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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⑭ 하루 석 줄 쓰기로 충분하다] 일기 쓰다 보면 생각하는 습관 기를 수 있어

의무적으로 썼던 학교일기 이젠 맘놓고 내 얘기 써보자

△일기쓰기의 즐거움

 

어릴 적 방학숙제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방학생활일기'였다. 그건 누구에게나 지겹고 귀찮은 일이었다. 그걸 왜 써야 하는지 선생님이나 엄마는 자상하게 설명해 주지도 않았다. 하긴 설명을 들었다 해도 그걸 제대로 이해할 수도, 일기를 쓰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겼을 리도 없을 테지만….

 

물론 처음 이삼 일은 어찌어찌 쓰긴 한다. 하지만 그러고는 그만이다. 그야말로 작심삼일이다. 결국 일기장이 어디 쑤셔 박혀 있는지도 모르고 방학을 다 보낸다. 개학날이 다가오면 슬금슬금 걱정이 되다가 어쩔 수 없이 한 달 일기를 한꺼번에 벼락치기로 쓴다. 그때마다 달력에 날씨라도 적어놓을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한다.

 

요즘에도 일기 숙제라는 게 있을까.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한테 일기를 쓰게 하는 건 물론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면서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 한다는 점은 일기쓰기의 소중한 가치임에 틀림없다.

 

"나는 요즘 정말 재미가 없다. 매일매일 똑같이 산다. 나는 어제 아침에 늦잠을 잤다고 엄마한테 잔소리를 들었는데 오늘도 늦잠을 잤다고 잔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오늘도 지각했다. 선생님한테 야단도 맞았다. 더럽게 화장실 청소를 또 했다. 어제도 학교 끝나고 영어학원 가고, 피아노학원 가고, 집에 와서 밥 먹고 텔레비전을 봤다. 생각해 보니 오늘도 똑같다. 그래도 일기 숙제는 해야 하는데 뭘 써야 하나. 나는 요즘 사는 게 정말 재미가 없다. 인생은 원래 이렇게 재미가 없는 건가 보다."

 

이 아이도 일기를 쓰다 보니(혹은 써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하루하루가 '정말 재미가 없다'는 걸 제법 진지하게 생각했고, 또 그걸 새롭게 발견하지 않았는가.

 

이 아이는 어쩌면 적어도 다음날 하루는 일기로 쓸거리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이게 될지 모른다.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엄마나 선생님께 야단도 안 맞고, 더럽게 화장실 청소를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속으로는 좋아하면서도 용기가 없어서 말을 못했던 짝꿍 여자애한테 자신이 아끼는 예쁜 필통을 선물할지도 모른다. 혹시 딱지를 맞더라도 아이는 그러면서 성장해가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림일기든 생활일기든 방학일기든 우리의 글쓰기는 대부분 일기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건 아마 요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일기는 다른 글과 차별되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매일 써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쓴 일기를 누가 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릴 때 일기를 쓰기가 싫었던 건 별로 쓰고 싶지도 않고 쓸 만한 일도 없는데 매일 꼬박꼬박 써야 했기 때문이었던 건 아닐까. 부모나 선생님께 일기숙제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건 곧 자신의 속마음을 누군가가 엿보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어린 마음에도 일기를 쓰기가 고역으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이 또한 우리가 글쓰기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게 된 원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숙제가 아니므로 일기를 매일 쓸 필요까지는 없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따위를 틀릴까 봐, 누군가 자신이 쓴 일기를 몰래 훔쳐볼까 봐 더 이상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아, 처음부터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쁨·실망·마음의 정화

 

옷장을 정리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먼저 옷장의 옷들을 모두 꺼낸다. 각종 스카프나 머플러, 벨트, 모자, 양말 같은 것들도 모조리 방바닥에 꺼내놓는다. 언제 이렇게 다 뒤죽박죽으로 쑤셔박아 두었던가 싶은 것들까지 마구 쏟아져 나온다.

