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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30)无量壽閣(무량수각)-추사의 글씨(16)

无(無)量壽閣(무량수각) -아미타불(무량수불)을 모시는 불전无:없을 무/ 無:없을 무/ 量:헤아릴 량/ 壽:목숨 수/ 閣:집 각본 연재 17에서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에 가면 조선 후기의 3대 명필이라고 할 수 있는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 창암 이삼만의 글씨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원교가 쓴 枕溪樓(침계루), 추사가 쓴 无量壽閣(무량수각), 창암이 쓴 駕虛樓(가허루)가 바로 그것이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런데 충남 예산의 화암사에는 추사가 썼지만 대흥사 무량수각 현판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또 하나의 '无量壽閣' 현판이 있다.충남 예산은 '추사고택'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서울 양반 추사 선생의 고택이 왜 예산에 있는 것일까? 추사 선생의 가문은 원래 충남 서산군 대교리에서 속칭 '한다리 가문'으로 불렸던 명문가인데 추사의 고조 김흥경(興慶)이 영의정에 오르면서 더욱 번성했다.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金漢藎)이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 즉 비운의 세자인 사도세자의 여동생과 결혼함으로써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지고 아울러 봉토(封土=賜田)로서 서울 통의동 일대와 지금의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 일대의 땅을 하사받아 그곳에 집을 지어 후손들이 대대로 이어 살게 되었다. 추사의 어머니 기계유(兪)씨가 추사를 임신했을 때 서울에 전염병이 돌자 서울 통의동의 집을 떠나 예산의 향저에 내려가 있음으로써 추사는 예산에서 태어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오늘날 이 저택을 추사 집안에서 가장 이름을 떨친 '추사'를 기리는 의미에서 추사고택으로 부르게 되었다.고택의 왼쪽에는 추사의 묘가 있다. 추사의 묘는 원래 추사가 만년에 거했던 경기도 과천에 있었는데 1937년 선조들이 묻혀 있는 이곳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추사의 묘 위쪽으로는 화순옹주와 김한신을 합장한 묘가 있고 그 옆에는 젊은 나이에 김한신과 사별한 후 개가를 하지 않은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훗날 정조가 내린 열녀문인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의 오른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기슭에 있는 추사 고조부 김흥경의 묘 입구에는 천연기념물 106호인 백송(白松)이 서 있다. 이것은 추사가 동지부사인 생부 김노경을 따라 북경에 갔다가 가져와 심은 소나무이다.추사고택 근처의 야산인 오석산(烏石山)에는 백제 때 창건된 화암사(華巖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을 추사의 증조부가 재건하여 추사 가문의 집안 절로 사용하였다. 추사가 쓴 이 무량수각 현판은 바로 화암사에 결려있다. 추사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도 절을 다시 한 차례 중수하였는데 추사는 이 현판 글씨를 제주도에서 써 보낸 것이다. 따라서 해남 대흥사의 무량수각 현판은 비록 귀양을 가는 길이지만 권문세가의 핵심인물로서 아직 기고만장할 때 쓴 글씨이고 화암사의 무량수각 현판은 유배생활의 고초를 겪으면서 氣도 한풀 꺾이고 고독 속에서 삶을 반추하던 시기에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화암사 무량수각 현판은 글씨가 매우 담담하다. 필획에 어떤 힘을 넣으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 아니, 넣을 만한 힘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좋게 보면 의도하는 바가 없이 붓 가는 대로 쓴 '담(淡)'의 글씨라고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자면 체념에 빠진 무기력한 글씨, 한 바탕 병을 앓고 난 후에 쓴 해쓱한 글씨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無를 无로 쓴 것이나 '量'자의 모양, 그리고 '閣'의 오른 편 문기둥에 해당하는 획을 오른 편으로 삐쳐 내린 특이한 결구 등 추사의 결자(結字) 습관은 그대로 다 드러나 있어서 대흥사 무량수각의 글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두 작품에 대한 평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閣'의 오른 편 문의 어깨를 낮추고 기둥에 해당하는 획을 오른 편으로 삐쳐 내린 특이한 결구를 통해 추사의 탁월한 창의성을 볼 수 있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의 진정한 탁월성은 '無'를 '无'로 쓴 데에 있다. 만약 無를 그냥 無로 썼다고 가정해 보자. 이 작품은 매우 답답한 작품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작품을 구성하는 네 글자 중 '量'과 '壽' 두 글자가 다 가로획의 연속적인 중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다가 첫 글자 '無'마저 가로획이 중첩된 모양을 하고 있는 '無'로 썼다면 이 작품은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해졌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반복과 중첩의 답답함을 피하기 위해 추사는 '無'를 '无'로 쓴 것이다. 역시 천재적인 작가임에는 틀림이 없다.동일한 작가가 손에서 나왔지만 그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두 작품을 보면서 우리도 인생을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9.21 23:02

'불량한 자전거 여행' 저자 김남중 작가 초청 강연회

익산시립도서관은 19일 2011년 한 권의 책으로 선정된 '불량한 자전거 여행'의 저자인 김남중 작가 초청 강연회를 20일 오전 10시 모현도서관 세미나실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이번 강연회는 2011년 한 권의 책 선정도서 '불량한 자전거 여행'을 널리 알리고 책 읽는 도시 익산 조성을 위해 마련된 행사로, 김 작가와 소통과 배려를 주제로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는 진솔한 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김 작가는 익산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제9회 MBC 창작동화상', '제5회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 '제8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창작부문 대상'등을 수상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자존심', '들소의 꿈', '붕어낚시 삼총사'등이 있다.특히 2011년 한 권의 책 선정도서인 '불량한 자전거 여행'은 속도감 있는 문장과 익살 가득한 에피소드로 그려 단숨에 읽히는 흡입력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익산시립도서관에서는 이번 작가초청강연회를 시작으로 한 권의 책 독후감 공모전, 원화전시회, 오디오북 체험전, 북콘서트, 독서골든벨, 도서교환장터 등 독서의 달을 기념해 시민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행사 개최를 이어갈 계획이다.한편 초청 강연회와 관련한 자세한 사항은 익산시립도서관 홈페이지(www.iksan.go.kr/library)나 전화(859-3731~2)로 문의하면 된다.

  • 문학·출판
  • 엄철호
  • 2011.09.20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29)비릿한 예토의 '우렁달팽이' 시인, 이연주

