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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현의 명창이야기] (30)판소리 후원자 신채효②

어려서 신동으로 불려…고창 향리돼…평생 모은 재산 광대후원·구휼에 소진

신재효 판소리 사설집 (desk@jjan.kr)

신재효의 어머니는 경주 김씨로 절충장군 김상려의 딸이다. 신재효의 아버지 신광흡이 열일곱 살에 신행도 미처 하지 못한 신부와 함께 고창으로 이사를 왔다고 했으므로, 신재효의 어머니 경주 김씨는 아마 서울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늦게까지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부부가 내장산 월조봉에 치성을 드려서 아들을 얻었으니, 그가 바로 신재효이다. 신재효의 출생일은 1812년 11월 6일(음력)이다. 신재효는 1884년 73세로 운명하였는데, 특이한 것은 그의 사망일이 생일날이라는 점이다. 셰익스피어도 생일날과 사망일이 같다고 한다. 그래서 신재효를 셰익스피어에 비기는 사람들은 이 또한 기묘한 일치라고 여긴다.

 

신재효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동으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재효(在孝)'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름을 지을 때가 언제인데 효성이 지극했는지 알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예전에는 어렸을 때는 아명을 쓰고 나중에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신재효가 누구에게 공부를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신재효는 중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양반들처럼 학식이 높은 학자에게 공부를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신재효는 일곱 살 때부터 아버지 신광흡으로부터 글을 배웠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주로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글공부를 한 것으로 보인다.

 

신재효는 아버지 신광흡이 고창에서 이루어놓은 기반으로 고창의 향리가 되었다. 향리는 고려 이후 지방의 토착 세력이 세습해서 맡았기 때문에 외지인이 향리가 되는 것은 극히 드문 예외에 속한다고 한다. 향리는 관청의 실무를 맡아 이권화하였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언제부터 신재효가 향리를 맡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40세 때에는 이미 이방이 되어 있었고, 재산 또한 1000석을 추수하였다고 한다. 마침내 신재효는 향리 중의 으뜸인 호장에까지 오른다. 고창문화원장 이기화의 증언에 의하면, 신재효는 철종 때 고창 현감이었던 이익상 밑에서 이방을 하다가 호장에 올랐다고 하는데, 신재효가 이익상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신재효는 부인 복이 별로 없었다. 부인을 내리 셋이나 여의었다. 그래서 57세 이후에는 부인을 더 맞이하지 않고 홀로 지냈다. 홀로 지낸 이 기간에 신재효는 판소리 사설을 집중적으로 정리하였다. 강한영 박사는 신재효가 57세에서 62세 사이에 <춘향가> 사설을 정리한 것으로 보았다. <심청가> 또한 비슷한 때 정리한 것으로 보았으며, <토별가> (수궁가)는 53세에서 61세 사이, <박타령> (흥보가)는 62세 이전, <적벽가> 는 62세 이후, <변강쇠가> 는 72세 무렵에 정리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 정리 작업은 신재효의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신재효는 이때 이미 호장직도 물러나 있었다.

 

신재효의 생애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가 재산을 모으는 데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이다. 신재효의 집안은 본래부터 가난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40세 전후에 1000석을 추수할 만큼의 재산을 모은 데는 신재효 자신의 생활 태도와 지혜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가 지은 <치산가> 에는 그러한 그의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 (…) 줄줄이 과목 심어 돈 진 사람 오게 하고, 고물고물 채소 놓아 반찬값을 내지 말고, (…) 밤마다 물레 잣기 벗을 삼고, 한냥 두냥 수십 냥을 모았다가 논도 사고, 밭도 사며, 그리저리 하거드면 자연 치가 되느니라. (…) "

 

<치산가> 의 내용을 한 마디로 줄인다면, 성실과 근검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재효가 일찍이 재산을 모은 것은 이러한 그의 태도가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신재효는 이렇게 해서 모은 재물을 당대에 다 쓰고 갔다고 한다. 신재효가 평생 모은 재산을 들여 한 일이 바로 판소리 광대 후원과 가난한 사람들의 구휼이었다. 신재효는 부를 쌓은 후 부자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했던 것이다.

 

/최동현(군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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