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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내가 만드는 우리의 역사 10년 전, 임실필봉농악전수관 야외무대에서 하는 마당극을 볼 때였다. 극의 막바지인 상여에 노잣돈을 매다는 장면을 한창 재미지게 보고 있는데 객석에 있던 초등학생 두 명이 느닷없이 무대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배우들을 따라 상여에 노잣돈을 매달았다. 순간 숙연했던 분위기가 들썩이더니 관객들이 너도나도 상여에 노잣돈을 달았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상여꾼을 따르며 곡소리에 맞춰 춤까지 췄다. 마당극이 축제의 장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그때를 연상케 하는 작품을 만났다. 최기우 극작가의 희곡집 <들꽃상여>다. 최근 전주문화재단 오디오북사업에 선정되기도 한 <들꽃상여>는 이름이 있으나 제대로 이름 불리지 못하고 사라진 이들의 이야기다. 그들의 이름은 들꽃처럼 흔하고 가벼웠다. 관심을 받지도 주지도 못하는 처지였으니 이름이 무엇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세상이 떠미는 대로 살다 죽는 것이 이들의 운명이었다. 그런 이들이 세상을 향해 죽창을 들었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또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된다. 이름하여 동학농민혁명군이다. 작품 <들꽃상여>는 연극을 준비하는 극단의 고민으로부터 시작된다. 극단은 이번만큼은 전봉준이 아닌 색다른 인물을 발굴해 무대에 올리려 한다. 그러다 인종학 연구를 위해 일본으로 갔다가 125년 만에 전주로 돌아온 유골에 관한 기사를 접한다. 극단은 이름도, 흔적도, 기록도 없는 동학농민군을 무대로 불러들인다. 자기가 살던 집을 집강소로 내준 김제 원평의 동록개, 소년 장사 김복룡, 또랑 광대 소리쇠, 양반 김서방 등이 이들이다. 눈길을 끌만한 기록이 없는 인물을 극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극단은 새로운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익숙한 것을 버리고 낯선 것을 택했을 때 오는 불안감을 누른 건 ‘함께’라는 연대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지 싶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신분과 세대를 뛰어넘어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동학농민혁명군과 사뭇 닮았다. 작품을 읽으며 작가의 사람 보는 눈을 짐작해본다. 허리 숙여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들꽃을 보듯 세상의 언저리에 놓인 사람들을 향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가없이 느껴졌다. 덕분에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름이 없거나 있더라도 한두 줄로 기록된 특별할 게 없는 인물을 역사의 중심으로 끌어올 수 있는 역량은 글발의 힘만이 아닐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발휘되는 민중의 연대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작가의 신념이 <들꽃상여>를 탄생시켰다. “우리의 역사는 좀 더 집요한 기억과 꼼꼼한 기록이 필요하다. 실체를 드러내야 확고한 역사가 된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질 때 귀에 들리고 입으로 말하게 된다. 동학농민혁명군의 농민이 보이고 만져질 때 당당한 역사의 자부심과 긍지가 더 높아질 것이다.” 작가의 말을 통해 우리가 진정 남겨야 할 역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커다란 수레바퀴 아래에 피어난 이름 없는 풀꽃 같은 이들의 개인적 역사가 없었다면 전체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네가 있고 내가 있기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명해야 한다. “우리 모두 죽더라도 우리 이름 영원히 살 것이라. 우리 목숨의 혼불이 눈물 나는 꽃빛으로 피어나리라.” 들꽃상여를 메고 가는 길에 핀 들꽃들이 수런거린다. 이제 막 시작된 잔치에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분연히 일어서는 중이다. 곧 상여를 따라 들꽃들의 춤사위가 이어지리라. 자신들이 걸었던 길을 결코 잊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바람과 후손을 향한 아름다운 악수가 가는 걸음마다 꽃향기로 남을 것이다. 오늘, 하늘은 명징하고 바람은 서늘하다. <들꽃상여> 읽기 딱 좋은 날씨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김근혜 동화작가는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선물> 로 등단했다. 발간한 책으로는 동화 <제롬랜드의 비밀>, <나는 나야!>, <봉주르 요리 교실 실종사건> 등이 있다. 현재 전주 최명희문학관 상주 작가로 있다.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바다의 행간을 읽는 일을 좋아한다. 바다에서 촉발되는 상상과 사유를 즐기며 소실점 너머로 사라지는 인연을 생각해본다. 복잡한 내면과 군더더기 많은 삶을 풀며, 솟구치는 파도를 바라보는 일은 매력적이다. 바다가 주는 친밀감과 날마다 접하는 삶을 뒤꼍으로 두고 여행하는 것을 즐기는 나. 제주 한 달 살기와 제주올레 에 합류하며 들썩이던 마음을 쉽사리 놓지 못하던 날이었다. 제주 동네책방올레를 하면서 제주의 책방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종달리에 있는 ‘책약방’ 다양한 굿즈 상품이 있고 호기로운 청춘의 열정이 탐났던 ‘소심한 책방’, 골목에 있던 ‘바다는 안 보여요’, 예술서적이 많았던 빨간 벽돌집의 ‘책자국’, 흰 개 광복이가 있는 ‘풀무질’ 등등. 배낭하나 둘러메고 아무 생각 없이 제주를 가면 꼭 들르던 곳, ‘시인의 집’을 빼놓을 수 없다. 정읍 출신의 손세실리아 시인이 운영하는 책방카페는 바다를 보며 멍 때리기 좋은 공간이다. 한때 카페지기와 책방지기의 삶을 살고자 했던 내게, 조천 ‘시인의 집’은 최애장소이다. 주황색지붕과 현무암으로 둘러싸인 돌담, 고양이 랭보, 깊고 푸른 노래 몇 소절이 적힌 <섬에서 부르는 노래>를 집어든다. 손세실리아 시인의 두 번째 산문집이다. 제주의 모습, 책방이야기, 문학과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뼈대란 뼈대와 살점이란 살점이 합심해 무너뜨리고 주저앉히려는 세력에 맞서 대항한 이력이 곳곳에 역력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생도 저렇듯 담담하고 의연히 쇠락하길 바라며 덜컥 입도를 결심하고 말았던 것인데요. 이런 속내를 알아챈 조천 앞바다 수십 수만 평이 우르르 우르르 덤으로 딸려왔습니다.” 라고 시인은 말한다. <섬에서 부르는 노래>는 시인의 삶의 노래이다. 27편의 글과 곁들인 시와 삽화들이 다감했다. 자신의 시와 다른 작가들의 이름이 호명되고 사연이 흘러나온다. 그 중에서 ‘고아의 노래’ ‘나만 알고 싶은 곳’ ‘그림에 울다’는 울림이 컸다. “별다를 것 없는 황토 빛 캔버스에 이렇다 할 선이나 색도 없이 다만 민들레 꽃씨를 솔솔 흩뿌려 놓은, 숨만 크게 내쉬어도 일제히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지나온 날의 회한과 미래의 바람이 무수히 중첩된. <민들레 꽃씨, 당신>은 내게 그렇게 들어왔다. 그야말로 기습적으로, 훅!” -89쪽, 임옥상의 그림을 만나며 눈물이 터진 이야기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우는 지극한 사랑이 아직 존재하는 구나. 이런 부모 슬하의 자녀는 사랑의 힘도 어마어마 하겠구나. 진심 어린 고백을 생의 이쪽에서 생의 저쪽으로 대신 전달하는 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천번 만번 생각해도 축복 맞다.” -195쪽, 책방에서 만난 특별한 인연이 풀어져있다. ‘고아의 노래’ 에서는 곰살궂은 딸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노래와 ‘비 내리는 고모령’을 같이 흥얼거렸다. 나도 그 안의 추임새, 그 안의 숨소리와 여전한 웃음, 그 안의 울음에 눈물콧물 범벅이 되었다. 시인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노래하듯 사랑해보고 싶어졌다. 꽂히는 노래가 있으면 온종일 그 노래만 돌려 듣는 버릇이 있다. 노래를 부르듯 시인에게 주어진 섬에서의 삶을 후렴구까지 들여다 본 기분이다. 시인의 노래는 고해성사이자 고백이고 넋두리이자 절규였다. 떠나고 다시 짐을 꾸리고 일하며 다시 쉼을 얻는 삶을 생각해본다. 여행의 지표를 꼼꼼하게 세우고 다음 행선지를 기약한다. 다른 계절의 제주를 담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래본다. 바다는 모퉁이가 없어서 숨어 울지도 못하고 계단도 없어서 핑계 삼아 주저앉지 못한다는 시인의 말이 맴돈다. <섬에서 부르는 노래>는 시인의 독창이 아니라 어느새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합창이 되어주었다. 책과 꿈꾸는 손세실리아 시인의 삶속에 기꺼이 다가가는 4월, <섬에서 부르는 노래>가 조곤조곤 들리는 조천 앞바다로 떠나도 좋겠다. 김헌수 시인은 전주 출생으로,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삼례터미널’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다른 빛깔로 말하지 않을게>, <조금씩 당신을 생각하는 시간>, 시화집으로는 <오래 만난 사람처럼> 등이 있다.
