙한 것이 나타난다. 이들은 크게 네 범부로 구분되는데, 먼저 창부 이날치와 장재백, 김세종인데 이들에게는 성명과 지불한 금액을 각기 따로 기재하였다.두 번째는 한양에서 온 경창동 2명으로 성명없이 기록하고 있다. 세 번째는 향창부 4명으로서 이들 역시 성명없이 단지 4명만 초대되어 지불한 금액만 기재해 놓았다, 마지막으로 한양에서 파견된 악공들도 소개되었는데, 이들은 고종이 관찰사인 윤영신의 아들이 문과에 합격한 것을 축하하여 보내준 장악원의 악공들로써 문과 합격자들에 대한 일종의 관례였다.이 내용에서 악공의 수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들에게 말을 빌리는데 들어간 144량을 지급했다. 그 외에 이들에게는 특별히 '행하(行下)'라는 명목 아래 따로 1천량을 지급한 사실을 항목을 달리해 기록했다. 행하는 경사가 있을 때 주거나, 위로하기 위해 내리는 금품, 그리고 품삯 이외에 주는 금품을 일컫는데, 통상 놀이 등이 끝난 뒤 기생이나 광대에게 준 보수 등도 포함된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창부 중 이날치, 장재백, 김세종 등이 모두가 지방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지급 금액을 달리 명기한 것은 당대 최고의 명창에 대한 예우로 생각되고 이들의 명성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더욱이 이날치 50냥, 장재백 50냥에 비해 김세종은 두배나 많은 100냥의 이른바 개런티를 받은 것은 지금의 한류처럼 유명가수에게 더 지불하는 모습을 보여준다.앞에서 밝힌 것처럼 명창과 동창 등 9명이 초대된 이 연희는 통상 각 읍치의 관아에서 판소리를 연행하는 것과 달리 대규모 연행모습이다. 이는 다수의 창자를 초청해 창자들의 자연스러운 경연 형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대사습의 경연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실제로 창자들의 전기에는 다수가 참여하는 감영 등지의 연행에서 이들 사이의 경쟁이 주요 일화로 소개되고 있다. 여기에 고수까지 동반했다면 그 규모는 훨씬 커졌을 것이다. 130여년 전의 전라감영에서 전개되었던 판소리 경연대회를 그림처럼 볼 수 있는 사료다./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풍속화는 조선시대에 서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그림을 비롯하여 동시대 전반에 걸쳐 제작되었던 궁중과 관아의 제반 행사를 그린 그림들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이러한 조선시대 풍속화는 여러 계층의 다양한 음악과 무용 장면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기록화적 성격이 강하여 당대의 음악문화를 사실적으로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겠다.1992년 6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제13호 지정된 의금부도사 김도언의 유물 가운데 궁중기록화인 태평연도가 있다. 1728년 무신란 평정 후 창덕궁 인정전에서 베풀어진 태평연 그림으로, 영조가 김도언에게 내린 유물이다. 길이 117㎝, 폭 63.2㎝로 필자가 미상이며, 견본채색으로 구성된 이 유물은 궁중행사의 여러 가지 모습을 파악하게 해 주는 좋은 자료이다.이 유물이 국악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궁중 연희의 장면을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점을 들 수 있다. 태평연도는 우선 창덕궁 인정전을 배경으로 군신과 악사, 무용수들이 유물 속에 포착된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화려한 색채와 짜임새 있는 구도, 여기에 세밀한 묘사까지 어디하나 부족함이 없는 궁중회화의 진수로 평가된다.먼저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병도가 중앙 정면의 배경을 차지하고 있으며, 차일을 치고 다채로운 연향이 거행되고 있다. 또한 어전을 중심으로 문, 무관이 좌우로 위치하고 있어 궁중에서 펼쳐졌던 상황을 극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또한 중앙에는 무용과 춤이 어우러져 흥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이 회화에는 처용무와 향발무 등 2종의 궁중무가 극사실주의로 나타난다. 향발무 5명과 처용무 5명이 아정하고 장엄하게 춤사위를 풀어내고 있어 궁중에서 연행되었던 정재를 고스란히 부활시켜 놓았다.