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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경옥 작가-배봉기 '햇빛 속으로'

청소년 시절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는 감정을 한 번쯤 가져봤을 것이다. 이것이 어느 정도 특별한 감정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다. 한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가까운 관계가 된다는 건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름다운 사랑인가. 그런데 그 사랑의 대상이 사람들의 통념과 다르다면, 동성을 사랑한다면 세상의 시선은 어떨까? <햇빛 속으로>는 십 대 퀴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수민’이가 화자가 되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담긴 어두운 자아를 발견하고, 밖으로 끄집어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퀴어 청소년의 커밍아웃, 섬세한 사랑의 감성, 자신의 진짜 모습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통해 퀴어에 대해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이다. 중학생 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게 된 주인공 ‘수민’은 친구 ‘희수’에게 고백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이상한 놈, 더러운 새끼”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성 정체성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까 봐 공포감을 느낀다.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마음속 지하실에 가두게 된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이성과의 사랑이 아니라 동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 ‘수민’의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 그대로 전해져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기도 했다. 수민은 고등학생이 되어 연극반 ‘목소리’에 가입한다. 그곳에서 예술 특기 강사이자 극단 배우인 ‘예쌤’을 만나면서 숨겨 두었던 감정이 다시 꿈틀거린다. 하지만 ‘수민’은 중학교 때 ‘희수’로부터 받은 경멸의 눈빛이 스치고, 결국 세상의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예쌤’에 대한 감정을 숨기려고 애쓴다. 그렇다고 그 애틋한 감정이 숨겨질 리가 있겠는가. 사랑의 감정을 이성으로 누르기에는 수민의 사랑은 통제되지 않았고, ‘예쌤’이 출연하는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을 다섯 번이나 보게 된다. ‘예쌤’은 수민의 마음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숨 쉬어. 숨 쉬어야 살아. 그래야 살 수 있어.” 늘 조바심을 안고 살았던 수민에게 ‘예쌤’의 말은 알에서 깨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되고,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한다. “세상, 사람, 참 무섭다. 네가 가려는 길이, 나도 모르는 길이고,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네 잘못이 아닌 것 알고, 너도 어쩔 수 없다는 것 아니까, 더 이 아빠 마음이….” 수민이가 말했을 때 아버지의 반응이다. 필자도 두 아들이 있지만 이러한 상황이라면 어떤 말이 먼저 나왔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만큼 세상의 통념과 상식의 기준을 넘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작가는 수민이를 통해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지켜내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빛을 향해서 나가라고 주문한다. 수민도 다짐한다. ‘앞으로도 한순간, 한순간, 이 순간을 살아갈 것이다. 내 진실에 온 힘을 다해 응답하면서.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하는 그래서 내 삶을 사랑하는 길일 테니까.’ 우리 사회에서 소수로 살아내는 건 모든 존엄을 내려놓으라고 강요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아직 지하에 웅크리고 있을 수많은 ‘수민’이가 이 소설을 통해 당당하게 햇빛 속으로 걸어 나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경옥 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두번 째 짝>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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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17 17:5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영주 작가-최기우'이름을 부르는 시간'

<이름을 부르는 시간> 희곡집은 동학농민혁명에 함께 한 이름 모를 하나하나를 위해 들꽃으로 상여를 장식하며 그 이름을 불러보는「들꽃상여」, 걸인성자라 불리운 이보한의 전주 3․1운동을 이끈「거두리로다」, 「1927 옥구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의 확고한 정신으로 일제에 대항한 농민운동과 젊은 혈기에 불타는 장태성의 이야기. 「수우재에서」는 시조 시인 가람 이병기의 생가를 배경으로 조선어학회 독립운동으로 간주해 관계자들을 핍박한 조선어학회사건이 소재다. 마지막으로 전북대학교 학생 이세종이란 5․18민주화운동 첫째 희생자의 비극적인 죽음인 「아! 다시 살아…」를 끝으로 다섯 편의 희곡이 담긴 희곡집이다. 최기우 극작가의 문장은 때론 젊은 패기가 넘쳤다가 밑바탕에는 오랜 연륜이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그는 젊다. 오랜 역사물이 소재인 이유는 아니고, 그는 시시때때로 문장을 가지고 논다. 내가 처음 일제의 잔인함을 목격한 것은 연속극 ‘여로’였다. 온갖 고문으로 고통스러운 비명에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TV에서 고문당하는 사람이 실제로 느껴져 끔찍해 하던 옛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섯 편의 희곡을 읽으며 그때처럼 긴장감을 놓지 못했다. 선봉자들 뒤를 따랐던 이름 모를 사람들 하나, 하나가 쉽게 지나가지지 않았다. 「들꽃상여」에서 ‘아무 것도 아닌게 힘을 보태제, 있는 놈이믄 허긋어?’라고 한 등록개의 말이 가슴 먹먹하게 만들었다. 누구나 똑같은 사람이란 말만 들었을 뿐인데 기뻐하는 모습은 깊은 억눌림이었다. ‘같다’는 말에 딴 세상을 맛보게 된 등록개의 탄성이 경이롭다. ‘같을 동’ 이름으로 힘이 실어지는 순간에는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전봉준이 “우리 모두 등록개다.”’라고 외치는 말이 얼마나 절실하던지 가슴이 뭉근하다. 김서방에게 언년이 등록개를 찾을 때, 조선 팔도 쌔고 쌘 이름이 개똥이 아니믄 소똥, 말똥, 된똥인데 어찌 찾으려 하냐며 반문한다. 같은 이름 개똥일지라도 소중함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름 없는 혼들을 태운 들꽃상여는 어디에도 없는 보상이다. 「들꽃상여」만으로도 가슴 벅차 다른 희곡의 서평은 지면이 모자라다. 「거두리로다」의 기인 이보한이 말하는 애국은 독특하기 그지없다. 배려, 존중, 희생과 배풂 이보한이 말하는 애국이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1927 옥구 사람들」젊은 혈기 장태성은 매질도, 봉변도, 징역도 두렵지만, 피하지 않을 거란 다짐이 굳건하다. 일본 앞잡이 백승일에게 ‘밤이 어둡다고 백 년 가도 날이 안 샐 줄 아느냐?’는 일침은 번쩍이는 칼날이었다. 「아! 다시 살아…」이세종! 외치고 싶을 정도로 5․18항쟁이 일어난 줄 모르고 안 오는 버스를 목을 빼고 기다리던 여중생이었다. 이한열, 박종열 열사에 눈물 흘렸었다. 모르고 지났을 그 이름, 이세종을 불러본다. 일제의 압박에 눌린 사람이 전봉준, 등록개, 소리쇠, 언년이, 이보한, 장태성, 이병기…만 있을까마는 희곡집『이름을 부르는 시간』을 통해 이름 하나하나 진심으로 불러본 시간이었다. 김영주 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됐으며, 같은 해 동양일보 동화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저서로는 장편동화 <레오와 레오 신부>, 청소년 소설 <가족이 되다>, 2023년 수필 오디오북 <구멍 난 영주 씨의 알바 보고서>, <너의 여름이 되어줄게>, 5人앤솔러지 청소년소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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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10 16:5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작가-지안 '오늘부터 배프! 베프!'

요즘처럼 한 끼 식사가 무서운 적이 있었을까. 마트에서 물건을 사거나 밖에서 외식을 할 때마다 부쩍 오른 가격을 보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웬만한 식사가 거의 만 원에 육박하거나 훌쩍 넘는다. 이런 상황이니 동화에 나오는 아동행복나눔카드로 아이들이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의문이 들었다. 어른만이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한 끼를 넘겨야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돌아서면 배고픈 나이의 아이들에게 어김없이 돌아오는 식사시간은 무섭다. 그래도 아동급식카드가 없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는 항변도 있을 수 있으나 당사자의 입장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턱없이 부족한 식비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 편의점밖에 없으니 말이다. 물론 아이를 키우는 것은 부모의 몫이고 당연한 의무지만 그 삶의 무게가 조금 덜어진다고 해도 좋지 않겠는가. 매번 밖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같은 음식 먹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식당이나 편의점 밥이라고 어디 다르겠는가. 주인공 서진이가 편의점에서 만난 남자아이나 소리의 이야기처럼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공원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그 마음은 또 어떠한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까지 밥을 먹어야 하는가에 이르면 마음은 더 착잡해진다. 그런 점에서 아동급식카드로 편의점 음식을 사 먹어야 하는 두 아이와 들고양이의 접점은 자연스럽다. 그들은 너무 이른 나이에 이미 세상의 냉혹함을 알아버렸다. 배려가 없는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처지는 삭막하기 그지없다. 세상의 쓴맛을 알지 않아도 되는 나이에 이미 맛본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땅의 수많은 아이들이 지금보다 좀 더 사랑받고 행복해지기를 기원한다. 그들이 아직도 이 세상 어딘가에 자신들을 응원하고 지켜주고자 하는 이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란다. 그들의 꿈이 꿈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로 변하고, 그들이 만나고 싶은 미래가 더 멋진 모습으로 후다닥 다가오기를 바란다. 아쉽게도 <오늘부터 배프! 베프!>에는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서진이와 엄마의 지나가는 이야기 틈에 희미하게 한 줄로만 등장할 뿐이다. 발을 동동거리며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모습도 안타깝지만 설령 그게 아빠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저출산을 탓하기에 앞서 오늘 이 시간에도 애를 태우며 아이를 키우고 있을 수많은 한부모 가정, 그리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시스템과 사람들의 따뜻한 배려가 그리워진다. 우리 시대는 예전처럼 이웃이 부모의 빈자리를 메워주거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내내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도 일주일, 길게는 한 달 후에나 발견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절박할 때는 작은 말 한마디, 몸짓 하나가 주는 울림이 더 크게 느껴진다. 임계점을 넘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이다. 하지만 그 고비만 넘기고 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오늘 누군가가 이 말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힘든 이 시간도 지나고 나면 웃을 수 있는 추억이 될 거라고, 이 또한 금방 지나갈 거라고, 장창영 작가 전주 출신으로 20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불교신문·서울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돼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시집으로 <동백, 몸이 열릴 때> 와 문학이론서 <디지털문화와 문학교육>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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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03 18:0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헌수 시인-진봉초등학교 어린이들'보리밭에 피는 꿈'