이연주(1953~1992)는 군산에서 태어나 짧은 생을 살다간 비운의 시인이다. 1991년 시 '가족사진' 등으로 등단한 그녀는 불혹의 나이를 앞두고 자진하였다. '탁류'의 고장에서 태어난 탓인지, 그녀의 시 속에서는 비릿한 생선 냄새가 난다. 시장의 생선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죽어가거나 죽어 있는 시체이다. 그 광경은 역겹다. 왜냐하면 그녀가 생전의 소원대로 "죽어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되어서"('즐거운 일기') 드러누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연주의 시는 읽기 고약하다. 그녀의 길지 않은 생애만큼이나 전기적 사실들도 미처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간에 이루어진 비평적 관심조차 드물어서 관심있는 독자들의 접근을 가로막는다.또한 이연주의 시가 난해한 이유는 여기저기서 고린내와 고름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녀 앞에서 시어는 세계의 위악성을 드러내는데 필요한 소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그녀는 말초신경염, 비만증, 전염병, 백내장, 긴장형 조발성 치매증, 황달기, 매독, 공수병, 위장병, 문둥병, 실어증, 소화불량증, 진폐증, 혈전증, 천식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각종 질병을 작품 속에 퍼뜨리는 심술을 부린다. 한편으로 그녀는 코카인, 가나마이신, 항생제, 아티반, 노발긴, 포르말린, 포도당주사 등 여러 가지 약품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녀는 적어도 작품상으로 '병 주고 약 주는 셈'이다. 그녀의 모순된 행동은 사회를 향한 진단과 치유행위이다. 병명의 나열은 사회의 환부에 대한 나름의 진료 기록이고, 약명은 그에 알맞은 처방전이다. 그녀의 시에서 질병은 존재의 이유인 셈이다.이연주는 세상과 소통할 수 없어서 생긴 병으로 인해 시작 생활 내내 한순간도 평화할 수 없었고, 자신의 불만과 욕망을 각종 질병으로 명명하고 치료하면서 살았다. 따라서 그녀가 기괴한 '가족사진'을 통해 다수의 작품에서 질병과 약품을 열거한 것은 사회에 퍼지게 될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언어적 신호였다. 그녀는 시인다운 예지력으로 미구에 창궐하게 될 질병을 예측하고 경고했건만, 사람들은 "코끝을 찌르는 듯한 이상한 냄새"('외로운 한 증상')를 풍기는 그녀의 시에 등 돌리고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고통에 들게 했던 병원들이 퍼진 후에야, 사람들은 그녀의 시를 꺼내어 병후를 알아보는 등 수선을 떨었다. 이미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가버렸는데 말이다.그녀는 생전에 날마다 꿈을 꾸었다. 그녀는 살아생전에 사람들의 '사이'로부터 탈출하는 꿈만 꾸었다. 그녀는 고상한 서정시인은 못 되더라도, 세상의 대책없는 무질서와 혼란을 외면하는 위선자가 되기 싫었다. 그녀는 패거리 문화에 휩쓸리는 권력지향적 문단 풍토를 애써 멀리 하고, 철저하게 반인문주의적인 상상력을 가동하여 감각적으로 포착하였다. 특히 그녀는 후각 이미지를 빈번하게 제시하고 있는 바 그 여파로 인해 시작품에 냄새가 진동한다. 독자들의 해독을 허용하지 않는 그녀의 '지독한' 시어들은 작품의 구석구석마다 형상으로 켜켜이 쌓여서 낯선 이미지를 형성한다. 그녀의 끈질긴 노력 앞에서 세계는 화해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온갖 모순들이 뒤엉켜 앞을 다투는 '저주의 굿판'으로 변모한 것이다.이연주는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과 '속죄양, 유다'라는 두 권의 시집만 덜렁 남겼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녀의 시집을 펴는 순간, 기존의 시와 달리 엉망으로 난자당한 시어에 당황한다. 그녀는 아어로서의 시어를 고의적으로 폐기하고, 덧난 부위와 곪아터진 상처를 소름끼치는 막말로 시를 썼다. 이처럼 그로테스크한 그녀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습한 시론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현대시의 전통적 문법이나 사유방식을 인정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남들이 자신의 시를 읽어주는 것조차 꺼려하며 "어디에도 소장되지 않는 삶"('네거티브')을 꿈꾸었다. 그녀가 "양로원에도 갈 수 없는 나이"('그렇게, 그저 그렇게')에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해버린 것은 그 꿈의 완성이다.두 시집은 그녀가 죽던 해를 에워싼 3년의 시간을 증언한다. 그녀가 두 권의 시집 속에 털어놓은 메스꺼움이란 결국 남은 자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그녀의 요구조건은 지극히 단순하다. 이제라도 세계의 정직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사회가 그녀에게 가했던 부자유와 불합리를 사죄받는 일이다. 더욱이 권력을 좇는 평자들의 눈 먼 독해력을 비웃었던 이연주처럼 치열했던 시인 앞에서는 우리 모두 죄인이다. 이처럼 시는 죽은 자의 작품을 통해서 살아남은 자로 하여금 현생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다짐하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이제라도 그녀가 남겨둔 두 권의 시집을 다시 꺼내어 읽으면서, 예토의 부정직성을 교정하느라 땀 흘려야 한다. 우리들이 태곳적의 형형한 눈빛을 회복할 때, 이연주의 시는 절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9.20 23:02

군장대학 이용길 교수, '창조교육…'출간

군장대학교 이용길(49) 교수가 최근 사회 각 분야에서 '창조적 발상'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창조적 인재 육성을 위한 교육학적 이해와 창조교육 교수 학습의 실제적 방법을 서술한 '창조교육 교수·학습의 이론과 실체'를 출간했다.총 380여쪽 분량으로 3부 14장으로 구성된 '창조교육 교수학습의 이론과 실체'는 창조교육의 교수학습에 대한 기존의 다양한 이론과 실제에 대한 연구와 저술들의 장·단점을 절충 보완하고 있으며, 교육의 궁극적 목적이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개발하는 것과 귀결됨을 강조하고 있다.이 교수는 그동안 교육현장에서 창조교육을 위한 교수법과 학습법을 연구해 왔으며, 특히 창조교육 이론을 주창하며 학문적 일가를 형성해 온 이종록 광동학원 이사장과 함께 창조교육학의 토대를 마련해 왔다.남원 출생인 이용길 교수는 원광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교육학회 기획조정위원, 한국교육사학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창조교육 교수 5단계 이론에 관한 논의'등 5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2004년 한국교육사학회 학술논문상, 2006년 창조교육학회 학술공로상, 2009년 창조성 국제학술대회 우수논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 문학·출판
  • 이일권
  • 2011.09.16 23:02

희망의 메시지 담긴 성장통 이야기

"그냥, 즐겼다."여고생 김누리(18·전북사대부고 3학년)양에게 첫 장편소설'안녕, 소리바다(잇북)' 출간은 "시작부터가 도박이었다" . 이야기를 완성시킬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없었다. 덕분에 즐길 수 있었다. 욕심을 버리니, 쓰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올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주관한 '우수 저작 및 출판지원사업'에 누리양이 최연소로 선정되면서 또다른 '문단 여동생'을 예고했다.'유의, 나 소리바다로 가.'소설은 열아홉살 여고생 '유의'의 시선을 따라간다. 유의는 '절친'J가 가상공간'소리바다'로 사라지자 찾아 나선다. 하지만 '소리바다'에서 한쪽 팔을 잃은 바이올리니스트, 집안 형편으로 헤어진 작곡가 등을 만난다. 유의는 성장통을 겪으며 사랑을 배우고 어른으로 성장해간다. 여기서 누리의 고민과 주인공 유의의 고민이 포개어진다. "처음으로 사랑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났다"고 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하지만 마냥 미쁘지만은 않다. 한창 어리광을 부릴 법도 한데, 성숙하다. 내일이 불안한 청춘의 창백한 낫빛을 볼 줄 알고, 그 지친 영혼에게 자신의 좁은 어깨를 빌려줄 줄도 안다. "더 열심히 읽고 쓸 계획"이라는 누리양은 "(감히) 사랑한다"는 말로 모든 이야기를 대신했다.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9.15 23:02

[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29)山崇海深, 遊天戱海-추사의 글씨(15)

