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2-20 04:38 (Sat)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영주 작가 - 우오즈미 나오코 '하모니 브러더스'

검색하다 눈에 띄는 책 표지가 있어 클릭해보았다. 소파에 앉아 있는 두 사람, 무언가 부자연스라운 모습이었다. 독특한 끌림에 아무런 정보 없이 무작정 주문했다. 그렇게 『하모니 브러더스』를 무작정 만났다. 7년 전 사라졌던 형, 유이치가 불쑥 나타나면서 가족이 저마다 모습을 서서히 드러낸다. 마치 프로타주처럼 엄마와 아빠, 형과 특히 히비키가 도드라진다. 중학생인 히비키는 중고등학교 통합과정인 중학교에 입학한 우등생이었다. 집을 나간 형으로 인해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공부는 점점 어려워져 성적은 곤두박질치지만, 불안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숨 막히는 현실을 같은 반 후토시에게 은밀한 분풀이를 시작한다. 가끔 엄마가 가꾸는 화분을 밖으로 떨어뜨려 부숴 놓는다. 유이치 형이 돌아왔다. 크림색 원피스에 허리까지 기른 갈색 머리, 오렌지색 입술과 손톱을 하고 어느 날 불쑥 나타났다. 마치 사나흘 집 나가 동생이 잠든 사이 귀가한 것처럼 형은 태연했다. 형이 돌아온 후, 엄마와 아빠는 될 수 있는 한, 서로 마주치는 일을 피한다. 엄마는 형이 목욕하고 나온 욕조를 닦고, 자기 말만 불도저처럼 한다. 엄마의 기에 눌려 자기주장이 없던 아빠가 형에게 머무는 3주 동안 말 걸지 말라고 한다. 가슴 속에 따끔따끔한 것이 어느 때보다 더 많이 굴러다니는 사춘기를 지내는 히비키는 자꾸 형이 내는 소리가 거슬린다. 모두 불편한데, 유일하게 형만 여유로운 자유를 만끽하는 것만 같다. ‘이게 바로 저예요. 아버지! 숨 막혀서 나갔지만,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돌아온 거예요. 아버지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 바로 진짜 나!’ 당당한 자기를 보이는 형과 히비키는 달랐다. 뜻대로 안 되는 공부, 남모르게 하는 화풀이 대상인 후토시, 화분. 결국 끝은 분명히 있어서 후토시가 히비키의 속마음을 알아차린다. 약속한 3주가 지나고 떠나기 전 형이 작곡한 음악은 화해로 바꿔 놨다. 집에 돌아와 가족의 소리를 주워 담은 소리로 용기를 내는 히비키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후토시에게 손을 내민다. 동네에 있는 ‘양말 공장과 스타킹공장’을 ‘남자공장과 여자공장’이라고 말하는 편견처럼 우리는 가끔 보고 싶은 대로 보려고 한다. 일방적인 시각을 모두 나처럼 볼 것이라 착각한다. 가족이니까 오히려 말 못하고, 반대로 가족이니까 걸림 없이 아무 말이나 한다. 어쩌면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사실 가족은 보이지 않는 틈새가 많을 때가 있다. 너무 더웠던 여름 한낮, 나는 아들과 너무나 다르고 같았던 얘기로 소리를 높였던 적이 있었다. 이제껏 반항 없던 아들이 슬리퍼를 신은 채 서울로 가출했다. 나는 아들의 큰소리가 화났던 것이 아니었다. 글 속에 ‘양말공장’을 남자공장이라고 하는 것처럼 일방적인 내 말만 한 것을 깨닫지 못한 대화였다. 우기니 내 말을 이해 못하는 건 당연했다. 오히려 지금에서야 아들과 잘 소통하고 있다. 형 유히치는 성정체성을 찾는 과정이다. 가족의 이해보다 자기존중이 우선이다. 자기의 진짜 모습을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환멸을 느낀다. 만약 내 아이가 성정체성으로 혼란을 겪는다면 흔쾌히 기뻐할 부모는 없을 것이다. 여기 나오는 부모처럼…. 아들이 밖에서 소변을 보지 않으려고 하루 종일 참는다는 말에, 자식 잃어버릴까 봐 수술에 동행한 부모를 뉴스에서 보았다. 내가 이해할 일보다 자식을 먼저 보는 마음이 얼마나 먼 얘긴지 알기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우오즈미 나오코의 문장은 간결하다. 얇은 부피의 책 안에 가감 없이 표현하지만 섬세하고 단출하다. 주변인물인 후토시가 살아서 움직이는 묘사는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했다. 그녀의 글에는 상처보다는 성장의 메시지가 있어서 희망적이다. 『불균형』,『원예반 소년들』,『하고 싶은 말 있어요.』,『에이 바보』 비록 찢어진 상처지만 봉합해 아물게 해주는 많은 이야기를 권해본다. 김영주 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마키코 언니’로 등단했다. 2018년 동양일보 동화부문에서 ‘가족사진’으로 신인문학상 수상했다. 동화 ‘레오와 레오 신부’와 청소년 소설 ‘가족이 되다’가 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2.06.29 16:3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박태건 작가 - 김영관 '나의 문턱을 넘다'

날이 흐리다. 반쯤 열어둔 창 안으로 습한 공기가 밀려온다. 아스팔트 도로위로 내리꽂히는, 함성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고 싶다. 비 오는 날은 따뜻한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내 앞엔 ‘갓 구운 빵’ 같은 시집이 있다. 김영관의 시집 ‘나의 문턱을 넘다’(천년의 시). 세상에 나온 지 채 보름이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시집이다. 이미 김영관 시인은 ‘박새 몇 마리 귓속에 살다’,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아’, 수필집 ‘11남매 이야기’를 냈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김영관은 대가족의 일원으로 성장하며 도시에 살지만 고향에 마음의 뿌리를 두고 산다. 농부는 땅에 묻혀도 계절이 바뀌면 다시 태어난다. 그들은 그들이 살아온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산나무에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상상력에 깃든다. 김영관의 시에는 가난하지만 희망을 잊지 않고 사는 순박한 시간들에 대한 경의로 가득하다. 도시의 생활이 각박할수록 순수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 또한 간절해진다. 이 간절한 마음을 찾아 김영관의 시심은 더욱 깊고 따뜻한 곳으로 뻗어나갔을 것이다. 시집 곳곳에 나타나는 생동감 넘치는 표현은 자연에 대한 경의로 야외에 나간 인상파 화가 같다. 김영관은 교사 시인이기도 한데 5부에 수록된 ‘시로 쓴 생기부’는 제자들에 대한 인상으로 풍성하게 그려낸 풍경화같다. 그런데 생기부에는 객관적이고 개량화된 내용으로만 채워져야 했다. 그래서 그가 제자의 인상을 정성스럽게 받아 적은 글들은 시가 되었다. 학생들이 집에 돌아간 저녁의 교무실에 홀로 남아서 생기부를 시로 쓰는 김영관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빗소리가 교실 창문을 넘어 올 것만 같다. 시집을 덮으며 카라바조의 그림 <의심하는 성 토마스>가 생각났다.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도마(토마스)에게 스승이 말했다.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그런데 제자는 정말로 스승의 몸에 손가락을 넣는다. 옷자락을 헤쳐 보이는 스승의 모습은 착잡해 보인다. 망설이면서도 상처를 만져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제자의 표정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카라바조는 흑사병 이후, 발흥하는 종교개혁의 요구와 이성주의 태동을 의심하는 도마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시를 읽고 나자 눈이 아프다. 상처를 후비는 손가락 같다. 자고나면 물가가 뛰는 세상이다.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김영관은「나무를 새기며1」에서 시 쓰는 행위는 곧 나무에 상처를 새기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는 ‘토마스’처럼, 시인은 조각도를 들고 나무에 기억의 무늬를 새긴다. 인간이 살아온 무늬가 곧 인문(人文)이다. 김영관이 보여준 가치는 오랫동안 잊고 살아왔던 오래된 가치다. ‘좀처럼 길을 내주지 않는 나무에 조금씩 새기는 시인의 길은 안 보이는 것을 상상하는 힘으로 단단하다. 김영관의 무늬를 손끝으로 따라 읽으며 올 여름은 여여하겠다. 비가 쏟아질 것만 같다. 박태건 시인은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시와반시 신인상, 불꽃문학상을 받았다. 시집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를 비롯하여 인문서 『익산 문화예술의 정신』, 『마을, 오래된 미래를 담다』, 『익산, 도시와 사람』, 『전북의 재발견』, 『전북문화지도』, 『강을 거닐다』등을 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6.22 16:3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오은숙 작가 - 김다연 '우연히 잡힌 주파수처럼, 필라멘트처럼'

