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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진숙 수필가-하기정 ‘건너가는 마음’

한 문장, 하나의 어휘에서조차 발걸음이 쉽게 옮겨지지 않는 책이 있다. 책을 읽는 동안 사전을 통해 낯선 단어를 확인하고 작가의 생각을 탐색하느라 온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 책을 덮는 것이 아쉬워 일부러 게으름을 피우기도 한다. 작가의 섬세함과 진지함이 고스란히 담긴 책은, 저자의 마음이 나에게 건너오고 다시 누군가에게 이어 달려가려는 충분조건을 지닌 것이다. 하기정 시인의 산문집 『건너가는 마음』이 바로 그렇다. 이 책은 단번에 읽기보다는 천천히 음미하며 읽게 된다.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멈추게 되고, 그 멈춤 속에서 독자는 생각과 감정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래서 이 산문집은 바쁜 일상에서 잠시 속도를 늦추고 싶은 이 계절에 더욱 잘 어울린다. 『건너가는 마음』의 문장들은 일상의 작은 틈에서 태어난다. 귀가 예민해지는 시간에 걷는 산책에서 얻은 삶의 단상들, 빗소리를 들으며 떠오르는 사유, 어이없는 죽음 앞에서 망자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 시간을 눈으로 보게 만드는 낯선 감각들이 조용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사소해 보이는 순간들이 저자의 시선을 거치면서 삶의 본질로 확장되고,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의 결들이 사실은 삶을 지탱하는 중심임을 이 산문집은 잔잔하게 일깨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시인의 언어에 대한 감수성이다. 현실과 실현, 이별과 별리, 삼삼한 삶,반절과 절반처럼 닮은 말들 사이의 미묘한 간극을 살피게 하고, ‘불현듯’을 ‘불 켠 듯’으로 감각하는 방식은 의미 이전에 느낌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숙성과 성숙의 차이를 조심스레 구분해 내는 문장들에서, 언어를 대하는 저자의 태도가 얼마나 섬세하고 정직한지 알 수 있다. 독자는 그 세심함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작가의 철학을 공유하게 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건너감’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이 다른 마음을 향해 가닿는 과정이며, 상처로부터 조금 멀어지는 일이고, 오래 붙잡고 있던 감정을 내려놓는 연습이다. 작가는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을 과장 없이 담아냈다. 소란스럽지 않으면서 깊이가 있으며, 삶을 정직하게 바라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의 밀도를 지녔다. 작가는 주변 사물과 자연을 향한 애정이 각별하다. 집 앞 소나무에 집을 짓는 까치 부부를 응원하면서 상량문을 지어주고, 물난리를 피해 나무 둥지로 열을 지어 오르는 개미군단을 보면서 그들의 안전을 기원한다. 이처럼 이 글에는 이해하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 마음, 멀리서 지켜보며 응원하는 마음, 조용히 곁을 지키는 마음이 문장 사이에 스며 있다. 그래서 이 산문집을 읽고 나면 잠시 멈춰 서게 된다. 글 속에서 만난 온기가 독자의 마음으로 옮겨 오기 때문이다. 『건너가는 마음』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책이다. 그 다리를 건너며 독자는 내면과 마주하고, 삶의 방향을 조용히 점검하게 된다.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 남는 따뜻함을 지닌 이 책은, 마음에 그늘이 내려앉을 때 다시 펼치고 싶은 산문집이다. 책을 덮은 지금도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괜찮아, 천천히 건너가도 돼.” 이진숙 수필가는 전직 국어교사.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 당선. 최명희문학관에서 “혼불” 완독 프로그램 14년간 진행. <우리, 이제 다시 피어날 시간> 오디오북 출간.

  • 문학·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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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17 18:5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은영 동화작가-윤일호 ‘거의 다 왔어!’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일을 겪는다. 어떤 일이 닥쳐도 의연하게 맞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회오리처럼 갑작스럽게 몰아닥치는 운명 앞에서 허둥대며 살기 마련이다. 되돌아보면 비명을 지를 정도로 부끄러웠던 때가 떠오르고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아픈 순간도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오히려 힘을 주는 특별한 기억이 있다. 내게도 힘겹고 어려운 순간마다 나를 똑바로 서게 하고 견딜 힘을 주는 추억이 있다. 외할머니는 어린 내게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아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 말은 선택의 순간에 설 때마다 한 발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딸을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보낸 엄마는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 처음으로 편지를 썼다. 받침도 틀린 그 편지를 읽으며 나는 많이 울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불효했다는 자책으로 잠 못 이룬 날이 많았다. 그런데 내 꿈에 오신 아버지는 ‘괜찮다’라며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 내 일에 집중하며 열심히 살 수 있었다. 윤일호 작가가 쓴 동화 『거의 다 왔어!』 는 평생 잊지 못할 멋진 추억을 만들어가는 행복초등학교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지호는 엄마의 갑작스러운 전학 제안에 어이가 없다. 좋아하는 친구들과 헤어져야 하고 전교생이 고작 80명밖에 되지 않는 시골 학교로 가야 한다는 게 정말 싫었다. 그래도 유일하게 궁금한 것은, 엄마, 아빠가 죽고 못 사는 지리산을 종주한다는 것이다. 행복초등학교는 산악학교라는 생각이 들 만큼 산을 많이 갔다. 지호는 꼰대 어른들이 자신들이 힘들게 자랐으니 너희도 고생을 좀 하라는 것 같아 불만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가 멋있다고 느낄 만큼 변해간다. 지리산에 오니 평범한 길을 걷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논어 맹자도 아니고 뜬금없이 저절로 가르침이 생각나는지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냥 힘들게 걷다 보면 저절로 깨달음이 온다. 인간에게 경험만큼 좋은 학교는 없다. 매일 매 순간 맞닥뜨리는 위기와 절망 앞에서 직접 몸과 마음으로 깨우친 지혜는 어떤 교과서도 찾을 수 없는 최고의 스승이다. 요즘 아이에게 좋은 것만 주겠다는 일념으로 아이가 성장할 기회를 막아서는 부모들이 있다. 실패와 좌절의 고통을 배우지 못한 아이는 정글 같은 현실에서 쉽게 넘어진다. 킹콩샘과 같은 스승이 있고, 손잡아주는 선배와 한걸음 뒤에서 바라봐주는 부모님이 함께하는 지리산 길에서, 아이는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 한 번 쉬면 자꾸 쉬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 그리고 사람마다 인사를 하게 하고 먹을거리도 나누게 하는 산이 주는 상냥함을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다. 장은영 동화작가는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통일 동화 공모전, 남도의병 콘텐츠 공모전 스토리 부분 대상, 전북아동문학상과 불꽃문학상을 수상했고 아르코문학창작기금(발표지원)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광대특공대>, <역사와 문화로 보는 도시 이야기 전주>, <책 깎는 소년>, <으랏차차 조선 실록 수호대>, <열 살 사기열전을 만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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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10 19:00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영종 시인 - 황유원 시집 ‘하얀 사슴 연못’

