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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으로 만나는 익산의 역사문물 ① 마한의 중심, 익산

청동유물 통해 고조선 흔적 마한인의 건마국 실상 보여

▲ 익산 왕궁 평장리유적 출토 '전한경·꺽창·검·투겁창'.

익산은 살아있는 역사교과서다. '익산역사유적지구'는 경주·부여·공주와 함께 4대 고도(古都)보존지구로 지정됐으며, 세계문화유산등재를 위한 각계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국립전주박물관(관장 유병하)이 익산시·전북일보·KBS전주방송총국·국립문화재연구소·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와 공동으로 지난달 28일부터 익산에 산재한 문화유산들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전북의 역사문물전, 익산'기획전을 열고 있다(2014년 2월19일까지).

 

본보는 익산의 역사유물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문화적 자긍심을 높일 수 있도록 연재 기획물을 마련했다.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의 집필로 10차례에 걸쳐 진행될 이 기획은 익산의 역사유물의 가치를 다시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역사유물에 대한 상식을 넓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후한서〉 동이열전(東夷列傳) 한조(韓條)에 따르면,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한지(韓地)지에 와서 한왕(韓王)을 자청하였다. 고조선 준왕이 정착한 곳에 대해서 〈제왕운기〉,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은 금마(金馬)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조선 왕의 남천'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익산지역은 청동기시대부터 중국, 한반도 서북부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곳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만약 전쟁에서 패한 고조선의 준왕이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간다면, 우호적인 교류가 있었던 익산지역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

 

이와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 가운데 하나가 왕궁면 평장리에서 나온 전한경(前漢鏡)이다. 평장리유적에서는 전한경과 함께 한국식 동검 2점, 청동창과 청동꺽창 각 1점 등이 확인되었다. 초엽문과 반리문이 새겨진 전한경은 대체로 기원전 3세기 말~2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조선 왕이 위만에게 쫓겨 남천한 시기로 추정되는 기원전 194년~180년 사이와 일치한다.

 

이와 더불어 결정적 증거로 철기를 들 수 있다. 고조선은 한반도 남부에 철기가 유입되기 전에 이미 중국 연나라의 영향을 받아 철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한반도 남부에 철기가 등장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2세기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고조선 준왕의 남천 직후와 맞물려 있다.

 

익산시 춘포면 신동리의 널무덤에서 덧띠토기, 한국식 동검과 함께 도끼, 새기개가 출토되었다. 특히 신동리 널무덤의 형식은 청동기시대 익산지역에서 유행하던 무덤 형식과도 다르며, 삼한시대 유행했던 분구묘와도 연결되지 않아 외래 집단이 이주했음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다면, 익산에 정착한 고조선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후한서〉 한전(韓傳)에 따르면, '준왕 후손이 절멸하자, 마한인이 다시 자립하였다.'고 한다. 이는 곧 외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 준왕의 후손을 대신하여 토착세력이었던 마한인들이 득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익산지역에서 고조선 세력을 대체한 마한인들이 세운 국가는 건마국(乾馬國)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익산지역 마한인의 생활 흔적은 장신리유적과 송학동유적에서 살펴볼 수 있다. 2007년에 발굴된 장신리유적은 해발 9~12m의 완만한 구릉의 사면에 조성된 마을유적으로, 총 27기의 집터가 확인되었다. 여기에서는 다양한 토기와 함께 불에 탄 쌀 등의 곡물이 발견되어 마한인들의 식생활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 간촌리유적 출토 '새모양토기'.

송학동유적에서는 다른 유적에 비해 다양한 생산도구가 발견되어, 마한인들의 생산기술을 가늠해볼 수 있다. 송학동유적에서 나온 구슬 거푸집은 작은 구멍이 많이 뚫린 형태이다. 이러한 형태의 거푸집은 열에 녹인 용액을 틀에 부어 작은 구슬을 한 번에 많이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 다른 생산 도구인 받침모루는 토기 벽을 두드리는 도구로, 토기 벽의 밀도를 높여 얇으면서도 강도가 높은 토기를 만들수 있었으며, 받침모루에 새겨진 무늬에 따라 토기 표면에 두드림무늬가 생기는 예술적 효과를 줄 수 있었다.

 

익산지역의 마한인들은 고조선 세력과는 달리 무덤 주위에 고랑을 판 분구묘를 축조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등동 분구묘와 율촌리 분구묘인데, 낮은 분구와 주구를 가진 저분구묘인 것이 특징이다. 이와 더불어 간촌리유적의 널무덤에서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곡령신으로 마한인들이 숭배하던 새를 형상화한 토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건마국은 처음에는 고조선 준왕 세력을 대체하여 마한연맹의 맹주를 자처하였으나, 점차 그 지위를 목지국에 내줘야만 했다. 또한 백제가 성장함에 따라, 영산강 유역의 마한연맹체처럼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점차 백제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진정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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