『우연히 잡힌 주파수처럼, 필라멘트처럼』을 읽고 나는 자주 부끄럽고 지난한 삶에 짓눌려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곤 한다. 지병이 되어버린 무기력증은 스무 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젊은 날의 나는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어떤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고 고백한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을 외우며 무기력증을 떨쳐내곤 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시인의 고백은 내게서 힘을 잃었다. 무기력증이 엄습할 때마다 삶의 동력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몰라 버둥대다 바닥이다 싶을 때까지 내려간 뒤, 겨우 올라오기를 반복하였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던 무기력이 일상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어느 날, 김다연 시인의 시집 『우연히 잡힌 주파수처럼, 필라멘트처럼』을 만났다. 무얼 해도 기운이 나지 않았기에 시를 통해 어떤 영감을 받고 삶을 치유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책장에 꽂아져 있던 파스텔블루 표지의 『우연히 잡힌 주파수처럼, 필라멘트처럼』이란 시집이 제목처럼 내 손에 우연히 잡혔을 뿐이었다. 그렇게 펼친 시집에서 “머리와 가슴 사이/우물이 있다//생각은 짜고/감정은 차갑다//두레박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좋았으리,//그것만 퍼내면/된다”는 「시인의 말」을 접하고 순간, 멈칫했다.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그것만 퍼내면/된다”고 말하는 시인이 나를 꾸짖는 듯했다. 절망하지 않으려고 욕망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으려고 차가워진 감정. 해서, 무기력한 삶을 어찌하면 좋을 것이냐고 반문하는 것도 같았다. 어찌 살라는 것인데, 하며 다소 공격적인 마음으로 첫 시 「은행잎지전나비」를 읽었다. “새살이 밀어내는 딱지처럼 몸속의 푸른 독毒 뿜고서” 살아가고 있다 생각하면 더욱 무기력해질 뿐인데 시인은 “이 얼마나 눈부신 날개인가?”라고 말했다. “밤마다 가려운 쪽으로 기우는 나무,”가 나임을 알기에 뒤척임 없이 잠들었다가도 가려워 깨고 마는데 시인은 또 노래했다. “상처 아물리던 그늘이 날개였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울컥’을 삼키자/코뚜레가 뚫렸다”로 시작하는 「38도9부」에서 시인은 내게 보여주었다. 살아 있어 느끼는 절망과 고통 속 열병 끝에 있는 것은 무기력이 아니라고. “손가락을 내 머리에 겨누는 버릇이 생겼”다 해도 “빈 총에 쓰러져줄 줄 아는 애인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놓지 않으니 「방아쇠 증후군」은 희망이었다. 시집을 끝까지 읽고 난 후에는 무기력증이 사라졌고 “여그가 그라고 안 좋다 안 흡디요!”「뭐뎌」라며 다시, 삶을 긍정하게 되었다. 만약에 당신이 나와 같다면, 시집을 펼치고 글자를 읽어 나가자. 오독(誤讀)하여 더욱 좋았던 「아카시아」를 비롯해 「한도를 초과한 말」, 「가라앉히다」, 「정지론」 등 많은 시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문신 시인의 해설과 김유석 시인의 추천 글도 당신을 맞을 것이다. 어떤 시는 분명, 당신의 삶에 『우연히 잡힌 주파수처럼, 필라멘트처럼』 생기를 불어넣으리라 믿는다. 오은숙 소설가는 202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납탄의 무게’가 당선돼 소설가로 등단했다. 공저로는 <1집 스마트 소설>, <지금 가장 소중한 것은>, <2021 신예작가>가 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2.06.15 17:3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기우 작가 - 김병용, 문신 외 '천이두 다시 읽기'

누구나 장편소설 몇 권쯤의 사연이 있다. 그의 삶이 특히 그렇다. 그는 아물 수 없는 상처들의 의미를 추적하며 한 생을 살았다. 한(恨), 그 자체를 자기 삶으로 여기며, 우리 삶의 그늘에 드리워진 애달프고 응어리진 마음을 달래고 어루만졌다. 문학평론가 하남(何南) 천이두(1929∼2017). “도피할 수도, 망각할 수도 없는 것을 한이라고 할 때, 그 한과 익숙해지면서 그 한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길을 찾을 수는 없을까, 한국인으로서 자아를 정립하는 길을 찾을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어둠과 밝음의 경계에 드리워진 모호한 세계, 상실과 좌절과 원망과 한탄의 삭임 속에서 아련하게 피어나는 세계. 원통하고 기막힌 일들을 ‘기똥차게’ 풀어줄 한의 미학을 찾아 나선 그는, 한을 넘어서는 길을 세심하게 살펴 들려주었다. 원한에서 한탄으로, 한탄에서 체념으로, 체념에서 삭임으로, 삭임에서 화해로, 화해에서 지혜로 이어지는 상생. 민족의 한을 기록하는 일은 묵은 시대를 떨쳐버리고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는 길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했다. 전북대학교와 원광대학교 강단에 선 그는 뚜렷한 학문 세계를 추구하며 학자의 책무에 충실했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못지않게 후학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그에 대한 깊은 신뢰는 문학평론가와 판소리연구자, 교수, 소설가, 발행인, 문화예술단체 수장 등의 권위에 기대 붙여진 허명이 아니었다. 시대의 진실을 바라보는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선과 논리의 타당성, 그리고 판소리 ‘쑥대머리’와 ‘군사설움’의 흥을 아는 인간적인 멋 때문이었다. 그는 1980년대 혼란스러운 시국에도 옳은 일은 강하게 주장했고 그른 일은 어떤 압력에도 끝내 굴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우리는 숱한 의혹의 오리무중을 겪으며 살아왔다. 그런 의혹의 오리무중이 세월이 흐를수록 시간의 이끼를 뒤집어쓴 채 민족사의 바른길을 곳곳에서 가로막고 있다. 올바른 일에 대한 국민적 냉소주의와 미래에 대한 집단적 허무주의는 여기서 온다. 이런 모든 병적인 요인은 이제 제거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공명정대한, 정의와 진실이 일월(日月) 같이 살아나는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천이두는 삶을 작품에 투영하는 단순한 증언자나 기록자가 아니라 특별하고 내밀한 삶의 진실을 파헤치는 연구자다운 연구자, 작가다운 작가였다. 자신의 문학을 일으킨 텃밭의 소중함을 알고, 이곳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며, 고유한 것을 찾아 특화했다. 정의와 평등, 균형과 조화가 어느 때보다 서러운 지금, 천이두의 삶과 시대 의식과 문학적 관심과 비평 세계를 다시 새기고 널리 알리는 일은 그래서 더 절실하다. 김미영•김병용•김영미•문신•박태건•서철원•임명진•최동현•현순영 등 후배 연구자들이 웅숭깊은 그의 비평 세계를 되짚어본 『천이두 다시 읽기: 한을 넘어 비평을 넘어』(모악•2022)는 긴 호흡으로 이어질 ‘추앙’의 바른 시작이다. 이런 책은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삶을 다잡는 든든한 벗이 된다. 최기우 극작가는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했다. 전북의 역사와 설화, 인물과 언어, 민중의 삶과 유희, 흥과 콘텐츠를 소재로 무대극 집필에 힘을 쏟으며, 희곡집 『상봉』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은행나무꽃』 『달릉개』와 인문서 『꽃심 전주』 『전주, 느리게 걷기』 『전북의 재발견』 등을 냈다. 현재 최명희문학관 관장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6.08 17:20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황지호 작가 - 이근영 '심폐소생술'