많은 날을 올라왔습니다. 굳은 의지는 보슬보슬 날아갔습니다. 통제사 벼슬이라도 할 것 같았던 통제력도 바닥을 쳤고요. 황유원의 『하얀 사슴 연못』을 듣고 싶습니다. “세상은 소음으로 가득하다”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그래서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증폭시켜보는 길과 최대한 잠재워보는 길을 모두 가보기로” 했다고. 잠재워본 게 이 시집이라고. 음악은 소음을 줄여 적막을 늘리는 방식이겠죠. 말이 끝나는 곳에 음악이 있겠죠. 맑은 날, 땀을 벽력같이 흘려 하루에도 옷을 몇 번이나 갈아입어야 했습니다. 잠이 오지 않았지요. 이런 날은 「명동대성당」에 나오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습니다. “나는 거기 없었고/ 나는 거기 있었지만/ 내 숨소리는 아무래도 멀리서/ 들려오는 것만 같은” 음악입니다. “칸나가 잔뜩 피어나 노란 꽃머리로 통 통/ 드럼을 연주”(「리틀 드러머 보이」 부분)하면 음파는 어디로 갈까요. 언어와 리듬을 타고 뇌파로 올라오겠죠. 잔잔하게 물결치겠죠. 콩나무 잡고 거인의 구름성까지 가겠죠. 하프의 말이 들릴 때까지 잠에 들겠죠. “가슴속에 사슴 뛰는 소리 들려온다면/ 삶의 푸른 풀을 마구 뜯어내고 싶다는 뜻인데// 그렇게 사슴 다 뛰쳐나가버리고 나면// 마침내 홀로 남겨진/ 텅 빈 가슴속/ 고요”(「사슴 머리 여인숙에서」 부분). 풀을 들입다 먹은 사슴은 자러 갔습니다. 풀들이 오래전에 예약한 고요만 남았네요. 아무것도 하지 않네요. 잠잠히 살 뿐. “고요를 위해 굳이 입 닫을 필요 없음/ 고요가 숨 쉴 수 있는 공간만 마련해두면/ 고요는 그냥 찾아옴/ 벽돌을 하나씩 하나씩 차곡차곡 모아/ 서로 붙여주기만 해도”(「불광동성당」 부분). 잘 말린 야생 고요의 똥으로 벽을 쌓습니다. 빈 방에 햇살이 들어오듯 고요가 오겠지요. 편히 쉬라는 말까지 아낄 필요는 없겠지요. 「별들의 속삭임」을 “듣는 자는 시베리아 아닌 그 어디서라도/ 하늘의 입김이 얼어붙는 소리를 듣는다/ 추운 날 밖에서 누군가와 나눠 낀 이어폰에서도 별들이 얼어”. 별들은 우리에게 낮은 목소리로 늘 무언가를 들려줍니다. 우주가 진공 상태라 들리지 않을 뿐이죠. 그런데 그 귓속말을 들을 수 있는 길이 있죠. 이어폰으로 추위를 나눈다면, 별들의 귀엣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상대의 아픔에 귀 기울여 보세요. 서로의 슬픔에 등을 기대 보세요. 함께 눈을 맞으며 호숫가를 걸어 보세요. 그러면 별들이 큰고니 날아오는 호수에 큰 고요를 뿌려 줄 겁니다. “잠시 서로의 말이 드러낸 단단한/ 등뼈를 쓰다듬으며/ 우리가 헛것임을 잊을 수 있다”(「언중유골」 부분). 뼈가 있는 말은 쉼표와 같습니다. 그걸 가볍게 쓸어보며 우리가 이 땅에 온 작은 이유를 어루만질 수 있을 테니까요. 느렸지만 역마다 서고 정차 시간도 길었던 기차가 비둘기호였어요. 내려서 가락국수를 후후 불며 먹었어요. 속이 든든하게 차고 쉼표가 찍혔죠. 긴 4형식 문장을 끌고 온 기차에 올라 먼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얻었어요. 이영종 시인은 2012년에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아르코 문학창작기금에 선정되어 2023년에 첫 시집 <오늘의 눈사람이 반짝였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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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2.03 18:47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작가- 징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가끔 아프리카 기아 문제나 우리나라에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자는 광고를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그 마음 한편에는 문제 해결을 강요하고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묵시적인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 말로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대신하며 살아왔다. 가난의 책임을 개인의 능력 부족이나 개인사로 치부하면서 그들이 처한 냉혹한 현실을 외면해 왔던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다. 유엔 식량 특별조사관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이 질문에 대해 답을 들려주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가 제기한 문제는 오늘날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실제 통계 자료와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를 자기 아이에게 들려주는 식으로 편안하게 서술한다. 덕분에 독자들은 보고서나 통계자료의 딱딱함을 넘어서 사실에 기초하여 냉혹한 현실을 느긋하게 직시할 수 있다. 나아가 그의 생각에 충분히 공감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를 누릴 수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서 다룬 저자의 시각과 문제 인식은 오늘날에도 명확하다. 여전히 가난과 질병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힘들게 하며 우리 삶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이 책의 또 다른 강점은 ‘기아’라는 사건을 둘러싸고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따라 나오는 사회, 정치, 인간의 욕망까지 한꺼번에 조망하는 것이다. 현장 전문가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 다각적으로 검토할 수 있기에 더 신뢰가 가는 책이기도 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하나의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 문제가 발생하기까지는 여러 종류의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다. 대개의 경우 이 과정에서 이권 개입과 힘의 논리가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힘을 앞세운 가진 자들의 논리 앞에 인권과 정의는 유린되고 설 자리를 잃는다. 이런 구조적 어려움 속에서도 개인의 노력으로 희망을 만들어 낸 사례가 있다. 영화 <바람을 길들인 소년 (The Boy Who Harnessed the Wind>이 그 대표적 예다. 당장 한 끼도 먹을 형편이 안 되는 집안 상황에서 아이가 학교에 가는 것은 사치였다. 당연히 아이는 수업료 때문에 쫓겨날 위기에 처하고,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도서관 책을 마중물 삼아 메마른 대지를 적실 수 있는 수차를 개발한다. 영화는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기에 더 깊은 감동을 준다. 오늘도 지구편 한쪽에서는 음식물이 넘쳐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음식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다. 누군가는 최고급 식당을 순회하면서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에 취하고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허기진 배를 채워줄 음식 한 조각과 깨끗한 물이 없어 질병에 신음해야 한다. 가을 단풍이 머지않았다. 이제 헐벗고 주린 이들에게는 길고 긴 겨울이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선다. 눈앞의 문제도 처리하기 버거운 형편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지구 반절의 인구를 책임질 여력은 없다. 지금 당장 세계를 바꾼다거나 누군가를 책임질 수 없지만 아마도 얼마쯤은 할 일이 남아 있을 것이다. 장창영 작가는 전주 출신으로 20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불교신문·서울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돼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사업과 전주도서관 출판제작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시집으로 <동백, 몸이 열릴 때>, <우리 다시 갈 수 있을까>, <여행을 꺼내 읽다>, <나무의 속살을 읽다>가 있으며 인문서로 <나무의 문을 열다>, <디지털문화와 문학교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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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26 18:2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기우 극작가-정양 ‘헛디디며 헛짚으며’

아닌 것은 아니라고 귀싸대기 올려붙일 줄 아는 시인의 눈 부라림이 생생한 시집이다. 시인은 헛딛고 헛짚으며 살아온 한국 사회의 맹점을 예전 교육 현장에서 꺼낸다. 귀싸대기를 때리고 싶지만, 맞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 시집에는 “머리통에 어깻죽지에/ 뭉치자 삼천만, 깨뜨리자 삼팔선/ 그런 종이 띠를 두르고/ 양팔간격으로 늘어선” 1940년대 국민(초등)학생들이 있고, 양팔간격 사이로 “줄 틀리는 아이들을 단속”(「깨뜨리자 삼팔선」)하는 선생님들이 있다. 수업 시간에 “출입문 드드륵 밀고 들이닥쳐/ 머리 긴 아이들 머리통에 한 줄씩/ 드르륵 드르륵 신작로를 내놓고” 나가는 1950년대 바리깡 훈육부 선생님이 있고, “그렇게 길들기가 죽어라 싫어/ 일주일 넘게 신작로를 그대로 이고 다닌”(「신작로」) 학생도 있다. 시인은 이 시절을 “황량했다”라고 표현한다. 바르지 못한 시대의 바르지 못한 일들. 철썩철썩, 학생들의 뺨을 갈기는 선생은 1990년대까지 꽤 많았다. 반세기가 지났어도 진저리 쳐지는 그 순간순간은 애잔한 그리움이자 씁쓸함이며, 여전한 통증이자 참담함이다. 시인이 기억하는 두 선생님이 있다. 정작 이름 석 자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그의 귀를 번쩍 열리게 했고, 지그시 입술까지 깨물게 했다. “원래 건달이었는데 이사장 친척이라서/ 자격증도 없이 체육선생이 되었다고들’ 했던 ‘별명이 무식이었던 체육선생님”은 농구공·배구공·축구공을 던져주고 알아서 편 짜고 놀다가 끝나면 공만 체육실로 가져오라 시키고 당당하게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은 자신의 수업 시간에 소지품 검사를 하겠다고 들이닥친 훈육부 선생들에게 “왜정 때 배운 대로만 풀어먹을라고 저 지랄들을 해댄다.”(「잃어버린 이름」) 라고 쌍욕 하며 막아서기도 했다. 분필 하나 달랑 들고 교실에 들어오는 “왔다리갔다리 시계불알 화학선생님”은 출석도 안 부르고 차렷 경례 끝나면 곧바로 노트도 책도 없이 고개를 한 번씩 좌우로 저으며 수업 내용을 칠판에 빼곡하게 적었다. 아이들이 책상을 두드리거나 발을 구르거나 말거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시험 답안지에 모두 ‘×’를 친 시인에게 “이 세상에는 옳은 일보다 그른 일이 많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제대로 채점하면 60점인데 기분 좋아서 100점”(「화학선생님」)이라고 말하던 선생님이었다. 옳은 일보다 그른 일이 많아지는 세상에서 두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시인을 성장하게 한 밑거름이었을 것이다. 정양(1942∼2025) 시인은 다른 시인들과 달리 “발표한 작품이라도 고칠 데가 있으면 고쳐야 한다.”라고 말했다. 시대도 사람도 변하니 지나간 것을 보면 당연히 고칠 게 많다는 것이며, “눈 감기 전까지는 자기가 쓴 시를 고치는 것이 시인의 의무”라는 믿음이다. 시집에 실린 시도 다시 고쳐 내듯 시인은 묵히고 삭힌 기억을 또렷하게 살려냈다. 그 아득한 기억은 어둡고 답답한 굴레에서 벗어나 소소한 것을 위대하게 하고, 비루한 것을 장엄하게 했다. 후배들 곁에서 시대와 ‘맞짱 뜨는 법’을 조금 더 알려주셨으면 좋았으련만. 오늘도 우리는 『헛디디며 헛짚으며』(모악·2016)를 읽으며 귀싸대기 때릴 순간을 기어이 기다린다. 최기우 극작가는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했다. 희곡집 『상봉』,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은행나무꽃』, 『달릉개』, 『이름을 부르는 시간』, 어린이희곡 『뽕뽕뽕 방귀쟁이 뽕 함마니』, 『노잣돈 갚기 프로젝트』, 『쿵푸 아니고 똥푸』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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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19 18:5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문신 시인 - 김도수 시집 ‘진뫼 오리길’