유난히 마음이 편안해지는 집이 있다. 들어가면 나오고 싶지 않고, 평생을 눌러앉아 있고 싶은 그런 집. 하지만 좋은 집을 만나기는 쉬워도 정작 나와 맞는 집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우선적으로 나와 내 가족이 원하는 조건이 부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디에서 살 것인가? 최근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이자 문화사학자, 도보여행가로 익히 알려져 있는 신정일 선생이 펴낸 『나는 그곳에 집을 지어 살고 싶다』(2022, 창해)는 우리에게 그에 대한 물음을 던져놓고 있다. 가볍게 훑어내려도 좋을 것 같다고 여겼으나,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것도 사뭇 진지하기까지 한 그 질문에 당황하여서다. 선생은 이 책을 통해 전국을 누비면서 찾은 집들을 순차적으로 제시해주고 있다. 그것도 무려 30여 년에 걸쳐 찾아낸 집들이라니. 조선시대 김정호가 한반도를 3번 돌고, 백두산을 8번이나 오르내리며 「대동여지도」를 낳았다면, 선생은 평생토록 우리 국토 곳곳을 걸음하며 ‘가장 살기 좋은 집’을 찾아다닌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인지 강원・경상・제주편으로 묶인 이번 책에서 소개된 22곳의 집들의 이야기 또한 그에 못지않은 공력이 깃들어 있다. 발 딛는 곳마다 산천은 또 얼마나 수려하고 아름다운지 책속에서마저 수시로 걸음을 놓고 감상에 빠지게 된다. 그야말로 ‘살아생전에’ 나도 이런 곳에 한 번 살고 싶다는 충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곳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물론 소개된 집들의 형태는 제각각이다. 오랜 세월 비바람과 풍상을 견뎌온 천년 고찰이나 명승지에 위치해 있는 정자, 혹은 수령 4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자라는 하나의 마을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문화와 역사, 내력을 간직한 채 긴 시간을 이어져오는 곳들. 그리고 그 삶터를 영위하며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과 그들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선생은 왜 그토록 평생에 걸쳐 ‘집’을 찾아다닌 것일까? 선생이 중국의 문명비평가이자 작가인 임어당을 들어 인용해놓은 문구처럼 ‘거처로 삼아 생애를 보내고자 하는 장소는 잘 선택해야’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살고 싶은 곳’이 아니라, ‘살아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는 곳’은 지기(地氣)가 살아 있고, 주변 환경에 거슬림이 없는 환경 친화적이어야 한다 등의 풍수적인 관점과는 또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곳에 살고자 하는 이의 의지와 목적에 따라 처해 있는 환경을 이겨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생 역시 ‘그렇다면 어느 곳에서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라고 되묻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선생의 『나는 그곳에 집을 지어 살고 싶다』는 아름답고, 혹할 만한 경관과 환경을 지닌 일반적인 집의 개념을 뛰어넘는다. 살고자 하는 이의 내적 동요, 혹은 사상과 철학까지도 반영하는 그런 집을 얘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사실 선생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좋은 집, 좋은 지역이 눈에 들었겠는가. 남들이 차를 타고 휘익 다녀가는 동안, 일일이 발걸음을 두었을 때 그곳에서, 혹은 그 지역에서 좋은 집과 뜻하지 않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장을 넘길 때마다 선생의 발끝에는 또 어떤 집이 있을까, 더욱 궁금하여지기도 하던 것이다. 그리고 올여름에는 책속에서 만나는 집들을 만나러 행장을 꾸려 잠깐이라도 여행을 떠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좋은 터를 만나면 100년이 편하고, 좋은 낯을 한 사람을 만나면 하루가 즐거워진다는 말을 나는 참 좋아한다. 도보여행가 신정일 선생의 『나는 그곳에 집을 지어 살고 싶다』에서 만난 집들이 딱 그렇다. 선생의 해박한 지식과 입담으로 인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드는 집들. 정말이지 그곳에 집을 지어 살고 싶다. 김형미 시인은 현재 한국지방정책 연구원, 해인사 편집국 편집실장, 진주문화관광재단 이사, 시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늘의 동양과 서양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세상을 끌고 가는 특별한 정신이 있다. 우리는 이 정신을 ‘시민 정신’이라 부른다. “서양의 시민의식 시작에 신사가 있다면 동양, 그중에서 조선에는 선비가 있었”다. ‘신사’와 ‘선비’가 사회의 윤리적, 도덕적 기준 계층이었던 셈이다. 《신사와 선비》 (백승종, 사우, 2018)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들의 길을 알아보는 책이다. 저자가 서문에 밝힌 대로 “신사와 선비는 기득권층의 대명사였다. 그들 가운데는 재벌과 권력을 앞세워 무소불위 세력을 행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신사와 선비는 동서양의 지배층으로 온갖 비리와 부정으로 세상을 망가뜨리기도 하였으나, 세상이 신사 또는 선비라 부른 크고 작은 벼슬아치들이 세상의 모범이 되기에 족한 때가 많았다.” 3부의 구성 중 1부는 신사의 역사다. 중세 기사도를 계승한 신사도가 근대 서구 시민의 교양으로 발전한 과정을 살핀다. 신사의 가치관과 태도가 서구사회의 중요한 발전 동력이었기 때문이다. 2부는 조선조 멸망과 함께 쇠락한 조선 선비의 길을 더듬는다. 선비들은 도덕적 가치를 중히 여기는 독특한 식자층이었다. 마지막 3부에서 저자 백승종은 선비정신과 선비문화가 한국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동서양의 역사를 조망하며, 우리가 나갈 길을 모색한다. 어제의 역사가 첩첩한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스테리한 내일을 살아낼 어떤 결정적인 혜안을 주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섬광처럼 반짝이는 지혜의 보석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제는 히스토리(history), 내일은 미스테리(mystery), 오늘은 선물(present)이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살아낸 어제는 이미 역사가 되었고 살아내야 할 내일은 알 수 없어 미스테리하다는 이야기이리라. 내일을 살아야 할 우리가 어제의 일,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미스테리한 내일을 살아가기 위한 좌표 확인일 것이다. 저자 백승종은 역사든 한 시대를 지배하는 어떤 현상이든 문화적 전통은 지속적으로도 단속적으로도 나타난다고 말한다. 중세 기사도에서 출발해 서구사회에 천년 시민 정신으로 뿌리내린 신사도에 비해 선비정신은 조선의 멸망으로 맥이 끊겼으나 오늘날 부활할 기미가 보인다고 진단한다.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산업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었지만 잃은 것 또한 적지 않았다. 선진 기계문명인 서양 것은 비판 없이 숭배 답습했다. 고리타분하고 후진적이라며 우리 것은 일고의 고민도 없이 배척했다. 그러나 보라 오늘날 우리 한국의 위상을, 정치적인 것은 아니겠으나 경제적·문화적 위상은 가히 세계가 부러워하지 않은가. K-반도체, K-컬처, K-방역 등 이미 세계의 기준이 되었거나 기준이 되어가고 있는 것들이 많다. 우리 내면의 선비정신을 깨워야 하겠다. 깐깐함과 고집불통은 선비정신이 아니다. 시대와 사회를 끌고 가는 것은 군왕이 아니라 그 시대에 깃든 시민 정신이다. 안성덕 시인은 전북 정읍 출생으로, 지난 2009년 전북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시집으로는 <몸붓>, <달달한 쓴맛> 등이 있으며, 디카에세이로는 <손톱 끝 꽃달이 지기 전에>가 있다.
