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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이야기의 인물처럼 말하고 행동하기] 시대에 맞는 배경·상황 써야 사실감 있어

생생한 표현 글쓰기 어렵다면 스마트폰 녹음파일 좋은 방법

△연애-변심-엇박자

 

그때 우리 나이가 아마 20대 후반쯤이었을 테니 벌써 30년도 넘게 지난 일이다. 그해 겨울 어느날 여고동창생들인 우리는 겨울바다를 구경하려고 대천으로 향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다 휴게소에 들렀다. 벤치에 둘러앉아서 아메리카노 한 잔씩을 마시다 보니 첫눈이 하얗게 내리는 게 아닌가. 그러자 집 떠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갑자기 남편이 보고 싶어졌다. 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그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막 글쓰기에 맛을 들이기 시작한 어느 주부글쓰기 모임의 회원이 쓴 글 중 일부다. 이 글에서 구사한 문장을 보면 그간의 노력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문장 하나하나가 크게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는 것이다. 사건이나 생각의 전개방식도 매끄럽다. 그런데 내용은 별로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이 글을 읽는 이는 몇 가지 의문이 저절로 생길 것이다. 여고동창들과 겨울바다를 구경하러 간 게 지금으로부터 30년도 넘게 지난 일이라고 했다. 그 시절에는 20대 후반쯤만 되어도 대부분 결혼을 했을 테니 부잣집 젊은 마나님들이 자가용을 몰고 바다구경을 갔다고 한 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치자.

 

그런데 30년 전에도 서해안 고속도로라는 게 있었나? 그 고속도로는 1991년에 개통된 걸로 나와 있는데? 그러면 기껏해야 20년 조금 넘게 지난 거 아닌가? 아무리 부잣집 마나님들이라지만 휴게소에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마셨다고? 그 시절에는 '아메리카노'라는 커피는커녕 그런 이름조차 없었는데?

 

한 술 더 떠서, 또 뭐라고?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 다녔다고? 그걸로 즉석에서 '그이'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그이'가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면 전화를 걸기 위해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고 해야 맞는 거 아닐까? 이 글의 내용이 조금 황당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가끔 황당한 일을 겪기도 한다. 연인의 느닷없는 변심 같은 것도 그중 하나다. 목숨처럼 사랑한다고, 자기하고 함께라면 지옥이라도 따라가겠다고 맹세했던 여자가 어느날 갑자기 너무너무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으니 이제 그만 만나자고 하는 것이다.

 

그게 왜 황당할까.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목숨처럼' 사랑한다고 했으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변치 말고 세상 끝나는 날까지 계속 사랑해야 할 것 아닌가. 아니면 로미오하고 줄리엣이 그랬던 것처럼 함께 목숨을 던져서라도 한 번 맹세한 사랑을 지켜가든가.

 

그래도 어쩌겠는가. 마음이 그렇게 변했다는 걸, 이렇게 변한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으니 그냥 눈 딱 감고 〈진달래꽃〉처럼 말없이 고이 보내달라고 숫제 애원을 하고 나서는 걸….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푸슈킨이 일찍이 그렇게 노래했던 것도 삶의 그런 속성을 간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살아가다 보면 이렇듯 전혀 예기치 못했던 황당한 일도 겪으면서 살아가기도 하는 게 인생일지도 모른다.

 

△ KTX와 빨강 트래킹화

 

임진왜란이 시대적 배경인 TV 사극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적진으로 염탐을 갔던 장수가 말을 타고 드넓은 평원을 달리며 진지로 돌아오는 장면이 눈앞에 긴박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걸 마른침을 꼴깍 삼켜가며 지켜보고 있는데 저 멀리 보이는 산 아래로 난데없이 KTX 한 대가 힘차게 지나가고 있다면, 아, 이 노릇을 어쩌면 좋은가. 본진에 도착한 그 장수가 말에서 뛰어내리는데 보니까 유명 상표의 로고가 선명하게 찍힌 붉은색 트래킹화를 신고 있다면, TV로 그런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찬호는 벌써 사흘이 넘도록 외출도 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고등어 사려, 갈치 사려. 싱싱한 물오징어도 사세요.' 주택가 먼 골목길을 빠르게 지나가는 생선장수 아저씨 목소리가 귓속을 쟁쟁하게 울렸다.