당신,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고개를 끄덕인다면 기억의 힘도 인정할 것이다. 우리 영혼은 기억의 힘으로 살아가고, 빛나는 기억일수록 영혼을 맑게 드러내는 법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자기 기억으로 빛나는 영혼을 여럿 만났다. 그중에는 김도수 시인도 있다. 그의 시집 <진뫼 오리길>을 읽고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오롯이 기억의 힘으로 빛나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우리 영혼은 모든 기억을 한 편의 시처럼 간직한다는 사실을. 김도수 시인의 시집을 펼치면 먼저 「물수제비」라는 시가 나온다. 그 시에서 나는 “새벽까지//명치끝에//잔물결만//출렁출렁”이라는 구절을 남달리 좋아한다. 잔잔한 물결 위로 날려 보낸 납작한 돌멩이가 통통통 튀는 느낌이 좋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명치끝”이라는 말과 “잔물결”이라는 말을 남몰래 어루만지곤 한다. 그 말에는 삶을 향한 진심이 있고, 매 순간을 간절하게 살아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잔여가 배어 있다. 잔여라는 말이 낯설다면 여운이라는 말도 좋겠다. 지나갔지만 아직 남아 있는 어떤 것. 그러니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 같은 것. 시는 그 실낱같은 희망을 고르고 골라 엮은 영혼의 심장 같은 거다. 이런 시도 인상적이다. “세상 올곧게 살려거든/삼시 세끼 밥 먹듯이/강물에 얼굴 비춰보며/물색 있게 살 일이다” 「물색없이」라는 시의 부분인데, 나는 이 시를 읽고 ‘물색’이라는 말의 의미를 찾아보았다. ‘어떤 기준을 가지고 찾거나 고르는 일’이라는 심심한 대답을 읽고 실망했다. 그래서 나름으로 물색이라는 말을 이렇게 고쳐 생각해 보았다. 물색이란 사물 각각의 고유한 빛깔을 찾아주는 일이라고. 그렇게 본다면 세상 올곧게 사는 일이란 우리가 만나고 마주하는 존재의 고유한 색채를 읽어내는 일이 아닐까? 이번에는 시 한 편을 오롯이 읽어보자. 허기진 배가 쑥 들어간 달이/배고픈 지상의 뭇 생명들/홀쭉한 배 위에 올려놓고/밤새 잠이 들었다 「초승달」이라는 이 시는 초승달만큼이나 간결하고 짧다. 하지만 보름달보다 크고 환하고 풍요롭다. “허기진 배”가 품고 있는 “뭇 생명들”을 상상해 보라. 뭔가 아릿한 게 명치끝에서 꿈틀거린다면 이 시를 절반만 감상한 셈이다. 척박한 대지에서도 생명은 자란다. 초승달은 “배고픈” “생명들”을 품고 “잠이 들”지만,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면 어느새 세상 무엇보다 크고 둥근 생명이 된다. 그러므로 이 시는 부모가 자식을 기르고, 농사꾼이 모종을 키우는 일의 정확한 은유다. 그리고 이 시는 시인 김도수가 시심을 일구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내가 알기로 시는 시인이 세상 허기진 것들을 밤새 품어 생명을 부여한 것들이다. 따라서 시에는 영혼이 있고, 그 영혼마다 시인의 기억들이 물색 있게 자리한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 시구를 마저 읽어야 한다. “등 따숩게 햇볕 내리쬐는 날/그대가 업고 강을 건너온 슬픔이/세상 길 끝을 걸어갈 때”(「강을 건너온 슬픔」) 그가 남긴 잔여의 발자국을 떠올려 보라. 우리도 저마다의 슬픔을 업고 세상 길 끝으로 나서야 하는 건 아닐까? 김도수 시인의 시집 <진뫼 오리길>은 그런 물음을 던진다. 그에 응답하듯 우리 영혼의 기억들이 슬픔의 윤슬로 반짝거린다. 이것이 김도수 시인의 시집을 거듭 읽고 난 잔여다. 문신 작가는 2004년 전북일보와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죄를 짓고 싶은 저녁>, 동시집 <바람이 눈을 빛내고 있었어>, 평론집 <서로의 표정이라서>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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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12 18:2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근혜 아동문학가, 이경옥 ‘진짜 가족 맞아요’

이경옥 아동문학가의 신간 『진짜 가족 맞아요』(보라빛소어린이)가 출간됐다.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는 어린이 문학에서 간과했던 인간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주로 다룬다. 이번 작품도 한국안데르센상 최우수상 수상작답게 가족의 다양성을 보여주면서 어린이의 내면을 다정하고 섬세하게 다루었다. 『진짜 가족 맞아요』 주인공 박다영은 엄마의 재혼으로 뜻하지 않은 사람들과 가족으로 묶인다. 자기와 엄마만 빼고 모두 문 씨인 집에서 다영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한 모습이다. 그런 박다영과 달리 또래인 문진호는 새엄마와 다영에게 지나치게 다정하다. 문진호에게 새 가족은 삶의 활기요 돌아가신 엄마의 빈자리에 핀 소담한 꽃 무더기다. 반대로 오빠 문윤호는 어딘가 어둡다. 다영이는 오빠가 엄마와 자기를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 단정 짓는다. 새아빠도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박다영은 성을 ‘문’으로 바꾸자는 엄마 제안을 거절한다. 성을 바꾸면 친아빠와 멀어질 것만 같다. 엄마는 다영의 마음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 성을 바꾼다고 해서 끈끈한 가족애가 마법처럼 생기는 건 아니기에. “가족이 많아졌다는 건 사랑할 사람이 많아진 거라고 수없이 마법을 걸었다. 그래도 아이들의 눈빛을 보면 마음먹은 대로 잘되지 않았다. <중략> 사실은 정말 궁금하게 아니라 남의 약점을 끄집어내려고 하는 속마음을 다 아니까.” 박다영은 공개 입양을 당당하게 말하는 최강나라처럼 친구들 앞에서 재혼 가정의 아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그게 흠이 될 것만 같다. 절친인 설지혜조차 이상한 가족이라는데 남들은 오죽할까. 설지혜처럼 우리 또한 ‘평범하다’의 반대말을 ‘이상하다’로 치환할 때가 있다. 심지어 그런 판단을 타인에게 주입한다. 이는 삶의 다양성을 해치고 상호 간의 공존을 무너뜨리는 섣부른 태도가 아닐까. 다행히 박다영은 설지혜가 말한 이상한 가족의 노력으로 그들과 단단한 결속력을 갖는다. 계기는 고장 난 자전거다. 자전거를 타다 넘어진 박다영을 일으켜 준 건 살갑지 않았던 오빠 문윤호였다. 그날 처음으로 오빠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다영은 오빠를 대한 오해를 푼다. 병적으로 수다스럽고 식탐 많은 문진호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 또한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뀐다. 불편함을 무릎 쓰고 친아빠를 초대해 가영이의 달리기를 함께 응원한 새아빠 역시 다영이가 새로운 가족에게 스며들도록 만든 힘이었다. “가족이 많아진 건 사랑할 사람이 많아졌다는 엄마 말이 맞았다. 모두 내 가슴에 스며들어 각각의 무늬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들의 무늬는 점점 커지고 깊어지고 있다.” 박다영은 박다영이다. 그렇다고 문다영이 아닌 게 아니다. 박다영과 문다영 사이를 오가며 다영이는 자기 정체성을 찾아 부단히 성장해 나갈 것이다. 세상 모든 가족은 똑같은 무늬를 하지 않는다. 똑같은 빛깔일 수도 없다. 함께한 시간이 많다고 진정한 가족인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모두가 각각의 이유로 특별하다는 거다. 고로 이상한 가족은 없다. 각각의 무늬와 빛깔로 자기 가족만의 특별함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오늘 우리 가족은 어떤 빛깔과 무늬를 지녔는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면 좋겠다. 김근혜 아동문학가는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전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장편동화 <제롬랜드의 비밀>, <나는 나야!>, <봉주르요리교실 실종사건>, <다짜고짜 맹탐정>, <베프 떼어 내기 프로젝트>, <들개들의 숲>, 청소년 소설<유령이 된 소년>, <너의 여름이 되어 줄게>(공저), 오디오북<날아라 자전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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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1.05 18:2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영주 작가-신시아 라일런트, '그리운 메이 아줌마'

『그리운 메이 아줌마』로 뉴베리상과 보스턴 글로브 혼북 상을 수상하고, 스쿨 라이브러리 저널이 ‘올해의 최고 우수작’으로 선정된 작품성이 높은 작품이다. 잘 짜진 구성과 절제된 문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메이와 오브는 여섯 살 어린 서머를 보자마자 ‘우리 저 아이를 데려가요.’ 말할 만큼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그들은 낡은 트레일러에서 끊을 수 없는 가족이 된다. 수많은 바람개비로 가득한 그곳은 사랑받을 수 있으리라 서머를 믿게 한다. “천국에 대한 아저씨의 생각을 표현한 바람개비도 있었는데 언제라도 거기에서 천사들이 떨어져 나와 금빛으로 빛나며 유유히 트레일러 안을 날아다닐 것만 같았다. (중략) ’메이”라는 바람개비도 있었는데, 다른 바람개비보다 작은 날개들이 많고 모두 순백색이었다.’ 이 집 저 집 전전하며 다녔던 서머. 분명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빗겨주고 존슨즈 베이비 로션을 골고루 발라주며 밤새도록 안고 또 안아주었을 엄마가 있었을 것이란 믿음으로 버텼다. 메이와 오브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메이가 밭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을 때 서머는 슬픔을 느낄 겨를조차 없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오브마저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컸다. 메이를 분명히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집중하는 오브는 서머를 더 옭아맸다. 반짝이는 과자봉지부터 온갖 것을 수집하는 클리터스의 등장은 메이를 만나리라는 오브의 믿음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클리터스가 물에 빠져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연은 오브를 더 간절하게 했다. 급기야는 영혼을 만나게 해준다는 심령 목사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목사를 찾았을 때는 이미 죽은 뒤였다. 서머는 절망할 오브 생각에 모든 것을 멈추게 했다. 의외로 오브는 돌아가던 차 방향을 클리터스가 기대하는 주의회 의사당으로 향할 때 서머는 무기력했다. 낡은 트레일러로 돌아온 오브는 메이가 생전에 가꾸던 밭에 바람개비를 모두 걸어둔다. “큰 바람이 쏴아 불어와 모든 것을 자유롭게 날려 보내 주었다.” 는 해방을 상징했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강한 상실의 트라우마는 서머의 감정을 일찍이 제한시켰다. 메이와 오브와 가족이 된 것은 축복이기도 했지만 언제 없어질지 모를 두려움이었다. 메이의 죽음은 가족에 대한 간절함을 반 토막 냈다. 서머는 마음 놓고 메이 아줌마를 그리워할 수도, 모두 내려놓고 울 수조차 없게 만든다. 또다시 겪는 결핍은 서머를 보이지 않게 억눌렀다. 심령목사를 만나러 갔다 돌아오는 하루는 어느 시간보다 길었으며 정지되었다. 기억에도 없는 시간 속에서 엄마가 발라줬을 거라 믿는 베이비 로션은 극한 고독을 상징한다. 드리웠다 금방 사라질 연기보다 가볍다. 하지만 서머의 조였던 숨통을 트이게 한 건 밖으로 나온 바람개비다. 메이와 영원히 함께 할 거란 믿음을 상징한다. 『그리운 메이 아줌마』는 간결하지만 매 순간 극적이다. 서머의 상실과 결핍, 치유의 과정은 읽는 동안 숨죽이게 한다. 작가의 절제된 서술은 깊이를 더하게 하는 백미다. 김영주 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됐다. 2018년 동양일보 동화부문 신인문학상 수상했으며, 2020년 장편동화 『레오와 레오 신부』 출간. 2021년 청소년 소설 『가족이 되다』출간했다. 이후 2023년 수필 오디오북 『구멍 난 영주 씨의 알바 보고서』와 『너의 여름이 되어줄게』5人앤솔러지 청소년소설 출간. 『크리스마스에 온 선물』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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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29 18:00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정숙인 작가-'나에게 새로운 언어가 생겼습니다'

