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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상상력이 필력을 결정한다]자세히 관찰하고 메모하는 습관 들여라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도 가슴 속으로 깊이 맡아보자

소개팅 자리에서 처음 만난 여자가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걸 알고 남자는 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단다. 그게 미심쩍어 보였던 여자가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지으며 웃느냐고 남자에게 물었단다. 그러자 남자가 곧이곧대로 이렇게 대답했단다.

 

"제가 상상력이 좀 풍부한 편이거든요."

 

약간의 결벽증까지 갖고 있던 여자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탁자에 놓인 물컵을 남자의 얼굴에 집어던지고 자리를 떴단다.

 

여자들이 공중화장실에 들어가면 맨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변기의 물을 내리는 것이다. 밖에서 남자의 기척이 느껴질 때는 그 일에 더 적극적이다. 왜겠는가. 자신이 옷 벗는 소리를 감추려고 그 아까운 물을 허투루 쏟아버리는 것이다. 아니, 그런데 사실은 소리 때문이 아니다. 그 소리를 듣고 누군가 자신의 벗은 몸을 '상상'할까 봐서다.

 

왜 있지 않은가. 김광균의 시 〈설야〉에 나오는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고 대목도 옷을 벗는 '소리'와 상상을 통해 눈앞에 그려지는 시각적 이미지를 결합해서 공감각적 이미지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여인숙 ? 이슬의 집

 

달개비꽃 밑에 / 여인숙 치는 / 여치 / 숙박계도 안 쓰고 / 하룻밤 자고 가는 / 이슬 / 하늘일까 / 지상일까 / 이슬의 / 집 (유강희, 〈이슬의 집〉 전문)

 

밤사이 소리없이 내린 이슬은 어느 꽃잎이나 나뭇잎에 머물다(숙박계도 안 쓴 공짜 잠을 자고) 아침이 오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이슬과 꽃잎이 스스럼없이 동화되는 자연 현상에서 시인은 혹시 우리가 꿈꾸는 삶의 자유와 여유를 보았거나 그걸 간절히 열망한 건 아니었을까.

 

시인의 그런 생각과 느낌이 이 짧은 시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런 시를 쓰는 게 가능했던 건 바로 시인의 상상력이다. 밤마다 찾아오는 이슬을 상대로 달개비라는 꽃에 여치가 여인숙을 친다는 이야기는 상상의 힘이 아니고는 쓸 수 없을 거라는 말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상상'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존재하지 않은 대상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아무리 사전이라도 그건 그야말로 천만의 말씀이다. 전지전능하신 '그분'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고 존재하지도 않은 대상을 머릿속으로 그려내고, 또 그걸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영화 〈아바타〉에 등장하는 기괴하게 생긴 인물들을 한번 떠올려 보라. 이 세상에서 아바타와 똑같이 생긴 생물체가 발견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그건 누구나 처음 보는 생물체다. 그야말로 '존재하지 않은 대상'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인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영화에서 보았던 아바타의 모습을 조목조목 떼어놓고 보라. 모두 눈에 익은 것들 아닌가. 쫑긋하게 솟은 귀는 당나귀의 것과 흡사하게 생겼다. 아바타의 피부 생김새나 빛깔 역시 어느 파충류나 깊은 바다에 사는 해괴한 물고기의 표피 등을 떠올리게 한다. 아바타와 같은 꼬리를 가진 동물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전체적인 모양새는 사람을 닮지 않았는가.

 

상상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이나 '존재하는 대상'을 되살려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합하는 것이 상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직접 겪었거나 어딘가에서 보고 들었던 장면이나 사건을 되살려서 새로운 모양이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이 바로 상상력인 것이다.

 

국어시간에 교사가 학생들에게 미리 준비한 용지를 나눠주며 지난주에 3박 4일 동안 다녀온 제주도 수학여행에서 각자 보고 느낀 것이 있으면 뭐든 좋으니까 형식이나 분량에 구애받지 말고 맘껏 적어보라고 말했다. 한 시간 후에 보니 어떤 학생은 석 장을 썼고, 어떤 학생은 일곱 장을 썼다. 물론 한 장도 제대로 못 쓴 학생도 있었다.

