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난 음악가들 새 수입원" 영국서 첫 시작…18세기 활성화, '콘서트' 용어도 당시 첫 사용
음악회장에서 음악을 듣는 공공음악회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전통일까?
17세기 영국은 청교도혁명,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왕실재정이 빈약해져 왕궁에 속한 음악가들에게 충분한 사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음악가들은 수입을 올릴 다른 방도를 찾게 되고 흥행사들은 그 같은 상황을 재빨리 간파하여 공간을 빌려 입장료를 받고 음악을 듣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음악회를 열어주며 음악가와 함께 수입을 챙기는 공공음악회를 열게 된다.
1672년 12월 '런던 가제트'지에 실린 광고는 당시의 공공음악회 상황을 짐작케 한다. '알립니다. 와이트 프라이어에 있는 조지 연인숙 건너편 존 배니스터 하우스(지금은 음악학교라 불리는)에서 오는 월요일에 훌륭한 연주자들이 음악을 연주합니다. 오후 4시 정각에 시작하여 앞으로도 매 오후 같은 시간에 연주합니다'. 공공음악회는 이렇게 17세기 영국에서 생겨났다.
런던에서 시작된 공공음악회는 1720년 이후에는 성공적인 음악활동의 장(場)이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공공음악회는 더욱 활성화되니 피아노 협주곡을 처음으로 작곡하고 연주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S. 바흐의 막내아들)의 1년 예약 시리즈 음악회도 공공음악회이었다. 음악회 즉, '콘서트(Concert)'라는 용어도 런던에서 이렇게 행해지는 연주회에 사용하게 된다.
계속적인 행사는 전통이 되는 법! 공공음악회는 음악활동의 전통이 되어 파리와 독일지역의 주요도시들로 퍼져나갔다. 파리에서는 작곡가이자 오보에(Oboe) 연주자인 안 다니캉 필리도르(Anne Danican Philidor, 168~1728)가 1725년에 콩세르 스피리투엘(Concert Spirituel)이라는 시리즈 음악회를 열어 성공한 후 1790년까지 계속되었다.
독일지역에서는(독일은 19세기에야 통일된 나라가 된다. 그 전에는 지역국가 형태이었다.) 아마추어나 중간수준 연주자들도 다 즐길 수 있는 음악을 작곡하며 음악의 대중화를 추구하던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이 그가 설립하여 지도하는 라이프치히,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의 대학생 동아리 콜레기움 무지쿰 (Collegium musicum)에서 대학생들이 음악을 친하게 느끼게 하기 위해 정규적인 공개 연주회를 연다. 그 연주회는 종교음악, 세속음악 구분없이 모든 장르의 음악이 연주되는 야외음악회와 유사한 형태였다. 공공음악회이었던 것이다.
힐러(Johann Adam Hiller, 1728~1804)가 1763년 라이프치히에서 시리즈 음악회를 열었고, 1781년 이후에는 게반트하우스의 새 연주홀에서 공공음악회를 계속하였다. 이 전통의 중심인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오케스트라의 하나이다. 이와 같은 연주기관이 빈(1771)과 베를린(1790)에도 설립되며 공공음악회는 유럽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신대륙 미국에서도 1731년 보스톤에서, 1734년 필라델피아에서 방문한 연주단에 의해 '영국적인 방식' 으로의 공공음악회가 열렸다. 표를 사야했기 때문에 청중은 중산층, 여흥을 즐길 수 있는 부유한 계층이었다. 음악회는 광고지, 포스터, 신문, 입소문으로 알려졌고 연주시간은 대개 약 3시간 정도, 성악과 기악이 다양하게 구성된 프로그램이었다.
초기의 공공연주회는 지금과 같은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움직이지 않고 들어야 하는 조용한 분위기의 음악회는 19세기에야 나타나는 전통이다. 18세기의 음악회는 사교적 행사장이기도 했기 때문에 다른 이를 방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듣고 싶은 음악은 듣고, 그 밖에는 음료수를 마시며 걷기도 하고 대화도 나누며 음악과 사교를 함께 즐겼던 것이다. 프랑스 작곡가이자 지휘자 루이 줄리앙(Louis Jullien, 1812~1860)은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에서 연주 중에도 이리저리 거닐 수 있는 음악회, 프롬나드 콘서트(Promnade Concert)를 열며 그의 음악회의 목적을 '가장 기품있는 곡들을 잘 프로그램 해서 교훈적인 즐거움을 책임져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청중을 '1쉴링 청중'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입장료를 1쉴링 정도 받았던 모양이다. 그는 그런 음악회를 수시로 열며 스타 지휘자가 되었고, 첫 런던 시즌에 베토벤 교향곡 4곡을 런던 시민들에게 알렸다.
/신상호(전북대 음악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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