그리고 궁중의 기록화답게 호위하는 군사와 악사 및 무용수들의 역동적인 모습들이 실제와 흡사한데, 여기에 삼현육각이 등장한다. 피리 2, 해금 1, 대금 1, 장고 1, 북 1을 연주하는 악공들은 붉은 단령과 복두를 착용하고 있어 동시대의 궁중연희에서 베풀어졌던 음악문화를 이해하는데 귀한 자료가 된다. 여기에 홍주의를 입고 박을 치는 사람, 그리고 대고가 악사 앞에 있어 웅장한 음악과 춤이 어우러지는 모습 또한 장관이다. 이 유물은 평면도형 구성으로 건물이나, 장소, 인물의 모습에서 입체감이나 사실감이 최대한 배제된 채 행사의 공간과 장면을 펼쳐 보이고 있으며, 기록을 목적으로 하는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지방에서는 드물게 궁중문화의 전모를 볼 수 있는 태평연도는 화려한 궁중음악은 물론 어전에서 전개됐던 내용을 매우 소상하고 방대하게 담아냄으로써 언어가 전달하지 못하는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했다./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감로탱화란 불교에서 영가천도 때 쓰이던 의식용 불화다. 조상숭배의 신앙 혹은 영혼 숭배의 신앙을 중심으로 묘사한 그림으로 영단탱화, 하단탱화라고 하며, 사찰의 명부전이나 법당의 불단 좌우에 있는 영단에 많이 봉안된다. 영가의 극락왕생을 위한 신앙내용을 도설한 것으로 영단탱화라고 하고, 지옥의 중생에게 감로미를 베푼다는 뜻으로 감로탱화라고도 한다.감로탱화는 불교미술의 상징 주의적 성격과 함께 불교의 극락왕생과 조상숭배, 영혼숭배신앙과 같은 현실적이며, 사실주의적 성격이 결합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감로탱화는 일반 중생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인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하게 해주는 것과 동시에 중생을 구원하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있어서 조선시대에 매우 성행한 유물이다.1750년에 제작돼 원광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감로탱화는 감로탱화의 전형적인 모습을 담고 있으면서 한국음악사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탱화에는 춤추는 무희와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 등이 비교적 풍부하고 세밀하게 묘사돼 있어 당대 전문연희패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냈다.상단, 중단, 하단으로 구성된 이 탱화의 하단에는 춤과 음악을 상론할 수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특히 소나무 아래에는 술에 취해 싸우는 사람들, 바둑을 두는 사람들, 예인집단들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먼저 예인들의 모습에는 곡경비파, 장고, 해금, 횡적 등으로 연주하는 악인들과 뒷모습으로 보여 상론할 수 없지만 광쇠, 바라, 요령을 치는 악인 등도 보인다. 여기에 도포와 비슷한 모양새의 의상을 입고 있는 무희가 등장하는데, 남색의 붉은 허리띠를 맨 무희와 녹색의 붉은 허리띠를 맨 무희가 앉아 양 손에는 하얀색의 짧은 앵삼과 한삼 같은 것을 들고 춤을 추고 있다.또한 악인과 무희 들 뒤에는 재주를 부리는 2명의 재인도 등장한다. 이들은 악인의 뒤에서 재주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무희들의 춤이 끝난 후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춤을 추는 무희들과 악사, 그리고 재인들의 통일된 의상형태와 소품 등으로 미루어 전문적인 유랑예인 집단임이 틀림이 없다. 따라서 이 유물은 당대 죽은 이를 위한 영세불망을 묘사했지만 현실적인 춤과 음악이 공존하고 있어 산자들을 위한 연희로도 파악된다. 마치 씻김굿이 죽은 영혼을 달래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굿과 같다는 점에서다.조선시대 빼어난 감로탱화를 통해 당대 연희판에서 전문유랑예인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이 감로탱화가 갖는 사실성이다. 그래서 풍부한 미술도상은 지금까지 문헌적 자료가 제시해주지 못하는 풍부한 시각적 요소를 안겨준다. 그만큼 감로탱화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조선시대 발간된 고악보들은 단지 악곡변천사의 자료로써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사회문화사를 이해할 수 있는 보고이기도 하다. 