한 해를 돌아보면서 여러 수업 중에서 기억에 남는 수업은 김제 진봉초등학교 아이들과의 만남이다. 코스모스가 줄 지어 서있는 가을의 넉넉한 모습, 추수가 끝난 들녘을 돌아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풍경의 깊이를 더 해 주었다. 새만금의 중심도시인 진봉면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보리밭이 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김제의 끝없는 황금들녘은 북쪽으로 만경강과 남쪽으로 동진강 사이에 펼쳐진다. 진봉들녘은 쌀과 보리를 생산해 내며 징게맹개의 지평선을 감상하기에도 좋다. 추운 겨울에 자라는 찰쌀보리는 병해충이 심하지 않고 수분흡수율이 좋아 찰지고 촉촉한 감이 있다. 어린 시절 쌀밥에 섞인 보리를 골라내며 먹던 추억이 떠오른다. 미끌미끌하고 까끌거리는 식감이 싫었던 기억이 난다. 추수를 끝낸 들판에 새떼들이 오르내리고 곤포사일리지가 마시멜로처럼 여기저기 뒹굴고 농기계들 사이로 길고양이가 보인다. 진봉면에 있는 관기, 종야, 상수내, 하수내, 석교, 상궐, 정동, 해망의 마을이야기를 소재로 그림책을 만드는 수업을 했다. 먼저 아이들은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고, 경로당과 마을회관을 찾아가 어르신들을 인터뷰 하며 글감을 뽑아내었다. 진봉면에 관한 자료조사를 시작하면서 너른 보리밭, 심포항, 망해사, 어른들의 유년 시절, 일제강점기 이야기 등을 알아보았다.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고, 구성진 사투리로 말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즐거워했다.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면서 진봉 보리밭에 푹 빠져 지냈다. 아이들은 살고 있는 마을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지역의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며 이해하는 마음도 커졌다. <보리밭에 피는 꿈>은 왕오색나비와 현지가 등장하며 파도처럼 일렁이는 보리밭으로 시작한다. 보리밭에서 보리도 구워먹고 잠자리를 잡고 나비 떼를 쫓으며 놀던 추억, 어른들의 가난했던 시절, 일제 강점기의 생활이 들어있다. 심포항에서 뭉그적거리던 물범과 갯지렁이와 조개를 잡아서 생활했던 이야기, 할아버지가 너무 좋아서 흰 고무신을 들고 따라간 할머니, 일제강점기에 농사지은 곡식을 가져가는 일본군과 고되고 힘든 시절 이야기가 들어있다. 동네잔치와도 같았던 가을운동회, 망해사까지 걸어서 소풍을 다녀왔던 일과 보리의 자생력과 푸른 생명력을 노래한다. 아이들의 꿈이 보리처럼 단단해지기를 바라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건강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새기며 마무리 된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고, 거칠고 삐뚤빼뚤한 선으로 그림을 그렸다.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 사인펜을 두르고 색연필과 사인펜으로 칠하는 작업을 하고 노래도 흥얼거리면서, 집중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손대지 않은 아이들만의 정서가 드러난 그림이 주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논물을 보러 다니는 아버지와 바다낚시를 가는 일이 재미있다는 우영이, 고양이 사육사가 되고 싶은 수호, 편의점 사장님이 되어 멘토스와 더블더블을 몽땅 먹고 싶다는 민석이, 환경미화원이 되어 더럽고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치우겠다는 정후, 로제떡볶이와 짜장면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머리를 잘라주는 미용사가 꿈인 세린이, 유튜브에서 만나는 무한한 세상이 놀랍고 신기하다는 지성이, 돼지고기의 비곗살을 좋아하고 사랑을 전하는 목사님이 되고 싶은 예담이, 무한의 계단 게임에 빠져 지내는 요즘이 행복하다는 환이, 손흥민 같은 축구선수가 되고 싶은 태영이, 눈망울이 유난히 맑고 순수한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 서로 믿고 도우며 건강하게 자라는 학교, 김제 진봉초등학교 오태정 교장선생님과 심민욱 선생님, 진봉초등학교 교육공동체의 친밀함과 다정함을 잊을 수 없다. 진봉 들판을 오가며 소풍가듯 갔던 수업이 새록새록하다. 진봉초등학교 어린이 작가 탄생을 축하하며 아이들의 꿈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을 듬뿍 보낸다. 김헌수 시인은 2018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삼례터미널'로 등단했다. 또 그는 '작가의 눈' 작품상을 받은 이력이 있다. 그의 시집으로는 <다른 빛깔로 말하지 않을게>, <조금씩 당신을 생각하는 시간>이 있고, 시화집으로는 <오래 만난 사람처럼>, <마음의 서랍>이 있다. 오디오북으로는 <저녁 바다에서 우리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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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2.20 17:0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정경 시인-페터 춤토르 '분위기'

나의 근무지는 팔복예술공장이다. 2019년의 첫 출근길에 나를 태운 택시 기사는 “여기는 뭘 만드는 공장이에요?”라고 물었고, 그 뒤로도 더러 그런 일이 있었다. 1990년대 초반 폐업하기 전까지 카세트테이프 공장이었던 이곳은 이후 16년 동안 방치되다가 이제는 전시와 예술교육,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기획되고 실행되는 현장이 되었다. 언젠가부터 팔복예술공장에 방문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기에서 일하면 좋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단순히 오래되고 낡은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라 공간이 고유의 분위기를 갖게 되었다는 말이겠다. 페터 춤토르의 『분위기』에 매료된 것은 그야말로 ‘분위기’ 때문이다. 그의 건축물이 간직한 분위기. 이 책은 2003년에 ‘독일 문학·음악축제’에서 <분위기. 건축적 환경. 주변의 사물>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춤토르의 강연을 바탕으로 한다고 밝혀두고 있다. ‘분위기’는 춤토르가 오랫동안 관심을 두고 생각해온 주제이며, 그에게 분위기는 미학적 범주에 속한다. 이 책의 첫 장에 인용한 영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가 1844년에 비평가 존 러스킨에게 보낸 편지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분위기는 나의 스타일이다” 스위스의 건축가 춤토르는 2009년에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았다. 그의 수상은 당시만 해도 의외로운 결정이라고들 했다. 이전 수상자들은 국가 차원의 대규모 프로젝트로 이름을 세계에 알린 건축가들이었던 반면 춤토르는 스위스 알프스의 작은 마을에서 일하는 은둔형 건축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축의 본질을 끈질기게 탐구한 구도자와 같은 그의 건축 철학을 인정한 건축계에서는 이미 ‘건축가들의 건축가’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분위기』는 춤토르가 건물을 설계하면서 깨달은 아홉 가지 사실에 대해 다룬다. 그는 건축물의 분위기는 시각적인 부분 외에도 소리나 몸이 감지하는 온도, 습도, 주변 사물과의 조화 등 여러 측면이 공간의 분위기를 인지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말한다. “건축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시간예술이다. 건물 내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방식을 떠올리면 된다. 나는 작업할 때 여러 지점들을 고려한다. 온천 프로젝트로 설명하겠다. 우리에게는 편안하게 거닐 수 있는 환경, 지시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유혹하는 분위기,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병원의 복도는 사람들에게 지시한다. 그와 달리 사람들이 긴장을 풀고 느긋하게 걷게 만드는, 부드럽게 유혹하는 기술은 건축가의 몫이다.” - 『분위기』 41쪽 그가 언급한 온천 프로젝트는 스위스 그라우뷘덴주 발스에 있는 온천이다. 그는 알프스산맥에서 나는 편마암 6만여 개와 콘크리트, 그리고 빛을 활용해 ‘테르메 발스(Therme Vals)’를 완성했다. 알프스의 자연경관, 천장과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 물의 온도와 소리 등을 섬세하게 계산해 설계했다. 스위스 작은 마을에 세운 나뭇잎 모양의 ‘성 베네딕트 교회(Saint Benedict Chapel)’와 독일 바렌도르프 들판에 있는 클라우스 형제 예배당(Bruder Klaus Field Chapel)도 감탄을 넘어선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클라우스 형제 예배당은 천장의 작은 구멍을 통해 빛이 내려오는데 내부를 지지하던 나무 거푸집을 3주 동안 태워 만든 검은 벽과 대비되어 신비로움을 불러일으킨다. 그 어떤 화려한 장식 없이 놀랍도록 아름답다. “아무리 고심해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으면 아예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한다.”라고 건축이 ‘아름다운 형태’를 간직해야 함을 춤토르는 강조한다. 그는 성상이나 정물에서 아름다운 형태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평범한 일상의 도구들, 하나의 문학작품, 한 곡의 음악에서도 아름다운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라고 이 책을 맺는다. 당신은 어떤 분위기를 사랑하는가? 그곳에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거기에 머무는 동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느끼게 되리라. 김정경 시인은 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검은 줄'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시집 <골목의 날씨>가 있다. 자칭 ‘산책중독자’. 오래된 골목을 유람하며 채집한 이야기로 시도 쓰고, 산문도 쓰며 살고 있다. 현재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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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2.13 17:4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영종 시인 – 안도현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

