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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만에 전주에 귀향 '남천 송수남 선생'

80년대 현대수묵운동 주도…작품서 실험 지속…전주 흑석골에 작업실 꾸리고 신진작가 뒷받침

지난 16일 남천 송수남 선생이 전주시 서서학동 흑석골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안봉주(bjahn@jjan.kr)

남천 송수남 선생(73)을 생각하면 황소가 연상된다. 뚝심있는 얼굴에 다부진 덩치는 기력이 펄펄 넘칠듯 하다. 붓에 먹을 묻혀 휘둘러 대는 화가지만, 씨름꾼이 되었다면 천하장사가 되지 않았을까. 역시나 그는 한국 화단의 '장사'가 됐다. 지난 16일 전주시 서서학동 흑석골에 신축된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50년 만의 귀향입니다. 나이가 드니까 귀소 본능이 들어요. 다시 오니, 좋습니다. 푸근하고 아늑해요."

 

작업실에는 꽃을 그린 수묵채색화 몇 점이 놓여 있다. "나이를 먹으니까 화려한 게 좋아진다"는 그는 울긋불긋한 꽃그림을 그리고 있다. 화면을 가득 메운 꽃들은 사방팔방에서 잔치를 벌이는 듯 했다.

 

"어린 시절, 뒷산에 피어 있던 도라지꽃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청초하고 맑은 그 꽃에 넋을 잃었죠. 내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느낀 것도 자연을 가까이 한 어린 시절의 추억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합니다."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는 '환쟁이' 얼굴에는 행복한 꽃이 피었다. 그림이 그의 인생이고, 그림이 그의 신앙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호방한 웃음이었다.

 

'우리 시대의 수묵인'으로 꼽히는 그의 작품 세계는 끊임없는 실험정신으로 점철돼 있다. 그는 60년대 수묵 추상화를, 70년대 서양화 같은 강렬한 관념산수화를 그렸다. 하지만 스웨덴 국립동양박물관 초청전을 계기로 다시 수묵으로 돌아왔다.

 

"외국에 나가 보니 자기 것을 찾지 않을 수 없었어요. 장식성이 짙은 산수화로는 대결하기 힘들다는 걸 깨달았죠. 한국화의 새로운 방법론은 수묵의 개발 밖에는 없었습니다."

 

80년대부터 그는 '현대 수묵 운동'을 주도했다. 이는 60~70년대 경제가 나아지면서 한국화가 상업적이고 장식적인 요소로 흐르는 데 대한 반성과 실험정신에서 출발했다.

 

"수묵 정신은 먹 하나와 종이 한 장으로 이뤄집니다. 하지만 수묵의 발전 가능성은 무한해요. 먹은 검은색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종이에 닿는 순간 또 다른 직감의 세계를 펼쳐낼 수 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한 일(一)이 빼곡히 들어찬 수묵 숲을 표현해왔다. 가로로 누워 있고, 세로로 서 있는 선 하나 하나에서도 나무와 숲을 볼 수 있었고, 그 선이 품고 있는 여백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먹은 색의 시작이며 끝이고, 가장 우주적이고 영원한 것"이라며 "먹이 극에 이르면 동양의 선(禪)과도 통한다"고 했다.

 

"한 일(一)은 하나라는 이야기예요. '곧다', '바르다'는 뜻을 담고 있죠.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과 모여 전체가 되는 거죠. 더불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바른, 밝은, 맑은 세상이잖아요. 일종의 바람이죠. 이마저도 없다면, 어떻게 살겠어요."

 

그의 수묵은 현대적이다. 선원근법이 사라진 평면, 중성적인 먹색의 사용, 군더더기 없는 선의 반복 등이 그렇다. 이 때문에 젊은 작가들에게는 그의 수묵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반면 화단에서는 반응이 엇갈렸다.

 

그는 "스스로 하고 싶은 걸 찾았기 때문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고 했다. 주변 시선에 연연했다면, 자기 변신을 거듭한 지금의 송수남은 없었을 것이다.

 

"연륜이 쌓이면서 수묵의 정신이 잘 표현되는 것 같아요. 동양 사상의 극치를 보여줄 수 있다고 할까. 동양 사상은 또 한국 정신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 것이 최고라는 식을 탈피한, 보편타당성을 찾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세계적인 미술 사조를 이루는 데 수묵화가 한 부분을 차지해야 한다는 분명한 고집이다.

 

"어머니들이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고 했어요. 전부 다 사랑이 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지 모든 작품을 마치고 나면 기분이 좋아요. 천하가 다 내 것 같죠."

 

스승 없이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했듯 그는 제자들 화풍에도 간섭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는 "가만놔두면 뭔가 된다. 걱정스럽던 학생들도 때가 되면 자기 그림을 찾아간다"며 패거리를 만들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가 현재 운영중인 신진 미술 작가 지원 프로그램은 지역의 유망한 신인을 대상으로 장소를 제공하고, 장학금을 지원하는 방식. 공간을 더 확보해 작가들을 지원하면서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문화교실을 운영하고, 자료 도서관을 짓고 싶다는 욕심도 있다.

 

"채워지지 않을 때 모든 가능성이 시작돼요. 남의 것이라도 빌려와서 꽉 꽉 채우고 싶은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창작은 그 여유로부터 피어나거든요. 여기에서 나는 그런 여유를 느낍니다."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가듯 그림도 사람도 변해간다. 그는 "수묵을 하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한지에 먹물이 스며드는 때"라며 "먹물처럼 세상과 나는 하나가 되는 삶을 꿈꾼다"고 했다. 물과 먹이 합쳐져서 하나의 우주가 탄생되는 것처럼 물 흐르듯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또 다른 수묵은 이렇듯 거스름 없는 삶의 이야기일 것이다.

 

남천 송수남 선생은 전주에서 태어나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해 한국화과로 전과했다. 스웨덴 국립동양박물관 초대 개인전을 전후로 한국적인 것에 매료 돼 한국화의 현대화 기틀을 마련했다. 30여 회 개인전을 비롯해 동경국제비엔날레(1967), 상파울루비엔날레(1973), 한국화 100년전(1986) 등 여러 차례의 단체전을 열었으며,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수묵화', '남천 사군자', '수묵의 4계절', '한국화의 길' 등을 펴낸 바 있다.

이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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