반성문을 마지막으로 쓴 때는 고등학교 2학년 봄이었다. 교문에서 복장단속을 하던 선생님께서 내 두발 상태를 지적했다. 선도부원이 다가와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눈썹과 귀를 넘어선 머리카락을 무쇠 가위로 댕강 잘랐다. 삐죽 솟는 까치머리를 꾹 누르고 선무당 가위질하듯 머리카락을 잘랐으니 헤어스타일이 볼만했을 것이다. 종일 고개를 숙이고 있었을 것이다. 머리카락을 자주, 쓸어내렸을 것이다. 하교를 하며 죽마고우들을 꾀어 삭발을 했다. 남원 사람이었던 장수읍 양조장 위 현대 이발소 아저씨가 ‘아따! 야들이 이제 공부를 할랑갑다.’ 하며 머리카락을 말끔히 밀어주었다. 다음날 걱정하며 등교를 했으나 별문제가 없었다. 몇몇 선생님들은 칭찬까지 해주었다. 다만 여자친구들을 비롯해 어여쁜 후배 여학생들이 사모하던 옆집 총각이 출가라도 하는 것처럼 퍽 서러워했다. 교복이 승복 같아서 더 그랬을까. 우리는 곧바로 ‘핵인싸’가 되었다. 우리를 보기 위해 막 복도에 여학생들이 꽉 들어차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였다. 라고 기억하고 싶다. 다음날 동급생들이 죄다 삭발을 하고 나타났다. 덕분에 현대 이발소를 비롯해 은혜, 창동, 홍콩 이발소가 돈 좀 벌었을 것이다. 우리들 삭발에 친구들 삭발이 더해지니 집단행동으로 보였던가 보다. 본보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는 얼떨결에 집단행동의 주동자 되어 지금으로 말하면 학폭위원회 같은 것에 회부되었다. 수업에 들어가고 싶었으나(진·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며칠 동안 운동장에서 풀을 뽑았다. 비듬 같은 붉은 먼지가 학교 운동장에 자욱하게 날렸다. ‘홍진’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그때 반성문도 많이 썼다. 반성 없는 반성문도 문장이라면 문장이니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 봄부터 지금까지, 그전에도 반성문은 학생들만 쓰는 것으로 알았다. 요즘은 반성문 대신 명심보감을 쓴다는 데 그런 것들은 모두 나 같은 불량품만 쓰는 것으로 알았다. 그 시절 선생님들이 사용했던 말처럼 티눈 같은 존재, 쥐젖 같은 놈들이라 불렸던 문제아들만 쓰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시인도, 어른도, 국어선생님도 반성문을 쓴다는 것을 이근영 시인의 시집 ‘심폐소생술’을 통해 알았다. 이런저런 껍데기 다 걷어내고 심층을 들여다보면 시들이 한결같이 반성문인데…… 배가 가라앉을 때를 대비해 심폐소생술을 익히라고 명령한, 혹은 현장체험학습과 관련된 26개의 공문서 작성을 요구한 관청 사람들, 졸업식 끝자락에 학위 수여증을 찢으며 열정, 희망 같은 것을 너무 일찍 내려놓은 청춘들, 사랑과 돈과 명예를 향한 사다리에서 미끄러진 삼류 아웃사이더들, 실내화를 대신해 신고 있던 고무신을 벗어 꽃 같은 아이의 뺨을 후려갈겼던 선생 같은 것들, 아버지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을 대신해 혹은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근영 시인이 반성문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집을 읽고 나서 알았다. 불량품으로 살아온 우리의 과거를 위해, 티눈으로 살아갈 다음 세대 몇몇 청춘들을 위해, 그래도 꿈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꽃잎 같은 것들을 위해 이근영 시인이 소주를 잉크 삼아 반성문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집을 읽고 나서 알았다. 황지호 소설가는 전북 장수 출생으로, 202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됐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6.01 22:17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작가 - 황경택 '자연을 그리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연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야생화를 보기 위해, 색다른 식물을 관찰하기 위해 자연으로 나서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덩달아 최근에 부쩍 자연을 다룬 책이 주변에 넘쳐나는 것을 느낀다. 아마 숲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해서겠지만 우리 집에도 숲 이야기를 다룬 책이 하나 둘 쌓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예전에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거나 글을 쓰고 싶었다는 이들의 의외로 많다. 누구나 어린 시절 벽에 한 번쯤 낙서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피폐함에 찌들다 보니 어느새 꿈은 사라지고 후줄근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허무해하기도 한다. 그래도 가끔 삶에 찌들 때마다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충동이 혹시 일어나지 않았던가. 사실 나도 그런 부류의 사람 중 하나였다. 이 책은 당신의 기억 저편에 자리 잡고 있던 어린 시절의 꿈에 다시 불을 지피기에 충분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 황경택은 만화가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생태놀이 코디네이터이자 생태 관련 책을 여러 권 낸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신문과 잡지에 만화를 연재하다가 우연히 숲을 만난 이후 그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10년 넘게 <황경택의 생태놀이 연구소>라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뚝심 있게 그 자리를 지켜왔는가를 알 수 있다. 황경택의 『자연을 그리다』는 자연 관찰과 이 결과물을 그림으로 표현해내는 방법을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은 그림에 대해 막연하게 두려움과 경외감을 가졌던 이들이 그동안 잊고 지내던 자연 앞으로 한 걸음 나설 수 있는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책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저자가 직접 그린 꽃과 나무를 다룬 세밀화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들풀부터 나무, 그리고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의 소재까지 그림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저자는 펜으로 그려낸 따뜻함과 섬세함으로 자연을 속속들이 이해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특히 내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부분은 “모든 그림에는 이야기가 있다.”라는 구절이었다. 그렇다 우리 삶도, 그림도 이야기를 빼면 재미가 없다. 평범한 그림도 이야기가 곁들여지면 다시 한번 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느낌은 푸근함과 풍요로움이다. 아마도 이 책을 다 덮고 나면 당신도 책을 따라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어질지 모른다. 나 역시 덕분에 화방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한참 고생했다. 가끔 우리는 우연의 힘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내가 그랬듯이, 이 책이 당신이 삶의 뒤켠으로 밀쳐두었던 ‘그림’이라는 매체를 바탕으로 자연에 성큼 다가서게 해주리라 믿는다. 올해가 끝나갈 무렵, 당신이 자연을 따라가며 그리워하고 감동했던 흔적이 멋진 그림으로 환하게 변할 수 있기를 응원한다. 장창영 시인은 전주 출신으로 20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불교신문·서울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돼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시집으로 <동백, 몸이 열릴 때> 와 문학이론서 <디지털문화와 문학교육> 등을 펴냈다. 그동안 다녀온 여행기를 여행잡지 <뚜르드 몽드> 에 연재하고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5.25 17:4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작가 - 존재의 구멍, 찬란함의 무늬

찬란한 것은 짧다. 맹렬한 녹음이 도착했다. 왜 살아야 하는가? 근본적인 몇 다발의 의문이 빛 그물에 걸린다. 척박한 대지 음울한 하늘, 지상의 꽃들을 찬양하려면 지구의 감각에 기댈 수밖에 없다. 청소년은 백인백색의 세계와 맞닥뜨릴 때 성장한다. 학교와 집, 학원이라는 제한된 환경에서는 타자와 사회에 대한 탐구심이 깊어질 수 없다. 필자를 충격에 빠뜨린, 청소년 소설 <합체>와 <맨홀>은 그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박지리는 작가 수업을 받아본 적 없는, 문학판과 교류 없이 글만 썼다. 스물다섯에 첫 작품 <합체>를, 서른한 살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끝으로 2016년 세상을 떠났다. <합체>의 주인공은 키 작은 고3 쌍둥이 합과 체다. 체가 계도사를 만나 키 크는 비법을 전수받고 323일 동안 수련을 위해 계룡산 형제 동굴을 찾아간다. 계도사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동굴 알게 돼 도중(화나서)에 돌아오지만 결국은 개학날 교복 바지가 현격하게 줄어들어 있다. 계도사가 아닌 난쟁이 아버지가 성장 비법을 가르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의 탄력도란다. 실수로 잘못 쏜 공이 땅에 떨어지더라도 그대로 깨지지 않고 다시 튀어 오를 수 있는 힘” “쇠공이나 유리공 같은 건 아무리 강하고 예뻐도 좋은 공이 될 수 없지. 다시 튀어 오르지 않고 땅에 박히거나 깨져 버리니까”(<합체>65쪽) 진정한 비법을 듣고도 여전히 주인공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큰 공’을 쏘고 싶어 한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는 난쟁이라는 ‘도시 빈민’ 상징을 통해 사회 현실을 고발했다. 반면 <합체>의 난쟁이 아버지는 ‘튀어 오르는 공’의 비유를 통해 쪼그라든 우리에게 다시 튀어 오를 수 있다는 ‘성장 메시지’를 전한다. <맨홀>은 막을 수 없는 ‘존재의 구멍’을 탐구한다. <합체>가 코믹하다면 <맨홀>은 ‘살인을 저지른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어둡고 무겁다. 또 <합체>가 장르의 혼합을 꾀한다면 <맨홀>은 ‘의식흐름기법‘으로 맨홀을 추적해 나간다. 폭력적인 아버지를 피해 누나와 함께 헤매다 수상한 맨홀 안으로 들어가 안식을 느낀다. 뚜껑을 처음 연 날 주인공은 악몽을 꾼다. “머리에서부터 몸통 다리까지 내 몸은 점점 구멍 속으로 야금야금 먹혀 들어갔고 나는 그곳에서 빠져나오려고 필사의 힘을 다해 몸부림쳤다.(<맨홀>91쪽) 주인공은 존재의 구멍(무의식, 공허, 진실 등)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함께 들어갔던 누나는 어른이 되어 더는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을 떠난다. 존재의 구멍은 본질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누구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각기 삶의 의미를 규정하면서 벗어난 것처럼 연기를 하는 것이다. 즉 <맨홀>은 우리가 벌이고 있는 연극을 까발리고 있는 셈이다. “나는 언제나 인간관계란 하나라도 틀어져 버리면 돌이킬 수 없게 끝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집에서는 학대를 당하면서 밖에서는 완전 순결무구한 것만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맨홀205>쪽) 자라온 환경이나 유년기 기억은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평생을 지배한다. 주인공은 악마 같은 아버지가 사라지면 제대로 된 삶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살인에 가담함으로써 ‘폭력의 절정’에 선 것은 본질의 구멍이며 인생의 아이러니다. 읽는 내내 내러티브의 유사성이 전혀 없지만 가정과 학교라는 제도에 의해 서서히 파괴되어 가는 청소년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헤르만 헤세를 떠올렸다. 분명 고통받았을 ‘작가적 감수성’이 돌올해서일 것이다. 헤세는 “작품을 창조해내는 것은 포도주와도 같아서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라고 하였다. 어찌하여 박지리는 서른한 살 나이에 스스로 세상을 등져버렸을까! 헤세처럼 정원을 가꾸고, 낙엽을 태우며 마법 같은 글을 지속하여 헤세처럼 85세를 살다 갈 수는 없었을까! ‘존재의 구멍’을 어쩌지 못하고 삶의 끈을 놓아버린 천재 작가 박지리의 생몰이 그리하여 너무도 안타깝다. 기명숙 시인은 목포 출신으로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로 당선됐다. 글쓰기 센터, 공무원 연수원 등에서 강의 중이며 시집으로 <몸 밖의 안부를 묻다> 가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5.18 17:4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근혜 작가 - 최기우 '들꽃상여'