 

자,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 물론이다. 시간만 충분히 주어지면 스무 장도 넘게 쓸 수 있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같은 기간에 똑같은 곳을 여행하고 왔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서 어떤 학생은 스무 장도 넘게 썼는데, 어떤 학생은 한 장조차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것일까. 그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역시 상상력의 차이다.

 

상상력을 키우려면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 물론 경험을 많이 쌓는다고, 이것저것 본 것이 많다고 상상력이 저절로 풍부해지는 건 아니다. 이때 필수적인 것이 바로 자세히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정리하는 습관이다. 좀 특이한 것이 있으면 다가가서 만져도 보고 요모조모 살펴보기도 해야 한다.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요모조모 뜯어보고, 카메라에 담고, 자신만의 감상을 수시로 메모하는 습관을 가져야 상상력을 키울 수 있다는 말이다.

 

글은 책상 앞에 앉아서 펜을 들거나 컴퓨터 모니터를 켠 순간부터 쓰는 것이 아니다. 사소하고 하찮은 사물이나, 아름답고 특이한 장면을 마음을 활짝 열고 바라보고 있다면 그 시간에도 당신은 이미 글을 쓰고 있는 것과 같다.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황당한 사건을 곱씹어가며 요모조모 생각을 굴리는 것도 글을 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상상하는 즐거움

 

세상에서 제일 잠이 많은 사람은? 가수 이미자다(이미 자고 있으니까). 그럼 세상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은 누구인가? 주말이나 휴일이 아닌 평일에 낚시질하는 사람이다(탤런트 한가인이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그게 이 '한가한' 유머의 답이었다.). 그런데 평일에 낚시질하는 사람보다 더 한가한 사람이 있다. 누구겠는가. 바로 그 사람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이다. 물론 우스갯소리다.

 

글을 쓰려고 하는 당신은 그래도 평일 낚시까지 맘껏 즐겨도 좋다. 대신 낚시의 덕목이라는 무념무상(無念無想)만은 삼가도록 하자. 호수의 수면에 꽂힌 찌를 노려보기도 하고 째려보기도 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자. 낚싯대를 타고 전해지는 손맛도 깊이 음미하자. 낚시 바늘에 물린 붕어의 파닥거리는 몸짓도 눈에 새겨두자. 틈날 때마다 옆자리에 앉은 낚시꾼의 표정 하나도 유심히 관찰하자.

 

어쩌다 비라도 내리면 빗방울이 나뭇잎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자. 수면을 덮은 연꽃잎 하나라도 그 생김새를 유심히 쳐다보고 거기에 고인 빗물은 얼마나 투명하게 빛나는지 눈빛을 빛내도록 하자. 주머니에서 꺼낸 스마트폰 카메라를 머뭇거리지 말고 거기에 가까이 들이대기도 하자.

 

오렌지의 시큼한 맛도 지금까지와 달리 더 깊이 음미하자. 뚝배기에서 보글 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도 자세히 들여다보고, 거기서 풍겨나는 구수한 냄새도 가슴속으로 깊이 맡아보자. 된장찌개가 끓는 소리도 들어보고, 그 모양도 남김없이 눈에 담아두자. 밤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물과 닮았는지 연상해 보자.

 

평소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보고, 카메라에 담고, 두고두고 세심하게 느끼고, 큼큼거리며 냄새를 맡았던 것들이 당신의 상상력을 키워서 독창적이고 풍부한 내용이 살아 있는 글을 쓰는 데 소중한 자양분이 되어줄 것이다. '주력(酒力)이 필력(筆力)'이라는 그럴싸한 궤변도 있지만, 상상력, 그것이야말로 마르지 않는 샘처럼 당신의 필력을 든든하게 받쳐줄 거라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자. 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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