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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매우 굵어서 자랑하고 싶은 내 팔뚝】자화자찬·비난·찬양 일변도는 절제해야

나를 자랑하거나 아무런 근거 없는 험담 / 용비어천가 같은 글 읽는 이 거북스러워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거나 다툼이 벌어질 경우 상대방이 지나치게 잘난 체를 하거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써가며 자기주장만 고집할 때, 그래서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을 때 우리는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그래, 니 똥 굵다."

 

"우리 그이가 이번에 승진을 했잖니. 함께 입사한 직원이 백이십 명인가 된다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과장을 달았다고 하더라니까, 글쎄? 어디 그뿐인 줄 아니? 우리 큰애, 걔가 맨날 2등 아니면 3등이더니 이번에 드디어 전교 일등을 했다는 거 아니니…. 내가 이거 졸지에 양쪽으로 축하 턱을 내야게 생겼으니 이래저래 돈 들어갈 일이 태산이다, 얘. 난 이 노릇을 도대체 어쩌면 좋으니?"

 

이 여자는 겉으로는 엄살을 피우면서 사실은 남편 자랑과 자식 자랑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다(이런 걸 두고 우리 지역 사람들은 '야냥개를 떤다'고 한다.). 어차피 작정을 하고 자랑을 하고 있으니 듣는 사람 기분 따위는 '그까이꺼'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런 이들일수록 낯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어휴, 내가 못살아!"

 

"왜, 또?"

 

나는 형자의 다음 말이 궁금했지만 꾹 참았다.

 

"아, 글쎄 이 인간이 나 몰래 주식에다 돈을 얼마나 꼴아박았는지…."

 

"저런…."

 

"그뿐이면 내가 말도 안 해. 아무래도 이 인간이 좀 수상해…."

 

"수상해? 그렇다면 혹시…."

 

이 경우는 어떤가. 친구가 들려주는 '이 인간(남편)'의 이야기에 '나'의 귀가 솔깃해지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그가 늘어놓는 자랑거리는 귀에 거슬리고, 속을 부글부글 끓이는 이야기에는 저절로 귀가 솔깃해지는 이 뒤틀린 심사를 도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런데 글을 쓰고 읽는 것도 이와 거의 같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 같다.

 

자신과 가까운 이(남편, 아내, 아들이나 딸, 형제자매 중 누군가)를 자랑하는 글을 주변에서 가끔 발견하게 되는데, 그런 이야기를 글로 쓸 시간이 남아돌거든 자랑거리가 주체할 수 없도록 넘쳐나는 가족끼리 지금보다 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면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데 모든 정열을 바칠 일이다.

 

△자화자찬의 성찬

 

대학교를 졸업한 뒤 나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각오한 바도 있었지만 석사과정 공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지독했다. 한 과목 보고서로 A4지 500장을, 그것도 거의 논문 수준으로 써야 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서가에 빽빽이 꽂힌 책들을 보면서 매 학기를 즐거운 마음으로 보람 있게 보냈다. 그 바람에 건강을 많이 상하기도 했고, 나는 결국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지독한 병에 걸리고 말았다. 교수가 되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지금 와서 돌이켜보아도 참 아득하기만 한 시절이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고 한다. 그렇게 잘났으니 좀 알아달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글을 쓴 사람은 뻥을 치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다. 이 사람이 대학원에 다니면서 얼마나 '지독하게' 공부했는지 읽는 이는 물론 자세히 알 길이 없다. 아무리 그래도 대학원 석사과정(설령 박사과정이라 해도)을 다니는 학생이 한 과목 보고서로 A4 용지 500장씩이나, 그것도 '거의 논문 수준으로' 써냈다는 걸 믿으려면 누구를 막론하고 상당한 인내가 필요할 듯싶다. 두 과목을 수강했으면 A4 천 장을 썼다는 건데, 그건 책 열 권 분량이다. 대학원은 자기만 다닌 게 아니지 않은가.