 

찬호는 어제 PC방에서 함께 게임을 하면서 놀았던 친구들의 말에 따라 자신의 페이스북을 꾸미느라 하루 종일 낑낑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이게 쉽지 않았다.

 

소설 습작을 열심히 하고 있는 어느 대학생의 글에서 일부를 따왔다. 그런데 어떤가. 좀 이상해 보이지 않은가. 다 읽었는데도 그런 점을 별로 발견할 수 없다면 한 번 더 꼼꼼히 읽어보자. 그러면 앞서 말했던 바로 그 'KTX'와 '붉은색 트래킹화'가 눈에 띌 것이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만든 역사극처럼 이야기와 사건의 사실감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밤이 깊어가고 있다고 했다. 적어도 밤 열 시는 넘어야 우리는 밤이 깊어간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깊어가는 밤중에 생선장수 아저씨가 골목길을 누비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설령 있다 해도 생선장수는 골목길을 빠르게 지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근처에 사는 누군가가 생선을 사러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느릿느릿 걷지 않을까. 그리고 주택가 먼 골목길에서 들리는 생선장수의 목소리가 어떻게 귓속을 '쟁쟁하게' 울릴 수 있단 말인가.

 

또 있다. 요즘에는 생선을 작은 트럭에 싣고 다니면서 파는 게 일반적이다. 그것도 미리 녹음한 걸 반복해서 틀어주는 방식으로 생선장수가 왔음을 알린다. '고등어 사려, 갈치 사려. 싱싱한 물오징어도 사세요.'라고 하는 식의 육성을 통한 호객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사라지고 없다. 그야말로 구시대의 유물이다. 어떻게 하면 생선장수의 이런 호객 내용 하나까지도 글로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다. 어쩌다 아파트 단지에 생선을 실은 트럭이 들어오면 거기에서 어떤 말이 녹음되어 흘러나오는지 귀를 활짝 열고 들어보라. 녹음된 내용뿐만 아니라 그 목소리의 톤이나 템포까지도 세심하게 들어두라. 스마트폰을 들고 나가서 녹취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다. 기차나 전철의 안내방송 같은 것도 녹취를 해서 '글쓰기 자료' 파일에 옮겨 적어 놓으면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글 속에 등장하는 작중화자들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다음 장면을 보자.

 

김 대리와 박 대리는 모텔 출입문을 열고 골목길로 나왔다. 길 건너편에 있는 허름한 순대국밥집 하나가 눈에 띄었다. 모텔 청년이 일러준 바로 그 집이었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뭘 드릴까요?"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주인아주머니가 물컵을 챙기며 그들을 맞았다. 두 사람은 창가 쪽 자리에 마주앉았다.

 

"주모, 여기 국밥 두 그릇만 말아주소."

 

선배인 박 대리를 대신해서 김 대리가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뭘 드릴까요?"라고 했는가. 50대 중반인 국밥집 아주머니가 손님에게 그렇게 말하는 걸 들어본 적 있는가? 그냥 "어서 오세요." 정도 아닐까? 그리고 지금이 무슨 조선시댄가, 아니면 일제 말기나 해방 직후 어느날 쯤인가. "주모, 여기 국밥 두 그릇만 말아주소."라고? 이런 식의 음식 주문법은 1960년대 이전에 이미 효력이 만료된 표현이다. 자, 그럼 어떻게 써야 하는가.

 

"아줌마, 여기 순대 둘요."

 

보나마나 이런 식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 읽는 이가 그 소리를 생동감 있게 들을 수 있을 거 아닌가.

 

그런데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그 식당이 두 사람의 오랜 단골집이라면 다음과 같이 써야 사실감을 높일 수 있다는 거, 손끝에도 새겨두고 마음속에도 깊이 새겨두었으면 좋겠다.

 

"이모, 우리 순대 둘." ·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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