안도현의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를 읽다가, 해밀턴의 법칙이 떠올랐습니다. rB > C. 유전적으로 가까운 정도(genetic relatedness)에 이타적 행동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Benefit)을 곱합니다. 값이 그 행동을 하는 데 드는 비용(Cost)보다 크기만 하면 이타적 행동은 진화한다는 것입니다. “초록 풀잎 하나가/ 옆에 있는 풀잎에게 말을 건다/ 뭐라 뭐라 말을 거니까/ 그 옆에 선 풀잎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풀잎이/ 또 앞에 선 풀잎의 몸을 건드리니까/ 또 그 앞에 선 풀잎의 몸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들끼리/ 한꺼번에 흔들린다/ 초록 풀잎 하나가/ 뭐라 뭐라 말 한 번 했을 뿐인데/ 한꺼번에 말이 번진다/ 들판의 풀잎들에게 말이 번져/ 들판은 모두/ 초록이 된다” (‘초록 풀잎 하나가’ 전문). 옆과 앞에 있는 풀잎은 가까운 사이입니다. 땅속을 벋어 가는 뿌리를 잠시 멈추고 물과 양분을 나눌 수 있는 사이죠. 이롭고 보탬이 되는 일은 무엇일까요? 들판이 모두 초록이 되는 것. 초록은 젊음, 순수, 발달, 평화, 휴식, 여유 등을 상징해요. 말을 거는데 비용은 얼마나 들까요? 흔들림을 지불해야 한다고 하는군요. 흔들림은 슬픔과 아픔으로 흔들릴 뿐,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어지러울 연(䜌)과 마음 심(心)이 합해져 그리워할 연(戀)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나는 좋은 느낌과 약간의 용기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겠어요.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야겠습니다. 내게도 초록 들판 하나 무연히 흘러들어 오겠지요. 로드 킬을 당한 족제비를 지나치지 않고 차를 세웁니다. 그와 가까워져요. “털가죽으로 노란 목도리를 만들어 팔던 때”의 소리를 듣습니다, 생태계를 지탱해 준 족제비를 “산머루 같은 까만 눈으로” 바라봅니다. “지금은 길가에 누워 있는 족제비/ 아스팔트의 목을 감싸고 있는 목도리”는 숭엄함을 가만히 건네줍니다. “흉측한 걸 왜 보느냐”라는 말은 한 손으로 받아도 가볍지만 말이죠 (‘아무도 주워 가지 않는 목도리’ 중).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는/ 할아버지의 유품 중에는/ 씨앗이 든 낡은 자루가 있다”로 시작되는 ‘할아버지의 시드볼트’는 “올해 화분에 한번 심어 보자”라고 말하는 아빠로 끝납니다. 유전적으로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타적 행동이 진화할 현실성이 높은 것이지요. “먼 훗날 열어 보라고/ 할아버지가 시드볼트를 만들어” 놓았겠지요. 덕분에 화자는 “이 작고 여린 것들이/ 힘이 정말 세다”라는 것과 “손끝에도 잡히지 않는 씨앗 중에서/ 채송화와 상추씨가 제일 작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지요. 물론 “씨앗을 담아/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 놓은” 할아버지의 노고는 봉투처럼 작죠.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를 쓰지 않고/ 귀뚜라미와 대화를” 나누면, “혼자 지낼 줄 알아야 어른이 된다” (‘귀뚜라미와의 대화’ 중)라는 진실을 살릴 수 있겠지요. 이영종 시인은 2012년에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아르코 문학창작기금에 선정되어 2023년에 첫 시집 <오늘의 눈사람이 반짝였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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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2.06 17: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기우 작가, 김여화 '운암강'

섬진강은 물줄기가 지나는 마을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진안 백운에서는 백운강, 임실 관촌은 오원강, 순창은 적성강, 곡성은 순자강·압록강이다. 임실 운암을 흐르는 물은 지금 ‘옥정호’라고 불리는 호수 같은 강이 되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운암강이라고 부른다. 옥정호는 1928년 섬진강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운암댐을 만들며 생긴 인공호수다. 1965년 대한민국 최초의 다목적댐인 섬진강댐이 완공되면서 호수는 더 넓어졌지만, 기존 운암댐과 함께 마을·농경지가 물에 잠기면서 수몰민들의 슬픈 사연은 깊어졌다. 옥정호 물은 더 서럽고 애틋해졌다. 김여화(1954∼2023)의 장편소설 『운암강』(유월의나무·2015)은 강이 품은 숱한 곡절을 담았다. 작가는 섬진강댐 건설로 통째로 물에 잠겨야 했던 입석리 잿말(嶺村)을 배경으로 마을 사람들이 겪었던 사연을 구절구절 풀어 놓는다.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던 이야기,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았던 이야기, 강물에 묻어 버린 이야기들이다. "갑진년이 저무는 섣달그믐 그 밤이 지나면 을사년이 시작되는 정월의 초하루다. 때는 65년 2월 1일 일진은 정해를 맞는다. 잿말 사람들은 섣달에 한전 사무소로 삼삼오오 몰려가 그곳의 휴게실을 점령하고 하룻밤 묵어 연일 농성을 벌이고 열두 가지의 조건을 붙여 데모하였더니 경찰관들을 동원 강제 해산시키니 주모자를 색출한답시고 조사를 벌이고 뒤숭숭한 상태에서 새해를 맞는 감회는 남다르고. 이제 이곳 잿말에서 차례를 올리는 것으로는 마지막이다. 실로 500여 년 잿말이 생기고 나서부터 평화롭고 정말로 아름다운 국사봉과 강과 넓은 들이 있어 풍요로웠던 구성물 앞 마당벌 구름이 이번 설을 쇠고 나면 미구에 해가 가기 전에 수장되리라. 저 멀리 묵방산 넘어 자시라지는 해는 잿말 구성물 사람들의 이렇듯 의미 깊은, 아쉬운, 쓰리고 애리는 가슴을 알고나 있는지 무장무장 저 홀로 묵방산을 넘고 있다." (김여화의 소설 「운암강」 중에서) 잿말은 수몰되기 전까지 면사무소·파출소·초등학교가 있는 운암면 소재지였으며, 임실군의 동학농민혁명과 3·1독립만세운동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었다. 전주최씨 집성촌으로 양요정을 지은 최응숙이 여생을 보낸 곳이며, 조선 시대에 진사를 12명이나 배출할 정도로 바르고 곧은 기운이 가득한 곳이었다. 마을 뒤에 있는 작고 낮은 산이 국사봉(475m)이라는 큰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섬진강댐 20년사』에 따르면 임실군 운암면·강진면·신평면·신덕면과 정읍시 산내면 5개 면 24개 마을 93㎢가 수몰됐고, 2,786세대 1만 9,851명의 이주민이 생겼다. 정부는 수몰민을 부안군 계화도와 경기도 반월로 이주했지만, 이주지 조성이 제때 되지 않아서 상당수 주민이 고향 가까운 곳으로 돌아왔다. 슬픔은 반복되었고 아우성은 커졌다. 그 소리를 놓치지 않은 이는 작가 김여화뿐이었다. 올봄, 작가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수필집 『임실, 우리 마을 옛이야기』, 『그림이 있는 임실 이야기』, 『임실의 먹거리 이야기』, 어휘사전 『임실 사투리 어휘록』 등 그가 남긴 흔적은 온통 임실이다. 작가가 수몰민의 아픔을 잊지 않았던 것처럼 임실도 작가 김여화의 이름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최기우 극작가는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했다. 희곡집 <상봉>,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은행나무꽃>, <달릉개>, <이름을 부르는 시간>, 어린이희곡 <뽕뽕뽕 방귀쟁이 뽕 함마니>, <노잣돈 갚기 프로젝트>, <쿵푸 아니고 똥푸>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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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29 17:4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작가, 이윤학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

이 시집은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 같았다. 하여 이윤학 시인을 만난 적 없지만 먼 곳에서 보내온 연인의 편지처럼 은밀한 ‘나만의 것’이어야 했다. 서평(왈가왈부) 대신 그동안 마음속 하나쯤 품고 있을 ‘풍경’과 숙성된 ‘그리움’을 아껴먹고 있었다. 40줄에 들어서 시를 알게(배우게) 된 즈음 나는 지도교수가 권한 시집 100권 정도를 읽었던 것 같다. 시에 대한 감흥이 아니라 신춘문예 도전용인 ‘한 수 배우기’ 위함이었다. 그때 길들인 삿된 시 독서법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현재 내 정서의 평야에 시란! 낙과(落果) 같은 것, 농부가 서너 번 실패 본 작물처럼 돌이켜보기 싫은 것이 되었다. 침잠해있는 열패감이나 외부적인 충격을 흡수할 만큼 시가 그렇게 대단치 않다. 시라는 뮤즈 앞에 순종적이지도 그렇다고 버릴 수 있는 용기도 없는 겁쟁이에게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은 시가 효능이 아닌 詩로 읽혔다. 그것이면 된 것 아니겠는가! "지금은 눈물이 번지지 않는 혹한의 시간 글썽이며 흩어진 별들의 파편을 / 그 사람 눈동자로 돌려주기 적당한 시기/ 수평의 별들이 수직의 별들로 바뀐 시간을 / 거슬러 그 사람에게 돌아가기 적당한 시기 / 이 세상에서 살기 불가능 한 별들을 / 그 사람을 닮은 새벽별들을 / 그 사람의 눈동자에 파종한 적이 있었다" ('별들의 시간' 일부) 시인은 흩어진 별들의 파편을 그 사람 눈동자로 돌려주기 적당한 시기를 가늠하고 있다. ‘눈물이 번지지 않는 혹한의 시간’ 그 절박함을 고요히 견디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에게 그 행위는 정언명령과 같다. 이 시집을 읽는 내내, 또 산문집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을 읽었을 때도 ‘그리스인 조르바’가 생각났다. 아들이 죽었을 때나 모든 것이 파멸에 이르렀을 때도 조르바는 미친 듯 춤을 춘다. “두목,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안 돼요. 반쯤 악마가 되지 않고 어떻게 악마를 다룰 수 있겠어요?”라던 원기 왕성한 야수(野獸)를 지나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구현한 ‘자유인 조르바’. 우리가 저지른 일을 이해하는 과정이 삶이라면 이윤학 시인은 지나온 삶의 파편들을 시의 뼈에 새기면서 이해하고 용서하려 한다. 그 행위는 다시 한번 상처를 복원시켜야만 가능한 것이다. 독자에게는 상처를 치유할 절호의 찬스가 되는 셈이지만 갈등과 단절, 결핍과 혼란을 재료 삼는 이 방식이 작가에게는 또 한 번 고통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검지를 잘라버린’ 조르바처럼 시인은 자신을 엄혹하게 닦아 세운다. 이를 일컬어 박형준은 표사(表辭)에서 “절실한 이미지를 얻지 못하면 죽어도 쓰지 않는 태도” “독사처럼 머리 치켜든 비애와 늘 맞서고 있지만 그 머리를 베어버리지 못”하고 “가난한 모든 것들의 흔적을 지독하리만치 끈질긴 응시의 미학으로 복각해 낸다”고 했다. 이윤학 시인의 이런 태도를 시인의 말에서 방증한다. “부리와 발톱들을 쭉 뻗은 자세로 최후를 맞이한 새를 보았다(중략)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엔 나머지 체중을 비우지 못해 바닥에 의지한 자세로 더이상 어찌할 수 없어 눈을 감고 말았다 최대한 부리와 발톱들을 떼어놓으려는 의지의 마침표였다 자신과 끝까지 타협하지 않은 정신의 길이었다” "꽃을 보지 않은 열매를 자꾸 먹어봐야 아린 맛에 홀리지 않는단다 눕혀 박힌 술병들의 꽃밭엔 꽃이 없고 아려서 남 겨진 때꼴들만 그늘을 오물거렸다 서리 맞기 전에 풋고추 몇 부대 따와 바깥마당 마루에 펼쳐 너는 어머니"「('때꼴(까마중)' 일부) 어렸을 때 나는 우물가에 있던 까마중을 맛있게 따먹었다. 시인의 체험과 더불어 내(독자)가 체험된 서사에서 시간은 직선적이지 않다. 불가역적 성질인 시간이 유기적으로 결합 돼 의미망이 환원된다. 그리하여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이 현재의 나를 따숩게 하는 것이다. 특히 사춘기 시절 외로움과 결핍이 쓸쓸하되 이윤학 시인의 키보드를 적셨을 활자의 열매, 까마중을 혓바닥으로 음미 내 과거의 불완전함과 미숙함을 이해하는 것이다. "살러 들어와 죽어나간 자의 집에 당도했다 / 탱자나무를 전지하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 바닥을 뒹구는 탱자들이 쭈글탱이가 되어 있었다(중략) / 폐암을 앓는 그의 신음을 재생하고 있었다 / 토해낸 매연 찌꺼기를 바람이 채가고 있었다(중략) / 노간주나무 그림자로 창고 벽에 재현하고 있었다 / 마당의 전깃줄에서 질끈 눈을 감았다 뜬 / 그의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밤의 밀레' 일부) 우리 모두 가지가지의 삶이지만 최종은 죽음(고독)일 게 분명하다. 죽음에 대한 인식과 잃어버린 박동을 되살리는 작업을 통해 이윤학 시인은 그것이 결코 소멸과 상실이라고 말하지 않는 듯하다. 홍용희는 해설에서 “비관적 감정의 과잉 분출 대신 관조의 거리를 견지”한다고 했다. 덧붙이자면 화자 자신의 내적 세계까지도 관찰자적인 관조의 거리를 유지한다. 그리하여 과거의 정지된 이미지가 아니라 현재와 교감하는 서사적 상황을 끌어내 ‘시의 문법이나 효능’따위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저절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온기 가득한 얼굴로, 나보다 더 오래 다가와서 말이다. 기명숙 시인은 전남 목포 출신이며,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몸 밖의 안부를 묻다>가 있다. 현재 강의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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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22 17:1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진숙 작가, 조재형'말을 잃고 말을 얻다'