 

'서가에 빽빽이 꽂힌 책들'을 위안삼아 그 '지독한' 시절을 보냈다는 것까지는 얼마든지 너그럽게 인정해 줄 수 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또 뭐라고 썼는가. 그 시절에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지독한 병'에 걸렸다고 하지 않았는가.

 

교수님의 시험문제는 강의보다 훨씬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그게 식은 죽 먹기였다. 나는 이미 강의를 받는 동안 교수님께서 출제하실 문제를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10년이 넘도록 그때 보았던 문제들을 마치 손에 들고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후배들은 그 교수님 과목 중간고사나 기말시험을 앞두고 내게 문제를 앞다퉈 물어오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그걸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정확하게 복원해주었다.

 

읽는 사람 기분도 생각해가면서 글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 강의내용보다 훨씬 어려운 시험문제 때문에 다른 학생들은 죽을 쑤는데 자신은 그걸 매번 꿰뚫어보았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일찍이 오래고 고된 수련을 거쳐서 독심술 같은 거라도 연마했을지도 모른다.

 

졸업한 지 10년이 넘도록 대학 다닐 때 출제되었던 문제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줄줄이 꿰고 있다고도 했다. 그 적잖은 세월을 두고 매 학기 똑같은 문제만 출제하는 교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이런 말을 함부로 썼다가 자칫 잘못하면 그 교수의 명예를 크게 손상시킬 수도 있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걸까.

 

물론 자신의 장점이나 업적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야 인지상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서는 읽는 이를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감추고 싶은 단점은 있다. 자신이 행한 일중에서 혹시라도 누가 알게 될까 두려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도 있을지 모른다. 그걸 솔직하게 드러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힘들게 살았던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자신 앞에 닥쳐온 고난과 역경을 얼마나 슬기롭게 극복했는지 쓰는 것은 좋지만 이 또한 읽는 이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수준이어야 한다.

 

자신의 장점이나 자랑하고 싶은 '빛나는 업적'에 대해 글로 쓰고 싶어서 정 견딜 수가 없으면 꾹 참고 있다가 집에 들어가서 새벽이 밝아오도록 일기장에나 실컷 쓸 일이다(사실은 일기에조차 그런 걸 쓰는 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런 다음 한 일 년쯤 묵혀두었다가 그 일기장을 꺼내 다시 읽어보도록 하라.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낯이 화끈 달아오를지도 모른다.

 

△비난하거나 찬양하기

 

납득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신의 주관적인 감상이나 즉흥적 기분에 매몰되어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폄하하는 데 열을 올리는 이들이 있다. 자신이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를 알아달라는 건데 그래 봐야 속만 빤히 들여다보인다. 정작 민망하고 딱한 쪽은 그런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것도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그가 못마땅하면 불러내서 면전에 대고 일침을 가하거나 비판을 하는 게 옳다. 또 그가 내게 한 어떤 행동에 정 견딜 수 없이 화가 나거든 당장 달려가서 멱살을 붙잡고 코피가 터지도록 싸울지언정 그걸 글로 써서 함부로 발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다.

 

글로 쓰지 말아야 할 것은 또 있다. 바로 '용비어천가' 같은 글이다. 그렇게 완벽한 인격의 소유자를 평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느니, 21세기에 새롭게 태어나신 신사임당 같은 그 분에게는 평생을 두고 흠모와 존경의 마음을 전해드려도 모자랄 것 같다느니, 그토록 훌륭한 학식과 덕망을 두루 갖춘 선생님의 헌신적인 가르침을 받으면서 공부할 수 있었던 건 제자들 모두의 크나큰 행운이었다느니 하는 찬양 일색의 글은 읽는 이뿐 아니라 찬양을 받는 당사자까지도 난처하게 만들 수 있다.

 

'절제의 미덕'이야말로 글 쓰는 이가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인 것이다.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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