◦선택하지 않은 것들 때때로, 세상의 어법이 해독되지 않을 때가 있다. 내가 접하는 상황이나 기분 때문인지, 권력적 구조 때문인지 경계가 모호할 때 그렇다. 그럴 때면 이 세계가 너무 거대하고 무거워서 막막하다 느껴진다. 세상의 모든 언어가 가진 자의 것이라면, 약하고 소수인 누군가는 무엇으로 말하고 버텨야 하나. 어떻게 나를 표현하고 주장할 수 있을까. 먹고 싶은 반찬이 무엇인지 묻지 않기 때문에 선택할 수도 없다. 머리카락을 기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짧은 머리의 미소년이 되어야 했다는 깨달음도 얻는다. 삶에 선택되었을 뿐 그녀는 장애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현실을 인식하는 나날을 살아왔다. 그녀, 누구도 장애를 선택하지 않았다. 시설 안에서의 장애인은, 다수의 중증장애인을 사회복지사 1인이 지원하는 구조 때문에, 개인이 불편해야 다수가 편하다는 암묵적 수용을 한다. 그렇게 불편함을 견딘다. 억압과 해방을 주는, 몸과 맘을 이루는 나의 물질로 이루어지는 세계에서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장애는 삶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 생(生)의 전부라서 나의 모든 것을 옭아매고 만다. 몸과 마음이 불편한 상황일 때는 사람과의 관계나 일상이 모두 예민해진다. 현재의 장애가 감기처럼 지나가지 않는다면, 평생 그 예민함 속에 살 수밖에 없다. ◦‘온전한 나’라서 『나에게 새로운 언어가 생겼습니다』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남의 문제’로 여기는 ‘나의 문제’이며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와 태도에 대해 다시금 성찰하게 만드는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이다. 임은주, 국화, 미숙, 차지숙, 이지숙, 정아, 최송아, 모두 일곱 명의 그녀가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나와 너의 기록으로 완성한 손바닥 에세이다. ‘가족의 선택으로 시설에서 오랜 시간을 살아’오거나 할머니와 살아온 시간이 더 많던 그녀. ‘늘 남의 시선이 먼저’ 보였던, ‘민폐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그녀. ‘온전한 나’로 살고 싶은 마음이 담긴 솔직한 이야기는 ‘일곱 개의 새로운 언어’로 드러난다. 인생이란 스스로 ‘밀어야만 열리는 문’이라는 성장기를 완성해 냈다. 한때 좌절했으나 절대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타인의 장애나 고통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의 말은 일회성 위로일 뿐일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나를 속이며 스스로 ‘나의 분석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그녀.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의 간절함이 더해져서 어떤 장애, 역경에도 정직하게, 현상을 돌파하는 지혜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는 답을 얻기까지 그녀들은, 참 얼마나 아팠을까. 거울을 보고 조심조심 발라도 지멋대로 발라지는 게 장애 때문이라던 생각을, ‘원래 내 생김새’라며 자신에게 ‘예쁘다, 귀하다’ 말을 건네는 그녀. 늘 글을 배우고 싶었지만, 손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포기하던 그녀가 남편에게 투정을 부리는,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 그녀. 결혼과 이혼, ‘평화로운 하루를 좀 더 빨리 갖지 못한 것’을 꼽는 그녀의 마음을 따라갈 때 우리도 함께 안타까워지고. 그런 그녀가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활동가이자 인권 강사이며 상담가인 다니엘을 만나며 ‘누군가가 나로 인해 행복해지는’ 꿈을 다시 꿀 때는 우리도 그녀와 함께 행복해진다. 내가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지 않을 때 그가 잃어버린 오늘은, 우리의 내일로 온다. 나와 다른 누군가의 절망이 아니라 나의 절망이고, 너의 절망인 채로 두어서는 안 된다. ‘타인의 시선이 곧 나의 시선’이므로, ‘그들의 시선을 판단하는 것은, 내 시선’이므로 ‘편견의 족쇄를 푸는 열쇠는 내 눈에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한다. 정숙인 작가는 2017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백팩'으로 등단했다. 작품으로는 몇 편의 단편소설과 채록집 <아무도 오지 않을 곳이라는, 개복동에서>(2017)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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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22 18:3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아현 소설가 – 에이미 탄 '뒷마당 탐조클럽'

지난 겨울, 모두가 그랬겠지만 마찬가지로 고달픈 연말을 보내느라 진이 빠졌다. 목표로 한 일은 죄 실패했고, 일거리도 없었고, 좋은 뉴스도 들리지 않았다. 무기력에 몸이 처졌고, 지하로 굴을 팔 것 같았다. 이런 때를 종종 겪으면 나름의 예방책을 찾게 된다. 제일 먼저 할 일은 움직일 것. 겨우 신발을 고쳐 신고 무작정 도서관에 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에너지는 자주 바닥을 쳤다. 움직이기까지는 힘을 낼 수 있지만, 사람을 만나기는 어려운 정도로. 그때쯤 새로운 즐거움을 얻었다. 옷을 아주 두껍게 껴입고서 도서관을 가다 말고 천변 벤치에 앉아서 온갖 새들이 오가는 걸 지켜봤다. 운이 좋은 날은 잠시 들른 수달을 볼 수도 있었다. 발끝이 얼고, 코가 차가워지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다시 도서관을 향해 걸었다. 가상에 살얼음이 낀 물 위를 오가면서 정신없이 먹이를 찾는 오리를 보고 있자면 나도 덩달아 마음이 바빠진 탓이었다. 그 뒤로는 생물 도감과 검색을 통해 새들의 이름을 익혔다. 그저 새라고만 불리던 조류들은 차츰 이름을 되찾았다. 백로, 청둥오리, 물까치, 까치, 왜가리, 멧비둘기. 오늘 보이는 오리 가족이 어제 있던 오리 가족인지 추측하며 들여다보는 재미로 무기력한 시간을 잘 견뎠다. 그 겨울에는 알게 모르게 나를 돌본 주변 사람들이 있었고, 관심을 끌어준 새가 있었다. 날이 풀리고, 좋은 뉴스가 들리고, 일이 바빠지면서 겨울의 탐조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 들른 도서관의 신간 코너에서 그냥 지나치기 힘든 책을 만났다. 이름하여 '뒷마당 탐조클럽'. 정말이지 반가운 제목이 아닐 수 없었다. 책을 열고 서문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아주 흥미로운 탐조 클럽에 가입하게 됐다. 막연한 즐거움이 새로운 취미로 발돋움하는 순간이었다. “이 클럽을 통해 새들이 먹이를 찾고, 터전을 지키며, 짝을 찾고, 새끼를 기르는 모습을 조금 더 깊고 오래 바라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혹시 마음이 움직이신다면, 그림을 그리는 일에 도전해 보거나, 매일 한 마리의 특별한 새를 찾아보는 즐거움에 빠져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중략) 결국 이 클럽이 지향하는 바는, 야생 새들과 이어진 작은 인연 속에서 인간으로서 의미를 되새기며, 삶을 더욱 깊고 충만하게 살아가는 데에 있습니다.” (7쪽) 책을 덮으며 지난 겨울을 다시 떠올렸다. 철저히 도서관을 향하는 산책과 그 길을 둘러싼 생명을 중심으로. 새들을 관찰하고 그 곁에 식물과 다른 생물들을 관찰하면서 안부를 묻던 일이 퍽 즐거웠던 것이 떠올랐다. 다 함께 아름다운 스케치가 곁들여진 이 탐조의 기록을 보자. 그리고 노트와 펜을 들고 나가자. 집 근처에, 마당에, 천변에 자주 등장하는 새를 찾아보자. 그러다가 생각나는 이가 있으면 안부를 묻자. 분주하게 자신의 생을 이어가는 새들을 보며 따라 해보자. 그러다 우리가 자연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감각해보자.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힘을 낼 수 있게 한다. 지난했던 지난겨울을 다 함께 견딘 것처럼. 최아현 소설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아침대화>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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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10.15 18:3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경옥 동화작가-김근혜'들개들의 숲'