너와 내가 만드는 우리의 역사 10년 전, 임실필봉농악전수관 야외무대에서 하는 마당극을 볼 때였다. 극의 막바지인 상여에 노잣돈을 매다는 장면을 한창 재미지게 보고 있는데 객석에 있던 초등학생 두 명이 느닷없이 무대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배우들을 따라 상여에 노잣돈을 매달았다. 순간 숙연했던 분위기가 들썩이더니 관객들이 너도나도 상여에 노잣돈을 달았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상여꾼을 따르며 곡소리에 맞춰 춤까지 췄다. 마당극이 축제의 장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그때를 연상케 하는 작품을 만났다. 최기우 극작가의 희곡집 <들꽃상여>다. 최근 전주문화재단 오디오북사업에 선정되기도 한 <들꽃상여>는 이름이 있으나 제대로 이름 불리지 못하고 사라진 이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이름은 들꽃처럼 흔하고 가벼웠다. 관심을 받지도 주지도 못하는 처지였으니 이름이 무엇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세상이 떠미는 대로 살다 죽는 것이 이들의 운명이었다. 그런 이들이 세상을 향해 죽창을 들었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또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된다. 이름하여 동학농민혁명군이다. 작품 <들꽃상여>는 연극을 준비하는 극단의 고민으로부터 시작된다. 극단은 이번만큼은 전봉준이 아닌 색다른 인물을 발굴해 무대에 올리려 한다. 그러다 인종학 연구를 위해 일본으로 갔다가 125년 만에 전주로 돌아온 유골에 관한 기사를 접한다. 극단은 이름도, 흔적도, 기록도 없는 동학농민군을 무대로 불러들인다. 자기가 살던 집을 집강소로 내준 김제 원평의 동록개, 소년 장사 김복룡, 또랑 광대 소리쇠, 양반 김서방 등이 이들이다. 눈길을 끌만한 기록이 없는 인물을 극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극단은 새로운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익숙한 것을 버리고 낯선 것을 택했을 때 오는 불안감을 누른 건 ‘함께’라는 연대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지 싶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신분과 세대를 뛰어넘어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동학농민혁명군과 사뭇 닮았다. 작품을 읽으며 작가의 사람 보는 눈을 짐작해본다. 허리 숙여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들꽃을 보듯 세상의 언저리에 놓인 사람들을 향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가없이 느껴졌다. 덕분에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름이 없거나 있더라도 한두 줄로 기록된 특별할 게 없는 인물을 역사의 중심으로 끌어올 수 있는 역량은 글발의 힘만이 아닐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발휘되는 민중의 연대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작가의 신념이 <들꽃상여>를 탄생시켰다. “우리의 역사는 좀 더 집요한 기억과 꼼꼼한 기록이 필요하다. 실체를 드러내야 확고한 역사가 된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질 때 귀에 들리고 입으로 말하게 된다. 동학농민혁명군의 농민이 보이고 만져질 때 당당한 역사의 자부심과 긍지가 더 높아질 것이다.” 작가의 말을 통해 우리가 진정 남겨야 할 역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커다란 수레바퀴 아래에 피어난 이름 없는 풀꽃 같은 이들의 개인적 역사가 없었다면 전체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네가 있고 내가 있기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명해야 한다. “우리 모두 죽더라도 우리 이름 영원히 살 것이라. 우리 목숨의 혼불이 눈물 나는 꽃빛으로 피어나리라.” 들꽃상여를 메고 가는 길에 핀 들꽃들이 수런거린다. 이제 막 시작된 잔치에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분연히 일어서는 중이다. 곧 상여를 따라 들꽃들의 춤사위가 이어지리라. 자신들이 걸었던 길을 결코 잊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바람과 후손을 향한 아름다운 악수가 가는 걸음마다 꽃향기로 남을 것이다. 오늘, 하늘은 명징하고 바람은 서늘하다. <들꽃상여> 읽기 딱 좋은 날씨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김근혜 동화작가는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선물> 로 등단했다. 발간한 책으로는 동화 <제롬랜드의 비밀>, <나는 나야!>, <봉주르 요리 교실 실종사건> 등이 있다. 현재 전주 최명희문학관 상주 작가로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5.11 16:57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헌수 작가 - 손세실리아 '섬에서 부르는 노래'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바다의 행간을 읽는 일을 좋아한다. 바다에서 촉발되는 상상과 사유를 즐기며 소실점 너머로 사라지는 인연을 생각해본다. 복잡한 내면과 군더더기 많은 삶을 풀며, 솟구치는 파도를 바라보는 일은 매력적이다. 바다가 주는 친밀감과 날마다 접하는 삶을 뒤꼍으로 두고 여행하는 것을 즐기는 나. 제주 한 달 살기와 제주올레 에 합류하며 들썩이던 마음을 쉽사리 놓지 못하던 날이었다. 제주 동네책방올레를 하면서 제주의 책방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종달리에 있는 ‘책약방’ 다양한 굿즈 상품이 있고 호기로운 청춘의 열정이 탐났던 ‘소심한 책방’, 골목에 있던 ‘바다는 안 보여요’, 예술서적이 많았던 빨간 벽돌집의 ‘책자국’, 흰 개 광복이가 있는 ‘풀무질’ 등등. 배낭하나 둘러메고 아무 생각 없이 제주를 가면 꼭 들르던 곳, ‘시인의 집’을 빼놓을 수 없다. 정읍 출신의 손세실리아 시인이 운영하는 책방카페는 바다를 보며 멍 때리기 좋은 공간이다. 한때 카페지기와 책방지기의 삶을 살고자 했던 내게, 조천 ‘시인의 집’은 최애장소이다. 주황색지붕과 현무암으로 둘러싸인 돌담, 고양이 랭보, 깊고 푸른 노래 몇 소절이 적힌 <섬에서 부르는 노래>를 집어든다. 손세실리아 시인의 두 번째 산문집이다. 제주의 모습, 책방이야기, 문학과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뼈대란 뼈대와 살점이란 살점이 합심해 무너뜨리고 주저앉히려는 세력에 맞서 대항한 이력이 곳곳에 역력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생도 저렇듯 담담하고 의연히 쇠락하길 바라며 덜컥 입도를 결심하고 말았던 것인데요. 이런 속내를 알아챈 조천 앞바다 수십 수만 평이 우르르 우르르 덤으로 딸려왔습니다.” 라고 시인은 말한다. <섬에서 부르는 노래>는 시인의 삶의 노래이다. 27편의 글과 곁들인 시와 삽화들이 다감했다. 자신의 시와 다른 작가들의 이름이 호명되고 사연이 흘러나온다. 그 중에서 ‘고아의 노래’ ‘나만 알고 싶은 곳’ ‘그림에 울다’는 울림이 컸다. “별다를 것 없는 황토 빛 캔버스에 이렇다 할 선이나 색도 없이 다만 민들레 꽃씨를 솔솔 흩뿌려 놓은, 숨만 크게 내쉬어도 일제히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지나온 날의 회한과 미래의 바람이 무수히 중첩된. <민들레 꽃씨, 당신>은 내게 그렇게 들어왔다. 그야말로 기습적으로, 훅!” -89쪽, 임옥상의 그림을 만나며 눈물이 터진 이야기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우는 지극한 사랑이 아직 존재하는 구나. 이런 부모 슬하의 자녀는 사랑의 힘도 어마어마 하겠구나. 진심 어린 고백을 생의 이쪽에서 생의 저쪽으로 대신 전달하는 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천번 만번 생각해도 축복 맞다.” -195쪽, 책방에서 만난 특별한 인연이 풀어져있다. ‘고아의 노래’ 에서는 곰살궂은 딸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노래와 ‘비 내리는 고모령’을 같이 흥얼거렸다. 나도 그 안의 추임새, 그 안의 숨소리와 여전한 웃음, 그 안의 울음에 눈물콧물 범벅이 되었다. 시인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노래하듯 사랑해보고 싶어졌다. 꽂히는 노래가 있으면 온종일 그 노래만 돌려 듣는 버릇이 있다. 노래를 부르듯 시인에게 주어진 섬에서의 삶을 후렴구까지 들여다 본 기분이다. 시인의 노래는 고해성사이자 고백이고 넋두리이자 절규였다. 떠나고 다시 짐을 꾸리고 일하며 다시 쉼을 얻는 삶을 생각해본다. 여행의 지표를 꼼꼼하게 세우고 다음 행선지를 기약한다. 다른 계절의 제주를 담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래본다. 바다는 모퉁이가 없어서 숨어 울지도 못하고 계단도 없어서 핑계 삼아 주저앉지 못한다는 시인의 말이 맴돈다. <섬에서 부르는 노래>는 시인의 독창이 아니라 어느새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합창이 되어주었다. 책과 꿈꾸는 손세실리아 시인의 삶속에 기꺼이 다가가는 4월, <섬에서 부르는 노래>가 조곤조곤 들리는 조천 앞바다로 떠나도 좋겠다. 김헌수 시인은 전주 출생으로,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삼례터미널’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다른 빛깔로 말하지 않을게>, <조금씩 당신을 생각하는 시간>, 시화집으로는 <오래 만난 사람처럼> 등이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4.27 16:5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형미 작가 - 신정일 '나는 그곳에 집을 지어 살고 싶다'