山崇海深, 遊天戱海(산숭해심, 유천희해)-老阮?筆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하늘에서 놀고 바다에서 장난질 하고. -늙은 완당이 멋대로 쓰다山:메 산/ 崇:높을 숭/ 海:바다 해/ 深:깊을 심/ 遊:놀 유/ 戱:놀 희, 희롱할 희/ 阮:성시 완/ ?:속일 만, 거만할 만/ 筆:붓 필이 작품은 현존하는 추사 작품 중 규모가 가장 큰 작품으로서 한 폭의 크기가 가로 207×세로42cm나 된다. 그런데 두 구절 중 '遊天戱海'라고 쓴 폭에만 '老阮?筆'이라는 관기(款記)가 있고 '山崇海深'이라고 쓴 폭에는 아무런 관지가 없다. 따라서 이 두 폭의 글씨가 원래는 두 폭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게 아니고 한 폭으로 이어진 가로 길이 414cm의 대형작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홍준은《완당평전》에서 1957년 3월 대한고미술협회가 주관한 경매전에서 관기가 없는〈산숭해심〉은 55만환에 관기가 있는〈유천희해〉는 121만환에 낙찰되었다고 하였다. 지금은 두 폭이다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이산가족'신세를 면하였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마치 각 폭이 한 작품인양 각 폭의 끝부분에 같은 도장이 찍혀 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 찍혀 있는 도장들은 추사가 당년에 찍은 게 아니라 두 작품이 분리된 이후에 누군가가 찍은 것으로 볼 수 있다.이작품은 추사 서예의 호방하고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거칠면서도 제대로 박힌 필획에 탄탄한 결구 그리고 여덟 글자를 가로로 이어 쓰면서도 어느 곳 한 곳 이지러진 데가 없는 웅장한 장법 등 흠잡을 데라고는 없는 작품이다. 이른 바, '살아있는 필획'을 구사하는 운필법 중에 종이와 붓이 마치 사포(砂布)에 문질리는 것 같은 강한 마찰감을 느끼도록 하는 운필이 있는데 이를 '향상도하(香象渡河:코끼리가 강을 건너듯)'라는 말로 표현하곤 한다(본 연재 추사〈계산무진〉조 참고). 이 작품이야말로 전형적인 향상도하의 필법으로 쓴 작품이다. 추사 이후 지금에 이르도록 이처럼 큰 대작을 이렇게 참신하면서도 기괴한 결구를 이루면서 이처럼 호방하고 웅장하게 쓸 수 있는 작가는 추사 외에는 없다고 단언해도 무방할 것이다.그렇다면 이 작품에 쓴 '山崇海深, 遊天戱海'라는 글의 뜻은 어떻게 풀이를 해야 할까? 추사는 자신이 스승으로 받들었던 청나라의 서예가 옹방강(翁方綱)의 실학정신을 칭송하면서 "山海崇深"이라는 말을 쓴 적이 있기는 하나(국립중앙박물관《추사 김정희》2006, 85쪽 참조) 여기서의 '山崇海深'도 그런 의미로 사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필자는 이 '山崇海深'의 의미를 굳이 옹방강과 연계하지 않고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인 팽구년(彭龜年1142~1206)의 시와 범성대(范成大 1126~1193)의 글에서 찾고자 한다. 팽구년은〈광수(廣壽=長壽〉라는 시에서 "누가 장수하기를 마다하겠는가? 장수하는 방법으로는 덕을 쌓는 것보다 나은 게 없지. ......쓸데없는 욕심을 버리면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수명을 누릴 수 있다네."라고 읊었다. 그리고 범성대는 한나라 때의 은자(隱者)인 엄광(嚴光)의 사당에 대한 기(記)에서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는 엄광의 인품과 도덕이 산처럼 높고, 맑은 명예가 강물처럼 길게 오래도록 이어질 것을 칭송한 말이다. 추사가 쓴 '山崇海深'은 범성대가 쓴 '山高水長'이라는 말과 비슷한 말로 볼 수 있다. 따라서 '山崇海深'이라는 말은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수명과 '산처럼 높은 인품으로 강물처럼 길이 전할 명예'를 누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遊天戱海'는 말은 중국 남조시대 양나라 사람 소연(蕭衍)이 위(魏)나라 때의 명필인 종요(鍾繇)의 서예를 평하여 "바다 위를 나는 기러기 떼의 비상처럼 비록 빽빽하지만 결코 답답하지 않고 오히려 구름 같은 고니가 하늘에서 놀듯이 한가하고 여유가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인 "群鴻戱海, 雲鵠遊天(군홍희해, 운곡유천)"에서 따온 것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하늘에서 노는 고니처럼 한가하게, 바다 위를 나는 기러기처럼 자유롭게'라고 풀이할 수 있다.이제 '山崇海深, 遊天戱海' 두 구절을 이어서 뜻을 부연하여 풀이해보도록 하자.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수명과 산처럼 높은 인품과 강물처럼 길이 전할 명예를 누리소서. 그리고 하늘에서 노는 고니처럼 한가하고 바다 위를 나는 기러기처럼 자유로운 삶을 누리소서.'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9.14 23:02

[김병기의 서예·한문 이야기] (28)竹爐之室(죽로지실) -추사의 글씨(14)

竹爐之室 (대나무 화로가 있는 방)竹:대 죽/ 爐화로 로/ 之:갈(go) 지, ∼의 지/ 室:집 실이 작품 역시 추사 김정희 선생을 대표하는 명작이다.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추사는 명필로 칭송을 받기에 충분하다. 추사 당시는 물론이려니와 추사 이후 지금에 이르도록 중국 한국 일본을 통틀어 과연 이만한 작품을 써낼 수 서예가가 추사 말고 누가 있을까? 필획으로 보나 결자(結字:한 글자의 짜임새)로 보나 장법(章法:전체적인 어울림)으로 보나 흠잡을 데가 없는 작품이다. '竹'자는 왼쪽과 오른쪽의 높이에 차이를 두어 상하의 변화를 강하게 주면서도 다시 왼쪽의 '?'는 폭을 좁게 쓰고 오른 편의 '?'는 폭을 넓게 씀으로써 오른 편의 '?'로 하여금 낮으면서도 그 기세는 전혀 약해 보이지 않게 하였다. '爐'의 '불화(火)'는 앙증맞을 정도로 작게 쓰면서도 필획은 마치 도끼로 나무판을 찍어내듯이 종이에 붓을 들이대어 다부진 모양을 만들었다. '爐'의 오른쪽 부분은 수평의 가로획을 반복 중첩하였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굵기가 조금씩 다른 한 획 한 획이 마치 건강하게 자란 대나무가 적절한 무게감을 가지고 나긋나긋 거리는 것 같은 탄력을 띠고 있기 때문에 지루하기는커녕 오히려 신선하고 경쾌한 것이다. '之'는 전체적인 작품 분위기가 예서임에도 전형적인 전서의 글자꼴을 취하여 마지막 가로획을 수평으로 처리함으로써 다른 글자의 횡세(橫勢)적 분위기와 정히 어울리게 하였다. '室'자에 이르러서는 추사의 천재적 조형감각을 더욱 더 실감할 수 있다. '室'의 '至'부분을 마치 6각형의 창문 모양으로 씀으로써 실지 집안의 방(房)과 같은 분위기를 내었으니 실로 귀신같은 솜씨라고 아니할 수 없다. '竹'의 쭉 뻗은 가로획은 물론이려니와 힘차게 감아 올린 마지막 획도 겉모습은 상당히 부드러우면서도 내적으로는 꿈틀대는 용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특히 마지막 획의 비백(飛白: 먹물이 묻지 않도록 희끄하게 처리한 획)이 일품이다. '爐'의 끝부분 '皿'을 전서로 쓰고 마지막 가로획을 가늘면서도 약간 위로 굽혀 씀으로써 마치 요즈음 건축 공사장에서 흔히 보는 긴 철근의 가운데를 들었을 때 느낄 수 있는 무게감과 탄력을 느끼게 한다. 혹자는 이 작품을 두고서 필획이 너무 부드러운 게 흠이라는 평을 하기도 하는데 그건 정말 모르고서 하는 평이다. 겉모습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탄력을 내장하고 있는 필획이 진짜 살아있는 필획인데 이 작품은 다 그런 필획으로 썼기 때문이다.이 작품은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써준 것이다. 다 알다시피 초의선사는 우리나라 차(茶)문화 중흥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며 추사와 절친한 사이였다. 추사는 늘 자신이 제조한 차를 보내주는 초의를 위해 초의가 차를 마시며 거쳐하는 방의 이름을 '죽로지실'이라 짓고 그것을 써준 것이다. 그렇다면 '죽로(竹爐)' 즉 '대나무 화로'란 무슨 의미일까? 대나무로 화로를 만들면 응당 타버리고 말텐데......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억측을 하고 있다. 혹자는 대숲의 서늘한 기운과 화롯불의 따뜻한 기운이 함께 감도는 방의 분위기를 '죽로지실'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라 하고, 혹자는 대나무로 장식한 화로로 해석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대숲을 바라보며 화롯불을 쬐는 방이라고 대충 풀이하기도 한다. 다 나름대로 낭만적인 해석이기는 하나 정답은 아니다. 정답은 '대나무로 감싼 화로'이다. 철로 화로를 만들고 화로보다 더 큰 크기의 대나무 껍질 커버(Cover)를 엮어 만들어 그 안에 화로를 넣은 다음 대나무 커버와 철 화로사이에 가는 흙이나 석회를 넣어 단열을 한 화로가 바로 죽로(竹爐)인 것이다.그렇다면 추사는 초의가 죽로를 소장하고 있었기에 방의 이름을 '죽로지실'이라고 지어 써준 것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더 많다. 필자는 최근 '죽로지실'이 추사와 초의와 다산과 아암 등 당시 대흥사와 관련이 있던 인물들의 교류와 우정과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상징하는 매우 의미가 깊은 말이라는 증거를 찾게 되어 현재《秋史「竹爐之室」'竹爐' 意味考》라는 논문을 집필 중에 있다. 논문이 완성되면 이 작품「竹爐之室」의 의미와 가치가 더욱 깊고 높아지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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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1.09.07 23:02