인간은 늘 더 나은 내일을 꿈꾼다. 그래서 오늘의 고단함을 딛고 이상향을 향해, 현재를 담보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보다 나은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토피아를 그리며 순간의 행복을 내일로, 모레로, 그다음으로 미룬다. 이러한 세상을 꿈꾸는 게 인간만은 아니다. 얼마 전, 출간한 김근혜 작가의 『들개들의 숲』에서는 인간의 품을 떠난 개들과 고양이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인간들에 의해 유기되었지만, 인간의 삶과 멀어지면서 그들만의 자유를 찾아 떠난다. ‘섬숲’이라는 소문 속 낙원을 향한 여정은 단순한 모험이 아니다. 그것은 생존, 연대, 책임에 대한 고백이며 우리 내면의 유토피아에 대한 질문이다. 『들개들의 숲』은 유기견 ‘라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라도는 자신의 주인이 감당하지 못하고 버려지지만, 거리에서 만난 늙은 개 ‘할매’의 마지막 유언을 믿는다. 인간의 폭력도 없고, 먹이 걱정도 없는 평화로운 곳, ‘섬숲’에 대한 이야기였다. 라도는 우연히 만난 길고양이 보리, 유기견 코털과 함께 섬숲으로 향한다. 이들이 섬숲 가까이 가면서 낙원에 대한 부푼 마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 있다. ‘섬숲에서 향긋한 냄새가 불어왔다. 텁텁했던 목과 잔뜩 엉킨 실타래 같던 머리를 상쾌하게 해주었다.’라면서 노래를 부른다. (p19) 하지만, 섬숲이 소문처럼 꿈꿔왔던 낙원이 아니라는 걸 도착하자마자 깨닫는다. 먹이가 부족하고, 생존의 위협을 받고, 개장수와 개 공장, 섬의 무차별적 개발 등 인간의 욕망이 만든 그림자들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라도 일행은 섬숲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친구들을 구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잃기도 하면서 ‘유토피아’라는 허상과 현실 사이에서 스스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걸 배우게 된다. ‘섬숲’이라는 공간은 희망과 자유의 상징이지만, 그곳 역시 생존을 위해서는 수많은 갈등과 먹이 쟁탈전이 일어난다. 결국 낙원이라는 것도 누군가의 희생이나 상실 위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작품 곳곳에서는 유기 동물에 대한 연민만이 아니라 돌봄과 책임, 인간과의 연관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시한다. 라도와 보리, 코털의 우정은 단순한 동료애를 넘어 고통을 함께 나누는 연대를 보여준다. 인간의 보호 아래 있던 존재들이 버림받고, 때로는 인간이 만든 애견 상점과 개 공장에 갇히면서도 서로를 구하고 함께 일어서는 모습은 따뜻하게 다가온다. 작가는 생명을 소유하거나 소비의 대상으로만 다루는 태도를 비판하면서 존재의 존엄성과 자율, 그리고 인간이 가져야 할 책임도 묻는다. 더불어 은유와 상징, 섬세한 감정의 흐름을 통해 이야기를 마치 사회 소설처럼 풀어놨다. 라도의 두려움, 친구들의 생존 투쟁, 엄마를 찾는 보리의 슬픔이 단순한 감성으로 그치지 않고, 현실의 부조리와 자기 존재의 의미를 고민하게 만든다. 결국 동물들의 지상낙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토피아는 일정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관계의 방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지금, 이곳 속에 낙원은 숨어 있다. 『들개들의 숲』에서는 인간들의 불편한 거울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내내 지상낙원이라는 ‘섬숲’보다 현실의 무게와 희망을 놓지 않는 용기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이경옥 동화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두번 째 짝>으로 등단했다. 이후 2019년 우수출판제작지원사업과 지난해 한국예술위원회 ‘문학나눔’에 선정됐으며, 2024년 안데르센상 창작동화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의 저서로는 <달려라, 달구!>, <집고양이 꼭지의 우연한 외출>, <진짜 가족 맞아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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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24 18:45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오은숙 소설가-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한 세상에서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겠다던,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내 고장 시인이 있었다. 그는 시의 이슬에 튄 몇 방울의 피를 훈장 삼아 문학을 길러냈다. 스물몇 해였던가. 그 마음을 닮겠다고 다짐하였으나 내가 마주한 것은 언제나 늪이었다. 이제 와 돌아보니, ‘자기 위안’만 남는 한계였다. 이럴 때 환기(喚起)의 시간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른 시기에, 내 고장을 거쳐간 수인이 있었다. 전주교도소에 머물며 “녹두장군의 농민군이 전주성을 공략할 때 넘었다던 완산칠봉”을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았다던 실천가이자 사상가. 1968년, 스물네 살에 강단에 선 신영복 선생은 어떤 이유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해 겨울, 선생은 ‘빙광’에서 희망을 찾았다. 빙광은 얼음에 비친 빛이 공중으로 반사되는 현상이다. 기온이 일정 온도 이하로 내려가야만 자기 숨결로 만들어진, 벽에 달라붙은 성에에 비친 빛을 볼 수 있다. “빙광이 날카로워지면서 파릇한 빛마저 내뿜는 때를 가장 좋아한다”고 선생은 말했다. 선생은 혹한이 주는 고통조차 진실을 마주하는 창으로 여겼다. 날이 풀려 자기 입김이 만들어낸 성에가 “느릿느릿 벽을 타고 기어내리”는 것을 보면 공포스럽다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첫 장에서 고백한다. 염치없는 ‘자기 위안’이 만연한 시대에 물리적 한계를 넘어 실천적 의지가 만들어내는 용기와 통찰을 느낀다. 진실을 마주하는 자에게 따라다니는 한없이 깊은 사유를 본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이 평범한 능력이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이다. 따라서 문화는 이러한 능력을 계발하여야 하며, 문명은 이를 손상함이 없어야 한다.” ‘사랑은 경작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선생은 인간에게서 희망 찾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책을 읽다 보면, 수감자라는 이유가 학문에 대한 열정을 식게 만들 수 없음을 발견한다. 감옥 안에서 서예와 독서를 이어가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쇠창살 안에 갇힌 몸이지만 부모, 형제는 물론이고 형수나 계수, 조카와의 소통을 소홀하지 않은 것 또한 페이지 마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청구회 추억」에서는 아이들과 함께 키워 간 선생의 한없는 인본주의의 극치를 엿본다. 인공지능이 사람의 정서를 대변하는 시대에도 오롯이 느껴질 키득거림과 들뜸, 애잔함이 뒤엉킨 장면에서 느껴지는 선생의 정신은 오히려 더욱 드높다. “기쁨과 마찬가지로 슬픔도 사람을 키운다는 쉬운 이치를 생활의 골목골목마다에서 확인하면서 여름 나무처럼 언제나 크는 사람을 배우려 합니다.” 슬픔 또한 선생을 좌절시키지 못한다. 극한의 추위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 주체로 남고자 했던 선생에게 어찌해도 지지 않는 의지를 배운다. 세속적⸳물리적 공간에 매인 선생의 환기는 빙광을 통한 무한한 우주로의 사유 확장이었다.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던 내 고장 시인과 달리, 선생은 숙고의 시간을 거쳐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새로이 쓰고자 했다. ‘자기 위안’ 대신 날마다 새로운 성좌를 키웠다. 어떤 이에게 희망은 오래된 고성에서나 피어나는 작은 풀, 납작 찌그러진 채 구르는 페트병 같다. 허리를 숙여야만 겨우 닿는다. 선생이 찾은 혹한의 빙광처럼 절박한 환기다. 그것은 냉철한 예지의 날을 세워 선생의 글을 마음에 새기는 용기다. 머리맡에 두고 날마다 실천적 의지를 다지는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오은숙 소설가는 202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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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17 18:1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황보윤 소설가 – 서귀옥 '우주를 따돌릴 것처럼 혼잣말'