붉은 딸기들이 떠내려갑니다. 불어난 물에 소식도 다 쓸려 갔습니다. 그래도 상상이 한 척 남아 있군요. 잠들기 전에 건너편으로 갑니다. 그런 밤이 셀 수 있을 만큼 흘러갑니다, 어느 날 자작나무 껍질에 연서를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안도현 시인의 산문집 〈내게 왔던 그 모든 당신〉을 읽습니다. 여기와 저기가 한곳에 있는 눈을 봅니다. “놀면서 건설하고, 허물어뜨리면서 달아나고, 정착하다가 부유하는 길이 문학”이라고 합니다. 맞은편으로 넘어간 당신을 모두 건네 드릴 수는 없습니다. 높이 올라갔다 쿵 떨어진 마음 몇만 실어 보냅니다. 요즘 상실이 커도 바구지꽃은 들려 보내겠습니다. 김기현 선생은 “매화를 ‘형’이라 부르며 좋아했던 퇴계 이황 속에 가장 새롭고 맑은 것이 깃든다고” 믿으며 걷고 또 걷습니다. 나는 볼펜에 들어있는 용수철을 꺼냅니다. 나선형 역사관을 만져보고 싶어서입니다. 손가락 끝에 묻어나는 역사를 바라봅니다. 튀어 오르는 힘도 느껴봅니다. “다산 정약용이 지인들과 시사詩社를 결성하고 사철 꽃이 필 때마다 한 번씩 모여 시를 이야기하던 분위기와 자세”가 좋습니다. 그 낭만을 차마 뿌리칠 수 없습니다. “꿩을 잡을 때 콩을 미끼로 달아 낚시로 잡는다는” 박기영 시인을 생각합니다. 낚시는 물에서 한다는 생각에 꿰어있던 내가 아픕니다. 사물에는 늘 뒷면이 있다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축구 심판의 동전은 언제나 양면입니다. 절반만 맞출 수 있어 치명적인 아름다움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말입니다. 딱따구리 박사 김성호는 말합니다.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는 큰오색딱따구리의 느낌을 몸으로 온전히 느껴보고” 싶으면 함께 비를 맞으면 된다고. “버섯의 벗이 되려면 버섯보다 많이 큰 내가 먼저 버섯의 높이로 땅에 엎드리면” 된다고. pupil에는 눈동자와 제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가르칠 때 눈높이에 맞춰 마음을 구부리세요. 서로의 눈에 서로가 어립니다. 이쯤 되면 누가 가르치고 누가 배우는지 구름나무처럼 경계가 흐릿해집니다. 호기심이 인류를 저기에서 여기로 데리고 왔다고 믿습니다. 책에는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날아가며 똥을 싸는 새의 기분이 궁금해 감나무에 올라간 소년 박성우, “만 리에서 날아온 바람이 왜 폭낭(팽나무)에게 와서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지” 궁금한 강요배 화백, “가장 참혹한 현실이 어떻게 가장 회화적인 기법으로 재현”되는지 궁금한 화가 황재형,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감자꽃’ 전문)에서 보듯 왜 아이는 보이지 않는 끈을 볼 줄 아는지 궁금한 권태응 선생…… 잠들기 전에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으나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는 그 마음이 바로 시적인 것의 출발”이라는 시인을 떠올립니다. 내가 꿈꾸던 것을 상상해요. 그것이 실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뇌는 경험한 것과 바라본 것을 동일시한다고 합니다. 머지않아 상상했던 일이 내 어깨를 저쪽으로 이끌 것입니다. 이영종 시인은 2012년에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지난 2020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에 선정됐다.
고3 때, 모의고사에 이런 문제가 나왔다.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1885년 조선의 거문도를 점령했다. 지도에서 거문도의 위치를 찾아라. 이 사건은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두고 벌인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이었다. 2021년 8월,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마무리했다. 1989년 2월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던 소련이 10개월 전에 조인된 제네바 조약에 따라 완전히 철군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지출한 막대한 전비는 소비에트연방을 해체하는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서구열강이 아프가니스탄을 차지하려는 다툼은 19세기 초로 거슬러간다. 당시 인도를 식민지로 둔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완충지대로 설정하고 있었다. 두 나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영국의 시파워(해양강국)와 러시아의 랜드파워(대륙강국)가 첨예하게 대립한 것이다.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한반도의 분단을 지정학적으로 설명한 대목들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태평양전쟁이 끝났다. 그렇다면 패전국인 일본이 아니라 왜 한반도가 분단되었을까? 흔히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일본이 항복한 결정적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미국은 45년 3월 10일, 단일 폭격사상 최대의 사상자를 기록한 도쿄대공습을 단행한다. 이후에도 일본의 대도시들에 대대적인 폭격을 퍼붓는다. 소이탄의 살상력과 파괴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폭격 전후의 도쿄 시가지 사진을 비교하면 피해 규모가 원자폭탄 못지않음을 알 수 있다. 소련은 일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8월 9일 0시를 기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공교롭게도 미국은 같은 날 오전 11시,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그리고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은 1945년 초, 병력 체계를 변경해 8월 18일 당시 북쪽에 11만 7천 명, 남쪽에 23만 명의 일본군을 배치했다. 소련의 한반도 진입을 용이하게 하려는 조치로, 미소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게 하고 일본은 교묘히 빠져나가려는 술책이었다. 8월 15일은 일본의 종전기념일이다. 자신들의 구상대로 판이 짜졌으므로 패전이 아니라 ‘종전’이고, ‘기념일’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쟁 또한 뤼순한과 다롄항을 상실한 소련이 김일성의 요구대로 남침을 승인한 결과였다. 남침에 대해 유보적이었던 스탈린이 1950년 1월 말, 중국의 요구로 태평양으로 통하는 부동항들을 잃자 입장을 선회한 것이다. 저자는 휴전선을 랜드파워와 시파워가 충돌하여 생긴 결과물이라고 정의한다. 한국이 랜드파워와 시파워를 견제하고 통제할 역량이 없었기에 분단되었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운명은 여전히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게임 속에서 결정되고 있다. 한반도가 처한 상황에 걸맞은 속담이 떠오른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너무 식상한가. 이건 어떤가.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한 해답은 이렇다. 한국은 강대국들과 동적이고 다층적인 지정학적 관계를 맺는 한편, 그들의 관계를 살피면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논리와 전략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려면 지정학적 지능과 전략, 그리고 지정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준호 작가 이준호 작가는 소설과 동화를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할아버지의 뒤주>, <그해 여름, 닷새>, <커렉터>, <탁류의 시간> 등이 있다.
심심甚深한 이야기 수필은 민낯이다. 새벽안개 걷히며 드러나는 말간 속살이다. 그래서일까? 수필을 읽다보면 만나 본 적 없는 글쓴이와 어느새 친밀해져 함께 웃거나 슬퍼하며 고민을 나누기도 한다. 또한 깨달음까지 얻는 희열도 빼놓을 수 없다. ‘시골 법무사의 심심한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조재형 시인의 첫 산문집, <집은 텅 비었고 주인은 말이 없다>가 그 주인공이다. 작가는 검찰 수사관으로 16년을 지내고 현재 부안에서 법무사로 일하면서 시를 쓴다. “산문의 소재들은 내 몸을 상하여 얻은 것들”이어서일까 ‘유도 신문, 소송, 기소, 구속, 영장, 지명수배’ 등 법률 용어가 불쑥불쑥 튀어나오지만 시적인 렌즈로 담아냈기에 서정적으로 읽히는 특별함이 있다. 수사관과 법무사로서 만났던 사람들은 애달픔이 많다. 딸 앞으로 집을 등기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노부부가 있는가하면 부모의 재산을 서로 많이 차지하기 위하여 아버지를 법정에까지 세우는 자식들도 나온다. 자식은 많으나 갑자기 쓰러졌을 때 자신을 구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몇 십만 원을 속잠방이 안에 준비해 놓고 살아야하는 할머니도 있다. 이 모든 것이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라서 더 아프고 부끄럽다.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으면서도 늘 웃는 문이 언니의 삶은 “돈에 쫓기며 왕국을 건설하기에 바쁜”우리들의 발걸음에 제동을 건다. 또 텅 비어 있고 말이 없는 집은 “어떻게 늙어가야 하고 어떻게 침묵해야 하며, 어떻게 낮아져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작가에게 자상한 아버지를 느끼게 해주신 석이 아버지. 그 어른이 사주신 자장면 곱빼기에 얽힌 사연은 독자에게 저장되어 있던 추억들을 소환한다. 아울러 ‘나는 진정한 어른인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 이처럼 66편 속에 담긴 이야기는 예리한 관찰력과 애틋한 감수성으로 바라본 심심甚深하기에 심심하지 않은 우리들의 민낯들이다. 시인에게는 신이 허락한 특별한 언어가 있다 했던가. 반복되는 잘못으로 고해성사를 하는 모습을 부객浮客, 풍객風客, 식객食客, 낭객浪客, 숙객熟客, 노객老客, 폐객弊客, 자객刺客으로까지 언어를 확장하며 보여준다. 이야기 속에 소개 된 여러 편의 시들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마음에 드는 시 한 편/낭독하면/별 한 동을/거저 분양받는 횡재이다('광고')”라는 시구는 그의 시집 <지문을 수배하다>와 <누군가 나를 두리번거린다>를 찾아 읽게 만든다. 춘분이 지났다. 꽃샘추위를 겪어낸 꽃들도 속살을 드러내며 마음껏 피어날 것이다. 머지않아 코로나19를 이겨낸 우리들도, 시 한 소절을 읊조리며 봄밤의 거리를 거니는 그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벚꽃이 정차 중이었다. 당신이 하차할 것 같아 달빛이 붐비는 봄밤을 서성이곤 했다”.('환승역에서') /이진숙 수필가 이진숙 수필가는 전직 고교 국어교사로 지난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 당선됐다. 2010년부터 최명희문학관에서 혼불 완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이 궁금하다. 외모나 말투, 옷이나 장신구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품고 있는 생각, 꿈, 그리고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를 알고 싶다. 그건 아마도 내가 가진 아픔이나 슬픔을 꺼내 보였을 때 기꺼이 손 내밀어주는 ‘사람’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껴 읽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책 중에 개성 있고 사랑스러운 인물이 등장하는 동화가 있다. <책과 노니는 집>은 천주학 책을 필사하던 아버지가 매를 맞아 죽은 뒤 전문 필사쟁이가 되는 장이의 이야기이다. 고아가 된 장이는 책방의 심부름꾼이 되어 홀로 세상을 헤쳐 나간다. 코끼리 어금니로 만든 책갈피인 상아찌를 허궁재비에게 빼앗기고, 그걸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책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는다. 결국 필사쟁이로 성공하고 아버지가 간절히 원하던 작은 책방, ‘책과 노니는 집’을 여는 꿈에 한 걸음 다가간다. 남동생 백일 상 차려준다고 늙어 빠진 노새 한 마리 값도 안 되는 돈에 기생집에 팔려온 낙심이는 때로는 장이를 못살게 굴기도 하지만 허궁재비를 혼내주는데 앞장서 위기에 빠진 장이를 구한다. 힘겹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 걸음 한 걸음씩 꿈을 향해 나아가는 장이와 ,아픔을 딛고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낙심이는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애쓰는 요즘 아이들 마음속에 매력적인 인물로 자리할 것이다. 이 책에서 어른인 내게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홍 교리이다. 최고의 수재이며 조정의 요직이라 불리는 홍문관 교리인 그는 책방 심부름꾼인 장이에게 거침없이 속내를 내보인다. 신분은 물론이고 나이마저 따지지 않는 열린 마음을 가진 그를 보며 진정한 어른, 참스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 읽지도 못할 책을 왜 이렇게 많이 사 모으냐’는 장이의 질문에 다음과 같은 답을 한다. “책은 읽는 재미도 좋지만 모아 두고 아껴 두는 재미도 그만이다. 재미있다, 유익하다 주변에서 권해 주는 책을 한 권, 두 권 사모아서 서가에 꽂아 놓으면 드나들 때마다 그 책들이 안부라도 건네는 양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지. 어느 책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는 것도 설레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저 책이 궁금해 자꾸 마음이 그리 가는 것도 난 좋다.” 홍교리가 책을 대하는 마음이 어쩌면 나와 똑같은지 책을 읽는 내내 감탄하곤 했다. 때로 작가보다 독자로 살고 싶은 나는 읽고 싶은 책을 사 모으며 행복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서란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의 인물에 공감하면서 사람을 이해하고 나를 반추해보는 것, 이것이 내가 책 속에 빠져서 살고 싶은 이유이다. /장은영 동화작가 장은영 동화작가는 200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통일동화공모전에서 수상했다. 또 『으랏차차 조선실록수호대로』 전북아동문학상과 불꽃문학상을 받았다. 『마음을 배달하는 아이』, 『내멋대로 부대찌개(공저)』, 『책 깎는 소년』(2018,전주의 책), 『으랏차차 조선실록수호대』(2020,전주의 책) 『설왕국의 네 아이』, 『바느질은 내가 최고야』를 썼다.