'푸른책들' 동시집 시리즈 50권 돌파

아동ㆍ청소년문학 전문 출판사인 푸른책들의 동시집 시리즈가 통권 50권을 돌파했다. 푸른책들은 최근 50번째 동시집인 이정인의 동시집 '남자들의 약속'을 출간했다. 1999년 윤동주의 동시집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를 내놓으며 동시집 시리즈를 처음 선보인 이후 12년 만이다. 1998년 설립된 푸른책들은 '책 읽는 가족' '작은도서관' 등 아동문고 시리즈를 통해 간간이 동시집을 펴내다 2007년부터 동시집 시리즈인 '시 읽는 가족' 시리즈를 선보였으며 2009년부터 '동심원' 시리즈로 동시집 출간을 이어가고 있다. 그간 출간된 동시집 가운데 '몽당 연필이 더 어른이래요' '붕어빵 아저씨 결석하다' '엉덩이가 들썩들썩' 등 여러 책 속 작품들이 초ㆍ중등 국어 교과서에 수록됐으며 소천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윤석중문학상 등 주요 동시 문학상도 수상했다. 독자들에게도 사랑을 받아 윤동주 시인이 남긴 동시를 묶은 첫 책과 신형건의 동시집 '거인들이 사는 나라'는 동시집으로서는 드물게 1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다. 동시집과는 별도로 최근에는 안오일의 '그래도 괜찮아'와 이장근의 '악어에게 물린 날' 등 청소년시집도 내놓기 시작했다. 푸른책들 관계자는 6일 "동시집의 상업성이 저조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좋은 책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읽히겠다는 사명감으로 출간을 이어가고 있다"며 "앞으로도 신인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꾸준히 동시집을 출간할 것"이라고 밝혔다.

  • 문학·출판
  • 연합
  • 2011.09.07 23:02

옛글에 담긴 애틋한 부부 이야기

"남자가 전적으로 혼자 장가들지 않고 여자는 전적으로 혼자 시집가지 않는다. 반드시 부모를 통하고 중매를 필수로 한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부끄러움을 멀리하고 음란함을 방지하기 위해서다."(43쪽) 조선의 학자 윤휴(1617-1680)가 '독서기'에서 이같이 지적한 것처럼 조선시대의 결혼은 대부분 부모가 개입된 중매결혼이었다. 어려서부터 '남녀칠세부동석'을 되새기며 내외하다 부모가 정해준 짝과 얼굴도 보지 못한 채 결혼해서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의 지극히 상하적인 관계로 부부생활을 유지하는 조선시대 부부에게 낭만이나 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일 것 같다. 그러나 이종묵 서울대 국문과 교수의 책 '부부'(문학동네 펴냄)에 수록된 옛글속 부부들의 모습은 오늘날의 부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다양한 옛 문헌과 문학작품 등을 바탕으로 옛 사람들의 부부관과 부부생활 모습을 살펴보고 있다. 이 교수는 "인간이 생각과 감정을 표출하여 문학이 생겨난 이래 문학의 가장 큰주제는 바로 남녀의 사랑이었다"며 "이러한 점에서 부부는 인문학과 문학 연구의 가장 큰 본령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말한다. 유교적 예법이 강조되던 조선시대에는 자유연애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남녀칠세부동석을 강조한 것으로 볼 때 역설적으로 조선시대에 자유연애로 인한 사고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제도권 밖에서 '남녀상열'하여 '야합(野合. 남녀가 중매 없이 서로 좋아만나는 일)'하고 '불고이취(不告而娶. 부모 동의 없이 혼인하는 일)'하는 일이 성행했다고 한다. 또 어린시절 함께 자란 남녀가 결혼하는 이야기를 담은 이안중(1751-?)의 연작시 '자야가(子夜歌)'를 비롯해 허구의 문학작품을 빌려 남녀의 자유로운 만남과 사랑을 그리기도 했다. 당시 부부에게도 애틋한 사랑과 치열한 갈등은 있었다. 이안중의 또다른 시 '달거리 노래'에는 알콩달콩한 신혼 생활의 모습이 엿보인다. "오늘밤 촛불 켜지 않았더니 / 낭군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 향긋한 숨소리만 듣다가 / 아침에 거울 보고 하는 말 / '어찌하여 뺨에 바른 연지가 / 낭군 얼굴에 가득 묻었나요?'"(160-161쪽. 이안중 시 '달거리 노래' 중)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사소절(士小節)'에서 자존심 다툼과 가난, 그리고 서로를 너무 잘 안다는 점 등을 부부 갈등의 원인으로 들기도 했다. "부부간에 불화가 생기는 까닭은 다만 남편이 천존지비의 설을 고수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여 아내를 억눌러 용납하지 않고, 아내는 제체(齊體. 등위와 품격을 같게하여 동등하게 대우하는 동급의 몸이라는 의미로 주로 부부를 뜻함)의 의의를 지켜 나나 저나 동등한데 무슨 굽힐 일이 있겠는가 하는 데서 연유할 뿐이다."(205쪽) 옛 사람들의 부부 생활에는 어쩔 수 없이 남성중심적인 시각이 담겨 있지만 그속에서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는 부부의 도(道) 역시 발견할 수 있다. 308쪽. 1만3천800원.