또한 고악보에는 해설과 함께 악기의 쓰임새를 상세하게 덧붙임으로써 조선시대 음악문화를 송두리째 살필 수 있는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특히 1610년 광해군 1년 우리고장에서 발간되는 『양금신보』는 국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최고의 고악보로 평가된다. 이 책은 거문고 악보로 양덕수가 지은 것이다. 1책 26장, 52면 목판본으로 발간된 이 금보의 발문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전북 남원에 피난 왔던 양덕수가 당시 임실현감으로 있었던 김두남의 도움으로 악보를 만들어 출간하게 되었다. 편찬자의 성을 따라 『양금신보』라는 이름으로 임실에서 처음으로 간행된 의미를 갖고 있다.이 악보의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부분은 금아부, 현금향부, 현금평조산형, 우조산형, 집시법, 조현법, 안현법, 타현법, 합자법으로 구성되었다. 또 두 번째 부분은 만대엽, 북전, 중대엽, 조음, 감군은 이상 8곡과 발문으로 구성됐다. 거문고의 악곡들은 합자보와 육보의 두 가지 기보법에 의해서 기록되었고, 합자보의 우측에 노래의 가사 또는 궁상각치우의 5성이 기록됐다.임진왜란 전후의 한국음악사 연구에 중요한 구실을 하는 음악자료의 하나로 학계로부터 주목되고 있는 이 금보는 이전의 금합자보에 없는 만대엽과 중대엽의 악곡을 골고루 갖추었으므로 17세기 전후의 가곡사 연구에 중요한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이 고악보에 전하는 중대엽의 평조, 우조, 평조계면조, 우조계면조 이상 네 가지 악조는 조선 전기 이후 악조의 역사적 변천연구에 결정적인 음악자료를 제공해준다.이와 함께 『양금신보』가 목판본으로 인쇄됨으로써 필사본으로 전하는 다른 악보보다 세상에 널리 퍼지는 기틀을 마련했고, 따라서 후세의 연주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거문고의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더욱이 이 악보는 우리고장 출신으로 시조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가람 이병기선생이 1959년 통문관에서 발간된 책자에 서문을 쓴 관계로 전북과 각별한 인연 또한 보여준다. 그러나 양금신보에 주목할 만한 가치는 당대에 목판본으로 인쇄되어 대중적인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점이다. 이는 동시대의 음악문화가 비로소 대중들에게 퍼질 수 있다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양금신보가 거문고만을 위한 악보란 점에서 눈여겨 보아야한다. 조선시대에 선비들은 거문고를 '백악지장'이란 말로 모든 악기의 으뜸으로 쳤다. 이러한 악기에 대한 악보가 편찬된 것은 그만큼 거문고가 선비들은 물론 중인층까지 수용층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가치는 더욱 돋보인다.편찬자인 양덕수의 노력과 전북이란 지역에서 편찬된 점으로 미루어 전북은 이 고악보 자체만으로도 한국음악사에 불멸의 족적을 남긴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만큼 전북이 국악의 본향으로 뿌리가 깊다고 할 수 있다./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는 8권 1책으로 필사본이다. 작성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만력 계축에 쓴 이정기의 서문으로 미루어 보면 1613년(광해군 5) 봄이나 그 전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허균의 일생 중에서 가장 불우했던 시기에서 탄생된 이 책은 저자가 초야에 칩거하면서 그동안 저술한 시와 산문들을 모아 시부·부부·문부·설부 등 4부로 나누어 정리한 초고이다.성소부부고의 구성은 네 가지로 나누어 수록하여 일반 문집의 편찬 체재와 다르다. 그러나 각 부의 배열을 보면 부부와 문부의 내용은 일반집의 체재와 거의 비슷하다. 이 가운데 풍악기행 47편, 궁사 100편, 열악 8편 등은 음악문화를 알 수 있는 수작으로 그 시대에 널리 회자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서 민속학을 연구하는데 길라잡이가 되어주고 있다.성소부부고 가운데 1600년대 전북에서 연희되었던 민속문화를 볼 수 있는 자료가 등장한다. 권 18 문부 조관기행에는 전라감영의 새로운 감사 부임시의 연희 공연이 나오기 때문이다. 1601년 허균의 큰 형 허성이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 때 허균(1569-1618)은 큰 형의 가족을 데리고 전주로 내려왔다. 