지난 여름부터 거실에는 화분이 여럿 생겼다. 그중에서도 유독 신경을 쓰던 아이가 있었다. 이름은 까칠이. 유칼립투스의 한 종이었는데 겨울 들어 시름시름 말라가던 것을 겨우 살려두었다. 봄이 오기만 하면 좋아하는 바람을 실컷 맞게 해주마, 하며. 그동안 쓴 마음이 무색하도록 며칠 여행을 다녀온 사이 까칠이는 완전히 말라버렸다. 그 사이 나는 줄곧 집에 숨어 계속 움츠려 있었다. 갑작스레 확진자가 치솟는 코로나로 나가지 않을 핑계는 충분했다. 그러기를 며칠, 환기를 시키려 창문을 열고 성큼 다가온 봄바람을 맞았다. 문득 이 바람을 맞지 못하고 말라버린 까칠이 생각을 했다. 그 날 오랜만에 밀린 일을 이것저것 해치웠다. 지난 달 손님이 두고 간 물건을 부치러 우체국에 다녀왔고, 오랜만에 도서관에 들러 이책 저책을 구경했다. 그러다 표지가 온통 초록색인 은모든 작가의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를 찾았다. 전주의 거리가 등장한다고 건너 들었던 책이었다. “한옥 마을 입구처럼 위치한 전동 성당과 경기전 사이로 뻗은 태조로”, “나란히 붙어서 활짝 문을 열어 놓고 영업하는 세 곳의 오모가리탕집 앞”, “한옥 마을과 서학동 예술 마을을 잇는 아치형 교량인 남천교”(『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中) 여러 책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만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늘 인물들의 서 있는 공간은 희미했다. 자주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서울 어딘가의 역 이름이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했다. 내가 직접 서울에 살아보기 전 까지는 말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전주 골목 어귀를 걷는 기분이었다. 소설의 중반부 대부분은 주인공 경진이 고향인 전주로 돌아와 이곳저곳을 걷거나 산책하며 인물들과 대화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달라진 거리를 보며 충격 받는 장면에서는 내가 기억하는 경기전 앞의 첫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돌길이 있는 곳. 볕이 가득해 걷기 좋은 거리. 하지만 대학생이 되어 다시 찾은 태조로에 대한 감상은 경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설 속에서 경진은 계속해서 주변을 걷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상하게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줄줄 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덩달아 나도 함께 객사부터 한옥마을을 지나 한벽당에 이르는, 나도 아는 산책로를 찬찬히 걷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으로 즐거운 경험을 했다. 주인공 ‘경진’이 걷는 골목 골목이 지금 내가 아는 곳이었고, 친구 ‘웅’이 가자던 가맥집은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한옥마을 어느 골목 어귀에 있는 조용한 다원은 할머니와 함께 나른하게 차를 마셨던 곳이기도 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느 곳이든 당장 뛰쳐나갈 거리에 있는 것이 무척 반가웠다. 봄이 왔다. 좋은 날을 골라 볕이 좋은 전주천변을 걸을 참이다. 구석구석 전주의 길목에 담아두었던 이런 저런 기억을 꺼내기 좋은 계절이 왔다. /최아현 소설가 최아현 소설가는 전북 익산 출생으로 지난 2018년 본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아침 대화'로 등단했다.
도깨비의 변주를 보며 어린 시절 책이 귀하던 때는 옛이야기를 들으며 지적 갈증을 해소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다양한 방식을 통해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며 살아가지만, 옛이야기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적이 불과 십수 년 전의 일이다. 많은 옛이야기 속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게 ‘도깨비’라는 소재였다. 최근에도 ‘도깨비’는 여전히 웹툰, 드라마, 영화, 그림, 특히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화소이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는 도깨비는 무서운 존재라기보다 일상에서 마주할 것 같은 친근한 존재로 다가선다. 이런 도깨비를 어린이 동화로 끌어와 교실에서 아이들과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는 동화가 나왔다. 우리 지역에서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는 전은희 작가의 <웃음 찾는 겁깨비>가 작년에 출간되었다. 작가가 만들어놓은 ‘도깨비’ 세상은 인간 세상의 축소판과 다름없다. 도깨비들이 사는 나라에도 겁이 많은 ‘겁깨비’가 등장한다. ‘겁깨비’라는 작명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겁이 많으면 온갖 세상일에 두려워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다. 도깨비들에게는 필수품인 방망이에 에너지를 채워야 마술을 마음껏 부릴 수 있다. 방망이에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서는 인간 세상에 내려가서 인간을 곯려주어야 한다. 이런 설정 또한 작가의 치밀한 계획으로 ‘겁깨비’가 인간 세상으로 갈 수밖에 없게 한다. 우여곡절 끝에 ‘겁깨비’는 인간 세상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내려가면서 까마귀 떼를 만나 목숨 같은 도깨비방망이를 놓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겁깨비’의 잃어버린 방망이를 찾는 과정은 만만치가 않다. 인간을 무서워하게 설정하여 처음부터 시련이 시작된다. ‘건호’가 도깨비방망이를 주워가지만, ‘겁깨비’는 돌려달라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건호의 집까지 따라간다. 도깨비방망이가 없어지면 도깨비나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반드시 방망이를 찾아야 하는 필연성이 전제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런 난감한 상황을 만들어 ‘겁깨비’와 건호가 만날 수 있도록 설정해 놨다. 건호가 학교에 간 뒤 ‘겁깨비’는 온 집안을 뒤지지만 도깨비방망이를 찾지 못한다. 그러다가 건호가 집에 돌아오고 ‘겁깨비’와 눈이 마주친다. 도깨비방망이를 만진 사람은 도깨비를 볼 수 있다는 장치를 해 놓았다. 아, 도깨비와 눈이 마주친 사람은 도깨비를 볼 수 있다는 발상은 어린이들 마음을 설레게 하고도 남는다. 이런 장면들은 독자에게 도깨비를 만날 수 있다는 상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순조롭게 모든 일이 풀리는 건 아니다. 겁이 많은 ‘겁깨비’를 작가는 끊임없이 위기에 몰아넣는다. ‘겁깨비’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어린 독자들의 마음은 가슴 조이며 책을 읽는 내내 ‘겁깨비’와 호흡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건호는 도깨비방망이를 찾아주고 ‘겁깨비’는 건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학교까지 따라간다. 학교에서 ‘겁깨비’가 벌이는 기상천외한 여러 에피소드를 만나면 또 한바탕 웃음이 터지게 된다. 이처럼 <웃음 찾는 겁깨비>는 어린이 독자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끌어들여 책을 읽는 동안 ‘겁깨비’와 숨막히는 경험들을 함께 한다. 옛이야기에서 소재를 찾고 변주하면서 어린이를 향한 끊임없는 고민으로 탄생한 작품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아직 책을 접하지 않은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겁깨비’가 학교에서 어떤 활약을 하는지 상상하면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경옥 동화작가 이경옥 동화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두 번째 짝>으로 등단했다. 발간한 책으로는 장편 동화 <달려라, 달구!> 등이 있다. 지난 2019년 우수출판콘텐츠제작사업에 선정됐다.