 

유행이 너무 지나서 앞으로도 도저히 입을 수 없을 것 같거나, 몸에 두르거나 걸칠 일이 없겠다 싶은 것들은 과감하게 헌옷 수거함으로 보낸다. 나머지는 계절별로 분류하고 개켜서 서랍에 넣거나 옷걸이에 걸어놓으면 옷장 정리가 끝난다.

 

일기를 쓰는 것도 옷장 정리와 같다. 일기쓰기는 자신의 생각을 손으로 적어서 그 내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행위이고 과정이다. 옷장 속에 든 옷들을 눈으로 보면서 손으로 정리하는 것과 같은 원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깔끔하게 정돈된 옷장처럼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서 정리할 수 있는 게 바로 일기이고 글쓰기라는 말이다.

 

이처럼 일기쓰기는 자신을 발견하고 정리하는 데 한층 유용하다. 자신이 잘한 일이나 잘 못한 일, 즐거웠거나 속상했거나 보람 있었던 그날의 일을 단 삼십 분이라도 책상 앞에 차분히 앉아서 돌아보는 것이다. 그걸 곱씹어가며 글로 옮겨 쓰다 보면 미처 떠오르지 않았거나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칠 뻔했던 생각들까지 새롭게 정리되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기쓰기는 자신이 겪고 있는 정신적인 통증을 치유하는 기능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굳게 믿었던 누군가의 배신으로 분노를 삭일 수 없어서, 혹은 본의 아니게 가깝고 소중한 사람을 실망시켰다는 자책감 때문에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그런 감정을 모조리 끌어내서 그날의 일기로 써보는 것이다. 내게는 과연 아무 허물도 없었는지, 나는 그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기를 바라는지, 그가 진정으로 내게 실망한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서 한 자 한 자 써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생각들이 꼬리를 물지도 모른다.

 

자신이 상대에게 취했던 행동이 부끄럽다고 해서 생각하기를 꺼리거나 감추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누가 엿보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남김없이 솔직하게 쓰는 것이 좋다. 그러면, 사실은 그렇게 분노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음으로써 내 행동에 실망한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조차 주체할 수 없었던 슬픔이나 분노 따위들을 객관화시켜서 마음도 정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효과는 물론 일기쓰기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가면서 겪은 일 중에서 기억할 만한 것들이 있으면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자유롭게 쓰는 것이다. 또 일기를 쓰는 데 있어서도 분량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 어떤 일이든 규모를 미리 정해두면 시작하기가 어렵다.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이라는 노래를 오늘 처음 들었다. 함박눈처럼 나부끼는 벚꽃의 고운 빛깔에 취하고, 〈벚꽃 엔딩〉의 경쾌한 선율에 흠뻑 젖었던 하루….

 

골머리 아프게 이것저것 떠올리기도 귀찮고 무얼 복잡하게 생각하기도 싫은 날은 이렇게 단 서너 줄만 써도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쓰느냐가 아니라, 쓰는 것 그 자체라는 말이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쓰기 편한 글이 바로 일기다. 자신이 직접 부딪쳐서 겪은 일을 쓰기 때문이다. 일기는 글쓰기를 습관화시키는 데도 매우 유용하다. 볼펜으로 노트에 써도 좋고, 컴퓨터를 이용해도 좋고, 스마트폰에 써도 무방하다.

 

유명한 작가도 처음에는 일기와 같은 자신의 이야기부터 쓰기 시작했다는 걸 기억해 두자. 그러다가 차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기도 하고, 자신의 이야기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섞어서 쓰기도 하면서 글의 내용과 범위를 확장시켜 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곰곰이 생각하는 습관도 생기고, 다른 사람의 인생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다 보니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도 넓고 깊고 커진 것이다.

 

글쓰기 공부로 일기를 충실히 쓰는 것만한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당장 오늘 밤부터 일기쓰기를 시작하자.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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