  • 문학·출판
  • 연합
  • 2011.09.06 23:02

90년대 청춘과 사랑, 그리고 추억 보고서

"무엇을 하건 어정쩡하고 무엇을 꿈꾸건 너절했으니 그게 바로 90년대. 80년대가 격렬했다면 90년대는 야비했습니다. 80년대가 야생마 같았다면 90년대는 그늘에 숨은 고양이 같았습니다."(32쪽) 소설가 한차현(41)의 새 장편 소설 '사랑, 그녀석'(열림원 펴냄)은 1990년대의사랑과 추억에 대한 보고서다. "인터넷커녕 PC통신도 없던 시절. 핸드폰커녕 삐삐도 없던 시절. 신용카드커녕 교통카드도 없던 시절. (중략) 인터넷 검색 사이트도 스마트폰 앱도 없지만 만나서 함께 다니는 곳은 어디건 서울 뒷골목의 숨은 맛집이요 주말 저녁 데이트 추천 명소였습니다."(129쪽) 작가는 어깨에 힘을 빼고 종로 피맛골 민속주점 일지매와 종로3가 나이트클럽 서울테크 등 1990년대 서울의 숨은 명소로 안내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거리에서 신해철의 '그런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를 듣고 TV 드라마 '서울의 달'과 '야망의 세월'의 내용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저자는 7080세대와 '88만원 세대' 사이에 끼어 좀처럼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1990년대를 주목했다. 그는 5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1990년대는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탄생한 시기"라며 "1990년과 1999년을 떼어 놓고 비교해보면 90년대가 80년대나 2000년대 등 다른 시기보다 변화가 훨씬 컸던 것을 쉽게 알 수 있다"고 작가가 느끼는 90년대에 대해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1990년대를 묶는 단어나 상징은 뚜렷하게 없는 것 같다"면서 "1990년대 문화도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힘줘 말했다. 89학번인 저자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개인의 경험을 버무렸다. 아예 '한차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연인 은원만 빼면 모든 등장인물의 이름을 실존 인물에서 따왔다. 은원도 아내 문은 씨를 토대로 한 캐릭터다. 차현이 대학 선후배와 함께 소설가 박범신을 만나는 일화도 실제 있었던 일이다. 소설은 90년대 거리를 누비는 연인의 이야기다. 대학에 입학한 주인공이 실연의아픔을 겪고 나서 우연히 시작한 연애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줄거리다. 전작 '변신' '왼쪽 손목이 시릴 때' 등에서 독특한 상상력을 펼친 그는 "이전작품에서는 음모론이나 보이지 않는 세력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무겁지 않은 연애 소설을 써 봤다"고 말했다. 첫사랑 선배인 미림에게 퇴짜 맞은 차현은 동기 은원을 불러내 '위로주'를 얻어먹는다. 그러다가 술김에 은원에게 '뽀뽀'를 요구하고 은원은 차현을 달래려고 이에 응한다. 예상치 못한 뽀뽀가 맺어준 두 사람의 인연은 갈수록 깊어진다. 춘천으로, 대전으로 여행을 하고 차현이 입대하기 직전 마침내 잠자리까지 함께하게 된다. 복학 후 차현은 소설가의 꿈을 키워간다. 차현은 3년 후배 정민과 가까워지다가은원에게 들키고, 영어 강사로 일하던 은원이 콜롬비아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하면서 둘의 관계가 위기를 맞기도 한다. 한 작가는 "소설은 90년대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사실 사랑은 100년 뒤에도 통할주제"라며 "다른 작품에 비해 내 감정이 많이 실렸고 무척 즐겁게 작업했다"고 말했다. 여기에 90년대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시시콜콜 더해지면서 소설은 더욱 풍성해졌다. 한 작가는 90년대 신문철을 쌓아 놓고 90년대 가요를 들으며 집필했다고 한다. "금융실명제와 공직자윤리법, 우루과이 라운드와 쌀 개방. 칼국수를 먹으며 '겡제'를 '학실히' 살리겠다던 김영삼의 1년은, 한마디로 'YS는 못 말려'였습니다.(중략)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와 대구 가스 폭발과 거기 이어지는 소통령 김현철비리, 비뇨기과 몰래카메라에 한보 사태에 IMF 외환위기까지는 감히 상상도 하기 이전이었지요."(221쪽) 한 작가는 "90년대에 청춘을 보냈고 소설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과거를 한 번쯤 여유 있게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372쪽. 1만2천500원.

  • 문학·출판
  • 연합
  • 2011.09.06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28)고고한 낙타 시인, 이한직

이한직(1921~1976)은 전주 태생의 시인으로, 호는 목남(木南)이다. 그는 1939년 경성중학을 졸업하고 도일하여 게이오대학(慶應大學) 법학과에 진학하였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자 그는 1943년에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다. 광복이 되자 그는 청년문학가협회의 창립에 참여하여 민족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이 무렵에 그는 시인 박인환이 경영하던 서점 마리서사에 출입하면서 김기림, 오장환, 김광균, 김수영 등과 친교하였다. 이 무렵에 종합지 '전망'을 주재하였다. 시작품으로 세상과 만나기조차 꺼리던 그답지 않게 거침없이 활동폭을 확장한 셈이다.1951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한직은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등과 함께 공군의 창공구락부 소속 종군 문인으로 활약하였다.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그는 인촌 김성수의 둘째 영애와 혼례를 올렸다. 서울이 수복된 뒤에는 조지훈 등과 힘을 합쳐 '문학예술'지의 시 부문 추천위원(1956~1958)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그는 1956년 '친일문학론'으로 유명한 임종국, 1956-57년에는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신경림, 1957년에는 '비는 수직으로 죽는다'의 허만하 등을 추천하였다. 그는 자신의 시를 뽑아준 정지용 못지않은 안목으로 장차 한국시단의 중흥을 떠맡을 괄목할만한 신인들을 고른 셈이다.이한직은 1957년 2월 한국시인협회의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여 기획 간사를 맡기도 했다. 그 뒤 1960년 4?19민주혁명이 일어난 뒤에 문공부의 문정관으로 취임하여 일본에 건너갔다. 다음해 5.16이 일어나자 직을 그만 둔 그는 1976년 7월 동경의 자택에서 지병으로 별세할 때까지 귀국하지 않았다. 이런 탓에 그의 행장은 자세히 복원되지 않았고, 시단의 평가를 불러 모으기에 역부족이었다.1939년 5월 이한직이 18세의 나이로 '문장'에 시를 응모하자, 시인 정지용은 "패기도 있고 꿈도 슬픔도 넘치는 청춘이라야 쓸 수 있는 시"라고 고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당선작은 18세의 소년이 쓴 시라고 보기에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을 정도로 고도의 압축미와 감각적인 언어가 구사되었다. 요즘에는 교과서에 실린 덕분에 "낙타는 어릴 때 선생님처럼 늙었다"는 시 '낙타'가 더 유명해졌지만, 그의 당선작 '풍장'은 당시의 시단을 평정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자연을 예찬하며 식민지 현실에 절망하고 있었던 시인들은 이한직의 시를 읽으며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박목월이 조시 '이한직'에서 '정신의 귀공자'이자 '열여덟에 떠오른 시단의 찬란한 별'이라고 칭송한 예에서 보듯이, 이한직의 출현은 한국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그 후로 그는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하였으나 과작에 불과했다. 그는 등단 초기부터 카프 계열의 현실지향성과 모더니즘 계열의 시경향을 한꺼번에 제척하고, 나름의 시관에 따른 순수시를 추구하였다. 그러던 중에 혁명과 군사정변, 전쟁 등의 굵직한 사건이 연속적으로 벌어지자 그는 서재에서 뛰어나와 발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동족상잔이 벌어지자 "이제는 고집하여야 할 아무 주장도 없다"('동양의 산')고 허탈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고, 학생의거가 벌어지자 "莞爾히 숨을 거둔 젊은이들"('깨끗한 손을 가진 분이 계시거든')을 호명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세사와 단절한 채 완고하게 살아간 시인이 아닌 줄 알 수 있다. 이 시편들에서 그는 모더니스트다운 태도로 폭력적 사태를 시로 비판하면서도, 시적 비유를 동원하여 절제된 지성을 보여주었다.세상 사람들은 이한직을 일러 '고고한 귀공자'라고 불렀다. 그는 인상도 고결하였고, 시재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 아마 정지용도 그를 추천하면서 조숙했던 프랑스의 천재시인 랭보를 떠올렸을지 모를 일이다. 그는 세간에서 부르는 바대로 남들과 쉽사리 어울리지 못하였다. 한때 대학에 출강하기도 했으나, 그는 소수의 지인들 외에는 어울리기를 거부하는 대인결벽증을 보였다. 또한 이미지의 충돌로 초래된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하기에 노력한 그의 시작법은 후배시인들에 의해 계승되기에는 난망한 과제였다. 이런 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가 시사적으로 자리를 잡기 어렵게 만든 요인으로 기능했다.이한직은 생전에 시집을 발행하지 않은 시인이다. 오로지 편저 '한국시집'이 있을 뿐으로, 시작 정리에 무관심했던 그의 사후에 유족들이 '이한직시집'(1976)을 발간하였다. 그 덕분에 한국시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확보했으면서도 온 작품을 읽을 수 없었던 그의 문명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시편은 총23편으로, 독자들이 갈급증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지금은 그마저 출판된 지 오래여서 일반인들이 대할 기회가 마땅치 않다. 앞으로 전북 문단에서 수행할 과제는 그의 시작품 전량을 한데 모아서 시업을 기리고 칭송하는 일이다. 지역의 풍부한 문학적 자산조차 수습하고 자랑하지 못한 데서야 어찌 전북인이라고 자긍할 수 있으랴.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9.06 23:02