어릴 적 고향 마을에는 점방이 두 개 있었다. 막걸리 한 주전자, 환희 담배 한 갑, 성냥 한 갑 등은 윗뜸에 있는 점방을 이용했고 밀가루나, 갱엿, 사카린 등은 아랫뜸 점방을 이용했다. 그곳엔 어린 우리들이 좋아하는 눈깔사탕, 달콤한 팥 맛이 나는 하드(아이스크림), 쫀드기 등 먹을거리도 풍성했고 풍선이나 뽑기, 고무줄 등 놀잇감도 많아 어린 날의 나에게 점방은 신비스럽고 오묘한 마술가게 같은 곳이었다. 지금도 ‘점방’이란 말은 마냥 설레는 마법의 단어다. 이 단어로 인해 어렵고 복잡한 법의 세계가 친숙하고 친근하게 진열된 수필집을 만났다. 《말을 잃고 말을 얻다》이다. 삼거리에서 점방을 운영하는 어머니한테 가난과 고난의 덕목을 이수한 조재형은 수사관, 법무사, 시인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그의 두 번째 수필집 《말을 잃고 말을 얻다》는 「지나간 오늘」, 「법과 문학 사이에서」, 「그놈의 인권」, 「법무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60편의 수필은 ‘삼거리 점방’으로 시작된다. 문학의 원천이었을 고향과 어머니와 형제와 이웃들의 이야기가 애절하게 그려져 있다. 남편을 잃고 홀로 생계를 꾸려가는 어머니의 애환과 억척스러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손이나 이웃들에게 잠자리나 먹거리를 넉넉히 제공한 푸근함과 정이 삼거리 점방 가판대에 있다. 읽다 보면 우리를 키워낸 고향과 어머니와 형제들, 이웃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무엇보다 멀고 낯설게 여겨지던 법의 세계를 문학으로 버무려 놓아서 문학과 법의 거리감이 해소된다. 작가는 사유를 키우는 힘을 문학에서 찾는다. “악은 악에서 나온다기보다 평범한 사람의 무사유에서 나온다.”는 일침을 가하며 깊이 사유하는 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십수 년을 법전 힘을 빌려 범인을 쫓던 수사관에서, 사전의 힘을 빌려 은유를 좇는 시인으로” 문학의 쓸모를 찾아내 법무사의 터전에 적용한다. 비유가 주는 유익이 법이 집행되는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한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사유하라고 역설한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목숨 한 그루 꺾는데 몇 발의 저주가 필요한지. 하지만 나는 모릅니다. 기도를 사다리로 사용하면 신이 낮은 데로 임할 수 있는 줄은. 나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말을 비수로 꽂으면 라이벌이 폭삭 무너지는지. 하지만, 나는 모릅니다. 숲 속의 새들은 어디서 울음을 채워 오는지.”〈「신지식인」중에서〉 작가는 수사관과 법무사로서 만났던 여러 유형의 삶들을 시인의 눈으로 읽어준다. 때론 측은한 마음으로, 신의 자비를 의존한 너그러움으로, 그늘에 빛을 모아 보내기도 하고 약자의 약점을 보완하기도 한다. 날카롭고 낯설며 멀고 어려운 법의 세계를 예리하면서도 따스한 시인의 눈으로 재해석하면서 삶의 자세를 점검하게 한다. 약자들의 아픔과 설움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시인에게서 그 옛날 점방에서 피어나던 이야기들의 애환을 비추어 볼 수 있다. 수사관에서 법무사로, 다시 더 낮은 자세로 시인의 마음으로 약자들의 비극을 어루만지는 점방인 셈이다.이 수필을 읽는 독자는 어떤 말을 잃어야 하고 무슨 말을 얻어야 하는지 사유하며 ‘오늘을 사는 어제의 당신’이 될 것이다. 우리의 철학은 안녕한지 멈추어 살펴볼 수 있는 공간, 《말을 잃고 말을 얻다》로 초대한다. 이진숙 수필가는 전직 국어교사로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으로 등단했다. 최명희문학관에서 '혼불' 완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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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5 18: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은영 작가, 서철원 '달의 눈물'

동북 면의 시골 무사였던 이성계는 고려를 지키는 장군이 되었다가 새로운 나라 조선을 개국했다. 그 격동의 시간을 그는 어떻게 견뎠을까? 그의 마음속에 수없이 요동쳤을 욕망과 두려움과 흔들림이 궁금해서 경기전에 있는 태조 이성계 어진을 보러 갔다. 우리 전통 초상화는 터럭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라고 했고, 겉모습뿐만 아니라 인격과 내면까지 그려야 한다고 했으니 어진을 꼼꼼하게 뜯어보면 뭔가 알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어진 속 태조는 푸른색 곤룡포와 익선관을 쓰고 있었다. 귀밑머리와 수염이 하얗고 눈썹 위 사마귀까지도 고스란히 그려낸 걸 보니, 본 모습 그대로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나이가 들었어도 정면을 응시하는 그의 운동자는 흔들림이 없었고 굳게 다문 입술은 굳은 의지를 드러내는 듯했다. 하지만 초상화만으로 그의 내면을 짐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헛헛한 마음으로 하릴없이 돌아왔을 때 서철원 작가의 <달의 눈물>을 만났다. 작가는 고려 시대 무신의 난(1170년)부터 태조 이성계의 죽음(1405년)에 이르는 긴 시간의 서사를 소설 속에 담았다. 200년을 훌쩍 넘는 시공간을 물 흐르듯 넘나드는 자연스러운 전개와 굽이굽이마다 피어나는 이야기가 감탄스러웠다. 칼과 한 몸이 되기를 바랐던 이성계는 홍건적을 물리치고 공민왕에게 ‘무신의 달’이라는 별호를 받는다. 고려라는 세상을 비추는 한 줄기 희망 같은 달이 이성계였다. "무신 이성계의 앞날은 무겁고 가혹했으나 별호가 품은 달의 품성은 무사와 상반된 부드러움과 온화함을 품고 있었다. 이성계는 아늑함을 딛고 칼끝처럼 일어서는 무사의 몸을 달의 감성으로 잠재울 줄도 알았다." 작가는 칼과 한 몸이 되고 싶었던 이성계의 열망과 고뇌를 절절한 문장으로 되살려냈다. 문장으로 만들어가는 사유의 세계가 매력적이어서 절로 몰입이 되었고, 책을 읽는 동안 가슴을 파고드는 문장에 빨려들어 수없이 밑줄을 그었다. 혼백을 앞세워 이성계의 꿈속으로 들어온 견훤이라든가 흡혈 무리를 쓸어내는 바람의 사제, 정몽주의 딸인 시간을 삼킨 아이 누오는 또 하나의 축이 되어 작품을 이끈다. 그들이 주는 긴장감 때문에 책을 놓을 수 없었고 신비로워 자꾸만 눈길이 갔다. "백제든 고려든 한 자락 땅에서 나고 자라며 무너진들 다시 들어서는 게 나라인 것이지. 그것을 깨닫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이승에서 허비했어." 책을 덮으면서, 고려의 장수였던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 조선을 연 것은, 무너진 백제를 추억하는 견훤의 말처럼, 달이 기울면 다시 차오르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은영 동화작가는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통일 동화 공모전과 이다 생명문화 출판 콘텐츠 공모전에서 상을 받고(공동수상), 전북아동문학상과 불꽃문학상을 수상했다. 2022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발표지원)을 받았다. 그의 저서로는 <책 깎는 소년>, <으랏차차 조선 실록 수호대>, <열 살 사기열전을 만나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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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08 17:3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근혜 작가, 최기우 ‘쿵푸 아니고 똥푸’

