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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작가-안성덕 '깜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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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 표지/사진=교보문고 제공

스트리밍 디지털 매체로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은 음악을 잠시 대여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아날로그 방식 LP는 시간개념부터가 다르다. 턴테이블 빙빙 도는 동그라미에 생채기를 내면 치어 떼처럼 싱싱한 추억이 몰려온다. 이때 추억은 소장 가치가 있는 현재의 ‘내것’이 된다.

음악 애호가 안성덕 시인은 수많은 LP를 소장하고 있다. 나는 최근에 발매된 안성덕 제작, <깜깜> 위에 바늘을 올린다. “동그라미 속 동그랗게 밀려나는 축음기판 소리골에서 옛이야기를 듣는다 낙숫물이 그리는 동그라미 속 동그랗게 갇혀 소년은 옴짝달싹 못하고”(「소년은 어디 갔나」) 시인이 수집하기로 한 시간대는 과거다. 아릿한 풍경을 소환하는, 부재와 존재의 괴리가 주는 애틋함에 뜨거워진다. 현재와도 연결, 서로에게 감응하는 방식이 인간을 넘어 자연물로 확장된다. “꽃이란 꽃 죄다 집니다 덩굴장미가 졌고 접시꽃도 집니다 시들기 위해 피어난 꽃, 열흘을 못넘고 져야 꽃입니다”(「꽃이 집니다」)에선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아름다움의 절정’을 향한 궁극이라고 말한다. “기저귀에 저린 간밤처럼 애기똥풀 노랗게 번진 은빛요양원 언덕바지 개나리꽃 이미 졌고요”(「개나리꽃 이미 졌고요」)는 갓난쟁이처럼 요양원의 노인은 애기똥풀같은 것을 노랗게 지리고 사라졌다. 시간의 괴리가 주는 안타까움과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 침잠된 가운데 “철 지난 청춘처럼 흔적뿐인 철길 옆 접시꽃 시들었네 춘포역 플랫폼 소리 없이 기적이 우네”(「춘포역」)의 ‘시적 질감’은 비장미로 가득하다. 반면 “진달래 꽃망울이 영락없는 성냥알이네요 사나흘 봄볕에 그어 대면 확, 온 산을 태우겠습니다”(「꽃불」)은 정신과 육체의 불일치(균열) 속에서도 정염情炎을 드러내는 숭고미의 절정, 서정시를 한 단계 갱신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인간은 죽어 태어난 직후로 순환할 수 있을까?’에 대한 명제는 회의적이지만 안성덕 시인은 사라져간 것들과의 교감을 통해 소멸이 과거의 분열이 아니라 생성의 지표임을 말하고 있다. 스크래치가 심해 좀 지직거리면 어떤가! 새삼 독자들도 과거로 역주행, 태생적 그리움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반질반질 마루가 윤나던 집 숟가락 통에 숟가락이 많던 집 내 태가 묻혀 있는 도란도란 양철 대문 집”(「양철 대문 집)」 

<깜깜>은 세월의 지층이 쌓이면서 생긴 흔적들을 채집하고 보존해온 사진첩이요 가슴팍을 지직거리는 추억의 음반이다. 시간의 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매재媒材가 사유의 발화점이 되어 심연을 울리고 병증을 헤아려준다. 경험상 엘피판에 바늘을 갖다 대는 순간의 쾌락을 잊지 못한다. 죽은 자의 목소리가 부활하고 소멸하는 존재가 생생하게 되살아날 걸 알기 때문이다. 

안성덕의 시집 <깜깜>은 삶과 죽음의 동시성이 갖는 모순형용, 사라져간 것들에 대한 절실한 감정들이 동그라미 속에서 흘러나온다. 그 시그널을 좇다 보면 과거와 현재가 삼투압, 생의 쓸쓸함을 견디는 이 극진한 방식이 독자의 가슴을 휘어지게 할 것이다. 

기명숙 시인은

전남 목포 출신이며,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몸 밖의 안부를 묻다>가 있다. 현재 강의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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