누구도 손대지 않은 보물 상자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근처 보육원 아동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그래서 보육원 아동이 한 반에 한두 명씩 있는데 5학년 때 우리 반도 그랬다. 우리 반의 그 애는 난폭하기로 소문난 남자아이였다. 그 애는 화가 나면 주먹으로 책상을 치거나 자기 비위를 거스르는 아이에게 으름장을 놓기 일쑤였다. 그 애 때문에 교실은 항상 공포 분위기였다. 하루는 반장이 그 애한테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날부터 정말이지 나지 않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 냄새를 아이들은 ‘고아 냄새’라고 명명했다. 누군가 “야! 어디서 고아 냄새 안 나냐?”하면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그 아이를 쳐다봤다. 처음에는 자기한테서 무슨 냄새가 나냐며 바락바락 소리치던 아이도 시간이 가면서 ‘냄새’라는 단어만 들려도 잔뜩 움츠 러들었다. ‘고아 냄새’라는 낙인은 졸업할 때까지 그 아이를 졸졸 따라다녔다. 윤일호 작가의 <가만두지 않을 거야! 왜 부들이는 자꾸만 화가 날까?/내일을 여는 책>를 읽는 내내 그 아이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주인공 부들이와 그 아이가 닮은 점이 많아서였을까? 주인공 부들이는 분노가 치밀면 나이, 성별 불문하고 무기를 들고 위협하거나 거친 말을 가감 없이 내뱉는다. 부들이가 삼각자를 들고 6학년 형을 쫓아가며 “죽여 버리고 말 거야.”하고 외치는 첫 장면은 두렵기까지 하다. 그런 부들이에게 지금껏 만난 어른과는 다른 어른이 나타난다. 바로 4학년 담임 킹콩 선생님이다. 킹콩 선생님은 교실 바닥에 누런 가래침을 뱉고, 수업 시간에 대놓고 잠을 자고, 지각을 해도 당당한 부들이를 야단치지 않았다. 부들이는 그런 킹콩 선생님이 의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 자신의 행동에 제재를 가하지 않은 어른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킹콩 선생님도 부들이의 돌발 행동이 여간 고민스러운 게 아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부들이를 야단치거나 벌을 줄 수는 없었다. 부들이 문제가 부들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혼을 내는 대신 부들이 가슴에 쌓인 분노를 들여다보려 노력했다. 자기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며 가슴 속 아픔을 글로 표현하도록 도왔고, 부들이만 집으로 초대해 선생님이 특별하게 아끼는 제자라고 생각하게 했다. 마침내 구제 불능, 문제아 부들이가 변했다. 동화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런 변화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의 잘못을 잘못으로 대하기보다 서툰 자기표현으로 받아들이고 다양한 각도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한다면 말이다. “눈높이를 맞추고 귀 기울이다 보면 비로소 보이게 됩니다. 인정해 주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조금씩 가능성과 잠재력을 알게 되겠지요.”라는 윤일호 작가의 말을 끝으로 이 책을 권한다. 더불어 아이들은 누구도 손대지 않은 보물 상자라는 걸 기억하자. 열리지 않은 보물 상자 안은 반짝반짝한 미래로 가득할 테니. /김근혜 동화작가 김근혜 동화작가는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선물> 로 등단했다. 발간한 책으로는 동화 <제롬랜드의 비밀>, <나는 나야!>, <봉주르 요리 교실 실종사건> 등이 있다. 현재 전주 최명희문학관 상주 작가로 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중략) 찾는다!” 어릴 적 숨바꼭질할 때 이 소리는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쫓기는듯한데 왜 그리 웃음을 구르게 만들던지…. 요새를 찾아 나는 높은 곳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돌 틈에 발을 딛고, 간신히 꼭대기에 한 손을 얹었을 때였다. 물컹한 무언가가 손아래 잡혔다. 같이 달아나던 누군가가 소리쳤다. “쥐, 쥐! 이따만 해.” 나는 며칠 동안 셀 수 없이 손을 씻고 또 씻었다. 오랜 세월 동안 내 기억이 편집되었겠지만 나는 아직도 새까맣고 고양이만 했던 쥐를 잊을 수가 없다. 『트럭 속 파란눈이』의 은호가 외치는 소리에 불현듯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거 씻어야 돼. 열 번 스무 번, 더, 더 많이!” 은호네 집에 남은 쌀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하필이면 씻어 놓은 곳에 쥐가 빠지다니…. 하는 수 없이 쥐를 건져버린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할아버지에게 다시 쌀을 씻어야 한다고 크게 소리친 것이다. 그 밥을 토하지 않으려 욱여넣었다. 은호에게 가난은 징그러운 것보다 더 힘이 셌다. 동화의 시작은 소소한 이유로 옥신각신하는 것 같아 재밌고, 흥미로웠다. 송곳니를 뺀 손자의 입안을 찍으려고 아침부터 할아버지는 카메라를 들이댔다. 살점이 뜯기는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크게 입 벌리라고 말했다. 손자의 입안에서 바라보는 카메라 든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이와 렌즈에 비친 손자의 이까지. 한 앵글에 세 개의 입이 보이는 그림에서 할아버지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손자의 성장 모습을 남기려는 극성스러운 할아버지로만 보였다. 창고 속 컨테이너, 멈춰선 낡은 트럭, 득실대는 쥐들, 얼마 안 남은 쌀, 이 배경은 모두 빈곤을 보여준다. 돌아오지 않는 부모는 기다림 대신 버림이라는 상처일 뿐이다. 은호는 자신을 찍어 아빠에게 보내는 것도 화가 났다. 멈춰 선 트럭은 너무도 무기력했다. 트럭을 발로 걷어차고, 주먹으로 쳐 화풀이를 해도 돌아온 건 아픔이었다. 비상시 연락하라고 쪽지에 적힌 ‘119’는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만약 전화를 한다면 그건 분명 할아버지에게 일이 생긴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은호는 미래를 꿈꾸기보다는 쌀이 떨어지지 않길 바라는 아이이다.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기보다 득실거리는 쥐가 없어졌으면 바랄 뿐이다. 하지만 앞날이 캄캄할 것만 같은 은호에게 트럭 속 도둑고양이 ‘파란눈이’는 불빛을 밝혀준다. 버렸던 새끼를 다시 데리고 간 파란눈이는 다독여주는 위로가 된다. 황선미 작가의 작품에는 화해와 성장, 생명존중과 정체성, 희망이 있다. 슬픈 결말이지만 강한 의지와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트럭 속 파란눈이』도 암담하지만 희망의 끈을 이어간다. 아무것도 해줄 것 같지 않았던 고물 트럭에서 새 생명이 태어났다. 파란눈이 덕분인지 쥐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은호의 창고 속 컨테이너, 고물트럭은 분명 보금자리이다. 긴장과 고난의 전개가 과장되지 않았다. 글 서두에서 나의 옛 추억과 은호의 이야기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읽는 내내 왠지 내 가까이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황선미 작가의 잔잔함과 강렬함이, 소박함과 치밀함이 균일하게 버무려져 있다. 진솔하고 따뜻하다. 있는 자에 대한 적개심과 시기심이 한 구석에 자리한 은호. 『트럭 속 파란눈이』는 한 아이의 마음이 마지막까지 넘치지 않고 잔잔하게 펼쳐진 이야기가 있다. /김영주 작가 김영주 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 '마키코 언니'로 등단했다. 같은 해 동양일보 동화 부문에서 '가족사진'으로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장편 동화 <레오와 레오 신부>, 청소년 소설 <가족이 되다> 등을 출간했다.