어린이희곡 <쿵푸 아니고 똥푸>는 ‘기똥차게’ 재미있다. 원고지 150장 정도의 분량이지만, 순식간에 읽힌다. 그러나 희곡은 낯선 장르이고, 연극 대본이라는 특성 때문에 ‘읽는 재미’를 아는 이가 많지 않다. 최기우 극작가는 이런 인식을 깨기 위해 자신의 희곡을 꾸준히 출간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어린이의,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만을 생각한 희곡으로 폭을 넓혔다. 동명의 동화를 각색한 어린이희곡 <쿵푸 아니고 똥푸>(문학동네·2023)에는 자신이 처한 난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며 씩씩한 아이로 성장하는 두 편의 희곡이 있다. 얼굴이 까맣다고 놀림 받는 탄이가 화장실에서 만난 똥푸맨에게 똥은 더러운 게 아니라 위대하다는 교훈을 얻는 ‘쿵푸 아니고 똥푸’와 뜻하지 않게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걸게 된 생쥐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다룬 ‘라면 한 줄’이다. 동화와 희곡의 큰 줄거리는 같지만, 희곡의 느낌은 분명히 다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흥 나는 대사와 인물의 행동이 눈에 선한 지문, 대사와 지문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운율이다. 의성어와 의태어를 넣은 노랫말이 한 예다. 생쥐들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 위해 가는 장면에서 ‘쪼르르, 쪼르르, 쪼르르’, ‘후르륵 라면집 지나 후후짭짭 후후쩝쩝’, ‘고슬고슬 떡집 지나 찰떡찰떡 쑥떡쑥떡’, ‘빵빵한 빵집 지나 앙금앙금 엉금엉금’과 같이 노랫말 같으면서도 시 같은 대사는 희곡의 재미를 몰랐던 이들의 오감을 번뜩이게 한다. 소리 내 읽다 보면 ‘내 맘대로 작곡가’가 되고, 가사 일부를 바꿔 ‘내 멋대로 작사가’가 될 수 있어 더 즐겁다. 모든 인물이 중요한 인물로 바뀐 것을 확인하는 것도 특별한 재미다. 동화는 탄이와 똥푸맨이 이야기를 이끌지만, 희곡은 이야기를 더 넣어 작은 역할이었던 할머니·엄마·선생님·친구들 모두 자신만의 갈등구조가 있고, 그것을 해결하게끔 했다. 탄이를 놀리던 친구들은 서로를 이해하며 자신의 말과 행동을 반성하게 됐으며, 아빠 병간호만 하던 탄이 엄마는 밝은 성격을, 할머니는 며느리의 마음을 살필 줄 알게 하며 인물의 개성을 또렷하게 했다. 무대에서는 작은 역할이 없고, 모두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또한, 화장실 장면에서 탄이의 복장이나 물건 활용 등 작고 사소한 부분까지 작품 속 모든 말과 행동에 분명한 이유를 넣었다. 등장인물의 등·퇴장에 따른 이야기 구조의 변화도 눈여겨볼 만하다. 가게명, 음식명, 사건, 표정, 상황, 감정 등 모두 것을 구체화했으며, 독자가 쉽게 바꿔서 상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희곡이 ‘독자와 함께 쓰는 혹은 관객과 함께 만드는 진행형 문학’인 것을 증명한 예다. “배우처럼 읽고, 연출이나 무대 스태프처럼 생각하세요. 노랫말이 나오면 흥얼거리면서 빠르게 느리게 소리 내 읽어보세요. 자연스레 가락이 생깁니다. 춤이 나오면 슬쩍 엉덩이와 어깨를 들썩거리세요. 독자가 배우가 되고, 연출이 되고, 가수가 되고, 작곡가가 되고, 춤꾼이 되는 놀라운 변신을 경험하실 겁니다.” 최기우 극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당부의 말에 희곡을 제대로 읽는 방법이 모두 담겨 있다. 이제 기똥찬 희곡의 세계로 떠날 준비를 할 때다. 김근혜 작가는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동화 <다짜고짜 맹탐정>과 <봉주르 요리 교실 실종 사건>, <유령이 된 소년>, <나는 나야!>, <제롬랜드의 비밀>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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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01 18:0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경옥 작가, 가와무라 겐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이런저런 이유로 책장에는 사 놓고 읽지 않은 책이 많다. 출판서 서평만 보고 이끌려 사 놓은 것을 비롯해 다른 사람의 소개로 사 놓은 것 등 책을 사 놓은 이유도 다양하다. 그중 제목이 주는 호기심 때문에 선택한 것도 있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이 그것이다. 뭔가 소중한 게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당황하며 감정을 추스르는 기간이 상당히 필요할 것이다. 소중하다는 건 자신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을 테니까. 물론 소중하다는 기준은 주관적인 개개인의 가치라는 걸 전제하면서 말이다. 주인공은 서른 살 젊은 청년이다. 어느 날 갑자기 말기 암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죽음이라는 걸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주인공 앞에 악마가 나타난다. 세상에서 뭔가를 하나씩 없애면 하루라는 시간을 더 연명하게 해준다는 황당한 거래를 제안한다. 주인공은 생각할 것도 없이 그 거래를 받아들이고 처음에 없앨 것으로 전화를 선택한다. 필자도 전화 없는 세상에 살아봤지만, 지금은 손안에서 휴대폰이 없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 휴대폰이 단순한 전화 기능만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떠올리게도 하고, 관계를 연결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구이기도 해서다. 전화는 어쩌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린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것일 텐데, 없앤다는 건 불편을 넘어서는 일이다. 전화를 없애므로 주인공은 하루의 시간을 연명할 수 있었다. 둘째 날, 악마는 다시 나타나 또 뭔가를 없애라고 요구한다. 주인공은 영화를 선택한다. 영화는 인간의 삶에 많은 부분의 정서를 담당하고 있다. 철이 채 들기도 전부터 우리는 영화와 친밀하게 관계를 맺는다. 그만큼 영화는 우리 삶에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영화를 걷어버린다면 과연 어떤 세상이 될지는 가늠할 수가 없다. 주인공은 영화를 없애기로 하면서 영화와 관련된 것을 떠올린다. 지금은 사라진 DVD 가게에서 일하는 친구와 영화관에서 일하는 첫사랑까지. 주인공은 전화를 없앤 후 상념에 빠진 것처럼 영화를 없애고 고뇌에 빠진다. “소중한 것 대부분은 잃어버린 후에야 깨닫는 법이다. 라고 어머니는 영화를 보면서 자주 말했었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지금 나는 영화를 잃는 게 너무 슬프고 너무 애달프다. 난 왜 이렇게 제멋대로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잃는 걸 알아챈 순간, 수많은 영화들이 얼마나 나를 지탱해주고 형성시켜 왔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내 생명이 아깝다.” 자신의 생명이 아깝다.라는 주인공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니까. 악마는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 집요하게 세 번째, 네 번째 없애야 할 것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예상치 않은 선택도 한다. 단 하루라도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려고 애를 쓰지만 어느 순간 타자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한다. 결국 주인공은 생명 연장 시도를 멈춘다. 없애야 할 것이 무엇인지, 왜 멈출 수밖에 없었는지는 책을 통해 접하기를 바란다. 이 책은 뭔가를 잇달아 소멸시키지만 동시에 우리 내면에서 잊고 지냈던 소중한 가치들을 되살려낸다. 우리는 누가 등을 떠미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과잉 착취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로 인해 여유롭게 생각하는 삶은 자취를 감추고 서서히 소멸해 가는지도 모른다. 주인공처럼 어느 날 갑자기 말기 암 선고를 받는 것처럼. 깊어가는 가을에 다시 한번 정신없이 살아가는 궤도에서 벗어나 내가 버릴 수 없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이경옥 동화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두 번째 짝>으로 등단한 이후, 2019년 우수출판콘텐츠제작지원사업에 <달려라, 달구!> 선정됐다. 또 그는 2023년 한국예술위원회 ‘문학나눔’사업에 <집고양이 꼭지의 우연한 외출>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저서로는 <달려라, 달구!>, <집고양이 꼮지의 우연한 외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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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25 16:4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황지호 소설가. 황보윤 ‘광암 이벽’

이벽(李檗 1754 ~ 1785)은 선교사가 없던 조선에서 스스로 천주교에 입교한 양반이다. 소현세자를 보필했던 6대조 할아버지 이경상이 ‘아담 샬’로부터 선물 받은 서적을 읽으며 믿음의 씨앗을 품었다. 정약전 정약용 형제 등과 ‘천진암’에 모여 천주학을 연구하고 교리를 익혀 씨앗을 신앙으로 발아시켰다. 이승훈을 설득하여 북경의 천주교회에 다녀오게 한 뒤 그에게 세례를 받아 온전한 꽃이 되었다. ‘명례방’에서 그 향기를 멀리 퍼뜨렸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배교하지 않으면 목을 매어 죽겠다는 아버지의 뜻에 좌절하다 열병에 걸려 낙화했다. 1785년 봄이었다. 그 봄부터 100년 동안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후 수많은 꽃이 이벽이라는 구근에 의지해 피었다가 졌다. ‘광암 이벽’은 그런 이벽의 삶을 담담하고 정연한 문장으로 그린 소설이다. 잔잔한 서사를 채우는, 가을 물 같은 서늘한 문체는 믿음의 산물처럼도 느껴진다.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주문한 책은 다음 날 오전에 도착했다. 급한 일들을 미루고 찬찬히 일독했다. 이벽은 낯설었고, 역사 소설을 즐겨 읽지 않으며, 천주교는 먼 종교였던지라 더디 읽혔다. 더욱이 우리 집안은 대대로 토테미즘 비슷한 것을 믿어 감정이입이 쉽지 않았다. 어머니께서는 무병과 장수를 기원한다며 아들들이 태어날 때마다 마을 동쪽 커다란 바위에 양자로 팔았다. ‘무당’도 아니고 ‘박수’도 아닌 ‘바위’에게 아들들을 팔아넘겼던 것이다. 열 살 때, 막내아들인 내가 소에게 손목을 밟히자 ‘우마신’을 달랜다며 떡 한 말을 해서 외양간 기둥에 바치기도 했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라며 평생 성당 근처에는 가보지도 않았고 지금은 불교를 믿고 있으니 더디 읽힐 만했다. 그런 내가 머뭇거림 없이 책을 주문하여 일독한 이유는 첫째가 황보윤 소설가 때문이고, 둘째가 그 무렵 물고 다녔던 ‘처음 혹은 두려움’이라는 화두 때문이었다. 지난해 가을, 어떤 강연이 끝나고 소설가 여럿이서 밥을 먹은 적이 있다. 그 자리에 황보윤 소설가와 동석을 했다. 육회비빔밥 전문점이었는데 메뉴판을 보며 한동안 머뭇거리던 그녀가 비빔밥을 시키며 고기를 빼달라고 청했다. ‘비건’이었거나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갈비탕에 고기를 좀 듬뿍 넣어달라고 비굴하게 웃으며 주문을 했다. 맛있게 갈비를 뜯는 나를 보고는 고기를 빼달라 주문한 것을 후회하는 눈치였다. 덜어주면 될 것을 괜히 그랬다며 퍽 미안해했다. 그 연한 말이 질긴 갈비로는 채우지 못할 헛헛한 곳에 담겼다. 헤어지면서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좋은 날 차를 한잔 마시자고 약속을 했는데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다. 처음엔 첫눈이 오기 전에 연락드리겠다며 내가 먼저 약속을 깼고 다음엔 벚꽃이 지기 전에 소식을 준다며 그녀가 약속을 깼다. 다시 만날 날을 정했으나 여름이 가기 전에 연락드리겠다며 내가 또 약속을 깼고 마지막엔 그녀의 다리가 부러져 약속이 깨졌다. 첫눈이 오기 전에 만나기로 했는데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서리가 내릴 것만 같은데. 그렇게 스스럼없이 깨진 약속들이 누이 같은 사람을 가져다주었다. 밥 안 사 주는 누이, 그녀의 책이어서 머뭇거림이 없었던 것이다. ‘광암 이벽’을 읽을 무렵 작가의 길, ‘길 없는 길’을 가는 두려움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작가라는 존재는 아무도 다녀오지 않은 ‘곳’을 다녀오는 존재고, 다녀온 그 ‘별’ 같은 곳을 향한 나침반을 조각해 내는 것이 도리인데 내 사유와 문장은 그런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고 서러워할 무렵이었다. 가끔, 김시습의 시 ‘도중’이 생각나기도 했다. 눈 내리는 저녁 지평선을 향해 외로이 길을 떠나는, 가난한 나그네의 두려운 심정을 가늠하곤 했다. ‘머뭇’ 했으나 뒤돌아보지 않고 의연히 길을 나섰던 나그네. 이벽이 그랬으리라. 그녀가 그랬으리라. 황지호 소설가는 202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으로 등단했다.