올봄 서귀옥 시인의 첫 시집이 출간되었다. 2012년 ‘김유정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으니, 무려 13년 만에 선보인 시집이다. 소설책만큼이나 두툼한 시집을 펼쳐 들고 우선 목차부터 훑었다. 쉰여섯 편의 시가 들어있었다. 손가락을 꼽으며 수치로 환산해 보았다. 한 해에 4편씩 쓴 셈이었다. 적어도 너무 적은 과작(寡作)이었다. 한 편 한 편 음미하며 읽다 보니 ‘분홍꽃댕강’처럼 무수히 구겨진 종이의 잔해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것은 시의 탑(塔)이었고,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쓰디쓴 쇄신의 맛’(「리프레시」)이었다. 시인의 시집에서 주목한 것은 법과 시의 만남이었다. 시인은 ‘시인으로 살아보겠다고 법무사 사무장 관두고 만학을 결정’했다고 「유머」에 썼다. 이후로 시인은 법과 담을 쌓고 시와 사귀었다. 시처럼 말랑말랑하고 서정적인 장르에 도끼처럼 쇠붙이 냄새가 나는 법의 접목이 가능할까. 누가 보기에도 시와 법은 어울릴 수 없는 조합 같았다. 시인의 시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줄타기하는 시적 화자들이 등장한다. 법과 무관하게 살고 싶어도 다양한 이유로 법망에 걸려드는 것이 인생이었다. 법 없이 시를 써 보겠다는 무구한 생각을 시인은 일찌감치 접었을지 모른다. 시인의 시는 법의 해석 안에서 웅숭깊어졌다. 「집이 날아갔다는 말을 들었다」에서 경매 법정을 빠져나오던 한 남자는 ‘집이 날아갔어!’라고 중얼거린다. 경매로 넘어간 집이 ‘지번을 가진 새’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집이 새처럼 날아서 새 번지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경매는 해체가 아니라 재생이었다. 시인은, 한 가족을 낳고 기른 집이 한때 성행했던 시절을 뒤로 하고 날갯짓하는 것을 본다. 또한, 갑자기 날아온 공에 맞아 집을 날려버린 남자의 처지에 공감한다. 시인은 ‘공도 진심에 닿으면 한 번쯤 좋은 곳으로 날아간다’(「공들」)는 믿음에 힘입어 집이 좋은 곳으로 날아갈 수 있도록 바람을 잡는다. 「모자는 많고 죄는 다양해요」와 「법정에 가요, 쇼핑하러」는 연작시처럼 읽힌다. 시인은 ‘죄지은 사람과 죄지을 사람은 모자를 눌러쓰는 버릇’이 있다고 말한다. 모자의 종류만큼이나 범죄가 다양한 것은 물론이다. ‘죄를 덮는 덴 모자만 한 것’이 없기에 모자를 쓴 사람들은 ‘죄를 고르기 위해’ 쇼핑하듯 법정에 간다. 그곳에는 ‘오늘만 사는 이들’이 있다. 시인은 불운을 물려받은 이들에게 법정에 즐비한 죄를 내보이며 ‘살 거야? 말 거야?’라고 다그친다. 살고 싶다는 게 ‘사치의 욕구인 이들’을 막다른 길로 몰아간다. 그러나 막다른 길에도 퇴로는 있다. 「위너」에서 시인은 ‘얼어붙지 않으려고 멍을 옮겨 달고’, ‘좀 더 유연해지려고 구겨지며’ 그저 살기만 하자고 손을 내민다. 루저와 잉여일지라도 가로등 폭죽을 터뜨리면서 자축하며 살자고 한다. ‘제 꿈의 보폭과 속도로 시차를 수련하면서’(「미래는, 내가 이름 붙여준 나의 골든레트리버」) 저마다의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그렇게. 시인은 「좋은 인상」에서 ‘내 시가 곧 죽을 사람의 마지막 한 끼라는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시인입니다’라고 썼다. 그런 마음으로 쓴 시 쉰여섯 편을 읽고 나니 며칠을 안 먹어도 될 만큼 포만감이 느껴졌다. ‘뻔하고 엽기적이어도 한 번씩 눈물 나게 웃어’ 달라는 당부대로 킥킥대기도 했다. 나도 시인처럼 우주를 따돌리고 혼자가 된 듯 가벼워졌다. 황보윤 소설가는 전북일보와 대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전주에서 활동하고 있다. 소설집 <로키의 거짓말>, <모니카, 모니카>, 장편소설 <광암 이벽>, <신유년에 핀 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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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10 18:4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작가, 박래빗'i의 예쁨'

박래빗 시인 건강하게 잘 있지요? 살다 보면 불현듯 폭우가 쏟아지고 사방이 캄캄할 때가 있습니다. 와이퍼로 물방울 밀어내듯 가볍게 두려움을 털어내고 자신에게 와줄 문장을 기다리는 박래빗 시인, 그에 대한 기록 『i의 예쁨』을 읽고 덩달아 나는 환해집니다. 글에 자신이 투영될 수밖에 없는 것이 작가의 운명이지요. 타자의 삶이나 상황맥락을 빌려 시침 떼 보지만 그 배면은 자신일 것이어서 쑥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래빗은 내포하고 있는 자신을 낱낱이 공개함으로써 타자의 억측을 무너뜨리고 순수함은 오히려 정밀해졌습니다. 형식은 신선했으며 나 또한 내용이 닿는 그곳을 가본 적도 있는 것 같아서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자신’을 도구이자 수단으로 사용하는 재기발랄한 책 『i의 예쁨』은 박래빗 시인의 유년에서부터 현재까지 거의 모든 시절이 날것으로 가득하더군요. 장르의 경직성을 털고 시와 수필, 경험과 환상, 유쾌한 수다와 진중한 철학적 성찰로 가득했습니다. 무엇보다 래빗의 문학을 사랑하고 예뻐하는 마음이 울울창창했습니다. 책에서 밝혔듯 “다음날이 오면 또 무슨 문장과 글이 나에게 올지 행복해하며 궁금해하는 날들”로 책의 모든 성분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꾸밈없이 써 내려간 글, 때론 나를 거침없이 보여주는 것 같아 혼자 웃음을 짓곤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늘 나이며, 나,인 것이 좋”은 박래빗 시인의 솔직함과 다소 과잉된 자의식마저 신선해 보여서 좋았습니다. 집요한 목적성이 오히려 목적을 훼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유인 박래빗 시인은 목적을 획득한 거지요.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주지하다시피 욕망하는 ‘목적성’ 없이 문학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유소년기 감수성 도처엔 천진함이, 굳이 세공 하려 들지 않은 원석의 묘미로 가득했지요. 래빗은 체력적 한계와 병약함으로 유년기를 보냈더군요. 극복할 수 있었던 배경엔 물리화학적 처방이 아닌 종교적인 포용과 엉뚱함과 재기발랄함과 세상 한복판에서 살짝 벗어난 비정형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짐작해 볼밖에요. 고백하건대 래빗의 사생활을 엿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사실 박래빗 시인과 나는 운명의 실타래 한 올쯤 얽혀있지요. 래빗의 사생활에 개입된 적 있으며 공유한 시절을 추억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니 더욱 좋았습니다. 박래빗 시인의 사적인 경험과 감각들이 궁극에는 보편적인 삶의 진리에 다다르게 된다는 점도 밝혀두고 싶군요. 래빗은 글을 맺으며 벌써 글을 쓰는 시간이 그리워진다고 썼더군요. 래빗의 그 ‘시간’을 응원합니다. 최근 고도의 해석 기술을 장착해야 풀리는 난해한 책들 속에서 모처럼 쉽고 천진한 성장 시 혹은 소설을 보는 것 같았어요. 소녀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한 지금까지의 일대기를 과감하게 보여주는 근원이 무얼까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시 산문집에서 일관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긍정의 언어들, 위태로울 만큼 천진하나 균형감각을 잃지 않은 래빗의 내면이 상처받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인간관계가 절대적이지 않는 부박한 시대, ‘오롯한 나’가 존재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지요. 래빗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로고테라피 대명사 빅터 프랭클처럼 앞으로도 세상이 캄캄해지거나 고통스러울 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라요. 선결과제는 우리는 모두 ‘나약한 인간’이고 ‘패잔병’이고 필멸로 향하는 ‘환자’임을 인정해야 하는 거지요. 특히 이 말은 꼭 전하고 싶어요. 래빗 덕분에 글을 쓸 때는 뭐든 써도 된다는 것, 자신을 보여주든 그 반대 값이든 ‘무엇’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써간다는 것을 새삼 알았어요. 개인에서 시작되는 기본값을 자신 감각대로 쓰다 보면 사회병리, 금기, 고통 등은 휘발되고 평화가 찾아온다는 메시지, 잘 받았어요. 박래빗 시인이 표출하는 에너지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킬 때가 오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잘 지내요. 답장이 늦어서 미안해요. 기명숙 작가는 전남 목포 출신이며,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몸 밖의 안부를 묻다>가 있다. 현재 강의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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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03 17:3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은영 작가, '사춘기, 우리들은 변신 중'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아들은 방문을 잠갔다. 꼬박꼬박 인사하던 아이가 ‘잘 다녀와’라는 말에 ‘네’라는 대답조차 인색했다. 함께 외출하자고 하면 고개를 젓기 일쑤였고 속 얘기는커녕 일상 속 대화조차 멀어졌다. 꽁꽁 잠긴 방에서 뭘 하는지, 달라진 이유를 몰라서 속이 터졌다. 심각하게 고민하는 내게 친구가 던지듯이 말했다. “드디어 시작이다. 사춘기.” 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전주에서 동화를 쓰고 있는 다섯 명의 작가가 『사춘기, 우리들은 변신 중』이라는 책을 펴냈다. 책을 읽으며 그때 아들이 왜 방문을 잠갔는지, 닫힌 방 안에서 어떤 생각 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작품 속 아이들은 다양한 문제와 고민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가슴이 나오고 생리가 시작된 데다가 또래 여자애들과 못 어울리면 자꾸 불안한 이나, 여드름과 털, 이상한 냄새가 나 스스로 낯설고 못난 아이로 변해가는 것 같아 걱정인 주홍이는 성적인 변화가, 요동치는 감정이 혼란스럽다. 귀엽기만 하던 볼살이 부푼 찐빵처럼 느껴지고 튼튼한 허벅지가 통나무처럼 거대해 보여 고민하는 윤서, 반면에 거식증에 걸린 자신과 다르게 잘 먹고 건강한 윤서가 부러운 소희, 전학 온 친구를 질투하다 나중엔 열등감에 빠진 영서는 친구와 자신을 비교하며 힘겨워한다. 여자친구 윤지가 아끼는 강아지를 질투할 정도로 사랑에 빠진 종범이, 아토피로 고통받는 덕준이, 필리핀 사람인 엄마를 무시하는 말을 참지 못하는 재현이 역시 어쩔 수 없이 일렁이는 감정, 상황 속에서 무기력하다. 사춘기는, 그 길을 걸어가는 아이들, 그 모든 걸 지켜보며 감내해야 하는 가족, 주변 사람들까지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아이들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 행동이 버겁고, 가족들은 하루아침에 낯선 외계인처럼 변해버린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다. 나 역시 변해가는 아이를 보면서, 수시로 솟구치는 화와 울컥 쏟아지는 눈물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 내가 겪었던 사춘기가 떠올랐다.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방문 걸어 잠그고 많이 울었던 그때, 친구가 너무 좋아서, 친구 집까지 데려다주고, 깜깜해져서야 집에 들어와 야단맞곤 했었다. 매사에 서툴러 실수가 잦았고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빨개지는 부끄러운 행동도 떠오른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은 ‘이 모든 게 결국엔 다 지나간다’라는 사실이었다. 아들 역시 묵묵히 지켜보면서 기다려주면 분명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었다. 이제 성인이 된 아들은 전자기기에 낯선 엄마를 가르치고 돌봐야 할 존재로 생각하는 듯하다. 나는 그저 순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들어 올리고 있다. 장은영 동화작가는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통일 동화 공모전, 남도의병 콘텐츠 공모전 스토리 부분 대상, 전북아동문학상과 불꽃문학상을 수상했고 아르코문학창작기금(발표지원)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광대특공대』, 『역사와 문화로 보는 도시 이야기 전주』, 『책 깎는 소년』, 『으랏차차 조선 실록 수호대』, 『열 살 사기열전을 만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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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27 18:5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작가, 멜리사 마인츠 '깃털 달린 여행자'

