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300만명 참여 30만명 사망·부상 추정 / 분살에 작두 처형, 생매장까지 목불인견 / 농민군 '죄인 멍에' 갖은 고초 산속 피신도
올해가 갑오년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60년이 두 번, 30년이 네 번 지났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치면 네 세대가 지나간 셈이다. 그저 먼 역사속의 일이라고 여길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그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당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이름 없이 쓰러져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이 되살아온다.
△무명의 사상자 30만명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이 혹자는 300만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죽거나 다친 사람이 30만이라고 한다. 당시 인구를 대략 1000만으로 추산해 보면 이 숫자는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동학농민혁명 하면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을 떠올린다. 물론 이들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의 역할이 컸고, 이들이 있었기에 조직적인 활동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동학농민군 지도자가 아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농민군들이 있었다. 이들은 과연 어떤 이들이었을까?
2004년 3월 5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이법에 따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여기서 유족들로부터 신청을 받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족을 등록하여 국가차원의 명예회복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름 없는 동학농민군들의 삶과 죽음의 내용이 상당히 많이 밝혀졌다.
△최후 순간까지 대를 이으려 했던 부정(父情)
필자가 심사담당관으로 참여하면서 가장 안타깝고 가슴 아팠던 것이 최후의 순간에 가족을 생각했던 동학농민군들의 선택이었다. 사실 동학농민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삶에 대한 또 다른 선택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남겨진 가족,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나의 삶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남겨진 가족을 위해 마지막 순간에 직접 생을 포기하는 눈물겨운 사례가 많았다.
전라도 강진의 강 아무개는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사형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동생이 나섰다. 형 대신 자기가 처형당하겠다고 하였다. 장손인 형이 살아남아야 하며 자신은 결혼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결국 그는 형 대신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강씨 집안 족보에 죽은 동생 이름 밑에는 더 이상 후손이 기록되지 못하였다.
지금은 충청도지만 당시 전라도에 속했던 금산에 사는 이 아무개는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나섰다. 아버지는 아들이 3대 독자이므로 자신을 대신 잡아가라고 하였다. 결국 아버지가 대신 죽고 아들은 살아남았다. 만약 그때 그의 아버지가 대신 죽지 않았다면 그 후손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겨진 후손들은 그 아버지의 마음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충청도 태안의 가 아무개는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에게 이제 가면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고 하면서 자신의 손가락 하나 잘라 주고 갔다. 돌아오지 못하면 그것으로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라는 뜻이었다. 결국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집 밖에서 나는 바람소리에도 문밖을 서성였다. 남편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애틋한 마음에서였다.
△목불인견의 처형 순간
동학농민군들의 죽음의 순간은 너무나 처참했다. 전라도 장흥의 이 아무개는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른바 분살(焚殺)이라는 형태로 처형되었다. 논가에 말뚝을 세우고 농민군에게 유지기(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삿갓과 비슷함)를 씌운 다음, 말뚝에 묶고 말뚝 아래에는 볏단을 놓고 불을 질러 처형하는 것이다. 이러한 처형방식은 전라도 남부지역에서 횡횡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충청도 태안에서는 동학농민군을 처형하는데 작두가 이용되었다. 토성산에서 수많은 농민군들이 작두로 처형되어 그 피가 강물을 이루었다고 한다.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1894년 조선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또한 경상도 예천에서는 동학농민군들이 체포되어 생매장당하여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살아 남은 자들의 몸부림
살아남은 사람들은 시신만이라도 어떻게든 찾아야했다. 그것이 그들의 임무이자 책무였다. 그들의 삶과 죽음에 관여할 수는 없어도 그 시신을 통해 후손들에게 지나간 시간을 일깨워주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몫이었다.
충청도 옥천의 강 아무개는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귀신당 계곡에서 처형되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그의 아내는 귀신당 계곡으로 가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여 둘러메고 와서 묘를 썼다고 한다. 강씨의 아내는 체구가 크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전라도 함평의 전 아무개는 나주지역 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하였다. 그의 아내는 수백구의 시신 중에 귀에 이상이 있는 남편의 시신을 찾아 수습하여 머리에 이고 왔다고 한다. 또 전라도 장흥의 이 아무개는 장흥지역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후손들은 시신을 찾지 못하자 밥그릇을 넣고 가묘를 만들고 집을 나간 날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전라도 무안의 박 아무개는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다가 무안 현경에 피신해 있었는데 같은 마을 사람이 신고하여 일본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가 처형된 후 시신을 찾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한 구덩이에서 불에 타 죽었기 때문에 시신을 찾을 수 없었으나 평소에 팔에 끼고 다니던 토시를 보고 찾아 매장하였다고 한다.
△피신, 그 후의 삶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겨우 살아남은 동학농민군들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다. 그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많은 농민군들이 산속으로 들어갔다. 충청도 농민군들은 천안 광덕산으로 피신하여 생활하기도 했다. 전라도 임실·남원지역의 농민군들은 순창 회문산으로 피신하여 생활하였다. 그밖에 집으로 돌아온 농민군들은 이사를 가거나 갖은 고초를 당하며 살았다. 동학농민군이었다는 게 죄인이었으며 멍에였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동학농민군을 보는 사회의 시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으며 일제강점기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학농민군들은 계속 감시의 대상이었다.
동학농민군들은 그들의 삶의 틀을 바꾸기 위해서 분연히 일어섰다. 적어도 후손들에게 바꾸어진 삶의 틀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후손들은 일제강점기 반역자의 후손이라는 굴레로 고통 받았다. 삶은 피폐해졌고 삶의 기반은 이미 무너져버렸다. 해방 이후 현재까지도 그러한 양상은 변하지 않았다. 한번 무너진 기반을 회복하기 어려웠다.
이름 없이 쓰러져간 동학농민군들, 그리고 부모와 형제를 잃고 고난의 시대를 힘겹게 살아온 후손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이 갖는 의무이기도 하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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