  • 전시·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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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18 17: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영주 작가-하미경'수선화 봉오리를 사겠어'

하미경 시인의 두 번째 동시집 <수선화 봉오리를 사겠어>를 펼쳤다. 수선화 봉오리를 사겠어 꽃집에 가야겠어 내일 봄비가 내리면 밖에 핀 목련은 떨어질 테니까 수선화 봉오리를 사겠어 거실에 화분을 놓고 수건으로 잎을 닦아줄 거야 물도 넘치지 않게 주고 창문을 열어 환기도 시켜줄 거야 나는 얼굴도 멋지고 성격도 부드러운 아이 이 말을 꼭 전해주라고 주문을 걸 거야 봉오리가 살짝 벌어질 때 나는 화분을 들고 너를 만나러 가겠어 주문 건 말들이 너에게만 쏟아지도록 볼이 발그레한 소녀가 수선화 봉오리를 돌보는 모습,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주문을 걸었을 모습이 생기 있게 표현되어 있다. 봉오리 자체가 꿈이고, 희망이다. 화분을 건네주기 전에 할 말을 차곡차곡 넣어 놓는다. 수줍은 소녀와 수선화 봉오리의 절묘한 조화에 매료된다. 봉오리가 살짝 벌어질 때 그동안 걸었던 주문이 튀어나올까 봐 소녀는 너를 만나러 가겠다고 말한다. 하미경 시인은 부지런하다. 늘 동시생각에 빠져 앞은 보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언니, 들어봐잉! 목련 꽃잎은 떨어졌응게 수선화 봉오리를 사는 거야. 잉, 워뗘?” “좋다.” “좋아? 그럼 봉오리에다가 주문을 거는 거여. 나의 좋은 모습을 어필하는 주문 말여. 워뗘?” 하미경 시인의 ‘들어봐잉’이란 말을 할 때는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그간 쓴 동시를 마치 모노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읽어준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할 때가 많다. ‘동시가 저렇게도 좋을까?’ 설레는 그녀를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읊조리게 된다. 다람쥐는 밤이나 잣을 구해와 겨울 식량으로 먹는다며 땅에 묻고는 어디다 묻었는지 잊는단다. 그곳에서 싹이 돋아날 때면 그제야 밝혀지듯 기억하지 못한다. 하미경 시인은 절대 그런 법이 없다. “이건 별로지? 그럼 넘어가고잉?” 하지만 그녀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김장독에 김치를 저장하듯 시시때때로 독을 열어 김치를 맛보듯 동시의 깊이를 키운다. 어느 날이 되면 잘 익은 김치 한 쪽 떼주듯 내게 말한다. “들어봐잉?” 동시인으로서 그곳에 흠뻑 미치는 것조차 하미경 시인에게는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빤닥빤닥한 그녀의 이마와 상기된 볼은 늘 동시를 꿈꾼다. 지금도 다음 동시집을 채울 동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하미경 시인의 첫 동시집의 「공」이란 동시다. 굴러가야 공이지 누군가 뻥! 걷어차야 공이지 그냥 우두커니 있으면 동그라미지 하미경 시인은 그냥 우두커니 멈춰 있는 동그라미이길 거부한다. 굴러가고 뻥 차 하늘 높이 떠오른 공이길 바란다. 공만큼이나 부지런하다. 이번 시집에는 「손」이란 동시다. 땀이 나면 손수건이 되고 밥을 먹을 때면 손가락 젓가락 집는 도구가 되고 잘 가라고 흔들면 안녕이라는 말이 되지 네가 손을 잡을 때만 손이 되는 거야 찌르릉 내 짝꿍. 찌르릉, 내 짝꿍. 찌르릉 내, 짝꿍. 찌릉내 나는 아이를 내 짝꿍이라는 게 정겹다. 계속 나는 찌릉내는 교실에서 자전거를 타며 맴돌 듯 ‘찌릉찌릉찌르르르릉’ 거린다. 하미경의 동심은 찌르릉 살아있다. 김영주 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마키코 언니’로 등단. 동양일보 동화부문에서 ‘가족사진’으로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레오와 레오 신부>장편동화, <가족이 되다>청소년소설, 수필오디오북 <구멍난 영주씨의 알바보고서>를 출간했다. 현재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글 놀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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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현아
  • 2023.10.11 17:0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오은숙 작가, 서권 '시골무사 이성계'

매년 추석을 앞둔 이맘때면 '밥상머리 민심'을 잡으려는 정치인들의 기사를 자주 접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올해는 감감하다. 주변의 정치적 관심이 단식을 끝낸 야당 대표의 행보에 쏠려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야당 대표가 스무날 넘는 단식 끝에 국회에서 얻은 게 고작 체포 동의안 가결이라면 어째서 단식을 했는가. 곡기를 끊는 대신, 야당 일부 의원이나 여당과 정부가 원하는, 그들의 이해에 반하지 않는 범위에서 고개를 끄덕이다 적은 이득이라도 취하면 그만일 것을. 누군가는 열패감에 쌓여 그렇게 감정을 쏟아내었고 누군가는 지지 정당 대표의 단식이 ‘척하는’ 액션이 아니라 통과의례로 한번은 넘어야 할 산이었다며 좌절된 마음을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나는, 아흔을 바라보는 늙으신 아버지의 서운한 말 한마디에 불현듯 가부장적이었던 과거 집안 분위기를 소환한다. 더불어 마음 쓸 일이 늘어난다. 이렇듯, 사람 사는 일이 여러모로 어수선한 가운데 서평 마감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여름부터 서평할 만한 책을 찾아 읽었으나 모두 마뜩잖았다. 어떤 책은 독자의 이해 부족으로, 어떤 책은 저자의 기술 부족으로, 어떤 책은 시의에 맞지 않아서, 어떤 책은 너무 가볍거나 너무 무겁다는 이유로. 여전히 추천 책을 찾지 못해 초조했던 9월의 초입이었다. 최명희 문학관에서 <‘남민’의 시대>라는 주제로 열린 80~90년대 전북 민족 문학의 운동성에 대한 특강을 들었다. 그곳에서 서권(본명)이라는 소설가를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시인(서소로)으로도 활동한 그는 고등학교 교사였으며 오래전에 작고하였고 역사 장편소설인 <시골무사 이성계>는 지인들의 노력으로 출판된 것이었다. 책날개와 발문(신귀백/영화평론가)을 통해 저자의 왕성한 창작활동과 또 다른 이력을 만날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열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고개가 숙여지는 대목이었다. 본문은 ‘성계’로 지칭되는 이성계가 남원 일원에서 아지발도를 수장으로 한 왜구를 토벌하는 내용이다. 황산대첩으로 알려진 전투를 단 하루의 서사로 하여 그 안에 중앙군과 사병인 가별치(초)의 차별, 신돈을 통해 드러낸 공민왕의 개혁의지, 박순이와 미즈류를 통해 희화되어버린 사랑까지 멋들어지게 심어 놓았다. 소설 안에 성계의 역성혁명에 대한 당위는 없었다. 주입하는 사상이 없으니 읽는 동안 자유로웠다. 고려 말 부패한 정권과 원의 횡포로 인한 삶의 신파도 없었다. 작품 후반 어디선가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으나 아슬아슬 넘어갔다. 감정의 최고조에서도 <38쪽. 그 피 묻은 가죽 위에 볕살이 또렷이 빛났다.>와 같은 정도의 먹먹함을 유지했다. 그것이 오히려 아름다웠다. 오늬(화살 머리를 활시위에 기도록 에어 낸 부분), 줌통(활의 한가운데 손으로 쥐는 부분), 전통(왕에게 바치는 보고문인 전문을 넣던 통), 경번갑(미늘을 사이사이 쇠고리를 얽어서 만든 갑옷), 관솔불 같은 단어들은 생소하여 사전을 찾아야 했다. 한편으로, 고증으로 엿볼 수 있었던 작가의 장인 정신에 대해서는 읽는 내내 숙연하기도 했다. <시골무사 이성계>는 쉽게 이야기 할 수 없는 귀한 책이지만 문장을 다루는 솜씨가 그에 미치지 못하여 부족한 마음을 웹서핑으로 달랜다. 운 좋게 검색된 기사의 일부로 두서없는 책 추천을 마치련다. '고려군과 왜군의 군대 진영, 전법에 대한 묘사와 무기 사용법, 전투가 막바지에 치달을 무렵 수 백개의 말이 떠오르는 풍등 장면 등은 압권. 무사들의 세세한 전투 장면은 웬만한 내공이 아니면 묘사 불가능한 지점이고, 전쟁신을 읽을 때 화살을 쥐는 들숨과 당겼던 살을 푸는 날숨은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책을 내려놓지 못하게 할 만큼 박진감이 넘친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 2012년 3월 20일자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이화정 -' 오은숙 작가는 202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공저로 <1집 스마트소설>, <지금 가장 소중한 것은>, <2021 신예작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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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04 17:2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작가, 이나가키 히데히로 '풀들의 전략'