한때 시간이 날 때마다 새를 보러 야외로 나가곤 했다. 가까운 전주천 외에도 만경강과 동진강, 새만금, 유부도, 강원도 철원, 전남 순천, 충남 서천, 경남 우포와 주남 저수지까지 이르는 강행군이었다. 그러다가도 새들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시기가 다가오면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당연히 정해진 자연의 이치인데도 정겨운 모습을 당분간 볼 수 없겠구나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어느 날은 기대하지 않았던 반가운 새를 만난 적도 있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기다렸으나 보고 싶던 새를 보지 못하고 오는 날도 있었다. 사실 새를 공부하다 보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일이 너무 많다. 다른 종의 둥지에 알을 낳아 그 종으로 하여금 새끼를 기르게 하는 번식 전략인 탁란은 애교에 불과하다. 그중 내가 가장 압도당했던 것은 쉬지 않고 1만 3천 킬로를 날아간다는 새 이야기를 들었을 테다. 공식적인 세계기록은 큰뒷부리도요(Bar-tailed Godwit, Limosa lapponica baueri)가 11일 동안 13,560km를 이동한 게 최고 기록이다. 큰뒷부리도요는 알래스카에서 호주 태즈매니아까지 11일을 쉬지 않고 날아갔던 것이다. 그 경이로움에 나는 말을 잃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추측만 해오던 이 새의 이동 비밀이 풀린 건 새에게 달았던 위성추적기 덕분이었다. 내가 풀리지 않던 숙제는 새는 어떻게 먹지도 자지도 않고 이동하는가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처럼 쉼 없이 하늘을 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점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게 가능한 이유는 새가 뇌의 절반이 최소한의 기능만 하면서 쉬고 나머지 반만 깨어서 활동하는 단일반구서파수면(USWS)이라는 휴식상태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깃털 달린 여행자』를 읽으면서 내가 평소 새를 공부하면서 느꼈던 궁금증이 어느 정도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외에도 이 책에서는 철새가 길을 찾는 법, 이주 과정에 도사린 위험 등 다양하고 흥미로운 주제를 많이 다루고 있다. 살다 보면 가끔 길 잃은 새가 발견되어 화제에 오르는 일이 있다. 우리가 흔히 미조(迷鳥)라고 부르는 길 잃은 새가 여기에 해당한다. 평소 주변에서 볼 수 없었던 새 이야기를 들었을 때, 탐조인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하기야 꿈에서나 볼 수 있을 만한 그런 새를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나에게 항상 새는 많은 것을 시사해 주었다. 나는 여전히 새 이름도 모르고 버벅거리지만 그 경이로운 탄생과 장대한 여정을 보면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일상에 지친 나에게 생존을 위해 기나긴 여정을 택해야 하는 철새의 운명이나 회귀를 포기하고 텃새로 전락해버린 새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롭다. 과연 우리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가끔 풀리지 않는 의문이 들 때마다 오늘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하늘을 날고 있을 새를 떠올린다. 그들이 긴 여정을 마치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기원한다. 우리들도, 장창영 작가는 전주 출신으로 20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불교신문·서울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돼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사업과 전주도서관 출판제작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시집으로 <동백, 몸이 열릴 때>, <우리 다시 갈 수 있을까>, <여행을 꺼내 읽다>, <나무의 속살을 읽다>가 있으며 인문서로 <나무의 문을 열다>, <디지털문화와 문학교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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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20 18:5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근혜 작가, 김란희 '금딱지와 다닥이'

SNS에서 우연히 『금딱지와 다닥이』(비공)란 동화책을 접했다. 제목이 특이해서 내용이 궁금했던 차였는데 그 책이 얼마 전 내게 왔다. 인연이란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맺어지는 것이었다. 작가 김란희는 91년도 통일문학상공모전에서 통일상을, 2005년에 <창비어린이>에 「외삼촌과 누렁이」로 등단했다. 지금은 전주에서 동화작가이자 문화해설사로 활동 중이시라니 모르긴 몰라도 오다가다 마주쳤지 싶다. 그래서인지 동화집에 더욱 애정이 간다. 『금딱지와 다닥이』는 ‘글 쓰는 일이 세상에 덜 부끄럽고 사람들에게 조금만 미안하면 좋겠다’라고 말한 김란희 작가의 첫 단편동화집이다. 작가가 긴 시간 가장 정제된 단어로 직조한 아홉 편의 단편은 블링블링한 필터 대신 원본 그대로의 현실을 담아냈다. 덕분에 동화를 읽는 내내 공포 영화를 보듯 섬뜩하면서도 통쾌했고, 불편하면서도 복숭아 스파클링을 마신 듯 달콤하고 짜릿했다. 김란희 동화의 또 다른 묘미는 사투리 구현에 있다. 한 지역에 오래 살았다고 해서 지역 사투리를 문장으로 맛깔나게 구현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란희 동화에 실린 사투리는 자연스럽다 못해 능청스럽다. 소리 내어 읽으면 더 찰지고 실감 난다. 단편 각각에 등장하는 할머니 캐릭터를 비교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외국인들 돌보면 돈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라며 아들만 보면 잔소리를 쏟아붓는 「외삼촌과 누렁이」의 할머니가 외강내유형의 우리네 어머니 모습이라면, 천애고아인 착한 솜이를 위해 새 부모를 점지해 준 「아기가 된 솜이」의 당산나무 할머니는 삼신할머니나 마고할미 같은 여신의 모습이다. 소외된 어린이를 향한 작가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엿볼 수 있는 「엄마 밥 줘」와 「가슴이 자라기 시작할 때」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자신의 결핍을 아이에게 전가하고, 성공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이들이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식에게 휘두르는 폭력은 다른 어떤 폭력보다 진한 상흔을 남긴다. 사랑이라는 핑계로 가하는 폭력 앞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김란희 작가는 에둘러 말하기보다 극사실주의적으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니 이 책은 어른이 먼저 읽어보기를 권한다. 욕망을 좇느라 그간 잊고 있던 진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광재 소설가는 ‘글은 그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재주로 쓰는 게 아니라 문학을 삶의 영역 안에 끈질기게 보듬고 있는 자가 쓰는 것이다. 지금 쓰는 글이 어느 지점에 가 있는지, 과연 무엇이 되기는 하는 것인지 그런 계산 따위 아예 없이 그저 한 발짝 씩 걸음을 떼는 사람(P.188)’이라는 말로 쓰는 김란희 작가를 정의한다. 재주로 글을 쓰기보다 끈기로 글을 쓴 결과가 『금딱지와 다닥이』에서 오롯이 느껴진다. 명징한 문장과 분명한 주제 의식을 겸비한 김란희 작가의 차기작이 무척 기대된다. 김근혜 작가는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동화)에 당선됐다. 장편동화 『나는 나야!』, 『봉주르요리교실 실종사건』, 『다짜고짜 맹탐정』, 『베프 떼어 내기 프로젝트』, 『들개들의 숲』, 『사춘기, 우리들은 변신 중』(공저) 과 청소년 소설 『유령이 된 소년』, 『너의 여름이 되어 줄게』(공저), 등이 있다. 동화『베프 떼어 내기 프로젝트』는 2025년 전주올해의 책에 선정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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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14 10:1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영주 작가, 김경숙 '오늘 또 토요일?'

