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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50주년 맞은 윤흥길 소설가 "아직도 써야 할 작품 많아…주변에 관심 가져야"

6·25 전후 문학적 싹 터…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박경리 선생의 숙제 '대작' 집필 중, 한민족 귀소 본능 다뤄 / 앞으로 완주·전주한지 소재 작품-손주 위한 동화도 쓰고파

▲ 등단 50주년을 맞은 윤흥길 소설가가 완주군 자택에서 문학적 소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박형민 기자

전주여고를 다니던 막내 누이가 눈길을 헤치고 운동장으로 걸어와 빙긋이 웃으며 노란 종이를 건넸다. 당선을 축하한다는 전보였다. 윤흥길(75) 소설가는 “그 광경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그로부터 50년이 흘렀지만….

 

윤흥길 소설가는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회색 면류관의 계절> 이 당선돼 등단했다. 올해로 꼭 등단 50주년이다.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한 그의 첫 발령지는 당시 익산 춘포국민학교였다. 그는 1966년 1월 1일 춘포국민학교 숙직실에서 서울신문에 크게 실린 장편소설 당선자 기사를 봤다. 교사를 그만둘 궁리만 하던 그는 기사를 보자마자 ‘소설가가 되면 교사를 그만둘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길로 호남서점에서 문학 관련 이론서 5권을 샀다. 첫 습작이 사상계 신인문학상 결선까지 올랐다. 길이 보였다. 벽지 초등학교를 자원해 내소사 밑 분교로 발령받았다. 그곳에서 네 살 어린 전주사범학교 후배에게 원고지 쓰는 법부터 다시 배우면서 소설 공부를 했다.

 

그는 9살 때 6·25전쟁을 겪었다. 백지 위에 먹물을 뿌린 듯 선명한 이 기억은 평생을 좌우했다. 성인이 돼서는 전라도에 대한 타지 사람들의 왜곡된 시각을 군대 생활부터 시작해 서울 생활 곳곳에서 체감했다. 분노와 환멸을 느꼈다. 그럴수록 고향이 소중해졌다. 차별은 그의 고향 사랑을 부채질했고, 고향 이야기에 더 집착하게 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은 고향에 대한 기억, 6·25전쟁에서 시작된 사회적 갈등으로 점철된다.

 

“독재, 전쟁 위협, 빈부 갈등 등 한민족이 겪는 불행과 비극은 모두 6·25전쟁과 직결돼 있어요. 독재 정권은 6·25전쟁으로 인한 분단을 권력 유지 핑계로 사용했어요. 자유는 유보됐죠. 더 이상 분단을 빌미로 국민을 억압하는 일은 없어야 해요.”

 

요즘 그는 고(故) 박경리(1926~2008) 선생이 내준 오래된 숙제를 하고 있다.

 

“박경리 선생은 젊을 때부터 나를 보면 작가는 땅을 밟고 흙냄새를 맡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선생이 나에게 내준 숙제는 ‘시골에서 단독주택을 짓고 살아라’, ‘대작을 써라’, ‘대학교수를 그만둬라’는 것이었죠. 제일 먼저 한 숙제는 정년이 되면서 대학교수를 그만둔 거죠. (웃음) 그다음 완주로 내려오면서 시골에서 단독주택 짓고 살라는 숙제를 했어요.”

 

이제 남은 숙제는 하나. 그는 “예전에는 대작이 대하소설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작은 길이나 분량 얘기가 아니었어요. 인간이나 세상을 얼마나 진지하게 보고, 그 이면에 숨은 진실을 포착해 치열하게 다뤘는지를 뜻하는 거였죠.”

 

일제강점기 말부터 6·25전쟁 직후까지 아우르는 장편 3부작을 계획했다. 3부작 중 3부에 해당하는 <낫> 이 제일 먼저 나왔다. 1부에 해당하는 작품은 5권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한민족이 가진 고유의 귀소 본능 다룬 <문신> 이 바로 그것.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문신> 은 사연 많은 책이다. 사실 <낫> 보다도 먼저 집필하기 시작한 작품이다. 출판사가 자진 폐간하면서 수년간 출판권 분쟁을 겪었고, 출판권 시효까지 집필을 중단했다. 이어 다른 출판사도 자진 폐간하면서 같은 문제를 되풀이해야만 했다. 결국, 계약금을 배상하고 출판권을 되찾았다. 고향에 내려와 개작하면서 스토리를 변화하고 모티브도 추가했다. 지난해 9월부터는 건강상의 이유로 집필을 잠시 중단했다. 현재 5권 중 4권을 집필한 상태다.

 

<문신> 을 이루는 큰 뼈대는 부병자자(赴兵刺字) 풍습과 북해도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이 부른 아리랑이다. 부병자자 풍습은 병정으로 뽑혀 나갈 때 몸에 바늘로 새기는 글씨 즉, 문신을 말한다. 외침이나 내란으로 전쟁이 발생해 객사할 경우 가족들이 시신을 알아보도록 하기 위함이다. 죽어서라도 고향 선산에 묻히길 바라는 귀소, 귀향 본능이다. 또 북해도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은 수모와 치욕을 견디는 방법의 하나로 아리랑을 불렀다. 이를 형편과 처지에 맞게 개사해 부른 ‘밟아도 아리랑’도 귀소 본능과 관련된다.

 

그는 집필하면서 ‘문신’이란 소재에 대한 문학적 보편성, 토속어 사용에 대한 대중적 반응 등을 걱정했다. 그러나 괘념치 않을 생각이다. 향수, 귀소 본능 등은 인간의 본성으로 형식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50년간 습득한 순우리말과 토속어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다.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것도 작가의 의무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윤흥길적인 작품으로 단편은 <황혼의 집> <기억 속의 들꽃> , 중편은 <꿈꾸는 자의 나성> <쌀> , 장편은 <에미> <묵시의 바다> 를 꼽았다. 반백 년 동안 그는 대중들이 대표작으로 언급하는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장마> <완장> 등 왕성한 집필 활동을 이어왔다. 50년간 글을 썼지만 아직도 쓰고 싶은, 써야 할 작품이 많다. 그래서 초조하다. 자꾸 ‘살아생전 어디까지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젊을 적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집필했다고 자부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드니 허점과 구멍이 많이 보여요. 쓰고 싶고, 써야 할 작품이 줄 서 있어요. 나이 들어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싶어요. 완주를 소재로 한 작품, 전주 한지에 대한 작품, 손주를 위한 동화도 쓰고 싶고요.”

▲ 익산시 만경강가 춘포문학마당 내 춘포정에서 윤흥길 작가와 부인.

지빠귀 울음소리가 ‘세시 이십 분 전’으로 들린다는 작가. 그의 집 주변은 딱새, 지빠귀, 고라니 등 동화 소재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창작 근원에 대해 “관심이 커지면 애정이 되고, 애정이 커지면 작품 쓸 의욕이 생긴다”며 “자신의 눈에 비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 두고, 자신이 처한 세계를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문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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