20년간 신춘문예에 도전했던 사내가 있다. 해마다 12월이 되면 우체국에 갔다. 일간지 별로 응모하느라 우표 값도 꽤 들었다. 그때부터 휴대폰은 항상 충전해 두었고 옆 사람 벨소리에도 깜짝 놀랐다. 새해 아침이면 당선작들을 찾아봤다. 그리고 자신의 불운에 좌절했다. 낙선한 이유를 몰라서 화가 났고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슬펐다. 나이 쉰이 다 되어 사내는 대학원에 입학하기로 했다. 지도 교수였던 안도현 시인은 ‘연애를 하고 술을 많이 마셔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사내는 다시 좌절했다. 체질적으로 술이 약했고, 총각이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그림을 그린다. 알아주지 않아도 40년간 그렸다. 그림을 그리면 잡념이 없어졌다. 판화를 할 땐 조각 날이 지나간 자리마다 뿜어내는 나무향이 좋았다. 송곳을 찍어 별 모양을 만들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되어 하늘에 별이 떴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그를 ‘그림 천재’라고 불렀다. 그가 그렸다는 걸 안 믿을 정도였다. 틈만 나면 그렸다. 선반에 습작품이 가득 쌓였다. 어느 날 집에 오니 그림이 없어졌다. 아버지가 불쏘시개로 썼다고 했다. 사내는 다시 그렸고 아버지는 다시 태웠다. 아버지는 임종을 앞두고 말했다. ‘이제 그림은 그만 하고 취직해라!’ 사내는 얼마 전 첫 시집을 냈다. 제목은 <달 칼라 현상소>다. 시집을 내고 나서도 달라진 것은 없다. 그에겐 87년 민주화의 투쟁의 향수가 남아 있다. “디지털로 바뀐 지가 언제인데 / 코닥필름 회사 망한 지가 언제인데 / 아날로그 필름만을 고집하는 달 칼라 현상소 남자 / 자꾸만 얼굴을 바꾸는 달을 좇는다 ”(표제시 ‘달 칼라 현상소’) 달은 얼굴을 바꾸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사내에게 달은 자유요, 민주주의다. 시인은 달이 보이지 않는 날에도 달의 존재를 믿는다. 시인 진창윤은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꾼다. 그런데 돈에 대한 공포가 민중의 연대를 방해한다. 내일이 두려워 현재는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벌면 자유를 누리게 될까? 효율성을 위해 자동차를 사고 가전 제품을 바꾼다. 노동시간은 추가되고 어느새 몸은 늙어 약해진다. 벌어둔 돈은 치료비로 나간다. 돈에 대한 공포가 각자도생을 만든다. 시인은 세상이 다 변해도 달이 이끄는 데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20세기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말한다. 생계를 위한 ‘노동’과 또 다른 세계를 만드는 예술가의 ‘작업’이 의미를 갖기 위해선 사회적, 정치적 ‘행위’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행위의 자유’가 권리이자 의무였다는 것. 시인은 노동이 주는 돈의 유혹에서 자유롭기 위해 오전엔 독서를 하고 오후엔 돈 안 되는 그림을 그린다. 저녁이 되면 더 돈 안 되는 시를 쓴다. 사내의 삶은 예술 같고 그의 시집에는 생활이 담겨 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은 낭만주의자다. /박태건 시인 박태건 시인은 익산 출신으로 1995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시와반시 신인상과 불꽃문학상을 수상했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대산문화재단 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되었다. 시집으로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가 있으며 지역 문화콘텐츠를 활용한 스토리텔링에 관심이 많아서 <익산 문화예술의 정신>을 비롯한 10권의 책을 펴냈다.
희곡을 낭독하는 일은 겨울바람에 날리는 자기 입김을 보는 것과 같다. 감정을 실어 읽은 글이 상대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낭독자를 자극하여 삶을 환기하니 말이다. 글자만 소리 내어 읽는 음독과 달리 장단과 고저를 달리하며 소리에 감정을 얹는 낭독의 즐거움은 희곡이 제격이다. 최기우 작가의 네 번째 희곡집 <달릉개>는 달래의 전라도 방언으로 부채 장수인 주인공의 이름이자 동명 희곡이다. 전주대사습에 나가 장원을 해 참봉 벼슬을 받아 아버지 한을 풀어주려던 꿈을 포기한 달릉개가 서예가 이삼만과 소리꾼 주명창을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작년 봄, 『조선의 여자』 때도 그랬듯이 낭독을 하던 지인과 나는 작가의 시그니처를 마주하며 감탄을 연발했다. 전라도 방언이 살아 있는 입말 속에 숨어 있는 해학과 풍자라니. 『달릉개』 7막 <왜망실 짓거리>에서 《(p.50)주명창: 지꺼리? 짓거리? 그것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거리요? 전주를 전봇대라고 허는 같잖은 농짓거리요? 전주를 이번 주, 지난주라고 허는 뻘짓거리요? 컹컹컹컹 개가 짖는 개짓거리, 욕지거리, 쌈짓거리요?》는 지역 특산품을 해학적으로 보여준 단적인 예다. 지인과 주거니 받거니 낭독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긴 하나 시간 맞추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때문에 희곡집 <달릉개>에 실린 나머지 작품은 혼자서 낭독했다. 『녹두 장군 압송 次』를 혼자 메기고 받기를 반복하는 동안 울컥울컥 뜨거운 것이 목울대로 올라왔다. 그러다 유머 섞인 문장을 만나 웃기도 했다. 《(p.80)엿장수: ~ 자네 솜씨를 어디다 댄당가! 지금 여기는 ~ MSG도 없을 것인디. (p.97)정봉준: ~ 기율(紀律)이 없어 다시 싸울 수 없었다. (p.113)정봉준: ~ 전투에서 패했는지 ~ 나는 알았네. (p.113)손민중: 그것이 무엇입니까? (p.113)정봉준: 우리는 정작 농민의 ~ 잊고 있던 것이다. (p.112)정봉준: 조선의 청년아, ~ 더 느리게 가야 할 것이다.》 흥부전 박타는 장면을 다룬 『시르렁 실겅 당기여라 톱질이야』는 그저 흥이 났으며 『월매를 사랑한 놀부』는 《7막 <긍게, 이르믄 안 되는디> 10막 <빌믄 뭐가 달라징가> 15막 <인제 가면 언제 오나>(p.213)놀부: ~월매, ~ 괭이 밥이 아니라 ~ 나, 가네!》를 이리 읽다, 저리 읽으매 애잔하기도 했다. 엿장수와 뻥튀기 장수가 관객들 흥을 돋는 것으로 시작하는 『아매도 내 사랑아』 또한 구성진 장단에 흥이 들고 나서 저 혼자 낭독을 한 것인지 놀이를 한 것이 몰랐다. 벌써부터, 작가의 세 번째 희곡집 <은행나무 꽃>에 수록된 『수상한 편의점』, 『교동스캔들』을 지인과 낭독할 것이 기쁘다. 작가는 희곡집 네댓 권은 읽어야 책 좀 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희곡집 대여섯 권은 갖고 있어야 집에 책 좀 있다고 하는 것이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만큼 희곡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죽어 있는 텍스트에 생명을 불어 넣는 낭독의 힘을 염두한 말인지도 모른다. /오은숙 소설가 오은숙 소설가는202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납탄의 무게’가 당선돼 소설가로 등단했다. 현재 요양 병원 근무하고 있으며 서울을 오가며 창작 수업을 들었다. 앞으로도 일하며 글쓰는 단순한 삶이 이어질 것이다. 공저로는 <1집 스마트 소설>, <지금 가장 소중한 것은>, <2021 신예작가>가 있다.
봄소식이 멀지 않았다. 벌써부터 부안에는 복수초와 노루귀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제 삭막했던 세상은 봄꽃과 파릇파릇한 새순으로 뒤덮일 것이고, 한겨울 월동을 끝낸 나비들도 제 세상인 양 날아다니리라. 연일 코로나 급증 소식으로 우울하지만 그때쯤이면 겨우내 몸을 잔뜩 움츠렸던 이들의 어깨도 조금은 펴지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 제주도에서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제주지역에서 사는 나비를 다룬 『제주도 나비와 문화』라는 책이 나왔다는 이야기였다. 비매품이라 구하기도 힘든 책을 제주까지 연락해서 어렵사리 받았다. 제주도 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오랜 시간과 공력을 기울여 제주도 나비 생태와 문화를 다룬 책자라서 더 반가웠다. 책 구성은 제주 나비 생태, 제주 나비 표본, 제주도 나비 연구의 발자취로 이루어져 있다. 380페이지에 달할 만큼 방대한 분량에 현장 사진을 포함한 내용 구성도 알차다. 이 책의 부제는 산굴뚝나비는 한라산을 떠나지 않는다.이다. 우리나라에는 대략 220여 종의 나비가 산다. 그중 산굴뚝나비는 유일하게 천연기념물 제458호로 지정된 나비이다. 다른 나비들이야 골고루 분포하는 편이지만 유독 산굴뚝나비만큼은 제주도 한라산, 그것도 1300m 이상에서만 산다. 운이 좋다면 한여름 한라산에서 이 나비를 만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표지도 산굴뚝나비가 차지하고 있다. 아마 누구나 한 번쯤은 방학숙제로 나비 채집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한때 우리는 주변에서 흔하게 나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전통 민화에도 나비는 쉽게 보인다. 그런데 요즘은 나비가 예전처럼 흔히 보이지 않는다. 상제나비처럼 한국에서 사라져 전설로만 남은 나비도 있다. 나비는 환경변화에 민감하기 때문에 기후변화를 예측하거나 환경오염을 추적하는 지표종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서식지 파괴와 생태 환경이 파괴되면서 나비 개체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지금은 지역을 대표하는 상품과 새로운 콘텐츠 개발에 국가 차원에서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시대이다. 그러나 지역의 생태계와 지역 문화를 바로 아는 일이야말로 더 시급하고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우리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지역 생태와 문화를 지키고 가꾸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몫이자 의무이다. 우리 지역에서도 조만간 이런 멋진 책자가 나오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장창영 시인은 전주 출신으로 2003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불교신문서울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돼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시집으로 <동백, 몸이 열릴 때>와 문학이론서 <디지털문화와 문학교육> 등을 펴냈다. 그동안 다녀온 여행기를 여행잡지 <뚜르드 몽드>에 연재하고 있다.
