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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영원한 약속 ④

 

자기를 매섭게 쏘아보던 오노다의 뱁새눈만 보지 않아도 찬옥은 살 것 같았다. 봄이 오고, 봄이 가는 사이 찬옥은 자유와 여유를 마음껏 즐겼다. 그것도 잠시. 꼭두새벽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출근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학습준비를 하고,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자니 벌써 권태롭고 따분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잘 됐다는 기색이었다.

 

“어서 혼처를 정해 시집을 가야한다”고 며칠 건너 독촉이 성화같았다.

 

하루는 찬옥이 슬며시 어머니의 의중을 떠보았다.

 

“정승철이 어때요?”

 

“뭐! 정승철이! 그 가정교사 했던 사람 말이냐?”

 

예상했던 대로 어머니는 펄쩍 뛰었다. ‘겪어보니 장래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설득해보려 했으나 어머니는 두 번 다시 입 밖에 내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려버렸다.

 

“혼사란 두 집안이 엇비슷해야 좋은 것”이라고 딸을 타일렀다.

 

찬옥에게는 전통적인 명문의 관습을 애써 깨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었다. 부모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초여름 들어 중신아비가 들랑거렸다. 전주에서 이름난 집안의 일등 규수를 최고의 신랑감에게 중매하겠다고 입담 좋게 떠들어댔다. 찬옥은 누가 봐도 최상의 신부 감이었다. 집안도 집안이려니와 맵시가 우아한 달걀형 미인이었고 덕성스러웠다. 다소곳하고 온화했다.

 

드디어 중신아비가 혼처를 한 군데 소개했다. 만석꾼 집안에 동경유학생이라고 자랑했다. 여름방학 때 전주에 오니 맞선을 보고 마음에 들면 해를 넘기지 말고 혼례를 올리라고 서둘렀다.

 

양가 어머니들과 중신아비가 동석한 가운데 한경의(韓景懿)와 맞선을 봤다. 헌헌장부는 아니었으나 부잣집에서 고생 않고 자란 귀골이었다. 얼굴색은 깨끗하고 맑았으나 해쓱한 빛을 띠고 있었다. 찬옥과는 여섯 살 차이가 나는 스물여섯. 말수가 적고 조용히 들으면서 가볍게 웃는 편안한 사람이었다. 진실성은 있으나 적극성은 없어 보였다.

 

찬옥의 마음에 흡족하지는 않았으나 무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의견도 찬옥과 같았다. 아버지는 여유를 가지고 다른 데도 알아보라며 정혼을 유보했다.

 

그러나 한 씨 댁에서는 어머니는 물론이고 한경의도 만족해한다면서 조모께서 어서 손부 보기를 고대하니 이른 시일 안에 약혼식을 갖고 혼례 날짜를 정하자는 전갈이 왔다.

 

찬옥의 어머니는 이만한 신랑감도 흔치 않겠다 싶어 찬옥과 남편에게 혼처를 정하자고 재촉했다. 그렇게 해서 한경의와 최찬옥은 그해 10월 부부의 가연을 맺게 됐다. 신혼여행은 동래온천으로 갔다. 첫날밤은 통과의례를 치루 듯 덤덤하게 보냈다. 신랑은 인상이 그렇듯 정력적이거나 쾌활한 사람은 아니었다.

 

여행 3일째 되는 날 오후 둘이서 금정산 기슭을 거닐다가 한담을 나누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한경의가 “찬옥 씨, 나는 아나키스트입니다.”

 

‘아나키스트’, 찬옥은 처음 듣는 말이다.

 

“아나키스트가 뭐예요? 처음 듣는 말 이예요.”

 

“번역이 잘못된 감이 있지만 무정부주의라는 것 있잖아요. 무정부주의자라는 얘기지요.”

 

무정부주의라면 정부를 타도하고 관청들을 파괴하고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테러행위로 알고 있는 찬옥은 섬쩍지근했다.

 

‘아니 저렇게 귀골로 생긴 부잣집 종손이 어떻게 아나키스트가 될 수 있는가?’ 찬옥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경의의 말이 이어졌다. “아나키즘이란 권력의 지배나, 국가나 정부와 같은 권력기관의 존재를 아예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사상입니다.”