유난히 마음이 편안해지는 집이 있다. 들어가면 나오고 싶지 않고, 평생을 눌러앉아 있고 싶은 그런 집. 하지만 좋은 집을 만나기는 쉬워도 정작 나와 맞는 집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우선적으로 나와 내 가족이 원하는 조건이 부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디에서 살 것인가? 최근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이자 문화사학자, 도보여행가로 익히 알려져 있는 신정일 선생이 펴낸 『나는 그곳에 집을 지어 살고 싶다』(2022, 창해)는 우리에게 그에 대한 물음을 던져놓고 있다. 가볍게 훑어내려도 좋을 것 같다고 여겼으나,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것도 사뭇 진지하기까지 한 그 질문에 당황하여서다. 선생은 이 책을 통해 전국을 누비면서 찾은 집들을 순차적으로 제시해주고 있다. 그것도 무려 30여 년에 걸쳐 찾아낸 집들이라니. 조선시대 김정호가 한반도를 3번 돌고, 백두산을 8번이나 오르내리며 「대동여지도」를 낳았다면, 선생은 평생토록 우리 국토 곳곳을 걸음하며 ‘가장 살기 좋은 집’을 찾아다닌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인지 강원・경상・제주편으로 묶인 이번 책에서 소개된 22곳의 집들의 이야기 또한 그에 못지않은 공력이 깃들어 있다. 발 딛는 곳마다 산천은 또 얼마나 수려하고 아름다운지 책속에서마저 수시로 걸음을 놓고 감상에 빠지게 된다. 그야말로 ‘살아생전에’ 나도 이런 곳에 한 번 살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곳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물론 소개된 집들의 형태는 제각각이다. 오랜 세월 비바람과 풍상을 견뎌온 천년 고찰이나 명승지에 위치해 있는 정자, 혹은 수령 4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자라는 하나의 마을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문화와 역사, 내력을 간직한 채 긴 시간을 이어져오는 곳들. 그리고 그 삶터를 영위하며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선생은 왜 그토록 평생에 걸쳐 ‘집’을 찾아다닌 것일까? 선생이 중국의 문명비평가이자 작가인 임어당을 들어 인용해놓은 문구처럼 ‘거처로 삼아 생애를 보내고자 하는 장소는 잘 선택해야’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살고 싶은 곳’이 아니라, ‘살아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는 곳’은 지기(地氣)가 살아 있고, 주변 환경에 거슬림이 없는 환경 친화적이어야 한다 등의 풍수적인 관점과는 또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곳에 살고자 하는 이의 의지와 목적에 따라 처해 있는 환경을 이겨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생 역시 ‘그렇다면 어느 곳에서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라고 되묻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선생의 『나는 그곳에 집을 지어 살고 싶다』는 아름답고, 혹할 만한 경관과 환경을 지닌 일반적인 집의 개념을 뛰어넘는다. 살고자 하는 이의 내적 동요, 혹은 사상과 철학까지도 반영하는 그런 집을 얘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사실 선생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좋은 집, 좋은 지역이 눈에 들었겠는가. 남들이 차를 타고 휘익 다녀가는 동안, 일일이 발걸음을 두었을 때 그곳에서, 혹은 그 지역에서 좋은 집과 뜻하지 않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장을 넘길 때마다 선생의 발끝에는 또 어떤 집이 있을까, 더욱 궁금하여지기도 하던 것이다. 그리고 올여름에는 책속에서 만나는 집들을 만나러 행장을 꾸려 잠깐이라도 여행을 떠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좋은 터를 만나면 100년이 편하고, 좋은 낯을 한 사람을 만나면 하루가 즐거워진다는 말을 나는 참 좋아한다. 도보여행가 신정일 선생의 『나는 그곳에 집을 지어 살고 싶다』에서 만난 집들이 딱 그렇다. 선생의 해박한 지식과 입담으로 인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드는 집들. 정말이지 그곳에 집을 지어 살고 싶다. 김형미 시인은 현재 한국지방정책 연구원, 해인사 편집국 편집실장, 진주문화관광재단 이사, 시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4.20 17:1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안성덕 작가 - 백승종 '신사와 선비'

오늘의 동양과 서양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세상을 끌고 가는 특별한 정신이 있다. 우리는 이 정신을 ‘시민 정신’이라 부른다. “서양의 시민의식 시작에 신사가 있다면 동양, 그중에서 조선에는 선비가 있었”다. ‘신사’와 ‘선비’가 사회의 윤리적, 도덕적 기준 계층이었던 셈이다. 《신사와 선비》 (백승종, 사우, 2018)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들의 길을 알아보는 책이다. 저자가 서문에 밝힌 대로 “신사와 선비는 기득권층의 대명사였다. 그들 가운데는 재벌과 권력을 앞세워 무소불위 세력을 행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신사와 선비는 동서양의 지배층으로 온갖 비리와 부정으로 세상을 망가뜨리기도 하였으나, 세상이 신사 또는 선비라 부른 크고 작은 벼슬아치들이 세상의 모범이 되기에 족한 때가 많았다.” 3부의 구성 중 1부는 신사의 역사다. 중세 기사도를 계승한 신사도가 근대 서구 시민의 교양으로 발전한 과정을 살핀다. 신사의 가치관과 태도가 서구사회의 중요한 발전 동력이었기 때문이다. 2부는 조선조 멸망과 함께 쇠락한 조선 선비의 길을 더듬는다. 선비들은 도덕적 가치를 중히 여기는 독특한 식자층이었다. 마지막 3부에서 저자 백승종은 선비정신과 선비문화가 한국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동서양의 역사를 조망하며, 우리가 나갈 길을 모색한다. 어제의 역사가 첩첩한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스테리한 내일을 살아낼 어떤 결정적인 혜안을 주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섬광처럼 반짝이는 지혜의 보석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제는 히스토리(history), 내일은 미스테리(mystery), 오늘은 선물(present)이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살아낸 어제는 이미 역사가 되었고 살아내야 할 내일은 알 수 없어 미스테리하다는 이야기이리라. 내일을 살아야 할 우리가 어제의 일,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미스테리한 내일을 살아가기 위한 좌표 확인일 것이다. 저자 백승종은 역사든 한 시대를 지배하는 어떤 현상이든 문화적 전통은 지속적으로도 단속적으로도 나타난다고 말한다. 중세 기사도에서 출발해 서구사회에 천년 시민 정신으로 뿌리내린 신사도에 비해 선비정신은 조선의 멸망으로 맥이 끊겼으나 오늘날 부활할 기미가 보인다고 진단한다.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산업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었지만 잃은 것 또한 적지 않았다. 선진 기계문명인 서양 것은 비판 없이 숭배 답습했다. 고리타분하고 후진적이라며 우리 것은 일고의 고민도 없이 배척했다. 그러나 보라 오늘날 우리 한국의 위상을, 정치적인 것은 아니겠으나 경제적·문화적 위상은 가히 세계가 부러워하지 않은가. K-반도체, K-컬처, K-방역 등 이미 세계의 기준이 되었거나 기준이 되어가고 있는 것들이 많다. 우리 내면의 선비정신을 깨워야 하겠다. 깐깐함과 고집불통은 선비정신이 아니다. 시대와 사회를 끌고 가는 것은 군왕이 아니라 그 시대에 깃든 시민 정신이다. 안성덕 시인은 전북 정읍 출생으로, 지난 2009년 전북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시집으로는 <몸붓>, <달달한 쓴맛> 등이 있으며, 디카에세이로는 <손톱 끝 꽃달이 지기 전에>가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4.13 16:3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영종 작가 - 안도현 '내게 왔던 그 모든 당신'

붉은 딸기들이 떠내려갑니다. 불어난 물에 소식도 다 쓸려 갔습니다. 그래도 상상이 한 척 남아 있군요. 잠들기 전에 건너편으로 갑니다. 그런 밤이 셀 수 있을 만큼 흘러갑니다, 어느 날 자작나무 껍질에 연서를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안도현 시인의 산문집 〈내게 왔던 그 모든 당신〉을 읽습니다. 여기와 저기가 한곳에 있는 눈을 봅니다. “놀면서 건설하고, 허물어뜨리면서 달아나고, 정착하다가 부유하는 길이 문학”이라고 합니다. 맞은편으로 넘어간 당신을 모두 건네 드릴 수는 없습니다. 높이 올라갔다 쿵 떨어진 마음 몇만 실어 보냅니다. 요즘 상실이 커도 바구지꽃은 들려 보내겠습니다. 김기현 선생은 “매화를 ‘형’이라 부르며 좋아했던 퇴계 이황 속에 가장 새롭고 맑은 것이 깃든다고” 믿으며 걷고 또 걷습니다. 나는 볼펜에 들어있는 용수철을 꺼냅니다. 나선형 역사관을 만져보고 싶어서입니다. 손가락 끝에 묻어나는 역사를 바라봅니다. 튀어 오르는 힘도 느껴봅니다. “다산 정약용이 지인들과 시사詩社를 결성하고 사철 꽃이 필 때마다 한 번씩 모여 시를 이야기하던 분위기와 자세”가 좋습니다. 그 낭만을 차마 뿌리칠 수 없습니다. “꿩을 잡을 때 콩을 미끼로 달아 낚시로 잡는다는” 박기영 시인을 생각합니다. 낚시는 물에서 한다는 생각에 꿰어있던 내가 아픕니다. 사물에는 늘 뒷면이 있다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축구 심판의 동전은 언제나 양면입니다. 절반만 맞출 수 있어 치명적인 아름다움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말입니다. 딱따구리 박사 김성호는 말합니다.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는 큰오색딱따구리의 느낌을 몸으로 온전히 느껴보고” 싶으면 함께 비를 맞으면 된다고. “버섯의 벗이 되려면 버섯보다 많이 큰 내가 먼저 버섯의 높이로 땅에 엎드리면” 된다고. pupil에는 눈동자와 제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가르칠 때 눈높이에 맞춰 마음을 구부리세요. 서로의 눈에 서로가 어립니다. 이쯤 되면 누가 가르치고 누가 배우는지 구름나무처럼 경계가 흐릿해집니다. 호기심이 인류를 저기에서 여기로 데리고 왔다고 믿습니다. 책에는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날아가며 똥을 싸는 새의 기분이 궁금해 감나무에 올라간 소년 박성우, “만 리에서 날아온 바람이 왜 폭낭(팽나무)에게 와서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지” 궁금한 강요배 화백, “가장 참혹한 현실이 어떻게 가장 회화적인 기법으로 재현”되는지 궁금한 화가 황재형,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감자꽃’ 전문)에서 보듯 왜 아이는 보이지 않는 끈을 볼 줄 아는지 궁금한 권태응 선생…… 잠들기 전에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으나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는 그 마음이 바로 시적인 것의 출발”이라는 시인을 떠올립니다. 내가 꿈꾸던 것을 상상해요. 그것이 실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뇌는 경험한 것과 바라본 것을 동일시한다고 합니다. 머지않아 상상했던 일이 내 어깨를 저쪽으로 이끌 것입니다. 이영종 시인은 2012년에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지난 2020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에 선정됐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2.04.06 17:17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준호 작가 - 김동기 '지정학의 힘'