허균은 9월 7일 전주에서 자기들을 맞이하는 놀이패의 연희를 보고 기록을 남겼다. '삼례에서 점심을 먹고 전주로 들어가는데, 판관이 기악과 잡희로 반마장이나 나와 맞이했다. 북소리, 피리소리로 천지가 시끄럽고, 천오, 상학, 쌍간, 회환, 대면, 귀검 등 온갖 춤으로 길을 메우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성곽에 넘쳐났다.'이 기록을 살펴보면 바다귀신춤을 비롯해 학춤, 줄타기, 솟대타기, 방물받기, 가면희, 귀신가면이 나오며 각종 악기가 이를 반주하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전라감사의 부임이나 손님 접대 등 지방관아의 여러 행사에서 성대한 연희가 공연되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이다. 이는 감사의 부임이나 손님 접대 등 지방 관아의 여러 행사에서 성대한 연희가 공연되었음을 제시해 준다.특히 이 기록은 전라감영에 대한 전통음악과 춤에 대한 기록이 빈약한 현실에서 동시대 문화를 구체적으로 상술함으로써 전라감영의 전통연희의 풍성한 모습을 표현해준다. 이는 중앙과 지방문화의 소통을 제시해줌과 이른바 궁중과 같은 특정지역에서 연행되었던 전통연희가 지방으로 파급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성소부부고에 나타나는 전라관찰사에 대한 연희행사는 지방관아에서 펼쳐졌던 대규모의 연희를 상세하게 전해주고 있으며, 지방관아에서 경제력을 밑바탕으로 해 공연물에 대한 수요가 분명하게 있었음을 증명한 것이다.지금부터 400여전에 펼쳐졌던 연희 모습은 시공을 초월해 지금까지도 우리음악과 춤을 풍성하게 해준다. /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2004년 6월에 방영된 KBS '진품명품'에 나온 고려시대 도자기 장구는 감정가 12억원에 먼저 놀라고, 그 장구가 갖는 품격에 두 번 놀랐던 유물이다. 이 의뢰품은 고려시대 청자역삼감장고란 점에서 주목을 모았는데 문양 또한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높은 평가는 바로 문양에 있는 것으로 목단과 당초문, 연판문을 역삼감기법으로 소성했다는 것이다.비록 파편으로 발굴됐지만 우리 지역에도 이에 못지않은 장구 명품이 있어 눈길을 끈다. 13세기경의 유물로 부안 유천리에서 발굴된 청자상감 추규무늬장구 파편은 전체 길이가 50센티미터이며, 두께도 21센티미터여서 지금의 장구와 매우 흡사한 형태를 띤다. 이 장구가 비록 파편이지만 주목되는 이유는 바로 화려한 장식으로 궁중 또는 사찰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귀족적 매력 때문이다.이 유물을 처음 접했을 때 도자기 장구가 펼쳐내는 아름다운 소리가 시공을 초월하여 듣는 사람에게 진정한 감동을 안겨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사 악지에도 나오듯이 고려시대에는 '장고업사'란 직업 장구 담당자를 두어 중요한 음악을 담당했다. 유명 장구명인이 도자기 장구로 풀어내는 음악을 상상만 해도 가슴 벅찬 감동을 준다고 할 수 있다.특히 발굴조사에 참여한 이화여대 관계자에 따르면 이 장구는 일체형이 아닌 조립식 장구란 점이다. 먼 거리를 갈 경우 간편함을 위해서 장구를 분리하고 연주를 위해 합쳐서 조립했던 것이다. 동시대에 선조들이 사용처와 용도에 따라 조립하면서 음악을 연주했다는 점에서 빼어난 실용성과 예술성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여기에 발굴된 장구 파편의 외형은 화려함의 극치다. 장구통에 당초, 연판 문양을 역상감으로 장식하였고 양쪽 통을 조립하기 위하여 조롱목 한쪽에 촉이 있어 마치 '짜맞춤 가구'와 같이 장인의 피땀 어린 노력이 스며있는 듯하다. 더욱이 나무가 주는 질감보다 흙이 주는 정감이 공명을 통해 울려 퍼졌을 때 당대 도자기 장구가 빚어내는 청아한 소리 또한 멋스럽고 격조가 넘쳐났을 것으로 예상된다.고려시대 도자기 장구는 전국적으로 수십 점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비록 파편 장구지만 이 유물은 장구의 구조적 변형 또한 연구할 수 있어 좋은 장구 길라잡이기도 하다.청자토로 온도 1.300도에서 구워 만든 청자상감 추규무늬장구 파편은 원형을 상세하게 살필 수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립식 장구와 화려한 문양으로 당대 음악사회사를 복원하는데 적격인 유물이다.특히 채편과 북편을 오른손과 왼손으로 두드리면서 소리를 냈을 이 장구는 한국음악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장단이 형성되며, 아악을 비롯해 궁중 중심의 음악과 판소리, 산조 등을 비롯한 민간음악에서도 다른 일정한 유형을 가진 장단을 형성했기 때문에 깊고 넓은 음색을 눈으로 감상해 본다./전북도문화재전문위원·한별고 교사