열린시문학상, '중산시문학상' 으로 재탄생

이운룡 시인(74·문학평론가)이 사재를 털어 자신의 아호(中山)를 딴 '중산시문학상'을 제정했다. 이 시인이 설립해 운영해오던 열린시문학회 시창작교실의 '열린시문학상'은 올해부터 '중산시문학상'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열린시문학회 시창작교실이 전북 시단에 불꽃을 퍼뜨리며 걸어온 지 22년. 1989년말부터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그는 시창작교실을 열고 작품을 지도하면서 수많은 시인들을 발굴해왔다.이 시인은 "전북 문단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도내 최초로 시(詩) 공모전을 마련하게 됐다"며 "전북 시단을 탄탄히 할 수 있는 발판으로 뿌리내리길 바란다"고 말했다.'중산시문학상'의 자격 요건은 새로 쓰여진 운문(시·시조·동시 각각 5편)만을 대상으로 한다. 대상 수상자에는 창작지원금 500만원이 수여된다. '중산시문학상'의 전신인 '열린시문학상'과 함께 수여되는 '국제해운문학상'은 바다에 관한 문학적 상상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바다·해상·물류·새만금과 관련된 운문과 산문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이다. 대상 300만원, 본상 200만원으로 나눠 지원하던 '국제해운문학상'은 올해부터 대상에만 500만원을 준다.이 두 문학상의 새로운 주최·주관자로 (주)국제해운(대표이사 윤석정), (유)현대건설안전연구소(대표이사 김병국), 전북문인협회가 지난 6월 협약을 맺어 선정됐다. 이로 인해 전북문인협회(회장 이동희)는 내년부터 '중산시문학상'과 함께 '국제해운문학상'을 주관한다. 모집기간은 매년 4월1일부터 30일까지, 예심과 본심을 거쳐 수상작를 가려낸다. 문의 063) 278-2296(전북문인협회).

  • 문학·출판
  • 이화정
  • 2011.09.02 23:02

고은 "파주북소리, 책의 시대 개막 기원"

고은(78) 시인이 오는 10월 열리는 '파주북(BOOK)소리 2011'과 관련, "행사가 열리는 파주출판도시가 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책의시대를 열기를 기원한다"고 30일 말했다. 고은 시인은 이날 태평로 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열린 '파주북소리 2011'보고회에서 "'북소리'는 책소리이기도 하고 큰 북을 울리는 소리이기도 하다"며 "책과 북이 함께 어우러지는 문화의 소리가 세계 책의 문화에 기여하기를 바란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번 행사에서 고문을 맡은 그는 "나도 내 인생의 후반은 책의 무덤 속에 살고 있으며 도저히 책을 떠날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며 "어제는 천문학을 읽었고 조금 뒤에는 지리서를 읽을 것"이라고 근황을 전하기도 했다. 동석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예전에는 책을 소리 내서 읽었는데 요즘은 묵독이 이뤄진다"며 "소리, 의미, 문자의 세계가 하나가 될 때 생명을 찾을 수 있는데 북소리와 파주출판도시를 통해 이뤄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행사의 성공을 기원했다.경기도와 파주시가 주최하는 '파주북소리 2011'은 '책 읽는 사람, 쓰는 사람, 만드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만드는 지식의 축제'라는 기치 아래 10월1일부터 9일까지 열린다. 15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며 출판도시 입주 출판사 150개를 비롯한 200여 개 출판사와 1천여 명의 저자들이 참여한다. 책 염가 판매 일변도의 기존 도서 행사에서 벗어나 출판문화를 테마로 한 다양한 전시와 강연, 세미나, 공연, 체험행사 등이 독자를 맞는다. 이날 보고회에서는 파주북소리 행사에 대한 개관과 추진 상황에 대한 간략한 보고가 이뤄졌다. 행사 조직위원, 자문위원, 집행위원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 문학·출판
  • 연합
  • 2011.08.31 23:02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27)비극적 서정시인 박정만

박정만(1946~1988)은 정읍 산외 출신의 시인이다. 그는 1965년에 경희대에서 주최한 전국 고교생 백일장에 시 '돌'로 장원 급제하여 동향의 선배시인 강인한의 뒤를 이어 전주고등학교의 문예 실력을 내외에 자랑하였다. 이태 뒤에는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고, 1972년에는 문화공보부의 문예 작품 공모에 시와 동화가 당선되어 일찍부터 문명을 날렸다. 경희대 재학 시절 '대학주보'에 소설'낙화유수'를 발표하는 등 중단편소설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문예지에 시평을 쓰기도 했으며, 수필 속에 자신의 문학관과 일상의 사연을 담아내기도 하였다. 그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면서 문학적 재능을 표현했지만, 언제나 시인으로서의 몸가짐을 잃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10권 남짓한 시집을 간행하였고, 2권의 동화집도 상재한 동화작가였다. 이러한 연보를 보면, 그를 '비극적 서정시인'이라고 하기에는 난망하다. 더욱이 그는 한 여학생과 고교 시절부터 사랑을 시작하여 혼인하고 두 딸까지 두었으니, 남부럽지 않은 화려한 경력의 시인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그러나 박정만의 생은 88 서울 올림픽을 전후하여 참담하게 난자당하고 말았다. 제5공화국의 군사정권이 여의도에서 국풍이라는 이벤트를 선보일 무렵, 그는 이른바 '한수산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영문도 모른 채 온갖 고문을 당하였다. 그는 평범한 잡지사의 편집자이자 소심한 시인에 불과하던 박정만의 여생은 그때의 후유증으로 절단되고 말았다. 자신의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입은 폭력으로 인해 문우와 사랑하는 여인을 동시에 잃어버린 채, 그는 '두 달 사이에 500병의 술을 쳐죽'이며 '사월 벚꽃 쏟아지듯 쏟아지듯 시를 받아서'('최후로') 전작품의 67%에 해당하는 386편을 썼다. 그는 질긴 목숨을 이어가며 삶의 무게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며 살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일체의 곡기를 끊고 날마다 일용할 양식인 양 술을 마시는 일과는 그의 신체적 조건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올림픽이 개최되던 중에 '죽어가는 자의 고독'한 포즈로 변기에 앉아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박정만은 사랑의 시인이었다. 그러나 초기의 작품에서 미처 청산하지 못한 감상적 요소는 평단의 시비를 불러오는 요인이었다. 그는 이혼과 고문 후유증으로 몹시 곤란한 처지에서 '팬지'를 만났다. 그와 동거를 시작한 그녀는 당시 세도가의 영애였다. 그러나 '가난뱅이 삼류시인'과의 애정 행각을 용납할 수 없었던 세력자는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여 둘 사이를 갈라놓았고, 결국 '팬지'는 산사로 들어갔다. 박정만은 '寂光殿을 끼고 도는 미인'('美人의 집')과의 사랑을 통해서 초기의 감상성을 극복하고 절절한 사실감을 획득하였다. 이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랑은 죽음을 재촉하는 흥분제이다. 스스로 사랑을 가리켜 '소리없이 말로 말하는 괴로움'이라고 부르던 그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매개로 시와 목숨을 맞바꾼 시인이다.무릇 한번 닥친 죽음의 모습은 박정만의 문학적 자질을 결정적으로 좌우하였다. 그런 흔적은 원시적 속성을 듬뿍 지닌 동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 동화에서 그는 함박눈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이 지어주신 눈꽃'이라고 칭했다. 그가 이 작품에서 눈을 맞는 아이들처럼 그가 순수한 표정으로 설경을 묘사한 부분과 그의 고향이 폭설로 유명한 고장인 줄 함께 감안하면, 생전에 '무덤 같이 행복했던 자'('풍장 Ⅲ')로 자처한 안쓰러운 자의식의 실체적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함박눈에 덮인 고향마을에서 행복의 원형을 찾았고, 고향은 죽어서 돌아갈 '무덤'이었다. 이미 죽음을 예상한 그에게 동화는 시쓰기의 연장이었던 셈이다. 이점에서 "착한 사람은 죽어서 그 영혼을 별에 묻고, 그 별의 소금으로 빛나서 사람의 흐린 눈을 맑게 씻어주신다"('별에 오른 애리')는 신념을 형상화한 그의 동화들은 시적 편력과 현실적 사고의 변화 추이를 반영하고 있고, 시와 함께 분석되어야 할 근거를 확보한다.요즘처럼 서정성조차 상품으로 포장되어 팔리는 시대에, 박정만처럼 한결같이 서정성을 유지하는 자세는 답답한 축에 든다. 그는 '우리 시대의 탁월한 서정시인'이었기에, 지금도 저승에서 조촐한 서정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그의 사후에 지우들이 '박정만 시전집'과 산문집'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나는 해지는 쪽으로 가고 싶다'를 출간하였다. 그리고 그의 슬픈 죽음을 안타까워하던 문우들이 정읍에 시비를 세워 영혼을 위로하였다. 그의 영전에는 유족들이 찾아와 눈물로 화해하였고, 문단은 그에게 유수한 상을 주어 문학적 위업을 기렸다. 이만하면 비극적 삶을 살다간 그에게 보상은 이루어진 셈이다. 앞으로 남은 일은 그의 시적 성과를 조명하여 문학사에 등재하는 일이고, 그보다 앞서 그의 서정시를 즐겨 읽는 사태가 벌어져야 한다.