고3 때, 모의고사에 이런 문제가 나왔다.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1885년 조선의 거문도를 점령했다. 지도에서 거문도의 위치를 찾아라. 이 사건은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두고 벌인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이었다. 2021년 8월,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마무리했다. 1989년 2월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던 소련이 10개월 전에 조인된 제네바 조약에 따라 완전히 철군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지출한 막대한 전비는 소비에트연방을 해체하는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서구열강이 아프가니스탄을 차지하려는 다툼은 19세기 초로 거슬러간다. 당시 인도를 식민지로 둔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완충지대로 설정하고 있었다. 두 나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영국의 시파워(해양강국)와 러시아의 랜드파워(대륙강국)가 첨예하게 대립한 것이다.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한반도의 분단을 지정학적으로 설명한 대목들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태평양전쟁이 끝났다. 그렇다면 패전국인 일본이 아니라 왜 한반도가 분단되었을까? 흔히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일본이 항복한 결정적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미국은 45년 3월 10일, 단일 폭격사상 최대의 사상자를 기록한 도쿄대공습을 단행한다. 이후에도 일본의 대도시들에 대대적인 폭격을 퍼붓는다. 소이탄의 살상력과 파괴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폭격 전후의 도쿄 시가지 사진을 비교하면 피해 규모가 원자폭탄 못지않음을 알 수 있다. 소련은 일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8월 9일 0시를 기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공교롭게도 미국은 같은 날 오전 11시,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그리고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은 1945년 초, 병력 체계를 변경해 8월 18일 당시 북쪽에 11만 7천 명, 남쪽에 23만 명의 일본군을 배치했다. 소련의 한반도 진입을 용이하게 하려는 조치로, 미소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게 하고 일본은 교묘히 빠져나가려는 술책이었다. 8월 15일은 일본의 종전기념일이다. 자신들의 구상대로 판이 짜졌으므로 패전이 아니라 ‘종전’이고, ‘기념일’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쟁 또한 뤼순한과 다롄항을 상실한 소련이 김일성의 요구대로 남침을 승인한 결과였다. 남침에 대해 유보적이었던 스탈린이 1950년 1월 말, 중국의 요구로 태평양으로 통하는 부동항들을 잃자 입장을 선회한 것이다. 저자는 휴전선을 랜드파워와 시파워가 충돌하여 생긴 결과물이라고 정의한다. 한국이 랜드파워와 시파워를 견제하고 통제할 역량이 없었기에 분단되었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운명은 여전히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게임 속에서 결정되고 있다. 한반도가 처한 상황에 걸맞은 속담이 떠오른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너무 식상한가. 이건 어떤가.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한 해답은 이렇다. 한국은 강대국들과 동적이고 다층적인 지정학적 관계를 맺는 한편, 그들의 관계를 살피면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논리와 전략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려면 지정학적 지능과 전략, 그리고 지정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준호 작가 이준호 작가는 소설과 동화를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할아버지의 뒤주>, <그해 여름, 닷새>, <커렉터>, <탁류의 시간> 등이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3.30 17:1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진숙 작가 - 조재형 '집은 텅 비었고 주인은 말이 없다'

심심甚深한 이야기 수필은 민낯이다. 새벽안개 걷히며 드러나는 말간 속살이다. 그래서일까? 수필을 읽다보면 만나 본 적 없는 글쓴이와 어느새 친밀해져 함께 웃거나 슬퍼하며 고민을 나누기도 한다. 또한 깨달음까지 얻는 희열도 빼놓을 수 없다. ‘시골 법무사의 심심한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조재형 시인의 첫 산문집, <집은 텅 비었고 주인은 말이 없다>가 그 주인공이다. 작가는 검찰 수사관으로 16년을 지내고 현재 부안에서 법무사로 일하면서 시를 쓴다. “산문의 소재들은 내 몸을 상하여 얻은 것들”이어서일까 ‘유도 신문, 소송, 기소, 구속, 영장, 지명수배’ 등 법률 용어가 불쑥불쑥 튀어나오지만 시적인 렌즈로 담아냈기에 서정적으로 읽히는 특별함이 있다. 수사관과 법무사로서 만났던 사람들은 애달픔이 많다. 딸 앞으로 집을 등기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노부부가 있는가하면 부모의 재산을 서로 많이 차지하기 위하여 아버지를 법정에까지 세우는 자식들도 나온다. 자식은 많으나 갑자기 쓰러졌을 때 자신을 구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몇 십만 원을 속잠방이 안에 준비해 놓고 살아야하는 할머니도 있다. 이 모든 것이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라서 더 아프고 부끄럽다.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으면서도 늘 웃는 문이 언니의 삶은 “돈에 쫓기며 왕국을 건설하기에 바쁜”우리들의 발걸음에 제동을 건다. 또 텅 비어 있고 말이 없는 집은 “어떻게 늙어가야 하고 어떻게 침묵해야 하며, 어떻게 낮아져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작가에게 자상한 아버지를 느끼게 해주신 석이 아버지. 그 어른이 사주신 자장면 곱빼기에 얽힌 사연은 독자에게 저장되어 있던 추억들을 소환한다. 아울러 ‘나는 진정한 어른인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 이처럼 66편 속에 담긴 이야기는 예리한 관찰력과 애틋한 감수성으로 바라본 심심甚深하기에 심심하지 않은 우리들의 민낯들이다. 시인에게는 신이 허락한 특별한 언어가 있다 했던가. 반복되는 잘못으로 고해성사를 하는 모습을 부객浮客, 풍객風客, 식객食客, 낭객浪客, 숙객熟客, 노객老客, 폐객弊客, 자객刺客으로까지 언어를 확장하며 보여준다. 이야기 속에 소개 된 여러 편의 시들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마음에 드는 시 한 편/낭독하면/별 한 동을/거저 분양받는 횡재이다('광고')”라는 시구는 그의 시집 <지문을 수배하다>와 <누군가 나를 두리번거린다>를 찾아 읽게 만든다. 춘분이 지났다. 꽃샘추위를 겪어낸 꽃들도 속살을 드러내며 마음껏 피어날 것이다. 머지않아 코로나19를 이겨낸 우리들도, 시 한 소절을 읊조리며 봄밤의 거리를 거니는 그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벚꽃이 정차 중이었다. 당신이 하차할 것 같아 달빛이 붐비는 봄밤을 서성이곤 했다”.('환승역에서') /이진숙 수필가 이진숙 수필가는 전직 고교 국어교사로 지난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 당선됐다. 2010년부터 최명희문학관에서 혼불 완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2.03.23 17:2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은영 작가 - 이영서 '책과 노니는 집'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이 궁금하다. 외모나 말투, 옷이나 장신구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품고 있는 생각, 꿈, 그리고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를 알고 싶다. 그건 아마도 내가 가진 아픔이나 슬픔을 꺼내 보였을 때 기꺼이 손 내밀어주는 ‘사람’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껴 읽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책 중에 개성 있고 사랑스러운 인물이 등장하는 동화가 있다. <책과 노니는 집>은 천주학 책을 필사하던 아버지가 매를 맞아 죽은 뒤 전문 필사쟁이가 되는 장이의 이야기이다. 고아가 된 장이는 책방의 심부름꾼이 되어 홀로 세상을 헤쳐 나간다. 코끼리 어금니로 만든 책갈피인 상아찌를 허궁재비에게 빼앗기고, 그걸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책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는다. 결국 필사쟁이로 성공하고 아버지가 간절히 원하던 작은 책방, ‘책과 노니는 집’을 여는 꿈에 한 걸음 다가간다. 남동생 백일 상 차려준다고 늙어 빠진 노새 한 마리 값도 안 되는 돈에 기생집에 팔려온 낙심이는 때로는 장이를 못살게 굴기도 하지만 허궁재비를 혼내주는데 앞장서 위기에 빠진 장이를 구한다. 힘겹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 걸음 한 걸음씩 꿈을 향해 나아가는 장이와 ,아픔을 딛고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낙심이는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애쓰는 요즘 아이들 마음속에 매력적인 인물로 자리할 것이다. 이 책에서 어른인 내게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홍 교리이다. 최고의 수재이며 조정의 요직이라 불리는 홍문관 교리인 그는 책방 심부름꾼인 장이에게 거침없이 속내를 내보인다. 신분은 물론이고 나이마저 따지지 않는 열린 마음을 가진 그를 보며 진정한 어른, 참스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 읽지도 못할 책을 왜 이렇게 많이 사 모으냐’는 장이의 질문에 다음과 같은 답을 한다. “책은 읽는 재미도 좋지만 모아 두고 아껴 두는 재미도 그만이다. 재미있다, 유익하다 주변에서 권해 주는 책을 한 권, 두 권 사모아서 서가에 꽂아 놓으면 드나들 때마다 그 책들이 안부라도 건네는 양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지. 어느 책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는 것도 설레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저 책이 궁금해 자꾸 마음이 그리 가는 것도 난 좋다.” 홍교리가 책을 대하는 마음이 어쩌면 나와 똑같은지 책을 읽는 내내 감탄하곤 했다. 때로 작가보다 독자로 살고 싶은 나는 읽고 싶은 책을 사 모으며 행복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서란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의 인물에 공감하면서 사람을 이해하고 나를 반추해보는 것, 이것이 내가 책 속에 빠져서 살고 싶은 이유이다. /장은영 동화작가 장은영 동화작가는 200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통일동화공모전에서 수상했다. 또 『으랏차차 조선실록수호대로』 전북아동문학상과 불꽃문학상을 받았다. 『마음을 배달하는 아이』, 『내멋대로 부대찌개(공저)』, 『책 깎는 소년』(2018,전주의 책), 『으랏차차 조선실록수호대』(2020,전주의 책) 『설왕국의 네 아이』, 『바느질은 내가 최고야』를 썼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2.03.16 17:20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아현 작가 - 은모든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지난 여름부터 거실에는 화분이 여럿 생겼다. 그중에서도 유독 신경을 쓰던 아이가 있었다. 이름은 까칠이. 유칼립투스의 한 종이었는데 겨울 들어 시름시름 말라가던 것을 겨우 살려두었다. 봄이 오기만 하면 좋아하는 바람을 실컷 맞게 해주마, 하며. 그동안 쓴 마음이 무색하도록 며칠 여행을 다녀온 사이 까칠이는 완전히 말라버렸다. 그 사이 나는 줄곧 집에 숨어 계속 움츠려 있었다. 갑작스레 확진자가 치솟는 코로나로 나가지 않을 핑계는 충분했다. 그러기를 며칠, 환기를 시키려 창문을 열고 성큼 다가온 봄바람을 맞았다. 문득 이 바람을 맞지 못하고 말라버린 까칠이 생각을 했다. 그 날 오랜만에 밀린 일을 이것저것 해치웠다. 지난 달 손님이 두고 간 물건을 부치러 우체국에 다녀왔고, 오랜만에 도서관에 들러 이책 저책을 구경했다. 그러다 표지가 온통 초록색인 은모든 작가의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를 찾았다. 전주의 거리가 등장한다고 건너 들었던 책이었다. “한옥 마을 입구처럼 위치한 전동 성당과 경기전 사이로 뻗은 태조로”, “나란히 붙어서 활짝 문을 열어 놓고 영업하는 세 곳의 오모가리탕집 앞”, “한옥 마을과 서학동 예술 마을을 잇는 아치형 교량인 남천교”(『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中) 여러 책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만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늘 인물들의 서 있는 공간은 희미했다. 자주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서울 어딘가의 역 이름이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했다. 내가 직접 서울에 살아보기 전 까지는 말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전주 골목 어귀를 걷는 기분이었다. 소설의 중반부 대부분은 주인공 경진이 고향인 전주로 돌아와 이곳저곳을 걷거나 산책하며 인물들과 대화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달라진 거리를 보며 충격 받는 장면에서는 내가 기억하는 경기전 앞의 첫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돌길이 있는 곳. 볕이 가득해 걷기 좋은 거리. 하지만 대학생이 되어 다시 찾은 태조로에 대한 감상은 경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설 속에서 경진은 계속해서 주변을 걷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상하게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줄줄 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덩달아 나도 함께 객사부터 한옥마을을 지나 한벽당에 이르는, 나도 아는 산책로를 찬찬히 걷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으로 즐거운 경험을 했다. 주인공 ‘경진’이 걷는 골목 골목이 지금 내가 아는 곳이었고, 친구 ‘웅’이 가자던 가맥집은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한옥마을 어느 골목 어귀에 있는 조용한 다원은 할머니와 함께 나른하게 차를 마셨던 곳이기도 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느 곳이든 당장 뛰쳐나갈 거리에 있는 것이 무척 반가웠다. 봄이 왔다. 좋은 날을 골라 볕이 좋은 전주천변을 걸을 참이다. 구석구석 전주의 길목에 담아두었던 이런 저런 기억을 꺼내기 좋은 계절이 왔다. /최아현 소설가 최아현 소설가는 전북 익산 출생으로 지난 2018년 본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아침 대화'로 등단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2.03.09 17:2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경옥 작가-전은희 '웃음 찾는 겁깨비'