옥수수 농사를 지었던 적이 있다. 처음 농사를 짓다 보니 뭐부터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더니 여러 작물 중에 옥수수를 심어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씨앗을 구해 땅을 파고 옥수수를 심었다. 잔뜩 기대하고 가보니 풀만 무성했다. 분명히 옥수수가 있어야 하는데 어디를 둘러봐도 옥수수는 보이지 않았다. 사진을 찍어서 아는 이에게 물어봤더니 올해 농사는 포기하라고 했다. 지금까지 싹이 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속은 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혹시나 하고 다시 가보았다. 무성한 풀 사이로 100여 개 싹이 난 옥수수가 거기 있었다. 간혹 풀을 베기는 했으나 풀이 자라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팔 것도 아니고 신경 쓰지 말고 제초제도 쓰지 말고 건달농사나 지으라는 조언이 따라왔다. 그래도 초가을 무렵, 제법 먹을 만큼 옥수수를 수확했다. 자연의 생명력이 신기하기도 하고 놀라웠다. 작년의 실패를 거울삼아 올해는 모종을 사다가 직접 심었다. 풀이 나기 전에 인터넷을 검색해서 식초를 기반으로 한 제초제까지 만들어 뿌렸다. 당연히 수확에 대한 기대감은 더 커졌다. 올해는 유난히 덥고 비가 많이 왔다. 몇 번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일이 생겼다. 결국 중간에 한두 번 간 걸로 만족해야 했다. 나중에 가보니 옥수수는 흔적도 없고 풀만 무성했다. 작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풀이 자라 있었다. 폭염과 장마 때문이었겠지만 다 자란 풀이 무서울 정도였다. 깨끗이 마음을 비우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모종을 심고 풀을 베며 보냈던 시간이 허공에 날아간 느낌이었다. 그때 이 책이 생각났다. 이 책은 일본인 저자 이나가키 히데히로가 주변 식물에 대해 관찰을 바탕으로 쓴 잡초 이야기이다. 당연히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이 그의 주된 관심대상이다. 이 책에는 평소 우리가 흔히 보는 다양한 식물 이야기가 과학적 원리를 기반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일부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도 있고 전문적인 부분은 이해가 안 가기도 한다. 특히, 관심 있게 읽었던 부분은 우리가 흔히 꽃무릇이라고 부르는 석산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맘때쯤 한창 산이나 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식물이다. 이 식물이 구황작용을 한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우리에게 친근한 쑥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제비꽃, 광대수염, 질경이, 타래난초, 메꽃, 계요등, 고마리 등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마다 많은 분량이 아니라서 쉽게 읽힌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다면 그동안 무심히 보았던 잡초가 이렇게 다양한가에 놀라고, 그 식물에 얽힌 이야기를 접하면서 다시 한 번 감탄하지 않을까 싶다. 올해 폭염과 장마 앞에 풀의 강인한 생명력에 완패한 나로서는 풀들의 전략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책이었다. 누군가 이 책을 접하면서 잡초의 생명력과 그 매력에 빠지면 좋겠다. 내년 농사를 기대해 본다. 장창영 작가는 전주 출신으로 20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불교신문·서울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돼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시집으로 <동백, 몸이 열릴 때> 와 문학이론서 <디지털문화와 문학교육>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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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20 17:50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형미 시인, 김인태 '어쩌다 외교관의 뉴욕 랩소디'

인문학의 위기를‘인간의 위기’, ‘인류의 위기’라고 말한다. 인간의 문제를 과학이나 기술, 또는 과학적 방법으로는 다룰 수 없는 문제라고 볼 때 맞는 얘기라는 생각이 든다. 흉기를 들고 길거리에서 난동을 부리는 등의 사건과 사고가 부쩍 늘고 있는 것도 예삿일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시점에서 군산 출신 은파 김인태 작가의 『어쩌다 외교관의 뉴욕 랩소디』(2023, 대경북스)는 우리에게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AI가 인간의 자리를 대신해가고 있는 요즘 같은 때에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지극히 철학적인 부분을 담고 있는 에세이기 때문이다. 앙투안 드 셍텍쥐페리의 그 유명한 ‘어린 왕자’의 시각을 활용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무겁지 않으면서도 친근감 있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도 특이점이다. 저자는 늘 현재의 익숙한 생활에서 탈피해서 낯선 곳으로의 도전을 꿈꾸었다고 한다. 가족은 물론이고,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서 온전히 ‘나’를 위한 삶을 살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인생의 고비를 마주하게 되거나, 반복되는 일상으로 인해 무료함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해본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도전에는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설령 무리한 도전일지라도 저지르지 않는다면, 인생에서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누구라도 알 것이다. 평온한 바다는 숙련된 선원을 만들지 못하고,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저자가 외교관이 되어 뉴욕 영사관에 부임한 후, 3년 동안 뉴욕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새로운 도시 뉴욕에서의 삶은, 분명 한국에서의 평이한 일상보다 나을 거라는 기대와 함께 스스로 선택해서 만든 기회였으리라고 본다. 또한, ‘나’를 보고자 하는 갈증을 달랠 우물을 그곳에서는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어떤 확신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저자는, 결국 어린 왕자와 함께 떠난 뉴욕 여정에서 ‘내 영혼을 적셔줄 우물’을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보지 못했던 미국의 또 다른 이면을 경험하게 되면서, 한국 사회와 문화를 다시금 돌이켜보게 되었다고 한다. 중요한 점은 현재 거주하고 있는 곳에 몰입하며 살아가느냐, 아니면 이방인으로 남느냐의 문제일 테니. 그런 측면에서『어쩌다 외교관의 뉴욕 랩소디』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고정된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마음을 계발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창조도, 대자유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책을 다 읽고 났을 때는 누구든 맞닥뜨려 있는 일상에서 벗어나, 인생의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로 나아가, 묻고 답하며 자기 진화를 통해 자유를 만끽하게 될지도. 김형미 시인은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2003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산 밖의 산으로 가는 길> , <오동꽃 피기 전> , <사랑할 게 딱 하나만 있어라> , 그림에세이 <누에> , <모악산> 등이 있다. ‘불꽃문학상’, ‘서울문학상’, ‘한국문학예술상’, ‘목정청년예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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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13 17:2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헌수 작가, 박수서 '날마다 날마다 생일'

그를 처음 만난 건 대학원 모임 때였다. 수줍은 듯 구석에 앉아서 눈웃음을 치던 모습이 선하다. 대뜸 형이라고 부르며 다가온 박수서 시인. 트롯트를 온몸으로 풀어내며 부르고, 연극무대에서 연극을 하는 다재다능한 팔방미인이다. 예술로 삶을 연주하는 끼를 발산하며, 낭만가객의 풍류를 읊는 그를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늘 그 자리에서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수행하며 학교 행정의 근간을 살피는 일도 놓치지 않고 있다. 오십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는 그, 마흔 아홉은 더디게 지나가고 몸도 마음도 힘겨웠다고 말한다. 시를 못 짓겠다고도 생각했지만, 아래코를 잡아 올려 뜨개질했다는 시인의 말이 아프게 다가왔다. 수척해진 몸과 퀭한 눈이 몸으로 맘으로 앓은 흔적을 내보였고, 담배와 술 없이 쓴 시집이라는 말에 슬몃 웃음이 나왔다. 우리네 삶의 고단함이 생일날 마주한 미역국 한 그릇에 녹아내리고 다양한 축하와 덕담으로 이어진다면, 날마다 생일처럼 산다면 부러울 것이 무엇이랴. 박수서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스스로 시의 화자가 되어 시의 대상이자 시의 글감이 된 생활을 담담히 풀어내었다. 특히 이번 시집에는 세상 나이 쉰을 앞둔 중년의 육체적 증상을 통해 시적 완성을 제공하고 있다. "나무는 쓸 만한 것이 먼저 베인다지만/ 사람은 쓸모없는 것이 먼저 베인다/ 살면서 작게 적게 베인 상처를 꿰매다 놓친 바늘이/ 수북이 쌓여 나는 잣나무처럼 뾰족해졌다/ 말미잘처럼 박힌 날카로운 모양이/ 신통하게 나이테가 되었고/ 마흔 아홉 테에서 층계가 낮고 넓어졌다" (시 '마흔 아홉' 부분) 마흔 아홉이라는 나이를 ‘바람은 어깨를 반도 걸치지 않았는데’자신의 생애가 가지 많은 나무처럼 몸 한그루가 통째로 출렁댔다고 표현했다. 시집에는 만성단순치주염, 전립샘증식증, 심실조기수축, 수면장애, 불안장애, 등과 같이 마흔아홉을 맞으며 만나는 다양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견뎌내고 버텨내는 삶을 한 줄 한 줄 토로해 내었다. 살아오면서 얻은 딜레마로부터 멀리 떨어져, 익숙하고 낯익은 개념을 마주한다. 자신만의 의미를 단단하게 세우며 생경하지 않은 경험을 발견하고 있다. 삶의 서정을 스스로 마주하며 세계를 거스르거나 재단하기보다는 순응하며 그것을 믿어주고 받아들이는 삶을 말한다. 세련되지 않은 일상의 이름 앞에 생활시를 보듬고, 당연함과 낯익음, 그냥 그럴듯하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대로, 그가 전하고자 하는 시도대로 온전하게 끌어내었다. 시의 통로 속에 채집된 중년 남자의 생채기가 자신과 가족, 주변을 아우르는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세월이 준 나이테를 탄식하지 않고 꽃잎도 나이 들면 군주름이 생긴다는 상상과 함께 낯설은 시로 머물지 않았다. 누군가를 향한 노래가 되고 고백이 되어 마음의 옹이로 남은 시, 그가 온몸으로 부대끼며 쏟아낸 시, 가쁜 호흡으로 때론 조용한 읊조림으로 고백한 시, 시어의 들숨과 날숨이 꿈틀거림을 알 수 있다. 세상을 사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힘주어 말하는 그와 갑오징어숙회에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고 싶다. 김헌수 작가는 2018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삼례터미널'로 등단해 시집으로는 <다른 빛깔로 말하지 않을게>, <조금씩 당신을 생각하는 시간>이 있고, 시화집으로는 <오래 만난 사람처럼>, <마음의 서랍>이 있다. 오디오북으로는 <저녁 바다에서 우리는>이 있다. 작가는 전북작가회의 작품상을 받았으며 글과 그림을 짓고 그리며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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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06 17:3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황지호 소설가, 허부문 ‘친일의 시대’