  • 문학·출판
  • 전북일보
  • 2011.08.30 23:02

"예수 믿으세요"에 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1. 운허 스님은 남양주 봉선사 회주 밀운 스님의 은사 스님이다. 하루는 독일인 목사가 운허 스님에게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하자 스님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러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상황을 지켜본 밀운 스님이 운허 스님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대답하셨습니까?" 운허 스님은 "저 목사는 예수밖에 모르지 않느냐. 당신 생각을 알겠다는 뜻으로 얘기했다"고 답했다. 밀운 스님은 "운허 스님은 남의 허물을 보지 않는 분으로 유명했다"면서 "뒤늦게 운허 스님의 뜻을 알게 됐다"고 회고했다. #2. 청주 보살사 회주 종산 스님은 젊은 시절 해인사로 가던 중 배가 고파 국숫집을 찾다가 불고기 냄새를 맡았다. 평소 계율을 지켜온 스님이었지만 그날따라 불고기 냄새가 너무 향기로워 번민에 휩싸였다. 스님은 그 자리에 서서 "만약 고기를 준다면 먹겠느냐?"라고 수차례 자문자답한 뒤에야 불고기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쏟아지는 잠도 스님을 괴롭혔다. 스님은 잠을 쫓기 위해 선방의 스님들과 이마 앞에 못을 박아 두고 수행을 했다. 졸다가 못에 찍혀서 이마에 피를 흘리는 스님을 보며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선승(禪僧)들의 가르침과 행적을 담은 '산승불회'(불광출판사)가 출간됐다. 이 책에는 남양주 봉선사 회주 밀운 스님, 청주 보살사 회주 종산 스님을 비롯해 동화사 조실 진제 스님, 봉화 금봉암 고우 스님 등 한국 불교계의 대표 선승 18명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특히 출가 후 50여 년 동안 토굴과 암자에서 수행에만 매진하며 일반 대중에 거의 모습을 안보인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의 생생한 인터뷰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책이다. 적명 스님은 '수행의 길이 멀고 고되다'고 호소하는 일반인들에게 꾸준함을 강조한다. "벽립천검(壁立千劍)이라고 했습니다. 벽에 천 개의 칼을 세워 두고 정진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둔공(鈍功)이라고 했습니다. 바보같이 공을 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가지로 바닷물을 펴내는 심정으로 공부하기 바랍니다."또 진정한 삶의 지혜도 알려준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지금의 현실은 내가 만든 것이니까 원망하지 말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미래는 지금부터 짓는 것이므로 지금 최선을 다해 기쁜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현재의 절망감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들인 상태에서 미래를 위해 끝까지 매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수행의 길이요. 삶의 지혜입니다."불교계 월간지 '불광' 취재팀장인 유철주 씨가 큰 스님들의 생생한 가르침을 책으로 엮었다. 352쪽. 1만6천원.

  • 문학·출판
  • 연합
  • 2011.08.30 23:02

한국 조각사 뒷이야기…'빌라다르와 예술가들'

1947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조소과가 신설된이후 70여 년간 그곳을 거쳐 간 사람들의 입을 통해 당시 시대상과 예술가들의 삶을들여다보는 '빌라다르와 예술가들'(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이 발간됐다. 1981년 서울대 조소과 출신 조각가들이 출범시켜 현재 회원 330여 명을 보유한 서울조각회(회장 최명룡 경북대 명예교수)가 지난해 결성 30주년을 계기로 1년간의 준비 끝에 펴냈다. '빌라다르(Villa D'Art)'는 '예술의 별장'이라는 뜻의 프랑스 어로, 1960년대 종로구 연건동의 서울대 교정에서 미대 학생들이 직접 운영했던 교내 카페의 이름이다. 그곳은 당시 예술가의 꿈을 가진 학생들이 예술과 사회, 사람에 대한 고민을 나누던 낭만의 공간이기도 했다. 서울대 미대 조소과의 첫 입학생인 백문기(46학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를 비롯해 강태성(49학번. 이화여대 명예교수), 최의순(53학번.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등 미술계 원로들과 이나라(91학번. 조각가), 이민선(04학번. 서울대 미대 석사과정) 등 젊은 세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27명의 인터뷰를 10개 장으로 엮었다. 우리 미술계의 살아있는 역사를 각 시대를 살았던 예술가들의 입을 통해 듣다보니 그간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유명 작가들의 삶과 작품에 얽힌 숨은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다. 길진섭(1907-1975.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국립미술제작소 소장 역임), 이쾌대(1913-1965. 거제 포로수용소에 구금됐다가 1953년 포로교환 당시 북한 선택), 김만형(1916-1984. 조선미술가동맹 평안북도 지부장 역임) 등 월북 작가들에 얽힌이야기도 흥미롭다. "인상파 화풍으로 유명했던 서양화가 최재덕 씨는 정말 이데올로기와는 아무 상관없이 친구 따라 월북했어요.(중략) 최재덕 씨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월북을 선택해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 없이, 맘에 안 들면 다시 돌아오면 된다는 가벼운 마음을 품고 북으로 넘어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도록 발이 묶여 버렸죠."(27쪽)지금은 작품 한 점당 수억을 호가하는 우리 미술계의 대표 작가들이 정작 생전에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안타까운 사연들도 소개된다. "권진규 씨가 생전에 얼마나 홀대를 당했냐 하면, 돈이 궁해서 전쟁 기념비 제작에 참가했더니 함께 일하던 조각가들이 '당신은 사실적인 조각은 못 하니까 얼굴엔 손도 대지 말고 군화만 만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미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분의 작품 세계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거예요. 그랬던 권진규 씨의 작품이 지금은 한 점당 1억 원이 넘죠. 참 한탄스런 얘기입니다. "(54쪽)모두 10개 장으로 구성된 책에는 서울조각회 회원 330명 전원의 작품 사진을 수록해 한국 조각예술사 70년의 흐름을 짚어볼 수 있도록 했다. 최명룡 회장은 29일 "우리 화단이 어떻게 조성돼 왔는지 직접 증언을 듣고 싶어서 20대 젊은 작가부터 80대 원로에 이르기까지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구성했다"며 "한국의 지나온 세월을 조각하는 사람, 예술가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고민한 흔적들이 담겼다"고 설명했다. 서울조각회는 오는 31일부터 다음 달 6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토포하우스에서 회원들의 작품 88점을 선보이는 제32회 정기회전을 연다. 개막 날인 31일 오후 4시 갤러리에서 출판기념회도 할 예정이다. 648쪽. 3만8천원.