주인이 게으른 헌책방일수록 책들은 더 두서없이 쌓여있기 마련인데 이런 헌책방에 으레 괜찮은 책들이 많았다. 이른 봄 두릅나무 순이라도 꺾는 것처럼 면장갑까지 준비해 헌책방을 뒤지다 보면 한 아름 가까이 책을 고르게 되는데. 헌책방의 책들은 긴 시간 정성을 다해 골라도 명저이면서 읽지 않은 책일 가능성이 작았다. 대개 빌려 읽든지 훔쳐 읽든지 읽기는 읽었으나 책장에 꽂혀 있지 않은 책. 그럴만한 책이 아닌데 양장본으로 만들어 책값이 비싸 구매하지 못했던 책. 읽지도 않을 거면서 빌려 간 뒤에 돌려주지 않는 책. 읽지 않을 걸 알면서도 책장에 꽂아 두어야 할 것만 같은 책. 꽂아 두면 왠지 있어 보이는 책. 그리고 절대 헌책방에 있으면 안 되는 책, 헌책방 구석에서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타고 먼지가 쌓이면서 박대당하면 안 되는 책이게 마련이다. 토요일과 일요일 막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한 주를 살고, 방학 두 달 일해서 한 학기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던 조실부모한 대학생이, 한 아름의 헌책을 모두 구매할 수는 없었고. 돌아갈 버스비와 콩나물국밥값을 제하고 남은 돈만큼만 책을 사게 마련인데. 우선순위에서 밀린 책들은 책방 모퉁이나 눈길이 머물지 않는 뒷줄 정도에 숨겨 다음을 기약하곤 했다. 그 책들을 놓고 오는 마음이 허전하고 스산하여 문득 인생이란 걸 알아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는데. 그 초라한 살림살이에도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매번 구매했던, 헌책방에 절대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책이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다. 한때 표지에 검열필이 찍힌 초판만 열 권 남짓 가졌을 때도 있었는데. 더러는 선물로 주고 더러는 빼앗기기도 해서 이제 두 권만 남은, 헌책방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는 책. 이 책을 그 시절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를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은 알 것도 같다. 한동안 글은 문장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며 살 때가 있었다. 화려하고 신선한 비유, 조율된 리듬감의 일관성,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 단문과 단문을 연결해 이루어내는 날카로움, 보일 듯 보여주지 않는 행간, 길어도 주술 관계가 깨지지 않는 어순, 문맥에 부합하는 적확한 단어, 조사와 수식어의 적절한 생략과 편안한 음독,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해학과 풍자,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긴장감, 아련함을 남기는 여백 등 문장이 글 쓰는 사람의 최우선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달은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달은 찾지도 않고 손가락의 손톱만 다듬던 때가 있었다. 그 무명(無明)을 벗어나게 해준 책이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다.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고민을 시작하게 해준 책. 사회적문학적 주제, 글은 그 주제가 우선이며 주제 실천 의지와 노력이 먼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책.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글 쓰는 사람 노릇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황지호 소설가 『2014 우수출판콘텐츠제작지원사업 선정』, 『2021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 저서 『잠수함 속 토끼』 등.
“밥 짓는 일은 절실한 기도였다” 「사랑이 밥 먹여준다」는 김하종 신부가 한국에 온 지 30여 년 만에 쓴 삶의 고백서다. 이탈리아 태생으로 사제 서품을 받은 뒤 한국으로 온 그는 1992년부터 지금까지 노숙인들을 위해 밥을 짓고 있다. 김하종 신부는 어렸을 때부터 무언가를 읽는 일에 어려움을 느꼈다. 숙제를 해결하려면 친구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난독증을 앓고 있었다는 것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난독증으로 인한 고통은 그의 영혼을 단련시켰고 주변의 나약함에 귀 기울이게 했으며 타인의 절망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했다. 사제가 되어 봉사의 길에 접어든 것도 아픔을 겪은 경험 때문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썼다. “난독증으로 다른 아이들보다 늦되었던 어린 시절에도 ‘괜찮다’라고 했던 어머니, 사제의 길을 간다고 결심을 밝혔을 때도 ‘괜찮다’라고 했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괜찮다’라고 했던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41쪽) 김하종 신부의 이탈리아 이름은 ‘빈첸조’다. 하종은 ‘하느님의 종’이라는 한국식 이름이다. 그는 성남시에서 ‘안나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성씨는 ‘성남 김씨’가 되었다. 1998년에 불어닥친 IMF는 이웃의 생존을 위협하고 200만 명에 가까운 실업자를 양산했다. 김하종 신부는 그해 7월 7일 실직자와 행려자를 위한 무료급식소 ‘안나의 집’ 문을 열고 수백 명분의 쌀과 반찬 재료를 구하기 위해 직접 발로 뛰었다. 리어카를 끌고 새벽 시장을 돌며 팔다 남은 야채를 얻었고 학교의 급식소를 찾아가 남은 반찬을 얻었으며 빵집과 결혼식장의 뷔페, 김장 김치를 나눠주는 절에도 찾아갔다. 앞치마를 두르고 밥을 짓는 동안 상처받은 일도 많았다. 하루는 음식을 만들고 있는데 밖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술에 취한 다섯 사람이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김하종 신부는 싸움을 말리다가 뺨을 맞았다. 상황이 종료되고 사무실에 들어간 그는 울기 시작했다. 매일 사랑을 주는 데도 폭력적인 행동으로 돌아온 것이 상처로 남았다. 그러나 다시 일어서야 했다. “오늘 흘린 눈물은 어두운 땅에 소중한 씨로 뿌려질 것이다. 새로운 사랑과 평화를 탄생시킬 것이다.”(145쪽) ‘안나의 집’에는 무료급식소 외에 공동생활 가정인 ‘쉼터’가 있다. 춥고 위험한 거리를 떠도는 청소년들의 대피소다. ‘쉼터’에서는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한편 상담, 의료 지원, 직업, 자활 교육 등을 하고 있다. 김하종 신부는 소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안전한 장소와 따뜻한 환영, 순수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꽃을 볼 때 평화로움을 느낀다. 나눔의 길에서 피어난 꽃은 더욱 아름답다. 밭에서 키운 감자와 배추를 나눠주는 분, 거리에서 만난 노숙인에게 주머니의 용돈을 다 털어준 사람, 어렵게 모은 100만 원을 놓고 가신 낡은 코트의 할머니, 해마다 약을 기부하는 약사들, 돌잔치 대신 나눔을 택한 부부, 안나의 집에서 도움을 받다가 이제는 후원자가 된 사람……. 김하종 신부는 나눔의 꽃들을 끝없이 소개한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이 책을 읽어준 당신이 내게는 큰 응원이다.’(255쪽) 책 한 권을 읽어주는 것이 나눔의 길에 들어서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정숙인 소설가- 주철희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1948, 여순항쟁의 역사 우리는 종종 세계 곳곳의 분쟁과 민간인들에게 행해지는 폭력의 잔혹함을 목도(目睹)한다. 전쟁 중에도 민간인을 대상으로 벌이는 초토화 작전은 국제사회가 용납하지 않기에 행위를 명령하는 자, 그 사실을 묵인한 사령관은 전쟁범죄자로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지기도 한다. 1948년, 영토 내 자국민을 초토화하라는 작전 명령이 하달되었다. 명령을 받은 군인은 어떻게 해야 올바른 행동이었을까? 주철희의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1948, 여순항쟁의 역사』는 이에 대한 의문과 답을 제시한다. 이 책은 군인들의 봉기에 초점이 맞춰진 책이다. 그들은 제주도민 30만 명을 학살하라는 것이 잘못된 명령이기에, 나쁜 국가의 잘못된 명령을 거부하고 맞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는 항쟁이 아니라 권력자와 소수 기득권이 만들어낸 반란의 역사로 강요되었다. 저자는 반란의 낙인을 여순항쟁이라고 정명(正名)한다.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 그들은 누구인가. 1948년 10월 19일 14연대의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의 동포의 학살을 거부했던 밤의 외침은 대한민국 민중 항쟁 역사의 첫 서막이었다. 저자는 독자가 이 책을 읽고 반란이란 족쇄에 조금이라도 의문을 품고, 여순항쟁의 역사를 떠올린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1948년 10월 19일에서 1955년 4월 1일까지 여순항쟁으로 인한 학살 피해자의 수는 1만 5천에서 2만 5천 명이다. 여순항쟁은 여수와 순천, 전라남도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남원, 순창과 임실, 경상남도 민간인의 학살 역시 많았기 때문에 학살 피해자는 상상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은 단순한 아픔을 공감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배경에서부터 원인과 과정을 정확히 알게 한다. 아픔을 공감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것을 정확히 알고 공감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주철희 역사학자는 말한다. 이념 논쟁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1948년 10월 19일의 사건, 뚜렷한 정명(正名)없이 연구자마다 명칭을 제각각 사용하는, 군인의 총궐기로 촉발하여 민중의 지지와 합세한 1948년 10월 19일 사건. 반란의 낙인으로부터 시작된 반공문화를 새롭게 해석하는 역사 작업은 사료와의 싸움이며 시간과의 다툼이고 나와의 투쟁이었다고. 현재 여수에는 여순항쟁을 역사 측면과 기록화 측면에서 접근하고자하는 두 사람이 있다. 주철희 박사와 박금만 화가는 반란의 도시 여순이라는 왜곡된 역사를 바꾸고 시민들의 의식을 전환하기 위해 오늘도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이 책은 그 목표로 가는 길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갤러리R에서는 2021년 12월 28일부터 2022년 1월 23일까지 여순사건특별법 제정을 기념하는 박금만 화가의 여순항쟁 역사화전을 전시 중이다. 또 주철희 박사의 특별강연이 1월 15일 오후 2시에 예정되어 있어 여순항쟁의 현재를 만날 수 있다. 박금만 화가는 단순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질문을 통해 현재 나의 배경의 근원을 떠올려보게 한다. 그는 이 이야기가 왜 시작되었고, 이후에는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나이거나 가족이거나 이웃임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그림 이전과 이후의 연속적 이야기를 끄집어 올리게 한다. 결국 역사화를 통해 현장을 목격하게 한다. 주철희 박사의 사실 자료와 박금만 화가가 생생하게 그려낸 여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우리 모두가 아픈 역사의 사실적 증인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글. 정숙인 소설가 작품으로는 단편소설 「백팩」과 「빛의 증거」, 민중구술 「농부로 잘 살고 있었다」와 채록집 『아무도 오지 않을 곳이라는, 개복동에서』가 있다.