때는 바야흐로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중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1992년이었다. 가을 소풍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난 알아요’란 노래의 ‘회오리춤’의 순서와 박자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타고난 몸치인 나를 위해 친구들은 느린 동작으로 회오리춤을 보여주며 부지깽이 같은 내 몸을 설득하려 애썼다. 석양에 그림자가 길게 눕는 늦가을 오후였다. 그림자로만 보면 회오리춤은 분명 주먹질처럼 보였다. 그리고 앞에는 선생님 한 분이 걸어가고 계셨다. 그 무렵 유행했던 공중부양과 단전호흡을 연마하신다는 선생님이셨다. 읍내 목욕탕에서 가부좌를 튼 채 공중부양을 했다는 전설의 당사자이기도 했고, 단전호흡을 이용한 ‘경락비공’으로 아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특별반’ 담임을 자청하셨다는 풍문도 있었다. 도인과 다름없었지만 선생님도 사람인지라 당신의 그림자 위로 ‘획획’ 지나가는 회오리춤을 주먹질로 오해하시고는 우리를 멈춰 세우셨다. 화가 난 선생님은 솥뚜껑 같은 손으로 우리의 귀때기를 잡고 교실로 끌고 가셨다. 영문도 모르고 매를 맞다가 끌려온 내력을 알게 된 우리는 “선생님, 그 동작은 선생님을 향한 주먹질이 아니오라 항간에 대유행하는 춤이옵니다”라고 해명을 했고 선생님께서는 노기가 조금 풀리셨는지 그 가수는 누구이며 춤의 전체 동작은 무엇이냐 물으셨다. 우리는 엉거주춤 일어나 어설픈 동작으로 대유행의 회오리춤을 추었다. 노래를 곁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알아요!’를 외칠 때 선생님의 눈이 이미 환해지셨고 ‘하! 정말 떠나는가!’에 이어 본격적으로 회오리춤을 출 때는 당신께서 오해하셨다는 것을 깨달으신 눈치셨다. 우리의 가무에 웃음을 보이셨으나 칭찬까지 하지는 않으셨다. 매 맞은 허벅지가 ‘땡겨’ 더 멋들어지게 춤을 출 수 없음이 아쉬웠다. 지금이라도 연습을 해서 칠순 때 한바탕 흐드러지게 회오리춤을 추어 여한을 달랠까 보다. 여하튼, 노래와 춤은 학생들에게 주먹질을 당한 선생님의 노여움도 풀 수 있는 힘이 있다. 노래의 힘이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노래는 왕의 강림과 집단 간 화합을 이끄는 주술적 기능을 가졌으며 잔월효성의 마음을 움직여 님의 무사 귀환과 극락왕생을 이루게도 했다. 적국의 현명한 공주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게 했으며 죽어가는 아내의 병을 치료하는 벽사의 능력도 갖추었다. 산 자의 슬픔을 달래고 죽은 자의 넋을 위로했으며 국란으로 분열된 백성의 마음을 규합하는 수단도 되었다. 오죽하면 가출한 사춘기 청소년들의 자발적 귀가를 이끌었는데 예의 그 서태지와 아이들이 부른 ‘컴백홈’이 그렇다. 나는 아직도 신문에 실린 ‘노래가 정부보다 낫다’라는 문장과 서태지와 아이들이 찍은 ‘가출 청소년 공익광고’를 기억하고 있다. 노래는 목민과 교화, 치국의 수단도 되었고 ‘프로파간다’로써 군중을 세뇌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도구도 되었다. 조선시대 ‘권계가’부터 가수 정수라가 부른 ‘아! 대한민국’을 비롯한 공화국 시절의 ‘관제가요’까지 역사도 유구하고 장르도 다양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대중계몽선전국가부’ 장관 괴멜스는 “거대한 거짓말을 계속 반복하면 대중은 결국 그것을 믿게 된다”라는 생명력이 긴 어록과 함께 국민라디오를 각 가정에 보급하여 나치의 의도하는 바를 혈관주사처럼 주입했다. 일제와 친일음악가는 어떠했던가. ‘친일의 시대’를 참고하면 친일가요와 군국가요를 통해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동시에 조선인들에게 일왕에 대한 복종과 희생을 강요했다. 노래에 비유와 상징, 선경후정 등의 문학적 기법을 동원했고 아련한 북국 정서로 침략지를 미화하여 탈향과 개척 이주를 획책했다. 어머니와 아가씨 이미지를 내세워 점령 과정에서의 만행과 점령 이후의 폭압을 희석하고 호도했다. 일본을 동경하는 노스텔지어를 가사에 담아 ‘내선일체’의 정치적 목적을 교묘하게 전파했고 점령지역의 특수성과 개별성을 가사에 반영해 대동아공영의 포석을 깔았다. 표리부동한 가사로 남경대학살을 은폐했고 아시아 침략의 야욕을 기만했다. 옥쇄라는 말로 무의미하게 죽어간 조선 청년의 죽음을 우롱했고 혈서지원가로 징병의 강제성을 왜곡했다. 이 역사적 실체를 밝히기 위해 저자는 당대의 대중가요 중, 137편의 친일가요와 군국가요를 선별해 분석했다.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와 행간의 의도, 공간적·시대적 맥락과 상황을 여연지필의 문장으로 주해했다. ‘친일의 시대’에는 일본과 화이부동(和而不同)하지 못하는 작금의 정치 현실을 암시하거나, 타국 간 갈등과 위기를 조장하여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동이불화(同而不和)의 세력들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함의되어 있지는 않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시기 일제의 식민정책을 찬양하고 점령지역을 미화한 ‘친일가요’와, 침략전쟁을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울로 왜곡하고 조선 청년의 참전과 희생을 강요한 ‘군국가요’의 실체를 밝히는 데 치중했다. 대상은 일제 강점기 대중가요이고 목적은 역사적 성찰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뜻은, 반추하고 기록하여 재발과 누범을 막고자 함이다. 뜻이 그러하므로 암시가 아닌 명시이고 함의가 아닌 표의이다. 의지가 그러하므로 기왕의 일이 아닌 당면한 현실이고 불구할 문제가 아닌 질책과 청산의 대상이다. 친일가요와 군국가요, 그리고 그것을 만들고 부른 사람들은 ‘기왕에 존재한 것이므로 언제까지나 존재’한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문장이다. 그것을 기록한 저자의 문장, 뜻과 노고도 이 책을 통해 만고의 세월 동안 존재할 것이다. 이 책의 육신은 당신의 서고에서 혼백은 당신의 마음에서 또한 그렇게 존재했으면 좋겠다. 황지호 소설가는 202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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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30 17:05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영종 시인, 신형철 '인생의 역사'

신형철의 <인생의 역사>를 읽다가, 여기까지 와버렸습니다. 가사와 해석이 있고 이왕이면 테너가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걸 보냅니다. 예이츠가 '솔리 마당 아래에(Down by the Salley Gardens)'로 다듬어 내놓은 아일랜드 민요입니다. 미성의 팝페라 임형주가 불렀고요. She bid me take love easy, as the leaves grow on the tree; 그녀는 나뭇잎이 자라는 것처럼, 사랑을 천천히 하라고 말했지요. And on my leaning shoulder she laid her snow-white hand. 나의 비스듬한 어깨 위에 그녀는 눈처럼 하얀 손을 올려놓았어요. ‘easy’를 ‘쉽게’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사전을 보면 ‘take it easy’는 ‘일을 쉬엄쉬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서두르지 말라는 말은 작위(作爲)를 부리지 말라는 말이겠죠. 상대가 필요한 것을 가만히 살펴보라는 뜻이겠죠. “릴케는‘아티카의 묘석에 새겨진 인간의 몸짓’을 보라고 권유합니다. 상대방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린 연인들의 모습을. 릴케는 그 연인들에게서 절제하는 사랑의 역설적 깊이를 보았어요. 그가 말하는 절제란 사랑이 탕진되지 않도록 가장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는 기술일 것입니다.” 허나 첫 시선의 놀라움과 창가에서의 그리움을 이겨 내고, 함께 거닐던 ‘첫’ 산책, 단 한 번뿐이던 그 정원에서의 산책을 견뎌냈을 때, 연인들이여, 그때에도 너희들은 ‘영원한’ 연인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너희들이 발돋움하며 입술을 맞대고 서로 마실 때. 아, 얼마나 그때 기이하게도 마시는 자는 그 행위로부터 멀어져 가는가! (릴케, 「두이노의 비가 中 제2비가」 중). 끌림이 비애랍니다. 사랑에 몰입하는 순간, 끝으로 달려간다고 해요. 이 매혹적인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아름다운 거리’군요. 참, 어렵습니다. 사랑 못할 것 같아요. 사랑은 내리는 눈발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뒤채지 않는, 쌓인 눈발이 햇볕과 교감하여 수증기가 되어 날아가도록 해주는 바위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요. 실존이란 어떤 존재자가 실재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실재에 순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거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좋아하는 마음을 심장처럼 숨겨 둘까, 말로 할까, 고민하는 어느 시가 떠오릅니다. 저는 눈 속에 숨겨 두라고 말하고 싶어요. 뭐,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흘러넘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을 테니까요. 후회 하나 하겠습니다. 가까이 지내라고 은행나무 암수의 손을 묶어준 것입니다. 손잡지 않아도 넉넉히 아름다웠는데 말입니다. “천사가 껴안으면 바스러질 뿐인 우리 불완전한 인간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그를 ‘살며시 어루만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사랑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자세일 것이기 때문이죠.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누구도 상대방에게 신이 될 수 없어요. 그저 신의 빈자리가 될 수 있을 뿐.” 이영종 시인은 2012년에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아르코문학창작기금에 선정되어 2023년에 첫 시집 <오늘의 눈사람이 반짝였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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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23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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