 

경의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찬옥은 무정부주의라는 말의 잘못된 고정관념이 이제까지 자기 머릿속에 박혀있었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아나키즘은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이긴 하나 인간의 자유를 최우선시하는 사상이라고 수긍했다. 일제의 억압을 받고 있는 인텔리가 숨 막히는 굴레를 벗어나 자유를 갖고자 하는 이념적 운동이라고 찬옥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여행에서 돌아와 시댁으로 신행 갔을 때 찬옥은 경의의 책상 위에 영국 고드윈의 ‘정치적 정의’, 프랑스 쁘루동의 ‘소유란 무엇인가’ 등 아나키즘 창시자들의 일본어 번역판 저서들이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경의가 아나키즘에 심취,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책갈피에 흑백사진 한 장이 끼어 있었다. 열한 명이 두 줄로 찍은 사진이었다. 경의는 앞줄 오른 쪽에서 세 번째에 어느 여자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사진 아랫부분에 ‘동경 아나키스트 동지들 1937.2.10.’이라고 쓰여 있었다.

 

찬옥의 시댁은 친정에서 불과 1킬로미터 쯤 떨어진 다가동에 있었다. 그 무렵 전주의 상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던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고 조선인 부자들도 몇 집 살고 있는 동네였다.

 

사람들이 시댁을 만석꾼으로 부르고 있으나 실상은 3천 석 정도 하는 집이었다. 한경의의 증조부, 조부 때는 6, 7천 석 했으나 2년 전에 세상을 뜬 경의의 선대인이 미두에 빠져 재산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경의의 선대인은 풍류를 즐겼던 한량이었다고 한다. 한경의가 여러 모로 자기 아버지를 닮았다고 시어머니가 두어 차례 말한 적이 있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곳간이 따로 있고 8백 평이 넘는 텃밭이 있는 너른 시댁에는 시조모 시모 그리고 온갖 집안일을 거들어 주는 만철이네 일가가 덩그렇게 살고 있었다.

 

한경의는 독자이고 세 누나는 모두 고창, 부안, 남원으로 출가했다. 살림은 시모가 주관했다. 찬옥의 결혼생활은 평온했다. 시조모 시모 남편의 삼시 세 끼니를 차려드리는 것 이외에는 걱정거리가 없었다. 젊지만 묵직하고 태평스러운 남편과의 관계도 원만했다. 국악단 공연이나 음악회가 있을 때면 둘이서 빼놓지 않고 가기도 했다. 가까이 있는 친정에도 자주 다녀오고 전주여고보 친구들도 때때로 만나는 평탄한 생활이 어어졌다.

 

시조모께서는 특히 찬옥을 금이야 옥이야 끔찍하게 아끼고 귀여워했다. 맛있거나 몸에 좋다는 음식을 보면 먹지 않고 두었다가 찬옥에게먹였다. 시모가 시샘을 느낀다고 입을 삐죽하곤 했지만 시모 또한 나무랄 데 없는 찬옥에게 자모같이 항상 따뜻했다. 이 두 노부인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찬옥이 옥동자를 낳아 이 집안의 대를 잇도록 하는 것이었다. 찬옥도 날이면 날마다 그것을 기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혼 1년이 넘도록 태기가 없었다. 노부인들은 물론 찬옥 내외, 찬옥의 친정, 한경의의 누나들까지 애태우기 시작했다.

 

시모가 안채 뒤뜰, 깨끗이 씻은 장독소래기 위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기도하는 날이 많아졌다. 시조모는 불공을 드려 보라며 공찬헌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록 여전히 태기가 없었다. 겨울이 가고 새봄이 왔다. 집안 분위기가 생기가 없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경의도 답답했던지 찬옥에게 미안하다며 동경에 얼마동안 다녀오고 싶다고 말해 그렇게 하라고 짐을 챙겨 주었다. 시모도 남원 막내딸 집에 가 있었다. 그 큰 집에 90이 넘은 시조모와 찬옥 만이 남게 돼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계속…〉

 

장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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