장창영 시인 시집 '여행을 꺼내 읽다' 어쩌다 책이라는 사물과 인연이 닿았는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책은 늘 내 손이 닿을 자리에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도 가끔 미운 구석이 살펴지는 법인데, 수십 년 들여다본 책이 싫지 않은 건 전생에 책이 나를 구해준 모양이다. 그런 책을 손에 들면 대개 두 가지를 고민한다. 정독할 것인지 발췌독할 것인지가 첫째 고민이라면, 한 번 읽고 책장에 꽂아둘 것인지 두어 번 거듭 읽을 것인지를 판단하는 일이 나머지 고민이다. 장창영 시집 <여행을 꺼내 읽다>(북컬쳐)는 드물게 발췌독으로 시작해 정독으로 끝난 책이다. 그러면서 자주 들여다보는 책이기도 하다. 이곳저곳 발길이 닿았던 곳의 풍경과 그곳에서 발견했던 자신의 내면을 낯설게 풀어내는 재미가 있다. 미리 말하지만, 이 시집은 읽는 즐거움에 앞서 보는 맛이 있다. 한 컷 사진이 있고 그 사진에 담긴 이야기를 시 형식에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와 문자 기호가 서로 의미를 보완해주니 시집 읽기가 한결 수월하다. 사진만 들여다보다가 책을 덮어도 시집 한 권을 알차게 읽은 보람을 얻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시집이 세상의 가장 뜨거웠던 쪽이/가장 서늘한 쪽으로/발길을 옮겨가는 순간(「무이네에 해가 지면」)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삶의 뜨거움으로부터 서늘한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는 일이 바로 여행일 것이다. 일상이라는 욕망과 충동의 뜨거움을 잠시 가라앉히기 위해 우리는 낯선 시간과 공간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럴 때 여행은 늘상/세상과 이기기 위한 연습만 하다가/오늘은 잠시 지기로 한다(「나트랑에 부는 바람」)는 약속이 된다. 여행길에서 우리는 나의 길과 만나는 숱한 다른 길을 보게 되고 다른 길에 서 있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렇게 다른 세상을 경험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세상에 슬쩍 져줄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시집 <여행을 꺼내 읽다>를 읽는 일은 시인의 여행길에 동행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 만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앞에서 아득해지고 말았다. 이곳 사람들은/눈 어두운 이를 위해/마음으로 작품 읽는 법과/더불어 세상 가는 길을 점자로 새겨 놓았다는 시행을 읽고는 홀로 어둠을 걸어가야 하는 가혹한 운명(「점자 안내문」)에 잠긴 우리를 떠올렸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 시대라는 어둠 속을 홀로 걷는 중이다. 이런 여행길에 눈 밝고 마음 따뜻한 동행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 이것이 새해에 여행 시집을 펼쳐 든 이유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얼마나 움츠렸었나. 만나지 못해 많이 외로웠고 쓸쓸했다. 그래서일까? 어차피 겨울은 끝날 테고/지붕이 있는 한/봄은 또 나비처럼 올(「시라카와고에서 온 편지」) 거라는 희망을 믿기로 한다. 2022년 새해는 나비처럼 다가올 봄을 기다리면서 한 해의 여행을 시작하고 싶다. 문신: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다. 시집 <곁을 주는 일> 등을 냈으며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이다.
밥 짓는 일은 절실한 기도였다 「사랑이 밥 먹여준다」는 김하종 신부가 한국에 온 지 30여 년 만에 쓴 삶의 고백서다. 이탈리아 태생으로 사제 서품을 받은 뒤 한국으로 온 그는 1992년부터 지금까지 노숙인들을 위해 밥을 짓고 있다. 김하종 신부는 어렸을 때부터 무언가를 읽는 일에 어려움을 느꼈다. 숙제를 해결하려면 친구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난독증을 앓고 있었다는 것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난독증으로 인한 고통은 그의 영혼을 단련시켰고 주변의 나약함에 귀 기울이게 했으며 타인의 절망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했다. 사제가 되어 봉사의 길에 접어든 것도 아픔을 겪은 경험 때문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썼다. 난독증으로 다른 아이들보다 늦되었던 어린 시절에도 괜찮다라고 했던 어머니, 사제의 길을 간다고 결심을 밝혔을 때도 괜찮다라고 했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괜찮다라고 했던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41쪽) 김하종 신부의 이탈리아 이름은 빈첸조다. 하종은 하느님의 종이라는 한국식 이름이다. 그는 성남시에서 안나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성씨는 성남 김씨가 되었다. 1998년에 불어닥친 IMF는 이웃의 생존을 위협하고 200만 명에 가까운 실업자를 양산했다. 김하종 신부는 그해 7월 7일 실직자와 행려자를 위한 무료급식소 안나의 집 문을 열고 수백 명분의 쌀과 반찬 재료를 구하기 위해 직접 발로 뛰었다. 리어카를 끌고 새벽 시장을 돌며 팔다 남은 야채를 얻었고 학교의 급식소를 찾아가 남은 반찬을 얻었으며 빵집과 결혼식장의 뷔페, 김장 김치를 나눠주는 절에도 찾아갔다. 앞치마를 두르고 밥을 짓는 동안 상처받은 일도 많았다. 하루는 음식을 만들고 있는데 밖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술에 취한 다섯 사람이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김하종 신부는 싸움을 말리다가 뺨을 맞았다. 상황이 종료되고 사무실에 들어간 그는 울기 시작했다. 매일 사랑을 주는 데도 폭력적인 행동으로 돌아온 것이 상처로 남았다. 그러나 다시 일어서야 했다. 오늘 흘린 눈물은 어두운 땅에 소중한 씨로 뿌려질 것이다. 새로운 사랑과 평화를 탄생시킬 것이다.(145쪽) 안나의 집에는 무료급식소 외에 공동생활 가정인 쉼터가 있다. 춥고 위험한 거리를 떠도는 청소년들의 대피소다. 쉼터에서는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한편 상담, 의료 지원, 직업, 자활 교육 등을 하고 있다. 김하종 신부는 소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안전한 장소와 따뜻한 환영, 순수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꽃을 볼 때 평화로움을 느낀다. 나눔의 길에서 피어난 꽃은 더욱 아름답다. 밭에서 키운 감자와 배추를 나눠주는 분, 거리에서 만난 노숙인에게 주머니의 용돈을 다 털어준 사람, 어렵게 모은 100만 원을 놓고 가신 낡은 코트의 할머니, 해마다 약을 기부하는 약사들, 돌잔치 대신 나눔을 택한 부부, 안나의 집에서 도움을 받다가 이제는 후원자가 된 사람. 김하종 신부는 나눔의 꽃들을 끝없이 소개한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이 책을 읽어준 당신이 내게는 큰 응원이다.(255쪽) 책 한 권을 읽어주는 것이 나눔의 길에 들어서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황보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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