똑같은 토요일이 다섯 번 반복되는 판타지 동화다. 주인공 장일주가 겪는 토요일의 반복은 무엇을 말하려하는 걸까 궁금했다. 낯선 동네에 이사 오자마자 벌어지는 일을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본인 말고 다른 등장인물들은 새로운 오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주에게는 변화무쌍한 토요일이 반복된다, 마주치는 동네 어른들과 또래의 아이들, 문방구에 서있는 블랙이라는 개까지 일주에게 친근한 이는 하나도 없다. 이사 온 첫날부터 다투기 시작하는 엄마와 아빠, 일주는 집에 있지 않고 자기를 배척하는 이들 속으로 매일 나간다, 하지만 날은 변하지 않고 갈수록 태산으로 큰일만 생긴다. 그리고 여전히 토요일이다, 전 동네에서 절친했던 민재에게까지 서운한 마음이 들 정도로 아무도 일주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 누구나 오늘을 산다. 아주 만족했던 날, 아주 낭패 본 날, 그저 그런 날 등등 다양한 하루를 산다. 그날을 살았던 감회에 따라 오늘을 만족하고, 후회하고, 그저 밋밋하게 지나간다, 만약 안 좋은 일이 있었던 오늘이었다면 다시는 그런 날을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 일주는 그런 혼란 속에서 지혜를 배운다, 똑같은 다섯 번의 토요일이지만 엄밀히 보면 하루도 같은 토요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자신의 아이 전학경험을 배경으로 하듯 내게도 ‘이제야 말한다.’라는 숨겨둔 비밀이 있다. 군인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기억 안 나는 이사를 13번을 했다. 그 중에 유일하게 기억나는 사연이다. 아버지가 군대 예편을 하고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막 한 달이 채 안되었을 때였다. 그런데 서울로 간 학교 화장실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잠깐 다닌 학교의 화장실은 그야말로 화장실이었다. 교장 선생님이 매일 비질을 해서 어디보다 깨끗했다. 짐작되겠지만 서울 학교는 그냥 변소였다. 도저히 갈 수 없었던 나는 ‘싸고 말리고를 반복하다 집으로 탈출한 기억이 난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변하는 건 없었다. 틈틈이 교직원 화장실에 잠입했었다. 작가는 전학시킬 학교에 미리 갔을 때 선선한 날임에도 땀을 흘리는 아이를 봤단다. 누구나 첫 경험은 다 있다. 매일 마주치는 일이 어제와 다른 그리고 같은 오늘이다. 작가의 말에 아이의 걸음마를 인용해 말하는데 비단 그뿐 아니라 어른들도 직장에 나가는 첫날이나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쓰고 있다. 매번 쓰는 서평이지만 ‘나는 왜 여기까지일까?’ 수시로 낯붉히며 원고를 보낸다. 하지만 그만 두지 않는 이유는 서평이 나올 때마다 하나래도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걱정은 커지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앞으로 나가야 한다면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장일주처럼 지혜가 생긴다. 낯설음이 농이 짙게 익어가는 날이 온다. 김영주 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당선, 2018년 동양일보 동화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레오와 레오 신부>, <가족이되다>, 오디오북 <구멍난 영주씨의 알바보고서>, <너의 여름이 되어줄게>공저. <크리스마스에 온 선물>, <사춘기, 우리들은 변신 중>이 있다. 현재 아이들과 동시쓰기를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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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30 19:2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기우 작가 – 정창근'남사당의 노래'

그를 처음 만난 건 2004년 여름 전북작가회의 사무실에서다. 젊은 작가들과 어울리고 싶다며 입회원서를 쓰겠다고 했다. 한 뼘 높이의 스프링노트를 내밀고, 무작정 한글 워드 작업도 부탁했다. 일흔 중반의 노(老) 작가가 볼펜으로 힘주어 쓴 글자들은 그 자체로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나 6·25전쟁은 뻔한 소재가 아니에요. 그 역사에서 우리는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했잖아요. 더 파고들어야 합니다. 젊은 작가들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저도 조국 통일에 도움 되는 글을 쓸 겁니다. 내 남은 생을 온통 소설 집필에 바칠 겁니다.” 몇 차례의 만남에서 그는 글쓰기에 대한 당위와 다짐을 들려줬고, 그 후 20여 년 동안 쉬지 않고 소설을 쓰며 약속을 지켰다. 지난봄 작고한 정창근(1930∼2025) 소설가 이야기다. 소설가 정창근은 누구도 넘보기 힘든 수식어가 있다. 첫째는 남과 북에서 자기 뜻으로 소설을 발표한 유일한 국내 소설가다. 독일 국적으로 살던 1989년 북한 문인들의 초청으로 2주간 북한을 방문한 그는 월간지 『통일문학』(조선문인협회)에 ‘동진’이란 필명으로 소설 「들쥐」를 발표했다. 한국전쟁 후 사회개혁을 외치던 지식인들이 변절하는 상황에서 개혁의 뜻을 굽히지 않던 한 젊은이의 방황과 좌절을 그린 중편소설이다. 둘째는 90대까지 왕성한 필력을 보여준 장편소설의 장인이다. 전주 출신인 작가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민주화운동에 몸담았다가 1974년 간호사인 아내와 함께 독일로 갔고, 그곳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솟아난 노래」(1985)를 시작으로 『남산 위의 저 소나무(전 5권)』(1994)와 『포츠담 인터체인지』(1995)를 냈다. 1997년 귀국해 정읍에 터를 내리고는 오직 소설 쓰기만 매달렸다. 고희인 1999년에는 『소설 정여립』을 냈고, 2000년 ‘남북 두 조국에 보내는 독일 망명객의 사랑 이야기’를 부제로 한 『브란덴부르크 비가』, 2013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야기인 『슬픈 제국의 딸: 데이신다이』, 2014년 임진왜란 때 역관 홍순언의 일대기를 다룬 『마자수의 별이 되어』 등 쉬지 않고 발표했다. 국내외 문예지에 중·장편소설을 연재하고, 퇴고를 거쳐 다시 세상에 내는 일도 반복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쫓기는 심정으로 글쓰기에 몰입했고, 구상이 끊기지 않도록 펜을 잡으면 몇 날 며칠 쉬지 않고 단숨에 써 내려갔다. 심지어 90세를 넘기고도 장편소설 『보복』(2020), 『쪽발이』(2021), 『북소리』(2022)를 발표하며 상상 초월의 필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소설 쓰기가 멈췄다는 비보를 듣고 첫 만남에서 받은 『남사당의 노래』(모시는사람들·2003)를 다시 펼쳤다. 이 작품은 침묵과 인(忍)으로 힘겹고 고달픈 세월을 끌어안고 유랑했던 남사당패의 삶에 동학농민혁명을 녹여낸 그의 일곱 번째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혁명에 참여한 남사당패가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영웅이 아니라, 백성 그 자체임을 역설한다. 정창근 소설가가 평생 숱한 문장으로 전하고자 했던 고단한 삶의 애환과 예인의 혼, 폭압에 대한 항거, 시대의 해학, 따뜻한 위로가 행간 가득 스며있다. 스스로 남사당이 돼 통일의 노래를 불렀던 작가가 뱉어낸 피의 언어다. 최기우 극작가는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했다. 희곡집 <상봉>,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은행나무꽃>, <달릉개>, <이름을 부르는 시간>, 어린이희곡 <뽕뽕뽕 방귀쟁이 뽕 함마니>, <노잣돈 갚기 프로젝트>, <쿵푸 아니고 똥푸>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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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23 18:1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영종 시인 - 유종화 시집 '그만큼 여기'

바깥이 아득한 것들은 눈 밟는 소리를 냅니다. 건조대에서 나부끼는 옷의 실밥 같죠.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같죠. 만져도 손을 베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갱이는 잘 여물어 있습니다. 그림의 마크 로스코가 그러죠. 색의 면은 힘세고 단순하지만, 가장자리는 숨결같이 나풀거립니다. 시의 유종화가 그러죠. “공황장애로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지는” 화자와 “할아버진 나만 좋아해 하며 짱짱한 개망초꽃님으로 오시는”(‘얼굴’ 중) 손녀의 메시지는 진하지만, 안으로 팔을 잡아끄는 언어는 연하죠. “좋은 노래는/ 끝으로 갈수록/ 첫 소절 입김이었// 다”(‘짹!’ 전문). 첫 입김을 보면 그 노래를 판가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첫’은 시작을 보여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나아갈 곳을 가리켜주죠. 왜 거길 가야 하는지도 알려줍니다. 첫울음, 첫맛, 첫걸음, 첫말, 첫돌, 첫인상, 첫사랑, 첫날, 첫비…… 헤아릴 수 없죠. 순수와 무서움과 설렘이 펄럭이죠. 발끝에 차이는 이슬 소리가 새로이 들리죠. 뇌를 ‘띠옹’하게 하는 냄새가 나죠. 부러져 잔디밭을 뒹구는 햇발 같죠. 은빛 테두리를 뽐내는 구름 같죠. 하지만 끝으로 가는 길은 복숭아씨같이 단단합니다. 그 길은 한걸음 한걸음 따복따복 걷는 것이죠. 온몸이 짜임새 있게 짜여 걷는 것이죠. 가는 곳을 짐작하고 걷는 것이죠. 처음부터 끝까지 팔과 다리를 한결같이 움직이며 걷는 것이죠. “오른쪽이 내장산이야/ 근데 왼쪽도 내장산이야/ 그 줄기거든”(‘당신’ 전문). 좌우가 다를 바 없습니다. 단풍 빛깔이 무르지 않고 야무지기 때문입니다. 빗발이 그 사이로 발을 쏙 집어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에게/ 넌 ‘우우’를 잘하는 놈이야,라고 말한다// 이 사람 저 사람을 연결하여 한 판 만드는 일을 잘한다는 말인데/ ……// ‘우우’의 말뜻은 말야/ 함께 가는 거기부터가/ 선물 같은 생의 길이라는 거야”(‘우우’ 중). 사람을 잇는 일을 시인은 ‘조금 심란하고 무책임한’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함께 가면 꽃무릇 같은 것이라 합니다. “하늘이 높은 까닭은/ 땅 위가 편하라고 그랬다는 걸/ 나처럼 철없는 놈도 맘 편하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개울물은 많으나 적으나 흘렀고/ 나도 그만큼 그만큼 여기다”(‘하늘이 높은 것은’ 중). 시인은 철이 없어 날이 서있지 않습니다. 아니, 철이 덜 들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중심은 흔들림 없이 강한데 변두리는 헝겊처럼 여립니다. 중심엔 묵직한 한 방이 있죠. 아니, 가운데가 어딘지 모르고 힘차게 날리는 바람 자루 같죠. 아니, 볼 때까지는 보이지 않죠. 하늘엔 천장이 없습니다. 장대를 짚고 날아도 머리를 찧지 않습니다. 비행기가 10km 남짓 상공을 보며 여행해도 콩~ 코를 부딪치지 않죠. 시인은 땅 위가 편하라고 그랬다 합니다. 적으나 많으나 그만큼, 그렇게 ‘아프고, 사랑하고, 살아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영종 시인은 2012년에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아르코 문학창작기금에 선정돼 2023년에 첫 시집 〈오늘의 눈사람이 반짝였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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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16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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