  • 문학·출판
  • 연합
  • 2011.08.30 23:02

신경숙 "'엄마를…', 내게 엄마같은 작품"

넉 달간에 걸친 '해외 북투어' 행사를 마치고국내로 돌아온 소설가 신경숙(48)이 29일 "'엄마를 부탁해'는 나에게 해외 문화와 독자를 만나고 느끼게 한 엄마 같은 역할을 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신경숙 작가는 이날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해외 번역출간 기념 간담회를 열고 "작품을 쓸 계획 없이 쉬려고 지난해 9월 미국을 갔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정이 계속 생겼다"고 웃으며 이같이 말했다. '엄마를 부탁해'는 지난 4월5일 영문판이 공식 출간되면서 곧바로 큰 반응을 얻었다. 아마존닷컴 상반기 결산(Best of 2011 So Far)에서 편집자가 뽑은 베스트 10에 뽑혔고 미국에서만 8쇄가 발간되는 등 국내 소설로는 이례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남편과 함께 미국 뉴욕에서 연수한 신 작가는 지난 4월부터 북미 7개 도시와 유럽 8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독자와 만났다. '엄마를 부탁해'는 미국, 이탈리아, 이스라엘 등 28개국에 번역 판권이 판매됐고 15개국에서 출간됐다. 그는 "한국에서는 문학의 힘이 축소되고 있다고 10여 년 전부터 듣고 있는데 바깥에 나가보니 오히려 한국 문학이 힘이 있고 역동적이라는 것을 느꼈다"며 "이번책이 영문으로 출간되기 전까지는 해외 독자를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제는 국경너머에도 독자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 것이 앞으로 작품을 쓰는 데 에너지를 강하게 주리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이미 180만 부가 팔린 '엄마를 부탁해'는 내년 초 미국에서 페이버북이 다시 나올 예정이다. 또 이미 계약된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도 미국에서 출간되면 신작가의 해외 위상은 더욱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전화벨이 울리고'는 미국, 영국, 폴란드, 중국, 스페인 등 6개 나라에 판권이 팔렸고 영문판 원고는 다음 달께나올 예정이다. 이하 신 작가와의 일문일답.--국내에 돌아온 소감은.▲ 작가 생활을 한 지 27년째인데 '풍금이 있던 자리'를 낸 뒤 '엄마를 부탁해'까지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다. 근 5년간 장편소설을 쓰는 데 집중한 탓에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뉴욕으로 떠났다. 그런데 막상 '엄마를 부탁해' 영문판 출간시기와 겹치면서 예상치 못한 스케줄을 소화하게 됐다. --'엄마를 부탁해'가 많은 나라에서 번역됐다. ▲ 나는 한국어로 작품을 썼지만 번역되는 것은 그 나라로 여행 가는 것이라고생각한다. 우연히 나도 함께 여행을 하게 됐다. 뜻밖에 많은 분이 공감해줬고 예상치 못한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고 새로운 생각도 했다. 많은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자식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엄마를 부탁해' 덕분에 문화도 다르고 번역 작업이 아니었다면 만날 수 없었던 독자와 이야기하고 좋은 시간을 나눴다. '엄마를 부탁해'는 나에게 이런 것을 보고 듣고 느끼게한 엄마 같은 작품이다. 새로운 언어로 책이 나올 때마다 나는 신인이 되는 느낌이었다. 긴장되고 서툴렀다. 기차를 타고 내리고 다음 역으로 가는 그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작은 물방울이 점점 수많은 물방울이 돼 돌아오는 것을 봤다. --다른 나라 독자의 반응은.▲ 소설은 자기와 가장 가깝고 상징적인 엄마를 갑작스레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가족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족의 상실감에 공감을 많이 한 것 같았다. 엄마를 잃어버린 뒤 찾아 나선 딸, 아들, 아버지의 입장도 이해했고 뒤에 등장한 엄마가 한 말에는 한국 사람보다 더 공감한 것 같다. --기억에 남는 독자는.▲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한 남자가 북클럽 회원에게 나눠주겠다며 27권을 들고와 사인을 받기도 했다. 그분은 아내가 소설 속에서 걸음을 빨리 걷는 아버지를 가리키며 '당신 같은 사람이 나왔다'고 말해 책을 읽게 됐다고 한다. 스페인에서는 사이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저세상으로 떠나 보낸 어머니를 가슴 아파하는 독자와 만나기도 했고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엄마 생각이 난다며 운 기자도 있었다. --북 투어에서 아쉬운 점은.▲ 여러 나라를 다니다 보니 3박4일 일정이 이어졌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뭔가 이야기를 해야 할 때면 떠나야 했다. 정이 들만 하면 떠났기 때문에 소통의 중요성을 더욱 강하게 느꼈다. --현지에서 느낀 한국 문학의 위상은.▲ 한국 문학을 굉장히 신선하게 받아들였다. 한국 젊은 작가에 대한 질문도 많았고 어떤 작가의 작품을 번역하면 좋겠느냐는 질문도 받았다. 한국 문학의 서사에서 힘을 느끼는 것 같았다. 또 유럽 문학에 없던 공동체적인 감각이나 인간에 대한공감 등에서 희망을 찾는 듯했다. 유럽이나 영어권 문학에 피로감을 느끼면서 한국문학에서 희망이나 대안을 찾는 것 같았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 교수는 최근 10년 동안 좋은 한국어 텍스트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번역이 좋아져서 결실을 보는 것 같은데 앞으로도 한국 문학이 좋은 번역자를 만나서 원작이 충실히 전달되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여정이 차기작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 같나.▲노르웨이에서 만난 입양아 이야기는 언젠가는 내 작품에 나올 것이다. 그곳에서 번역자가 마중을 나왔는데 5살 때 한국에서 입양된 사람이었다. 한국어에 의지해서 서로 내 작품 이야기를 했고 마침 주제도 엄마라 기분이 묘했다. 내가 입양아의 눈치를 보며 마음이 쓰이는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그 입양아는 노르웨이의 엄마가 소설 속 엄마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며 나를 편하게 해 줬다. --작가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독자들이 지적하기도 했나.▲ 시점을 달리한 화자에 대한 질문은 공통적으로 나왔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소설 속 상황을 확대해서 묻는 경우가 있었다. 현대와 전통 또는 세대 간 단절, 물질문명의 문제점 등의 상황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향후 일정은.▲ 다음 주 호주로 가서 브리즈번 작가 페스티벌에 참석하고 다음 달 14일에는 일본에 갔다가 19일 돌아올 것이다. 그 이후에는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고 싶다. 개인 작품만 쓰며 칩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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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1.08.30 23:02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