쇠북은 청동으로 만든 북인 금고(金鼓)를 말한다. 쇠북은 형태상 고대 타악기의 일종인 원반형태의 정(鉦)에서 유래되어 점차 불가의 의식용 법구로 정착되었는데, 그 근거는 『금광명최승왕경』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금고는 원래 징과 북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불교의 수용과 더불어 선종이 크게 융성함에 따라 의식과 사찰의 장엄이 중시되었기 때문에 의식용 법구로 활발하게 제작됐다.금고의 용도는 지금과 같이 대중을 모으는 용도 외에도 금고를 두드려 의식을 행하고, 그 소리를 들음으로써 모든 죄를 참회토록 한 것이란 점에서 악기로도 연주되었을 것이다. 또한 작은 소형의 금고의 경우 승려의 지물로 활용되어 손에 들고 치면서 염불수행의 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현재의 목탁과 같은 역할을 했다.현재에는 국악기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고 불교 의식물로만 생각되는 금고는 분명하게 우리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악기로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고구려 벽화의 으뜸으로 평가받고 있는 안악 제3호분에도 금고와 같은 악기가 묘사되었을 뿐 아니라 고문헌과 유물에도 쇠북이 국악기로 표현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구려벽화의 행렬도 가운데 후반부에 그려진 북의 모습은 금고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이 악기의 역사는 그만큼 윗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특히 고대 악기일수록 신호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악기를 사용했다. 타악기였던 나각과 나팔, 북과 징은 상고시대에 악기이자 신호를 알리는 도구로 사용됐다.고려사 병지 병제에는 금고가 군대의 진퇴에 사용한 신호악기임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범주의 악기는 후대에 내려올수록 타악기로 변화하면서 우리 악기에 편입되고 연주되었다. 따라서 국악기의 전범과 같은 악학궤범에는 국악기로 기록하지 않았지만 금고는 고분벽화와 같은 유물과 고문헌등의 자료에서 악기로 기록됐다.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전주 대성동 출토 청동금고는 고려시대의 유물로 지름이 50.5센티미터나 될 정도로 큰 쇠북이다. 더욱이 이 쇠북에는 연판, 연입, 인동문을 장식함으로써 화려한 미의식까지 보여줘 불교미술공예품의 아름다움을 대변한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고 중에도 규모나 장식면에서도 매우 우수한 이 쇠북은 고려시대 번창했던 연등회와 팔관회에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높다는 점에서 음악사를 확장하는 유물로 주목된다.고려시대 사찰과 각종 연희행사에서 사람을 모으는 법음구와 더불어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는 불교 음악의 한 갈래로 활용되었던 쇠북은 당대를 대표하는 고려시대 악기였던 것이다. 더욱이 지금의 징과 매우 유사한 쇠북은 한 면은 두드리는 역할과 다른 반대편은 비어있어 공명을 냄으로써 타악기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글자 그대로 쇠북을 뜻하는 금고는 넓은 의미에서 두들겨서 소리 내는 금속제 악기이다. 따라서 전주 대성동에서 출토되어 햇빛을 보게 된 금고는 고려시대 전북 국악계의 외형을 넓혀주는 소중한 악기다. 전북문화재 전문위원·한별고 교사
'작지만 강한' 전북도립미술관의 반란
세대와 기록이 이어지는 마을…부안 상서면 ‘우덕문화축제’ 7일 개최
전북시인협회장 후보에 이두현·이광원 최종 등록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근혜 아동문학가, 이경옥 ‘진짜 가족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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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원과 친동생처럼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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