도깨비의 변주를 보며 어린 시절 책이 귀하던 때는 옛이야기를 들으며 지적 갈증을 해소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다양한 방식을 통해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며 살아가지만, 옛이야기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적이 불과 십수 년 전의 일이다. 많은 옛이야기 속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게 ‘도깨비’라는 소재였다. 최근에도 ‘도깨비’는 여전히 웹툰, 드라마, 영화, 그림, 특히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화소이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는 도깨비는 무서운 존재라기보다 일상에서 마주할 것 같은 친근한 존재로 다가선다. 이런 도깨비를 어린이 동화로 끌어와 교실에서 아이들과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는 동화가 나왔다. 우리 지역에서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는 전은희 작가의 <웃음 찾는 겁깨비>가 작년에 출간되었다. 작가가 만들어놓은 ‘도깨비’ 세상은 인간 세상의 축소판과 다름없다. 도깨비들이 사는 나라에도 겁이 많은 ‘겁깨비’가 등장한다. ‘겁깨비’라는 작명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겁이 많으면 온갖 세상일에 두려워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다. 도깨비들에게는 필수품인 방망이에 에너지를 채워야 마술을 마음껏 부릴 수 있다. 방망이에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서는 인간 세상에 내려가서 인간을 곯려주어야 한다. 이런 설정 또한 작가의 치밀한 계획으로 ‘겁깨비’가 인간 세상으로 갈 수밖에 없게 한다. 우여곡절 끝에 ‘겁깨비’는 인간 세상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내려가면서 까마귀 떼를 만나 목숨 같은 도깨비방망이를 놓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겁깨비’의 잃어버린 방망이를 찾는 과정은 만만치가 않다. 인간을 무서워하게 설정하여 처음부터 시련이 시작된다. ‘건호’가 도깨비방망이를 주워가지만, ‘겁깨비’는 돌려달라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건호의 집까지 따라간다. 도깨비방망이가 없어지면 도깨비나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반드시 방망이를 찾아야 하는 필연성이 전제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런 난감한 상황을 만들어 ‘겁깨비’와 건호가 만날 수 있도록 설정해 놨다. 건호가 학교에 간 뒤 ‘겁깨비’는 온 집안을 뒤지지만 도깨비방망이를 찾지 못한다. 그러다가 건호가 집에 돌아오고 ‘겁깨비’와 눈이 마주친다. 도깨비방망이를 만진 사람은 도깨비를 볼 수 있다는 장치를 해 놓았다. 아, 도깨비와 눈이 마주친 사람은 도깨비를 볼 수 있다는 발상은 어린이들 마음을 설레게 하고도 남는다. 이런 장면들은 독자에게 도깨비를 만날 수 있다는 상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순조롭게 모든 일이 풀리는 건 아니다. 겁이 많은 ‘겁깨비’를 작가는 끊임없이 위기에 몰아넣는다. ‘겁깨비’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어린 독자들의 마음은 가슴 조이며 책을 읽는 내내 ‘겁깨비’와 호흡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건호는 도깨비방망이를 찾아주고 ‘겁깨비’는 건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학교까지 따라간다. 학교에서 ‘겁깨비’가 벌이는 기상천외한 여러 에피소드를 만나면 또 한바탕 웃음이 터지게 된다. 이처럼 <웃음 찾는 겁깨비>는 어린이 독자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끌어들여 책을 읽는 동안 ‘겁깨비’와 숨막히는 경험들을 함께 한다. 옛이야기에서 소재를 찾고 변주하면서 어린이를 향한 끊임없는 고민으로 탄생한 작품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아직 책을 접하지 않은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겁깨비’가 학교에서 어떤 활약을 하는지 상상하면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경옥 동화작가 이경옥 동화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두 번째 짝>으로 등단했다. 발간한 책으로는 장편 동화 <달려라, 달구!> 등이 있다. 지난 2019년 우수출판콘텐츠제작사업에 선정됐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3.02 17:17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근혜 동화작가 - 윤일호 '가만두지 않을 거야!'

