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주변의 실패한 연애담도 좋은 글감
△혼사장애 모티프
1970년대에 전 세계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러브 스토리〉라는 영화가 있었다. 원작은 에릭 시걸의 소설인데, 그 첫머리는 주인공 올리버가 사랑하는 아내 제니를 떠나보낸 뒤 이렇게 독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스물다섯 살에 죽은 여자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 여자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총명했다. 그녀는 모차르트와 바흐를 사랑했다. 비틀즈를 사랑했다. 그리고 나를 사랑했다.
〈춘향전〉의 몽룡이와 춘향이도 몽룡의 아버지가 한양으로 갑자기 '전근'을 가는 바람에 평생 변치 말자고 사랑의 굳은 맹세를 했던 그 어린 것들이 더 이상 붙어 있지 못하고 오리정에서 피울음을 쏟으며 작별하지 않았는가.
'혼사장애(婚事障碍) 모티프(motif)'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혼사(혼인/결혼)를 가로막는 동기 혹은 요인'을 뜻한다. 남녀의 사랑을 가로막거나 지속할 수 없도록 하는 유형과 무형의 원인은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이념의 차이로 남북으로 갈라진 동족간에 벌어진 전쟁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과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포로가 되어 배를 타고 제3국으로 가는 도중 바다로 뛰어내려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이명준'이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있다.
자신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혼사장애 요인의 벽 앞에서 작중의 남녀는 고난을 겪는다. 방황하기도 하고 깊은 슬픔에 빠지기도 한다.
△순수와 타락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소설이 있다. 작중의 주인공인 베르테르는 샤롯데를 사랑했지만 당대의 인습체제와 귀족사회의 통념에 가로막혀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자살한다.
〈소나기〉나 〈러브스토리〉처럼 운명적인 요인을 제외하면 춘향이와 몽룡, 이명준과 두 여인(윤애와 은혜), 베르테르와 샤롯데의 사랑을 가로막은 혼사장애 요인은 모두 인간이다. 구체적으로는 그런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타락한 세상이다.
'타락'은 무엇이고, '순수'는 또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과연 우리는 순수한가, 타락했는가. 나는 과연 순수한 사람인가 아니면 타락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본질적으로는 순수하지만/순수했지만 어쩔 수 없이 타락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처음에는 순수했다.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잘 몰랐을 때까지는 적어도 그랬다. 다만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리 변했을 뿐이다.
남녀의 사랑은 중요한 글감 중 하나다. 유사 이래 영원한 글감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남녀의 사랑을 다룬 글을 읽을 경우 그 글의 주제는 거의 대부분 혼사장애 요인에 있다. 남녀의 사랑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없도록 가로막는 '그 무엇'이 바로 주제라는 말이다. 〈춘향전〉이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제는 당대의 비인간적 신분사회의 모순을 드러내자는 것이 되고, 최인훈의 〈광장〉 또한 이데올로기의 비인간적 요소의 고발이 되는 것이다.
주말연속극 같은 멜로드라마의 경우 서로 사랑에 빠진 남녀는 그들 앞에 아무리 극복하기 어려운 혼사장애 요인이 버티고 있다 해도 종국에는 그걸 극복하고 사랑을 성취한다(그 과정이 납득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그걸 '막장' 드라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멜로드라마 얘기다.
우리가 써야 하는 글은 다르다. 글을 쓸 때는 혼사장애 요인을 통한 주제 찾기와 반대로 간다. 글에서 그려야 하는 이야기는 성공한 사랑이 아니고 앞서 보았던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실패한 사랑이다. 혹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랑이다. 모두 타락한 세상 탓이다.
△실패한 사랑 이야기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있는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글을 쓰고 싶어서 글감을 찾고 있다면 당신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서 글감은 가까운 데서 찾으라고 했으니 먼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는 일부터 시작하자. 연애에 실패한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그녀와의 사랑을 지속하지 못했는지 당시의 여러 전후사정을 곱씹어가며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얘깃거리가 될 만한 게 없는가. 초등학교 때 첫사랑인 그/그녀와 결혼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다투지 않고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아가고 있어서 그런가(이런 사람은 어쩌면 좋은 글을 쓰기가 대단히 어려울지도 모른다.).
주변에서도 찾아보자. 그 대신 남녀 어느 한쪽이 백혈병에 걸려서 죽고 말았다느니,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양쪽 집안 내력을 하나하나 파고들어가다 보니 서로 죽고 못 사는 두 사람이 배가 다르거나 씨가 다른 남매로 판명이 나서 천륜을 어기지 못하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느니, 양쪽 집안의 빈부차가 하도 심해서 남자나 여자 쪽 부모가 완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갈라서고 말았다느니 하는 진부하고 통속적인 이야기 따위에는 병아리 눈물만큼도 관심을 주어서는 안 된다. 기웃거리거나 근처를 얼씬거리는 것조차 삼가야 한다.
집안의 어른들뿐 아니라 가까운 형제나 사촌들 중에서 멀거나 가까운 과거에 지독하게 사랑하던 사람과 아프게 헤어진 이들은 없는지, 그들은 무엇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했는지 알아보자. 학교 선후배나 직장의 동료들, 한 동네나 이웃 마을에 사는 아무개와 아무개들의 실패한 연애담에도 귀를 기울이도록 하자. 물론 유명 연예인들의 이혼담 같은 통속적 사건에 관심을 갖는 것도 좋다. 인터넷을 뒤져서 그 이면에 가려진 진실을 샅샅이 뒤져보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기꺼이 눈길을 주도록 하자. 세상이 얼마나 어떻게 타락했는지, 그처럼 타락한 세상은 또 어떤 혼사장애 요인을 몰래 숨기고 있는지 발굴해내라는 것이다. 개인적인 것도 무방하고, 사회적인 요인을 찾아내는 것도 좋다. 불의의 큰 부상을 당했거나 성적부진으로 소속 구단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놓인 야구선수와 그를 열렬히 사랑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사랑 이야기를 무게감 있게 쓰기 위해서는 우리 현대사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동족간의 끔찍한 전쟁을 치렀다. 학생혁명이나 군사쿠데타와 같은 굵직굵직한 정치사회적 사건을 목도하며 변혁의 소용돌이를 헤쳐왔다. 그 과정에서 뜻있는 많은 이들은 위정자들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고초를 겪기도 했다.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가 잔혹한 고문을 당한 이들도 부지기수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이들도 많았다. 그중에는 스스로 온몸에 불을 사르고 처참하게 죽어간 이들도 적지 않았다.
시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그들의 가려진 사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들 중 누군가의 애인이나 아내가 되어 보고, 남자친구나 남편도 되어 보자.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것인지를 맘껏 상상하는 것이다. 그들이 겪었을 고통은 또 어떤 것들이 있었을 것인지도 당신이 직접 겪은 것처럼 눈앞에 그려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려보지 못했던 글감을 캐내거나 포획했으면 그걸 글감으로 사랑 이야기를 만들자. 아무리 순수한 사랑도 세상이 타락해 있는 한 그리 오래갈 수 없고, 종국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되고 만다. 그게 바로 당신이 글 속에서 그려야 하는 타락한 세상 속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이다.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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