누구도 손대지 않은 보물 상자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근처 보육원 아동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그래서 보육원 아동이 한 반에 한두 명씩 있는데 5학년 때 우리 반도 그랬다. 우리 반의 그 애는 난폭하기로 소문난 남자아이였다. 그 애는 화가 나면 주먹으로 책상을 치거나 자기 비위를 거스르는 아이에게 으름장을 놓기 일쑤였다. 그 애 때문에 교실은 항상 공포 분위기였다. 하루는 반장이 그 애한테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날부터 정말이지 나지 않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 냄새를 아이들은 ‘고아 냄새’라고 명명했다. 누군가 “야! 어디서 고아 냄새 안 나냐?”하면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그 아이를 쳐다봤다. 처음에는 자기한테서 무슨 냄새가 나냐며 바락바락 소리치던 아이도 시간이 가면서 ‘냄새’라는 단어만 들려도 잔뜩 움츠 러들었다. ‘고아 냄새’라는 낙인은 졸업할 때까지 그 아이를 졸졸 따라다녔다. 윤일호 작가의 <가만두지 않을 거야! 왜 부들이는 자꾸만 화가 날까?/내일을 여는 책>를 읽는 내내 그 아이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주인공 부들이와 그 아이가 닮은 점이 많아서였을까? 주인공 부들이는 분노가 치밀면 나이, 성별 불문하고 무기를 들고 위협하거나 거친 말을 가감 없이 내뱉는다. 부들이가 삼각자를 들고 6학년 형을 쫓아가며 “죽여 버리고 말 거야.”하고 외치는 첫 장면은 두렵기까지 하다. 그런 부들이에게 지금껏 만난 어른과는 다른 어른이 나타난다. 바로 4학년 담임 킹콩 선생님이다. 킹콩 선생님은 교실 바닥에 누런 가래침을 뱉고, 수업 시간에 대놓고 잠을 자고, 지각을 해도 당당한 부들이를 야단치지 않았다. 부들이는 그런 킹콩 선생님이 의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 자신의 행동에 제재를 가하지 않은 어른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킹콩 선생님도 부들이의 돌발 행동이 여간 고민스러운 게 아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부들이를 야단치거나 벌을 줄 수는 없었다. 부들이 문제가 부들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혼을 내는 대신 부들이 가슴에 쌓인 분노를 들여다보려 노력했다. 자기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며 가슴 속 아픔을 글로 표현하도록 도왔고, 부들이만 집으로 초대해 선생님이 특별하게 아끼는 제자라고 생각하게 했다. 마침내 구제 불능, 문제아 부들이가 변했다. 동화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런 변화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의 잘못을 잘못으로 대하기보다 서툰 자기표현으로 받아들이고 다양한 각도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한다면 말이다. “눈높이를 맞추고 귀 기울이다 보면 비로소 보이게 됩니다. 인정해 주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조금씩 가능성과 잠재력을 알게 되겠지요.”라는 윤일호 작가의 말을 끝으로 이 책을 권한다. 더불어 아이들은 누구도 손대지 않은 보물 상자라는 걸 기억하자. 열리지 않은 보물 상자 안은 반짝반짝한 미래로 가득할 테니. /김근혜 동화작가 김근혜 동화작가는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선물> 로 등단했다. 발간한 책으로는 동화 <제롬랜드의 비밀>, <나는 나야!>, <봉주르 요리 교실 실종사건> 등이 있다. 현재 전주 최명희문학관 상주 작가로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2.23 17:06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영주 작가 - 황선미 '트럭 속 파란눈이'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중략) 찾는다!” 어릴 적 숨바꼭질할 때 이 소리는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쫓기는듯한데 왜 그리 웃음을 구르게 만들던지…. 요새를 찾아 나는 높은 곳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돌 틈에 발을 딛고, 간신히 꼭대기에 한 손을 얹었을 때였다. 물컹한 무언가가 손아래 잡혔다. 같이 달아나던 누군가가 소리쳤다. “쥐, 쥐! 이따만 해.” 나는 며칠 동안 셀 수 없이 손을 씻고 또 씻었다. 오랜 세월 동안 내 기억이 편집되었겠지만 나는 아직도 새까맣고 고양이만 했던 쥐를 잊을 수가 없다. 『트럭 속 파란눈이』의 은호가 외치는 소리에 불현듯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거 씻어야 돼. 열 번 스무 번, 더, 더 많이!” 은호네 집에 남은 쌀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하필이면 씻어 놓은 곳에 쥐가 빠지다니…. 하는 수 없이 쥐를 건져버린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할아버지에게 다시 쌀을 씻어야 한다고 크게 소리친 것이다. 그 밥을 토하지 않으려 욱여넣었다. 은호에게 가난은 징그러운 것보다 더 힘이 셌다. 동화의 시작은 소소한 이유로 옥신각신하는 것 같아 재밌고, 흥미로웠다. 송곳니를 뺀 손자의 입안을 찍으려고 아침부터 할아버지는 카메라를 들이댔다. 살점이 뜯기는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크게 입 벌리라고 말했다. 손자의 입안에서 바라보는 카메라 든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이와 렌즈에 비친 손자의 이까지. 한 앵글에 세 개의 입이 보이는 그림에서 할아버지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손자의 성장 모습을 남기려는 극성스러운 할아버지로만 보였다. 창고 속 컨테이너, 멈춰선 낡은 트럭, 득실대는 쥐들, 얼마 안 남은 쌀, 이 배경은 모두 빈곤을 보여준다. 돌아오지 않는 부모는 기다림 대신 버림이라는 상처일 뿐이다. 은호는 자신을 찍어 아빠에게 보내는 것도 화가 났다. 멈춰 선 트럭은 너무도 무기력했다. 트럭을 발로 걷어차고, 주먹으로 쳐 화풀이를 해도 돌아온 건 아픔이었다. 비상시 연락하라고 쪽지에 적힌 ‘119’는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만약 전화를 한다면 그건 분명 할아버지에게 일이 생긴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은호는 미래를 꿈꾸기보다는 쌀이 떨어지지 않길 바라는 아이이다.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기보다 득실거리는 쥐가 없어졌으면 바랄 뿐이다. 하지만 앞날이 캄캄할 것만 같은 은호에게 트럭 속 도둑고양이 ‘파란눈이’는 불빛을 밝혀준다. 버렸던 새끼를 다시 데리고 간 파란눈이는 다독여주는 위로가 된다. 황선미 작가의 작품에는 화해와 성장, 생명존중과 정체성, 희망이 있다. 슬픈 결말이지만 강한 의지와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트럭 속 파란눈이』도 암담하지만 희망의 끈을 이어간다. 아무것도 해줄 것 같지 않았던 고물 트럭에서 새 생명이 태어났다. 파란눈이 덕분인지 쥐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은호의 창고 속 컨테이너, 고물트럭은 분명 보금자리이다. 긴장과 고난의 전개가 과장되지 않았다. 글 서두에서 나의 옛 추억과 은호의 이야기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읽는 내내 왠지 내 가까이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황선미 작가의 잔잔함과 강렬함이, 소박함과 치밀함이 균일하게 버무려져 있다. 진솔하고 따뜻하다. 있는 자에 대한 적개심과 시기심이 한 구석에 자리한 은호. 『트럭 속 파란눈이』는 한 아이의 마음이 마지막까지 넘치지 않고 잔잔하게 펼쳐진 이야기가 있다. /김영주 작가 김영주 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 '마키코 언니'로 등단했다. 같은 해 동양일보 동화 부문에서 '가족사진'으로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장편 동화 <레오와 레오 신부>, 청소년 소설 <가족이 되다> 등을 출간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2.16 17:0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박태건 시인 - 진창윤 '달 칼라 현상소'

20년간 신춘문예에 도전했던 사내가 있다. 해마다 12월이 되면 우체국에 갔다. 일간지 별로 응모하느라 우표 값도 꽤 들었다. 그때부터 휴대폰은 항상 충전해 두었고 옆 사람 벨소리에도 깜짝 놀랐다. 새해 아침이면 당선작들을 찾아봤다. 그리고 자신의 불운에 좌절했다. 낙선한 이유를 몰라서 화가 났고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슬펐다. 나이 쉰이 다 되어 사내는 대학원에 입학하기로 했다. 지도 교수였던 안도현 시인은 ‘연애를 하고 술을 많이 마셔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사내는 다시 좌절했다. 체질적으로 술이 약했고, 총각이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그림을 그린다. 알아주지 않아도 40년간 그렸다. 그림을 그리면 잡념이 없어졌다. 판화를 할 땐 조각 날이 지나간 자리마다 뿜어내는 나무향이 좋았다. 송곳을 찍어 별 모양을 만들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되어 하늘에 별이 떴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그를 ‘그림 천재’라고 불렀다. 그가 그렸다는 걸 안 믿을 정도였다. 틈만 나면 그렸다. 선반에 습작품이 가득 쌓였다. 어느 날 집에 오니 그림이 없어졌다. 아버지가 불쏘시개로 썼다고 했다. 사내는 다시 그렸고 아버지는 다시 태웠다. 아버지는 임종을 앞두고 말했다. ‘이제 그림은 그만 하고 취직해라!’ 사내는 얼마 전 첫 시집을 냈다. 제목은 <달 칼라 현상소>다. 시집을 내고 나서도 달라진 것은 없다. 그에겐 87년 민주화의 투쟁의 향수가 남아 있다. “디지털로 바뀐 지가 언제인데 / 코닥필름 회사 망한 지가 언제인데 / 아날로그 필름만을 고집하는 달 칼라 현상소 남자 / 자꾸만 얼굴을 바꾸는 달을 좇는다 ”(표제시 ‘달 칼라 현상소’) 달은 얼굴을 바꾸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사내에게 달은 자유요, 민주주의다. 시인은 달이 보이지 않는 날에도 달의 존재를 믿는다. 시인 진창윤은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꾼다. 그런데 돈에 대한 공포가 민중의 연대를 방해한다. 내일이 두려워 현재는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벌면 자유를 누리게 될까? 효율성을 위해 자동차를 사고 가전 제품을 바꾼다. 노동시간은 추가되고 어느새 몸은 늙어 약해진다. 벌어둔 돈은 치료비로 나간다. 돈에 대한 공포가 각자도생을 만든다. 시인은 세상이 다 변해도 달이 이끄는 데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20세기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말한다. 생계를 위한 ‘노동’과 또 다른 세계를 만드는 예술가의 ‘작업’이 의미를 갖기 위해선 사회적, 정치적 ‘행위’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행위의 자유’가 권리이자 의무였다는 것. 시인은 노동이 주는 돈의 유혹에서 자유롭기 위해 오전엔 독서를 하고 오후엔 돈 안 되는 그림을 그린다. 저녁이 되면 더 돈 안 되는 시를 쓴다. 사내의 삶은 예술 같고 그의 시집에는 생활이 담겨 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은 낭만주의자다. /박태건 시인 박태건 시인은 익산 출신으로 1995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시와반시 신인상과 불꽃문학상을 수상했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대산문화재단 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되었다. 시집으로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가 있으며 지역 문화콘텐츠를 활용한 스토리텔링에 관심이 많아서 <익산 문화예술의 정신>을 비롯한 10권의 책을 펴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2.02.09 17:01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